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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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구연은 송나라 시대의 사상가로,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즉리를 핵심 사상으로 주장했다. 그는 주희의 주자학과 달리, 마음을 우주의 근본으로 보고, 인간의 마음속에 도덕적 본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육구연은 "육경은 모두 나의 마음의 주석이다"라고 말하며 경전보다 마음을 중시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그의 사상은 왕양명에게 영향을 미쳐 양명학의 형성에 기여했다. 육구연의 사상은 주희와의 논쟁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저서인 《육상산전집》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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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구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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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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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루 주위안 (陸九淵) |
자(字) | 쯔징(子靜) |
시호 | 문안(文安) |
다른 이름 | 상산 선생(象山先生) |
출생과 사망 | |
출생 | 1139년 3월 26일 |
사망 | 1193년 1월 18일 |
출신지 | 푸저우진시현 칭톈 |
사상 | |
영향 | 공자 맹자 |
영향을 줌 | 왕양명 나카에 도주 오시오 헤이하치로 옌시산 량수밍 모우 종산 |
2. 사상
육구연의 사상은 심즉리(心卽理)로 대표되며, 주자학의 성즉리(性卽理)와 대비된다. 주자학은 마음을 성(性)과 정(情)으로 나누고 성을 리(理)로 보았지만, 육구연은 마음 자체를 리(理)로 보았다. 이러한 육구연의 사상을 심학(心學)이라고 한다.
육구연은 마음 이외의 것에 얽매이지 않고, 육경이나 공자, 맹자에게도 선험적인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는 "육경은 모두 나의 마음의 주석이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마음을 육경보다 상위에 두었다. 이는 명나라 양명학 좌파 사상의 기반이 되었다.
육구연은 13세 때 "우주 안의 일은 곧 자기 안의 일, 자기 안의 일은 곧 우주 안의 일이다"라고 썼는데, 이는 외적 현상과 마음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그의 사상은 객관을 주관 안에 흡수하는 주관 유심론으로 분류된다.
육구연의 학통은 정명도-사상채(사량좌)로 이어지는 '만물일체의 인(仁)'과 연관되며, 명나라 왕양명에게 계승되어 '육왕학' 또는 '심학'으로 불리며 시대를 풍미했다.
육구연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했으며, 욕망을 제거하고 단순하게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4][5]
2. 1. 심즉리(心卽理)
육구연의 사상의 특색은 심즉리(心卽理)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理)’는 ‘천지가 천지여야 할 것’으로서 그 입론의 기초는 송대(宋代)의 다른 사상가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이(理)는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파악하느냐 하는 점에 있어서는 북송(北宋) 이래 개개의 사상가에 따라서 논리의 입증이 달랐다. 그것은 주로 그와 같은 존재의 궁극자(窮極者, 존재를 존재로 하는 것)와 ‘나’인 주체와의 관계에 있어서 경향을 달리했던 것이다.육구연은 이에 대해서 “마음(心)은 1심(一心)이며, 이(理)는 1리(一理)이다. 이 심은 이 이(理)여서, 둘로 나뉘어 있는 일은 없다”라고 말하고, 우주 안의 일은 자신의 분내(分內)의 일이며, 자신의 분내의 일은 우주 안의 일이라고 했다. 다시 사람의 심은 지극히 영(靈, 뛰어나다)하고 이는 지극히 분명하다. 사람은 모두 이 심을 가졌고, 심은 모두 이 이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는 주자가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에서 주장한 “1물(一物)에 1리(一理)가 있고,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이를 밝힘으로써 만물의 일리를 얻는다”라는 논리와는 다르다.
육구연의 이(理)는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같은 존재의 이는 그것을 그것이라고 조정하는 바 나의 마음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나의 마음이 곧 이(理)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 즉 이는 내 마음의 이라고 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설파한 것이다. 따라서 이 1심(一心)이 만물의 이(理)이기 때문에 나의 마음에는 여하한 물건도 부가할 필요가 없고 마음을 가리고 있는 악폐만을 제거하면 된다고 보았다. 독서, 강학, 사색 등도 도리어 유해하다고 한다. 그의 유명한 “6경(六經)은 나의 주각(註脚)에 불과하다”라는 말은 이러한 사고 방식에서 나온 것이다.
