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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노동총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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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노동총동맹은 1912년 스즈키 분지 등에 의해 결성된 유애회에서 시작하여, 1921년 일본노동총동맹으로 개칭된 일본의 노동 단체이다. 관동 대지진 이후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간의 대립으로 여러 차례 분열을 겪었다. 1935년 중도파 전국노동조합동맹과 통합했으나, 중일 전쟁 시기 군국주의에 협력하며 파업을 금지했다. 1940년 자진 해산하여 대일본산업보국회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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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노동총동맹
일본노동총동맹
명칭일본노동총동맹
약칭총동맹
전신우애회
설립1921년
설립자스즈키 분지
해산1940년
종류노동조합 내셔널 센터
주요 인물스즈키 분지, 마츠오카 코마키치
개요
조합원 수 (1932년)28만 명
역사
전신대일본노동총동맹우애회
후신대일본산업보국회

2. 연혁

1912년 스즈키 분지 등이 결성한 유애회는 점차 좌익화되어 1919년 '''대일본노동총동맹우애회'''로 개칭되었고,[2] 이후 반사회주의적 태도에서 사회주의 입장으로 변화했다. 1921년 '''일본노동총동맹'''으로 개칭되었다.

관동 대지진 이후, 내부에서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간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1925년 총동맹은 일본 공산당 당원을 제명했고, 공산당 계열은 일본 노동조합 평의회를 결성하면서 총동맹은 분열되어 세력이 반감되었다.

1926년에는 일본 노동조합 동맹, 1929년에는 노동조합 전국동맹이 각각 결성되었다. 그 결과, 총동맹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우파로 위치하게 되었고, "현실주의", "반공주의", "노사 협조주의"를 내걸고 운동을 지속했다. 1932년에는 전국 노동조합 회의·일본 해원조합 등 11개 단체 28만 명으로 구성된 일본 노동조합 회의가 결성됨에 따라 당시 노동운동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

1930년 오랫동안 총동맹 회장을 역임한 스즈키 분지는 회장직을 사임했다(중의원 의장이 됨).[2]

1932년 4월, 일본 노동총동맹 체우동지회가 노동총동맹을 탈퇴했다.[3]

1935년 중도파 전국노동조합동맹(전총)과 통합했지만,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성전에 협력하기 위해 파업을 절멸시킨다"라고 선언하며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좌익 노동조합은 잇따라 탄압되어 붕괴해가는 가운데, 간부들은 전쟁 정책에 협력했다.

1939년 7월, 산업보국회와의 통합에 적극적이었던 중도파 전국노동조합동맹(전노)이 분열, 전노는 먼저 산업보국회에 참가했다.

1940년 7월, 일본노동총동맹은 자진 해산하여 산업보국회에 편입되었다.

2. 1. 우애회에서 총동맹으로

1912년 스즈키 분지 등이 결성한 유애회는 점차 좌익화되어 1919년 8월 '''대일본노동총동맹우애회'''로 개칭되었다.[2] 이후 반사회주의적 태도에서 사회주의 입장으로 변화했다.

1921년 '''일본노동총동맹'''으로 개칭되었다.

2. 2. 총동맹 분열

관동 대지진 이후, 내부에서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간의 대립이 첨예화되었다. 1925년(다이쇼 14년) 총동맹은 일본 공산당 당원을 제명했고, 공산당 계열은 일본 노동조합 평의회를 결성하면서 총동맹은 분열되어 세력이 반감되었다(총동맹의 '''제1차 분열''').

1926년(다이쇼 15년)에는 일본 노동조합 동맹('''제2차 분열'''), 1929년(쇼와 4년)에는 노동조합 전국동맹('''제3차 분열''')이 각각 결성되었다. 이 결과, 총동맹은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우파로 위치하게 되었고, "현실주의", "반공주의", "노사 협조주의"를 내걸고 운동을 지속했다. 1932년에는 전국 노동조합 회의·일본 해원조합 등 11개 단체 28만 명으로 구성된 일본 노동조합 회의가 결성됨에 따라 당시 노동운동의 최대 세력이 되었다.

1930년(쇼와 5년), 오랫동안 총동맹 회장을 역임한 스즈키 분지는 회장직을 사임했다(중의원 의장이 됨)[2]

1932년(쇼와 7년) 4월, 일본 노동총동맹 체우동지회가 노동총동맹을 탈퇴했다[3]

2. 3. 전쟁 협력과 해산

1935년 중도파 전국노동조합동맹(전총)과 통합했지만,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성전에 협력하기 위해 파업을 절멸시킨다"라고 선언하며 일본 군국주의에 협력했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좌익 노동조합은 잇따라 탄압되어 붕괴해가는 가운데, 간부들은 전쟁 정책에 협력했다.

1939년 7월, 산업보국회와의 통합에 적극적이었던 중도파 전국노동조합동맹(전노)이 분열, 전노는 먼저 산업보국회에 참가했다.

1940년 7월, 일본노동총동맹은 자진 해산하여 산업보국회에 편입되었다.

참조

[1] 서적 勞働國策と總同盟 https://dl.ndl.go.jp[...] 日本労働総同盟本部
[2] 간행물 友愛会から総同盟へ : 鈴木文治と松岡駒吉の軌跡 https://www.rengo-so[...] 連合総研 2019-04
[3] 뉴스 社民党分裂を機に逓友同志会が総同盟脱退 東京麻日新聞 1932-04-17
[4] 웹사이트 日本労働総同盟 https://kotobank.jp/[...]
[5] 웹사이트 日本労働組合総同盟 https://kotobank.jp/[...]
[6] 웹사이트 日本労働総同盟 https://kotobank.jp/[...]
[7] 웹사이트 日本労働組合総同盟 https://kotobank.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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