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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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사로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423년에 태어나 1463년에 사망했다. 그는 세종의 서녀인 정현옹주와 혼인하여 영천군에 봉해졌으며, 세조의 즉위에 협력하여 공신에 책록되고 좌찬성까지 올랐다. 윤사로는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공을 세웠으나, 재물을 탐하는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그는 한명회와 이중으로 겹사돈 관계를 맺었으며, 여러 왕비들과 복잡한 인척 관계를 형성했다.
윤사로는 1423년 광주목사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윤은(尹垠)과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이수상(李守常)의 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재종조부였던 윤번의 딸이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과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1436년(세종 18) 14세에 정현옹주와 혼인하여 영천군(鈴川君)에 책봉되었고, 1444년에는 자의대부(資義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통헌대부(通憲大夫)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윤사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2. 생애
1452년(문종 2) 영천위(鈴川尉)로 개봉되었으며, 문종 사후 수릉관(守陵官)·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맡았다. 이어 종1품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계되었고, 1454년(단종 2)에는 광덕대부(光德大夫)로서 과전 70결을 받았다.
세조의 계유정난에 협력하여 그의 즉위 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2][3] 1456년(세조 2) 의정부좌찬성 겸 의금부제조를 지내면서 세조에 반대하는 일파를 추국하여 벌하였고, 성록대부에 승계되고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2][3] 이듬해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하여지고, 1461년 간경도감도제조(刊經都監都提調)가 되었다.[2][3] 이듬해 충훈부당상(忠勳府堂上)으로 재직 중 병으로 죽었다.[2][3]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0세였다.[2][3]
1463년 윤사로가 죽자 세조는 조회와 저자를 이틀간 중지시켰다.[2][3]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성질이 영오(穎悟)하여 남의 뜻을 잘 해석하였으나 재리(財利)를 논의할 때에는 조그마한 이익도 남기지 않았다. 매양 나아가서 임금을 뵈올 적마다 낡은 모자에 때묻은 옷을 입으니, 임금이 항상 말하기를, “그 사람이 탐욕(貪欲)하고 인색하여 갑자기 부자집이 되었으니, 거만(鋸萬)의 돈을 쌓았을 것이다.”고 하였으나, 선비에게 굽신거리고 교만(驕慢)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자못 많이 그를 따랐다.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으니, 청렴 방직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하고, 의(義)에 따라서 남을 구제하는 것을 경(景)이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2][3]
비슷한 연배였던 그의 5촌 당숙 윤호는 훗날 성종의 장인이 된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윤사로는 1423년 광주목사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윤은(尹垠)과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이수상(李守常)의 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재종조부였던 윤번의 딸이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과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윤사로는 1436년(세종 18) 14세에 정현옹주와 혼인하여 영천군(鈴川君)에 책봉되었고, 1444년에는 자의대부(資義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통헌대부(通憲大夫)가 되었다.
1452년(문종 2) 영천위(鈴川尉)로 개봉되었으며, 문종 사후 수릉관(守陵官)·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맡았다. 이어 종1품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계되었고, 1454년(단종 2)에는 광덕대부(光德大夫)로서 과전 70결을 받았다.
2. 2. 혼인과 관직 생활
윤사로는 1423년 광주목사로 사후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윤은(尹垠)과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이수상(李守常)의 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재종조부였던 윤번의 딸이 세종의 차남인 수양대군과 결혼하여 왕실의 인척이 되었다. 윤사로 역시 1436년(세종 18) 14세에 정현옹주와 혼인하여 영천군(鈴川君)에 책봉되었고, 1444년에는 자의대부(資義大夫)가 되었다가 이듬해 통헌대부(通憲大夫)가 되었다.
1452년(문종 2) 영천위(鈴川尉)로 개봉되었으며, 문종 사후 수릉관(守陵官)·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맡았다. 이어 종1품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계되었고, 1454년(단종 2)에는 광덕대부(光德大夫)로서 과전 70결을 받았다.
2. 3.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 협력
세조의 계유정난에 협력하여 그의 즉위 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2][3] 1456년(세조 2) 의정부좌찬성 겸 의금부제조를 지내면서 세조에 반대하는 일파를 추국하여 벌하였고, 성록대부에 승계되고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2][3] 이듬해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하여지고, 1461년 간경도감도제조(刊經都監都提調)가 되었다.[2][3] 이듬해 충훈부당상(忠勳府堂上)으로 재직 중 병으로 죽었다.[2][3]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0세였다.[2][3]
1463년 윤사로가 죽자 세조는 조회와 저자를 이틀간 중지시켰다.[2][3]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에 대해 [성질이 영오(穎悟)하여 남의 뜻을 잘 해석하였으나 재리(財利)를 논의할 때에는 조그마한 이익도 남기지 않았다. 매양 나아가서 임금을 뵈올 적마다 낡은 모자에 때묻은 옷을 입으니, 임금이 항상 말하기를, “그 사람이 탐욕(貪欲)하고 인색하여 갑자기 부자집이 되었으니, 거만(鋸萬)의 돈을 쌓았을 것이다.”고 하였으나, 선비에게 굽신거리고 교만(驕慢)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자못 많이 그를 따랐다.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으니, 청렴 방직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하고, 의(義)에 따라서 남을 구제하는 것을 경(景)이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2][3]
비슷한 연배였던 그의 5촌 당숙 윤호는 훗날 성종의 장인이 된다.
