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치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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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치백은 한양 인근 부유한 비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무역에 종사하다가, 1835년 천주교인들을 돕기 위해 포졸로 활동했다. 1846년 아들이 체포되자 자수하여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김대건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그는 배교를 거부하고 고문 끝에 순교했으며, 1925년 복자,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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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 1846년 사망 - 현석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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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안드레아는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이자 순교자로, 천주교 신앙을 가진 가문에서 태어나 사제의 길을 걸으며 마카오와 필리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조선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26세에 순교하였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 역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어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임치백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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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임치백 요셉 |
출생일 | 1803년 |
사망일 | 1846년 9월 20일 |
축일 | 9월 20일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출생지 | 서울 |
사망지 | 서울 |
직업 | 순교자 |
시복 및 시성 | |
시복일 | 1925년 7월 5일 |
시복인 | 교황 비오 11세 |
시성일 | 1984년 5월 6일 |
시성인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기타 정보 |
2. 생애
임치백은 한양 근교의 부유하고 천주교를 믿지 않는 집안에서 태어나 한문학을 공부하고 무역에 종사했다. 그는 다재다능하고 친구가 많았으며, 그의 아내와 자녀들은 세례를 받았으나 정작 본인은 오랫동안 세례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천주교 신자들에게 호의적이었으며 그들을 돕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1846년 아들 임성룡이 김대건 신부와 함께 체포되자, 임치백은 아들을 만나기 위해 관아를 찾아가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밝히며 자수하였다.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투옥된 그는 옥중에서 김대건 신부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고 세례를 받았으며, 세례명으로 요셉을 받았다. 이후 친구들과 가족들의 배교 권유에도 불구하고 혹독한 고문을 견뎌내며 신앙을 지켰고, 결국 순교하였다.
2. 1. 출생과 성장
임치백은 한양과 가까운 한강변의 한 부유한 비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고, 그의 아버지는 그를 매우 사랑하였다. 임치백은 착한 소년으로 자랐다. 그는 약 10년 동안 서당에 다니며 한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그는 무역에 종사했다. 그는 운동과 음악, 시 그리고 예술 등 다방면에 뛰어났으며, 친구가 많았다.2. 2. 천주교와의 만남
임치백의 아내와 자녀들은 세례를 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세례를 계속 미루었다. 그럼에도 그는 언제나 천주교 신자들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그들을 돕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한 천주교와 관련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2. 3. 체포와 투옥
1846년 6월 5일, 아들 중 한 명이자 선박 주인이었던 임성룡이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동행하여 황해도 서해안으로 갔다가 김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임치백은 이 소식을 듣고 황급히 아들이 체포된 곳으로 갔으나, 아들은 이미 황해도 감옥으로 압송된 상태였다. 아들을 만나기 위해 옹진(해주) 수영을 찾아가 자신이 천주교인임을 밝히며 자수하였다. 며칠 후, 임치백은 한양의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2. 4. 옥중 세례와 신앙
임치백은 감옥에 있을 때 김대건 신부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임치백은 김대건 신부의 고결한 성품과 깊은 신앙심, 그리고 천주교인들이 그를 성직자로서 존중하고 따르는 모습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이로 인해 임치백은 천주교 신자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김대건 신부에게 자신이 감옥에 있게 된 것이 하느님의 특별한 은혜라고 생각하며 감사한다고 말했다. 감옥에서 임치백은 김대건 신부에게 직접 교리 수업을 받고 세례를 받았으며, 요셉이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로써 그는 김아기 아가타에 이어 옥중에서 세례를 받은 두 번째 인물이 되었다.2. 5. 고문과 순교
임치백의 친구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감옥으로 찾아와 배교를 강권했다. 때로는 임치백의 아들 둘과 딸 하나를 감옥에 보내 배교하도록 설득하게 했지만, 임치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포장은 화가 나서 임치백을 거꾸로 매달고 잔혹하게 매질했다.옥살이 3개월 만에 사형 선고를 받자 임치백은 오히려 매우 기뻐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다른 수감자들에게 자신이 먼저 천국으로 가서 그들을 맞이하겠다고 말했다. 하루는 형리가 임치백이 십계명을 외우지 못한다며 조롱하자, 그는 "무식한 아들이라도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한 대로 아버지께 충성을 다할 수 있다"고 답했다.
임치백이 계속 배교를 거부하자 포장은 꼬챙이로 찌르는 형벌과 주뢰형까지 가했다. 임치백은 고통으로 신음했는데, 포장이 신음소리를 항복의 신호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자 그는 신음을 멈추었다. 체포 당시 천주교 신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치백은 온갖 고통스러운 고문을 견뎌내며 죽을 때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3. 시복 및 시성
임치백 요셉은 1925년 7월 5일 로마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2]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다.[3] 이후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집전한 미사 중 거행된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조
[1]
웹사이트
http://newsaints.fai[...]
[2]
백과사전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http://preview.brita[...]
2014-12-28
[3]
뉴스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https://web.archive.[...]
평화방송
2014-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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