주희와 달리 육구연은 우주와 원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포괄하는 궁극적인 하나 또는 근원으로 마음을 제시했다. 육구연의 저작에서 표현된 마음의 통일성은 인류의 마음과 도(道)의 마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류의 마음과 도의 마음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는 주희의 생각과 정면으로 대치된다. 주희는 또한 모든 개별 사물이 원리(''리'')와는 다른 고유한 물질적 기운(''기'')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육구연은 이러한 이원론적 주장에 격렬하게 반대하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더욱 강조했다.[2]
육구연은 도덕적 덕성이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적으로 존재하며, 하늘로부터 부여받아 인(仁)과 의(義)가 인간의 원래 마음을 형성한다고 믿었다. 원래 마음은 성인과 평범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공유하며, 그 진실은 영원하고 변치 않는다.[3]
육구연의 사상은 "심즉리"라는 말로 특징지어지는 경우가 많다. 주자학에서는 마음을 "성"(사람이 본래 지닌 착한 본성)과 "정"으로 나누어, "성"이야말로 "리"(사물을 마땅히 있게 하는 하늘의 이치)라고 했다(즉 "성즉리"). 그러나 육구연은 이에 반해, 마음을 분석하여 그 안에 성·정이나 천리·인욕을 분별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고, 마음 그 자체가 "리"라고 긍정했다. 육구연의 사상을 심학이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2. 2. 만물일체(萬物一體)와 주관유심론(主觀唯心論)
육구연의 사상은 심즉리(心卽理)로 특징지을 수 있다. 육구연에게 '이(理)'는 '천지가 천지여야 할 것'이라는 의미로, 송대(宋代)의 다른 사상가들과 입론의 기초는 같았다. 그러나 '이(理)'가 어디에 있고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북송(北宋) 이래 사상가마다 달랐다. 이는 주로 존재의 궁극자(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와 '나'라는 주체의 관계에서 비롯된 경향 차이였다.육구연은 "마음(心)은 하나이고, 이(理)도 하나이다. 이 마음은 곧 이 이치여서 둘로 나뉠 수 없다"고 하며, 우주 안의 일은 자신의 분내(分內)의 일이며, 자신의 분내의 일은 우주 안의 일이라고 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뛰어나고 이치는 지극히 분명하며, 모든 사람은 이 마음을 가졌고 마음은 모두 이 이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는 주자가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에서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이치가 있고, 각각의 사물의 이치를 밝힘으로써 만물의 이치를 얻는다"고 주장한 것과는 다르다.
육구연에게 이(理)는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치를 조정하는 '나'의 마음 속에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나의 마음이 곧 이(理)이기 때문이다. 즉,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내 마음의 이치라고 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만물의 이치이므로, 마음을 가리는 악폐만 제거하면 되고, 독서, 강학, 사색 등은 오히려 해롭다고 보았다. "육경(六經)은 나의 주석(註脚)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나왔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둘러싼 주자와의 논쟁에서, 주자는 음양(陰陽)이기(二氣)와 도(道)를 형이상하(形而上下)로 나누고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인 것을 도(道)라고 한 반면, 육구연은 무극은 노자의 말이니 역(易)의 태극이라는 말로 충분하다고 했다. 즉, 역(易)에서 "한 번 음(陰)하고 한 번 양(陽)하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는 구절처럼, 도설의 위작론을 더해 주자에게 격렬하게 대항했다. 육구연의 사상은 명대의 진백사(陳白沙)를 거쳐 왕양명(王陽明)에게 영향을 주었다.
