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1세 드 베리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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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 1세 드 베리 공작은 1340년에 태어나 1416년에 사망한 프랑스의 귀족이다. 그는 프랑스 왕 장 2세의 아들로, 푸아투 백작, 베리 공작, 오베르뉴 공작 등을 역임했다. 1380년 형 샤를 5세가 죽은 후 조카 샤를 6세의 섭정으로 정계에 참여했으며, 랑그도크 섭정직을 수행하며 재산을 축적했다. 그는 미술품 수집가이자 예술 후원자로, 림부르크 형제에게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를 제작하게 하는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지원했다. 장 1세는 두 번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그의 사후 소유지 대부분은 왕령에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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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1세 드 베리 공작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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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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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베리 공작 |
라틴어 표기 | Johannes de Bituria |
프랑스어 표기 | Très Riches Heures |
출생일 | 1340년 11월 30일 |
출생지 | 뱅센 성 |
사망일 | 1416년 6월 15일 |
사망지 | 파리 |
매장지 | 베리 공 영지, 부르주, 상트-샤펠 |
가문 | 발루아 가문 |
아버지 | 프랑스 왕 장 2세 |
어머니 | 보헤미아의 본 |
통치 | |
왕정 | 프랑스 섭정 |
통치 기간 | 1382년 - 1388년 |
이전 통치자 | 샤를 6세 |
공동 섭정 | 용담공 필리프 2세(1382년-1388년) |
배우자 | |
배우자 1 | 아르마냐크의 잔 |
배우자 2 | 오베르뉴 여백작 잔 2세 |
자녀 | |
자녀 | 몽팡시에 백작 장 드 발루아 본, 칼라트 여자 자작 마리, 오베르뉴 여공작 |
2. 생애
장은 1340년 11월 30일 뱅센 성에서 프랑스 왕 장 2세와 룩셈부르크의 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356년, 그는 아버지에 의해 푸아투 백작이 되었으며, 1358년에는 국왕이 영국에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베르뉴, 랑그도크, 페리고르, 푸아투를 다스리는 국왕 대리인으로 임명되었다. 1360년 푸아티에가 영국에 할양되자, 그의 아버지는 장에게 새로 만들어진 베리와 오베르뉴 공작령을 수여했다. 그 해 5월에 서명된 브레티니 조약에 따라, 장은 영국 왕실의 인질이 되었고 1369년까지 영국에 머물렀다. 프랑스로 돌아온 후, 그의 형제이자 당시 국왕인 샤를 5세는 그를 베리, 오베르뉴, 부르봉네, 포레, 솔로뉴, 투렌, 앙주, 메인, 노르망디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357년, 장 1세는 아파나주(분봉국)로 푸아티에를 받았으나, 전년(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부친이 잉글랜드에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고 푸아티에도 점령당하여 이름뿐인 백작이 되었다. 같은 해, 맏형 샤를로부터 오베르뉴 인접 지역인 남부 프랑스의 랑그도크를 섭정의 입장에서 받았다. 오베르뉴는 원래 아파나주로 주어졌으므로, 남계가 단절될 경우 왕령에 편입되어야 했지만, 부르봉가의 가령도 함께 왕령에 편입하는 조건으로 딸 마리의 남편 부르봉 공작장 1세에게 상속이 인정되었다.[11]
1359년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 잔과 정략 결혼했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으로 푸아티에는 잉글랜드에 넘어가고, 랑그도크 섭정도 해임되었지만, 1369년부터 잉글랜드령 정복 사업에 참여하여 푸아티에를 회복하고, 1375년 뤼시냥을 획득하여 성 개축과 농민 이주 장려 등 부흥에 힘썼다. 르 크레믈랭-비세트르, 니오르, 동즈나크, 몽팡시에 등 푸아티에와 오베르뉴의 도시를 매수하여 부르주를 중심으로 영지 지배를 강화했다.[11]
