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타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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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 가타리나는 14세에 결혼하여 남편을 개종시키고 세 자녀를 신앙 안에서 양육한 한국 천주교 신자이다. 1838년 박해를 피해 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한양으로 피신했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옥중에서 장티푸스로 사망했다. 이 가타리나와 딸 조 막달레나는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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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타리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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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이 가타리나 |
출생일 | 1783년 |
사망일 | 1839년 10월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
직업 | 순교자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상징 | 해당사항 없음 |
수호 | 해당사항 없음 |
매장지 | 해당사항 없음 |
성당 | 해당사항 없음 |
기도 | 해당사항 없음 |
2. 생애와 신앙
이 가타리나는 시골에서 천주교 신자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교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14세에 조(趙)씨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하여 남편이 개종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 세 명의 자녀를 낳아 신앙 속에서 양육했다.[1]
그녀의 딸 조 막달레나는 특히 신앙심이 깊었다. 조 막달레나가 18세가 되었을 때, 이 가타리나는 딸을 신앙인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조 막달레나는 처녀로 살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가타리나는 딸의 결심을 존중했지만, 혹시 순교하게 되면 딸이 홀로 남겨질 것을 염려하여 결혼을 설득하기도 했다.[1]
1838년 고을에 사사로운 박해가 일어나자, 이 가타리나는 딸과 함께 한양으로 피신했다. 앵베르 주교의 소개로 이영덕 막달레나와 이인덕 마리아 자매의 집에 머물게 되었으나, 1839년 기해박해로 인해 한양은 천주교인들에게 더욱 위험한 곳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용감하게 박해에 맞서기로 결심했다.[1]
이후 이 가타리나는 조 막달레나를 포함한 다섯 명의 여성 신자들과 함께 포도청의 수배를 받고 있던 앵베르 주교가 체포되면 함께 자수할 것을 결의하였으나, 1839년 6월 말에서 7월 초 쯤에 포도대에 체포되었다. 당시 이 가타리나의 나이는 57세, 조 막달레나는 33세였다.[1]
이들은 배교를 강요당하고 혹독한 고문을 견뎌냈다. 계속되는 가혹한 형벌과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에서 장티푸스에 걸려 감옥에서 수 주 동안 몹시 앓았다. 순교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1839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옥중에서 병사했다. 그들은 수일 간격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숨을 거두었다.[1]
2. 1. 이 가타리나
이 가타리나는 시골에서 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천주교 신자 부모 밑에서 태어나, 14세에 조(趙)씨 성을 가진 남성과 결혼했다. 이후 남편을 개종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3남매를 낳아 신앙 안에서 길렀다.[1]2. 2. 조 막달레나
조 막달레나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깊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도왔다. 18세에 처녀로 살기로 결심했으나, 가족의 결혼 강요와 사람들의 의심을 피해 한양으로 올라와 한 천주교 집안의 하녀가 되었다. 그러나 과로와 영양실조로 병을 얻었다.[1]병이 완쾌된 후 좀 더 편한 곳으로 이사해 번 돈의 일부를 어머니에게 보냈다. 서른이 넘어 고향으로 돌아와 문맹인 예비 신자를 가르치고, 병자들을 돌보며, 죽을 위험에 처한 이교도 집안의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등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어려운 일들을 도맡아 했으며 사심이 없었다.[1]
2. 3. 기해박해와 순교
1839년 기해박해 때, 이 가타리나는 딸 조 막달레나와 함께 한양에서 체포되었다. 모진 고문과 형벌 속에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으나, 장티푸스에 걸려 1839년 9월 말에서 10월 초 쯤에 옥중에서 수일 간격으로 사망했다.3. 시복 및 시성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 모녀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가 되었고,[2][3]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이 되었다.
3. 1. 시복
이 가타리나와 조 막달레나는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 시복식을 통해 복자로 시복되었다.[2][3]3. 2. 시성
1984년 5월 6일,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미사를 집전하였고, 이 미사에서 이 가타리나는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3]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1-23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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