육구연은 "우주는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은 우주이다"라고 말했다. 주희는 모든 사물과 존재를 포함하고 근본이 되는 원리인 '이(理)'를 강조한 반면, 육구연은 우주와 원리를 모두 포괄하는 궁극적인 하나 또는 근원으로 마음을 제시했다. 육구연에게 마음의 통일성은 인류의 마음과 도(道)의 마음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인류의 마음과 도의 마음이 분리되어 있다는 주희의 생각과 대립된다. 주희는 또한 모든 개별 사물이 원리(''리'')와는 다른 고유한 물질적 기운(''기'')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육구연은 이러한 이원론에 반대하며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육구연의 사상은 심즉리로 특징지어진다. 주자학에서는 마음을 '성'(사람이 본래 지닌 착한 본성)과 '정'으로 나누고, '성'이야말로 '리'(사물을 마땅히 있게 하는 하늘의 이치)라고 했다(즉, 성즉리). 그러나 육구연은 마음을 분석하여 성·정이나 천리·인욕을 분별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고, 마음 자체가 '리'라고 긍정했다. 그래서 육구연의 사상을 심학이라 부른다. 이는 정명도(정호)의 "선악 모두 천리"라는 생각을 펼친 것이다. 마음이 곧 이치라는 사상은 마음 이외의 것에 얽매이지 않음을 의미하며, 육경이나 공자, 맹자에게도 선험적인 가치를 두지 않는 자세를 이끌어냈다. 육구연은 "육경은 모두 나의 마음의 주석이다"라고 말하며, 권위 있는 육경보다 자신의 마음을 상위에 두었다. 물론 육구연은 육경을 얕보지 않았지만, 이 생각은 훗날 명나라 양명학 좌파의 과격한 사상을 예비했다.
13세 때, 육구연은 "우주 안의 일은 곧 자기 안의 일, 자기 안의 일은 곧 우주 안의 일이다"라고 썼는데, 여기에는 외적 현상과 마음속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성장하면서 육구연은 이러한 생각을 심화시켰다. 즉, 육구연의 사상은 객관을 주관 안에 흡수하는 성격을 가지며, 이는 주관 유심론으로 분류되는 근거가 된다.
육구연은 명확한 사제 관계가 없었지만, 그의 학통은 정명도-사상채(사량좌)로 이어지는 '만물일체의 인(仁)'과 연관된다. 이는 명나라 왕양명에게 계승되어 '육왕학' 또는 '심학'으로 불리며 시대를 풍미했다.
2. 3. 육경(六經)과 권위에 대한 태도
송대의 다른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육구연에게 '이(理)'는 '천지가 천지여야 할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육구연은 이(理)를 파악하는 방법에 있어 북송 이래 다른 사상가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육구연은 "마음(心)은 1심(一心)이며, 이(理)는 1리(一理)이다. 이 심은 이 이(理)여서, 둘로 나뉘어 있는 일은 없다"라고 말하며, 우주 안의 일은 자신의 분내(分內)의 일이며, 자신의 분내의 일은 우주 안의 일이라고 보았다. 즉,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뛰어나고 이는 지극히 분명하며, 모든 사람은 이 마음을 가졌고, 마음은 모두 이 이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1]이는 주자의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과는 다른 논리였다. 주자는 "1물(一物)에 1리(一理)가 있고, 사사물물(事事物物)의 이를 밝힘으로써 만물의 일리를 얻는다"라고 주장한 반면, 육구연은 이(理)가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는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이(理)는 마음의 이(理)라고 하여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만물의 이(理)이므로, 마음에 다른 것을 더할 필요 없이 마음을 가리고 있는 악폐만 제거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독서, 강학, 사색 등은 오히려 해롭다고 여겼다.[1]
육구연은 "'''육경(六經)은 모두 나의 마음의 주석이다'''"라고 말하며, 권위 있는 육경보다 자신의 마음을 상위에 두는 발언을 했다. 물론 육구연 자신은 육경을 얕보는 일은 절대로 없었지만, 이 생각은 후대의 양명학 좌파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2] 태극도설을 둘러싼 주자와의 논쟁에서 육구연은 무극은 노자의 말이니 역의 태극이라는 말로 족하다고 주장하며, 도설의 위작론을 더하여 주자에 대항했다.[1]
2. 4. 도교(道敎)의 영향
육구연은 도교의 영향을 받아 단순함과 자연스러움을 강조했다. 도교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자연스러움인데, 이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고요함(정지)을 통해 어떤 상황에도 조화롭고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자는 이를 "''정지하면 성인, 움직이면 왕''"이라고 표현했다.[4]육구연은 '근본을 세우려면 욕망을 제거해야 한다'는 도교적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5] 이는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키는 욕망 없이 단순하게 사는 것을 강조하는 도교 사상과 연결된다.
