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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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건승은 1858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24년 만주에서 사망한 조선 말기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시문집 《해경당수초》와 《경재집》을 남겼으며, 1891년 진사가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는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펼쳤다. 1906년에는 재종제 이건방과 함께 강화도에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구국 인재를 양성했고,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이건승은 1858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891년 진사가 되었다. 당시 조선은 1876년 운요호 사건으로 강화도 조약을 맺는 등 일본 제국의 침략과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등의 사건으로 혼란스러웠다.[1]
2. 주요 저작
2. 1. 해경당수초(海耕堂收草)
海耕堂收草중국어는 이건승의 시문집이다.
다음은 이건승이 1906년 자신이 설립한 계명의숙 졸업생 12명에게 은잔과 수저를 선물 받고 지은 시 「내가 일찍이 병오(1906)년에 사립계명의숙을 세웠었다. 졸업한 열두 명이 은잔과 시저(匙箸, 숟가락과 젓가락)로써 멀리 환갑을 축수하니 그 뜻이 느꺼워 시로서 고마워한다」[8]의 내용이다.
가엾어라. 정위 새여 작디작은 몸
바다를 메우려는 뜻 이루지 못한 채 원통하게 괴로움만.
어찌 뜻했으리 그 당시 처음 발원이
이제 와서 겨우 열 사람의 은잔 은수저[7]를 받게 될 줄이야!
망상(妄想)만 어수선터니 나라는 망하여 서글픈데
뜻이 큰 영재들 모조리 서로 헤어졌네.
세상의 변고 이 눈으로 보니 누군들 변치 않으랴만
오직 자네들 마음만은 옛날과 똑같구려.
계명이라 아로새긴 글자 획도 새롭고
은빛만 번쩍번쩍 환갑을 느껍게 하네.
어쩌자고 온갖 생각 모두가 재처럼 사윈 이 때
다시금 이 늙은 영감의 눈물이 수건을 적시게 하는가!
이 시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이어간 이건승의 복잡한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나라를 잃은 슬픔, 제자들의 변치 않는 마음에 대한 감동, 그리고 독립에 대한 희망이 꺼져가는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이 복합적으로 나타난다. '정위 새'의 비유를 통해 자신의 노력이 미약함을 자조하면서도, '계명'이라는 글자와 '은빛'을 통해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통해 비통한 심정을 드러낸다.[2]
3. 생애
1894년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지만, 이건승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1] 1906년에는 재종제(6촌)인 이건방과 함께 강화도에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1] 당시 조선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시기로,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고종이 강제 퇴위당하는 등 국권이 위협받고 있었다.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건승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다.[1] 그는 만주 회인현 흥도촌[6], 강구촌, 접리촌 등에서 생활하며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망명 직전, 오랜 벗인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 1914년에는 접리촌으로 이사했고, 계명의숙 졸업생들과 교류하며 독립 의지를 북돋았다. 1924년 만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3. 1. 출생과 초기 활동 (1858년 ~ 1894년)
강화도에서 1858년에 태어났다. 1891년에 진사가 되었다. 이 시기 조선은 1876년 운요호 사건을 일으켜 강화도 조약을 맺게 하는 등 일제의 침략과,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등의 사건으로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1]
3. 2. 계명의숙 설립과 구국운동 (1894년 ~ 1910년)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이 추진되었으나 이건승은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고종 42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반대하여 기당 정원하 선생과 함께 자결을 시도했으나 가족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1]
1906년(고종 43년), 재종제(6촌)인 난곡 이건방과 함께 강화도에 계명의숙을 설립하여 구국 인재 양성에 힘썼다.[1] 당시 조선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던 시기로,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하는 등 국권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건승은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하였다.[1]
3. 3. 만주 망명과 독립운동 (1910년 ~ 1924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건승은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이어갔다.[1] 그는 만주 회인현 흥도촌[6], 강구촌, 접리촌 등에서 생활하며 동포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망명 직전, 오랜 벗인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1] 1910년 9월 말, 이건승은 사당 위패 앞에서 하직인사를 올린 뒤 만주 망명을 위해 개성의 왕성순의 집에 도착했다. 10월 1일, 전 이조참판 문원 홍승원, 아우 난곡 이건방, 장조카 이범하(영재 이건창의 장자)와 합류했다. (먼저 전 대사헌 기당 정원하는 만주로 이주했고, 창강 김택영은 배를 타고 중국 남통으로 망명하였다.) 10월 2일, 이건승은 재종제 난곡 이건방에게 후학을 부탁하고 이별했다. 그해 12월 1일, 압록강 하구 안동현(현재 단둥시)을 거쳐 12월 7일 만주 회인현 흥도촌에 도착하여 기당 정원하와 상봉했다.[6]
1914년에는 접리촌으로 이사했다. 망명 이후에도 이건승은 계명의숙 졸업생들과 교류하며 그들에게 독립 의지를 북돋았다. 1924년, 이건승은 만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참조
[1]
시
매천 황현의 절명시
[2]
인물소개
학자 소개
[3]
역사적 사실
일왕 은사금 수여자 관련 정보
[4]
역사적 사실
일왕 은사금 수여자 관련 정보
[5]
용어설명
재전의 의미
[6]
지명
흥도촌 위치
[7]
풍습
은수저 사용 이유
[8]
독음
여상어병오세, 건사립계명의숙졸업십이인, 이은배급시저, 위호진지수, 기의가감, 이시사지
[9]
독음
가련정위연신, 전해무성왕고신
[10]
독음
기의당년초발원, 여금지득십가은
[11]
독음
옹산분옹파비, 영재락락진상리
[12]
독음
안간창해수무변, 유유군심사구시
[13]
독음
각루계명자신, 은광엽엽동호진
[14]
독음
여하만념구회일, 복사쇠옹루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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