2. 4. 세조 치하 관직 활동과 사망
그 뒤 세조의 계유정난에 협력하여 그의 즉위 후, 수충위사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2][3] 1456년(세조 2) 의정부좌찬성 겸 의금부제조를 지내면서 세조에 반대하는 일파를 추국하여 벌하였고, 성록대부에 승계되고,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2][3] 이듬해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봉하여지고, 1461년 간경도감도제조(刊經都監都提調)가 되었고, 이듬해에 충훈부당상(忠勳府堂上)으로 재직 중 병으로 죽었다.[2][3] 당시 그의 나이는 향년 40세였다.[2][3]
1463년 윤사로가 죽자 세조는 조회와 저자를 이틀간 중지시켰다.[2][3]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에 대해 [성질이 영오(穎悟)하여 남의 뜻을 잘 해석하였으나 재리(財利)를 논의할 때에는 조그마한 이익도 남기지 않았다. 매양 나아가서 임금을 뵈올 적마다 낡은 모자에 때묻은 옷을 입으니, 임금이 항상 말하기를, “그 사람이 탐욕(貪欲)하고 인색하여 갑자기 부자집이 되었으니, 거만(鋸萬)의 돈을 쌓았을 것이다.”고 하였으나, 선비에게 굽신거리고 교만(驕慢)하지 않아서 사람들이 자못 많이 그를 따랐다. 시호를 충경(忠景)이라 하였으니, 청렴 방직하고 공정한 것을 충(忠)이라하고, 의(義)에 따라서 남을 구제하는 것을 경(景)이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2][3]
비슷한 연배였던 그의 5촌 당숙 윤호는 훗날 성종의 장인이 된다.
3. 인물평
윤사로는 정현옹주에게 장가들어 임금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성질이 요망하고 경오하였으며, 식리에 능하였다. 외방의 농장이 있는 곳에 여러 만석을 쌓아 놓고, 서울 제택의 창고도 굉장하여 몇 리 밖에서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무릇 주구하는 바가 이와 같았다.
4. 가계와 인척 관계
성종의 제3비 정현왕후는 윤곤의 후손으로, 윤곤의 둘째 아들이자 윤삼산의 형인 윤희제의 손자가 윤사로이다. 윤사로는 정현옹주와 혼인하여 부마 영천위가 되었다.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는 윤번의 딸이며, 중종의 제2계비 장경왕후는 정희왕후의 오빠인 윤사분의 가계로 윤번-윤사분-윤보-윤여필-장경왕후, 윤임 남매로 이어진다.
중종의 제3비 문정왕후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윤번의 아들 윤사흔의 후손들이다.
정현왕후, 문정왕후, 장경왕후, 숙빈 윤씨는 모두 고려 군부판서(軍簿判書) 영평군(鈴平君) 윤척의 후손들로, 윤척의 다섯 아들 중 셋째 문하평리 윤승순과 다섯째 아들 판도판서 윤승례의 후손들이다.
4. 1. 가계
4. 2. 한명회와의 관계
한명회와는 이중으로 겹사돈 관계였다. 증조부 윤곤의 후처는 한상질의 딸이다. 한상질의 아들 중 한기는 한명회의 아버지로, 윤곤은 한명회의 고모부가 된다. 또한 윤사로는 한명회의 내재종손이 된다. 윤곤의 증손자인 윤사로의 장남은 다시 한명회의 딸이자 공혜왕후의 언니와 결혼하여 이중 인척관계를 형성한다.[1]4. 3. 왕실과의 인척 관계
성종의 제3비 정현왕후는 윤곤의 후손으로, 윤곤-윤삼산-윤호-정현왕후로 이어진다. 윤곤의 둘째 아들이자 윤삼산의 형인 윤희제의 손자는 윤사로이며, 윤사로는 정현옹주와 혼인하여 부마 영천위가 되었다.세조의 정비 정희왕후는 윤번의 딸이며, 중종의 제2계비 장경왕후는 윤번의 4대손이다. 윤번-윤사분-윤보-윤여필-장경왕후, 윤임 남매로 이어진다.
중종의 제3비 문정왕후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는 윤번의 아들 윤사흔의 후손들이다. 윤번-윤사흔-윤계겸-윤욱-윤지임-문정왕후, 윤원형, 윤원로, 윤원량 남매로 이어진다. 숙빈 윤씨는 윤원량의 딸이다.
장경왕후는 정현왕후의 11촌 조카가 되며, 문정왕후는 정현왕후의 12촌 손녀뻘이 된다. 숙빈 윤씨는 정현왕후에게는 족증손뻘이 된다. 윤사로는 장경왕후에게는 11촌 숙부, 문정왕후에게는 12촌 족대부, 숙빈 윤씨에게는 13촌 증대부뻘이 된다.
참조
[1]
문서
정현왕후와의 관계
[2]
인물
윤사로
[3]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12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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