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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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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윤언이(尹彦頤, 1090년 ~ 1149년)는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자는 원로(元老), 호는 금강거사(金剛居士),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본관은 파평이며, 문하시중 윤관의 아들이고 윤인첨의 아버지이다.
생애1107년(예종 2년) 부음으로 벼슬에 올랐고, 1114년(예종 9년) 과거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내고 인종 때 기거랑이 되었다. 좌사간 정지상, 우정언 권적 등과 함께 당시 정치의 득실을 논하여 정책의 잘잘못을 진언했는데, 인종은 그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 그의 의견을 등과 시정에 반영하게 하였다. 1128년(인종 6) 예부시랑 때 송나라에 가서 국교 재개를 청하고 돌아왔다.

1132년 국자사업이 되어 경연에서 경의를 강의하고 특별히 화서대를 임금에게 하사받았다. 예종 때 아버지가 지은 의천의 비문을 김부식이 함부로 고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1133년 김부식의 주역 강의를 묻고 논란하라는 왕명에 정연한 논리로 반박 설분하였다. 국자감사업, 보문각직학사를 지냈다. 그는 승려 묘청과 학자 정지상 등이 칭제건원, 서경 천도를 주장하였을 때 칭제건원은 동의하였으나 서경 천도는 동의하지 않았다.

1135년 묘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윤언이는 중군좌로 임명되어 묘청의 난 토벌에 참여하였다. 1136년 공을 세웠으나 정지상과 내통하였다는 김부식의 보고로 양주방어사로 좌천되었다. 1138년 광주목사로 부임하였고 1140년 개성으로 돌아왔다. 1145년에 호부상서, 1146년 집현전학사 등을 지냈다.

1148년 한림학사에 이어 정당문학 판상서형부사로 임명되고 1149년 중군병마판사 겸 동북면행영병마판사가 더해졌고, 이해 군영에서 졸하였다. 은청광록대부 수사공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형부사 주국을 추증하였다.

《주역》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났다. 저서에 《역해(易解)》가 있다. 배위는 사정공 김약온의 딸인 광양군대부인 김씨이고, 7남 4녀를 두었다.
김부식과의 갈등윤언이는 김부식과 정치적으로 오랫동안 대립한 숙적 관계였다. 윤언이는 예종 때 아버지 윤관이 지은 의천의 비문을 김부식이 고친 일로 앙심을 품고 있었으며, 1133년 김부식의 주역 강의에 대해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김부식을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묘청의 난 진압 후에는 김부식의 보고로 인해 양주방어사로 좌천되기도 했다.
묘청의 난윤언이는 묘청, 정지상 등과 함께 칭제건원을 주장했으나, 서경 천도에는 반대했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의 막료로 출정하여 서경을 함락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가족


  • 5대조: 윤신달
  • 고조부: 미상
  • 증조부: 윤선지
  • 조부: 윤집형
  • 부: 윤관
  • 형제: 윤언인, 윤언순, 윤언식, 윤언민, 윤언영, 윤대원, 윤(출가), 윤(출가)
  • 아내: 광양군대부인 김씨
  • 자식: 윤인첨, 윤자양, 윤자고, 효돈, 윤돈신, 윤돈의, 윤, 윤, 윤, 윤

관련 항목

  • 윤관
  • 김부식
  • 묘청의 난
  • 정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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