1380년 맏형이 죽고 조카 샤를 6세가 즉위하자, 둘째 형 앙주 공작 루이 1세, 동생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용담공), 의붓형 부르봉 공작 루이 2세와 함께 섭정을 맡아 랑그도크 섭정에 재임명되어 재산을 축적했다.[11] 1388년 샤를 6세가 친정을 선언하자 다른 형제들과 정권에서 멀어졌고, 1389년 섭정에서 해임되었다. 1392년 샤를 6세가 광증을 보여 통치 불능이 되자 용담공과 함께 정권에 복귀, 1401년 랑그도크 섭정 지위를 되찾았다.[11] 이후 영지 보전과 백년 전쟁 중 프랑스 국내 대립 수습에 진력하여, 조카 오를레앙 공작루이와 용담공 사이의 평화 공작을 펼쳤다. 1404년 용담공이 죽자 그가 양육하던 아르튀르 드 리쉬몽을 거두어 증손자 루이 왕태자의 측근으로 발탁했다.[12]
용담공의 아들 장 1세(무포공)가 오를레앙 공작과의 대립을 지속했을 때도 1405년 양자를 화해시켰지만, 1407년 오를레앙 공작이 무포공의 자객에게 암살되자 분개하여 무포공을 규탄했다.[13] 1408년 그를 정권에 불러들였지만, 1410년 오를레앙 공작 샤를,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알랑송 백작 장 1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등과 지앙 동맹(지앙)을 결성했다. 이후 아르마냐크파로 이름을 바꾸고 잉글랜드에 원군 파견을 요청하며 무포공 등 부르고뉴파와 프랑스 각지에서 싸웠다.[13] 1413년 무포공이 파리 민중 폭동으로 퇴거한 후 파리를 탈취했지만,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냐크파가 참패하고 루이 왕태자가 사망하자, 동생 장이 왕태자로 옹립되었다. 아르마냐크 백작을 파리로 불러들여, 1416년에 75세로 사망했다.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소유지 대부분은 왕령에 편입되었고, 1417년 장 왕태자 사후 샤를 왕태자(후의 샤를 7세)는 부르주를 근거지로 잉글랜드와 대치하게 된다.[13]
정치 이상으로, 장 1세는 미술품 수집가이자 예술가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랑부르 형제에게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를 제작하게 한 외에도, 다양한 귀금속, 공예품, 채색 사본을 소유했다. 건축에도 열중하여 17개 성관을 짓고, 뤼시냥 성/Château de Lusignan영어과 부르주 교회 등 개축 사업과 컬렉션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베리 공작령은 프랑스에서 가장 세금이 무거운 지역이 되었고, 장 1세 사후 상당한 액수의 부채가 남겨졌다고 한다.[14]
2. 1. 초기 생애
2. 2. 랑그도크 통치와 섭정
1380년 형인 샤를 5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자 상속자인 샤를 6세는 미성년자였으므로, 장과 그의 형제들은 국왕의 외삼촌인 부르봉 공작 루이 2세와 함께 섭정으로 활동했다.[11] 그는 같은 해 11월 랑그도크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영국과의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과도한 세금 부과로 촉발된 농민 반란인 아렐에 대처해야 했다. 1384년 앙주 공작 루이가 사망한 후 장과 그의 형제인 부르고뉴 공작은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국왕은 섭정을 종료하고 1388년 친정을 시작하여 왕국의 통치를 대부분 그의 아버지의 옛 신하들에게 맡겼는데, 이들은 국왕의 강력한 삼촌들의 정치적 적이었다.[11] 이 시기에 장은 랑그도크에서 그의 직위도 박탈당했다. 장과 부르고뉴 공작은 때를 기다리다가, 1392년 국왕이 평생 동안 그를 괴롭힌 정신 질환의 첫 발작을 일으키자 곧 다시 권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11]1390년대에 베리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은 샤를 6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을 상대로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경쟁했다. 1401년 4월, 오를레앙 공작이 궁정을 비운 동안 샤를 6세의 삼촌들은 장 드 베리에게 랑그도크, 베리, 오베르뉴, 푸아투의 총독직을 다시 서명하도록 했다.[2]
시몽 드 크라마는 교회법학자이자 고위 성직자로서, 프랑스에 불리하지 않은 방식으로 서방 대분열을 종식시키려는 장의 노력을 도왔다.