3. 주희(朱熹)와의 논쟁
육구연의 사상은 심즉리(心卽理)로 대표된다. 육구연에게 '이(理)'는 '천지가 천지여야 할 것'으로, 송대(宋代) 다른 사상가들과 입론의 기초는 같았다. 그러나 이(理)를 어디에서 어떻게 파악하는가에 대해서는 북송(北宋) 이래 사상가마다 논리 입증 방식이 달랐다. 육상산은 “마음(心)은 하나이고, 이(理)도 하나이다. 이 마음은 곧 이 이치여서, 둘로 나뉠 수 없다”고 말하며, 우주 안의 일은 자신의 분내(分內)의 일이며, 자신의 분내의 일은 우주 안의 일이라고 했다. 또한 사람의 마음은 지극히 영묘(靈妙)하고 이치는 지극히 분명하다. 사람은 모두 이 마음을 가졌고, 마음은 모두 이 이치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이는 주자가 격물치지론(格物致知論)에서 “하나의 사물에 하나의 이치가 있고, 모든 사물의 이치를 밝힘으로써 만물의 이치를 얻는다”고 주장한 것과는 다르다. 육상산은 이(理)가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속에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자신의 마음이 곧 이(理)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며,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했다. 따라서 이 마음이 만물의 이치이므로, 마음을 가리는 악폐(惡弊)만 제거하면 충분하며, 독서, 강학, 사색 등은 오히려 유해하다고 보았다. “6경(六經)은 나의 주각(註脚)에 불과하다”는 유명한 말은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나왔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둘러싼 주자와의 논쟁에서 주자는 음양(陰陽)이기(二氣)와 도(道)를 형이상하(形而上下)로 나누고, ‘무극(無極)이면서 태극(太極)’인 것을 도, 즉 이라고 한 데 반해, 육상산은 무극은 노자의 말이니 역(易)의 태극이라는 말로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즉, 역(易)에서 “한 번은 음(陰)이고 한 번은 양(陽)인 것, 이를 도(道)라고 한다”고 한 것처럼, 육상산은 도설의 위작론을 더해 주자와 더욱 격렬하게 논쟁했다.
육구연은 주자와 동시대를 살았고, 그의 형들은 주자와 친분이 있었기에 자주 편지로 논쟁했다. 서로의 학설을 비판했지만, 기본적으로 서로를 존경했던 것으로 보인다. 1175년에는 여조겸의 중재로 직접 만나 논쟁했는데, 이것이 중국 사상사에서 유명한 "'''아호의 회'''"이다. 주자가 강학하던 백록동서원에 초청되어 강연하기도 했다.
4. 영향
육구연의 사상은 "심즉리"라는 말로 특징지어진다. 주자학에서는 마음을 "성"(사람이 본래 지닌 착한 본성)과 "정"으로 나누어, "성"이야말로 "리"(사물을 마땅히 있게 하는 하늘의 이치)라고 했다(즉 "성즉리"). 그러나 육구연은 이에 반해, 마음을 분석하여 그 안에 성·정이나 천리·인욕을 분별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고, 마음 그 자체가 "리"라고 긍정했다. 육구연의 사상을 심학이라고 칭하는 이유이다. 이것은 정명도의 "선악 모두 천리"라는 생각을 널리 펼친 것이다. 마음=리라는 사상은 마음 이외의 것에 속박되지 않음을 의미하며, 육경이나 공자, 맹자에게도 선험적인 가치를 두지 않는 자세를 이끌어낸다. 육구연은 "'''육경은 모두 나의 마음의 주석이다'''"라고 말하며, 권위 있는 육경보다 자신의 마음을 상위에 두는 발언을 했다. 물론 육구연 자신은 육경을 얕보지 않았지만, 이 생각은 후대의 명대에 꽃피는 양명학 좌파의 사상을 준비하게 된다.
