유양 (진정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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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양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왕망이 신나라를 세운 후에는 진정공으로 폄작되었으나, 왕망의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왕랑에게 귀부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후 후한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곽황후와의 혼인을 통해 관계를 강화하고 왕랑 토벌에 참여했다. 진정왕으로 복위한 후에는 참언을 퍼뜨리고 도적과 결탁하여 광무제의 의심을 샀으며, 결국 광무제에게 속아 죽임을 당했다. 광무제는 유양의 아들 유득을 진정왕으로 삼아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아버지 진정공왕 유보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원시 5년(5년), 신창(信昌)에 작은아버지 유광이 봉해져 진정국에서 이탈했다.
2. 전한 시대
원시 5년(5년), 신창(信昌)에 작은아버지 유광이 봉해져 진정국에서 떨어져 나갔다.
시건국 원년(9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5][6]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7]
2. 1. 진정왕 즉위
아버지 진정공왕 유보가 수화 2년(기원전 7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5]
원시 5년(5년), 신창(信昌)에 작은아버지 유광이 봉해져 진정국에서 떨어져 나갔다.
시건국 원년(9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낮춰졌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5][6]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7]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7]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7] 이후 한단을 함락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7]
2. 2. 왕망의 난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5][6]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7]
3. 후한 시대
이후 진정왕으로 있다가, “붉은 것 아홉 뒤에는, 혹 난 양(揚)이 주가 된다.[赤九之後, 癭揚為主.]”[8]라는 참언을 지어내 혹을 앓는 자신에게 끼워맞춰 대중을 선동하고 영내의 도적 면만적과 통했다. 광무제는 건무 2년(26년)에 기도위 진부와 유격장군 등륭을 보내 유양을 불렀으나 유양은 문을 걸어닫고 만나지 않았다. 광무제는 장군 경순을 보내 기주와 유주에 사면령을 내리고 왕후들을 위문하게 하면서, 비밀리에 유양을 사로잡게 했다. 경순은 진부와 등륭을 만나 전사에 머물렀고, 유양은 경순이 자기 일족의 여자의 소생이기에 경계를 풀고 아우 임읍후 유양(劉讓), 종형 유세(劉細)와 함께 각각 1만여 병사를 거느리고 경순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경순의 속임수였고, 유양 등은 경순에게 주살되었다. 광무제는 유양 등이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유양의 아들 유득을 진정왕으로 삼았다.[9]성명 유양(劉楊) 또는 유양(劉揚) 시대 전한 - 후한 생몰년 생년 미상 - 26년 (건무 2년) 가족·일족 부: 진정공왕 유보(劉普)
동생: 임읍후 유양(劉譲)
종형: 유감(劉紺) 자: 유득(劉得)
일족: 곽성통 (조카), 경순 (외조카)
3. 1. 왕랑에 협력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시건국 원년(9년)에 유양은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5][6]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유양은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劉植)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7]
3. 2. 광무제 귀순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어 진정왕이 되었다.
시건국 원년(9년)에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5][6]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7]
3. 3. 왕랑 토벌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유양은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10년)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5][6]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劉子輿)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유양은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劉植)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7]
3. 4. 모반과 죽음
왕망이 신나라를 세우고 전한을 멸하면서 진정공으로 폄작되었고, 이듬해에는 공작위가 폐지되면서 작위를 잃었다.[5][6]
신나라가 혼란에 빠지고 왕랑이 유자여를 사칭하며 세력을 떨치자, 거병하고 왕랑에게 귀부하여 십여만의 무리를 거느렸다. 후한 광무제의 장군 유식의 유세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귀순했다. 광무제가 진정나라에 머무르면서 유양의 생질녀 곽황후와 혼인했고, 곽황후의 친정이 있는 칠리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해 축을 치며 기뻐했다. 이후 한단을 함몰하고 왕랑을 타도하는 데 참여했다.[7]
이후 진정왕으로 있다가, “붉은 것 아홉 뒤에는, 혹 난 양(揚)이 주가 된다.[赤九之後, 癭揚為主.]”[8]라는 참언을 지어내 혹을 앓는 자신에게 끼워맞춰 대중을 선동하고 영내의 도적 면만적과 통했다. 광무제는 건무 2년(26년)에 기도위 진부와 유격장군 등륭을 보내 유양을 불렀으나 유양은 문을 걸어닫고 만나지 않았다. 광무제는 장군 경순을 보내 기주와 유주에 사면령을 내리고 왕후들을 위문하게 하면서, 비밀리에 유양을 사로잡게 했다. 경순은 진부와 등륭을 만나 전사에 머물렀고, 유양은 경순이 자기 일족의 여자의 소생이기에 경계를 풀고 아우 임읍후 유양(劉讓), 종형 유세(劉細)와 함께 각각 1만여 병사를 거느리고 경순을 만났다. 그러나 이것은 경순의 속임수였고, 유양 등은 경순에게 주살되었다. 광무제는 유양 등이 죽은 것을 불쌍히 여겨 유양의 아들 유득을 진정왕으로 삼았다.[9]
4. 평가
유양에 대한 구체적인 평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후한 건무 2년(26년)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참조
[1]
문서
彼が誅殺されると、はるか後の[[54年]]に斉武王[[劉縯]]の孫の[[劉復]]がその後継者となった。
[2]
서적
『東観漢紀』・『続漢書』
[3]
문서
「劉徳」とする書も存在する。
[4]
문서
高祖[[劉邦]]から九世の孫、すなわち光武帝を指す。
[5]
한서
반고: 《한서》 권53 경십삼왕전제23
https://zh.wikisourc[...]
[6]
한서
위와 같음, 권14 제후왕표제2
https://zh.wikisourc[...]
[7]
후한서
범엽: 《[[후한서]]》 권21 열전제11 중 유식전
https://zh.wikisourc[...]
[8]
문서
붉은 빛은 [[오행]]에서 화덕의 색으로 한나라의 시조 [[전한 고제]]를 말하며, 광무제는 고제의 9대손이다.
[9]
문서
위와 같음, 경순전
[10]
문서
여나라가 도중에 제천나라로 이름이 바뀐 것으로, [[유명 (제천왕)|유명]]이 봉해진 [[진류군|제천나라]]와는 연관이 없다.
[11]
문서
작위만 추증된 것으로, 봉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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