또한 13세 때, "우주 내의 일은 곧 자기 분내의 일, 자기 분내의 일은 곧 우주 내의 일이다"라고 적었는데, 여기에는 외적 현상과 마음속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보이며, 성장하면서 육구연은 이것을 심화해 간다. 즉 육구연의 사상은 객관을 주관 안으로 흡수해 버리는 성격을 가진다. 이것은 주관 유심론으로 분류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육구연은 명확한 사제 관계를 갖지 않았지만, 그 학통은 정명도-사상채로 이어져 온 "만물 일체의 인"과 연관된다. 그것은 명대에 이르러 왕양명에게 계승되어, "육왕학" 또는 "심학"으로 불리며 일세를 풍미하게 된다.
육구연은 주자와 같은 시대를 살았고, 그의 형들은 주자와 친교가 있었기 때문에, 종종 편지로 논쟁했다. 서로 상대의 학설을 비난했지만, 기본적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둘 다 품고 있었던 듯하다. 1175년 여조겸의 중재로 직접 만나 논했는데, 이것이 중국 사상사상 유명한 "'''아호의 회'''"이다. 주자가 강학하고 있던 백록동서원에 초청되어 강연을 하기도 했다.
4. 1. 근현대
육구연의 철학은 육구연 사후인 1193년 중국에서 많은 추종자를 얻지 못했다. 육구연의 철학은 명나라 시대에 왕양명이 육구연의 저작을 다시 출판하고 주석을 달기 전까지 거의 완전히 잊혀졌다. 왕양명은 육구연의 철학을 발전시키고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주희의 형이상학적 원리 학파에 대항하는 심학(心學)을 세웠다. 심학은 두 주요 사상가 육구연과 왕양명의 이름을 따서 육왕학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왕양명 사후, 이 학파의 중국 내 영향력은 강력한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 체제에 의해 억제되었는데, 이는 국가가 주관하는 과거 시험을 통해 모든 정부 관료의 교육을 통제했으며, 이 시험은 주희가 설계한 교육 과정에 크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6] 반면, 센고쿠 시대 이후 비교적 분권화된 일본의 정부 시스템 덕분에 육왕학의 일본 내 영향력은 훨씬 더 컸다. 일본의 요메이(왕양명) 학파는 나카에 도주와 오시오 헤이하치로와 같은 후대 일본 사상가 및 활동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큰 영향을 미쳤다.[6]육구연의 유교 해석은 20세기까지 중국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20세기 초, 육구연의 철학은 량수밍에 의해 그의 저서 《동서문화 및 철학》(1921)에서 다시 대중화되었다. 국민당 군벌 옌시산은 산시성에서 육왕학을 모델로 하여 유교 부흥을 시도했다.[6]
5. 주요 저서
- 육상산전집 36권
: 상산(육구연)의 문장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 13년째인 1205년(개희 원년)에 그의 장남 육지지에 의해 처음 편집되었고, 제자 양간이 서문을 썼다. 이때 "문집 28권, 외집 6권"이 만들어졌다.
: 2년 후인 1207년(개희 3년), 상산의 문인 고상로가 이 문집을 무주에서 간행했다. 그러나 이 고씨 간본은 빠진 부분이 많았으므로, 육지지가 빠진 글들을 모아 증보하여 재편집하고 합하여 32권으로 만들었다. 1212년(가정 5년) 9월 상산의 제자 원섭이 서문을 쓰고, 강서 창사에서 발행했다.
참조
[1]
서적
Sourcebook in Chinese Philosophy
https://books.google[...]
Greenwood Publishing Group
2012-04-01
[2]
서적
Mencius
Penguin Books
1970
[3]
서적
An Introduction to Confucian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
[4]
문서
The Zhuangzi
[5]
서적
The development of Neo-Confucian Thought
Greenwood Press
1957
[6]
서적
Warlord: Yen Hsi-shan in Shansi Province 1911-1949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67
[7]
서적
陸象山文集
明徳出版社
1972
[8]
서적
陸象山文集
明徳出版社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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