1357년, 장 1세는 처음 아파나주(분봉국)로 부여받은 푸아티에는 전년(1356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부친이 잉글랜드에 대패하여 포로로 잡히고 푸아티에도 점령당하여 이름뿐인 푸아티에 백작이 되었기 때문에, 같은 해에 맏형 샤를로부터 오베르뉴 인접 지역으로 동등한 수입이 예상되는 남부 프랑스의 랑그도크를 섭정의 입장에서 받았다. 또한, 오베르뉴는 원래 아파나주로 주어진 것이었으므로, 남계가 단절될 경우에는 왕령에 편입되어야 했지만, 원래 아파나주 설정이 아닌 부르봉가의 가령도 오베르뉴와 함께 왕령에 편입하는 것을 남계가 단절될 경우의 조건으로, 딸 마리의 결혼 상대 부르봉 공작 장 1세에게 상속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잉글랜드의 포로인 부친의 몸값을 마련하기 위해 랑그도크로 부임했을 뿐, 현지 농민 반란과 귀족 분쟁에 휘말려, 거처를 전전하며 자치 도시와 귀족으로부터 돈을 끌어모았고, 1359년에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 잔과 정략 결혼도 했다. 1360년 브레티니 조약의 결과 푸아티에는 잉글랜드로 넘어가게 되었고, 랑그도크 섭정도 해임되었지만, 1369년부터의 잉글랜드령 정복 사업에 편승하여 푸아티에를 회복, 1375년에 뤼시냥을 획득하여 성 개축이나 농민 이주 장려 등 부흥 작업에 진력했다. 이후에도 르 크레믈랭-비세트르, 니오르, 동즈나크, 몽팡시에 등 푸아티에와 오베르뉴의 도시를 매수하여 손에 넣고, 부르주를 중심으로 한 영지에서 지배를 굳혔다.[11]
1380년에 맏형이 죽고 조카 샤를 6세가 즉위하자, 둘째 형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용담공), 의붓형인 부르봉 공작 루이 2세 (샤를 6세의 외삼촌, 장 1세의 부친)와 함께 어린 샤를 6세를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 랑그도크 섭정에 재임명되어 재산을 축적했지만, 1388년에 샤를 6세가 친정을 선언하자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정권에서 멀어졌고, 이듬해 1389년에 섭정이 해임되었다.[11] 그러나, 1392년에 샤를 6세가 발광하여 통치 불능이 되자 용담공과 함께 정권에 복귀, 1401년에 랑그도크 섭정의 지위를 되찾았다.[11] 그 후 영지 보전과 백년 전쟁 중 프랑스 국내의 대립을 수습하기 위해 진력, 조카 오를레앙 공작 루이 (샤를 6세의 동생)와 용담공 사이의 평화 공작을 펼쳤다. 또한, 1404년에 용담공이 죽자 그가 양육하던 아르튀르 드 리쉬몽을 거두어 증손자인 루이 왕태자의 측근으로 발탁했다.[12]
용담공의 아들이자 조카 장 1세(무포공)가 오를레앙 공작과의 대립을 지속했을 때도 1405년에 양자를 화해시켰지만, 1407년에 오를레앙 공작이 무포공의 자객에게 암살되자 분개하여 무포공을 규탄, 이듬해 1408년에 돌연 그를 정권에 불러들였지만, 1410년에 오를레앙 공작 샤를, 브르타뉴공작장 5세, 알랑송 백작장 1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등 대귀족과 인척 관계에 있는 귀족들과 지앙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아르마냐크파라고 이름을 바꾸고 잉글랜드에 원군 파견을 타진하면서 무포공 등 부르고뉴파와 프랑스 각지에서 싸웠고, 1413년에 무포공이 파리의 민중 폭동으로 퇴거한 후에 파리를 탈취했지만, 1415년에 잉글랜드군이 난입하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냐크파가 참패, 루이 왕태자가 사망하고 동생 장이 왕태자로 무포공에 의해 옹립되자, 아르마냐크 백작을 파리로 불러들여, 1416년에 75세로 사망했다.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소유지의 대부분은 왕령에 편입되었고, 1417년에 장 왕태자 사후에 선택된 샤를 왕태자 (후의 샤를 7세)는 부르주를 근거지로 잉글랜드와 대치하게 된다.[13]
2. 3. 말년
말년의 장은 프랑스에서 더욱 화해적인 인물이 되었다. 1404년 용담공 필리프가 사망한 후, 그는 존 1세의 마지막 생존 아들이었고, 조카인 루이 1세 드 오를레앙과 장 용담공의 파벌 사이에서 평화 중재자 역할을 하려 노력했다. 부르고뉴 공작의 명령으로 오를레앙이 살해된 후, 그는 일반적으로 오를레앙파 또는 아르마냐크 편에 섰지만, 항상 온건한 인물로서 양측을 화해시키고 내부 평화를 증진하려 했다.1380년에 맏형이 죽고 조카 샤를 6세가 즉위하자, 둘째 형인 앙주 공작 루이 1세, 동생인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2세(용담공), 의붓형인 부르봉 공작 루이 2세와 함께 어린 샤를 6세를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했다.[13] 1388년 샤를 6세의 친정 선언으로 다른 형제들과 함께 정권에서 멀어졌고, 1389년에는 랑그도크 섭정에서 해임되었다. 1392년 샤를 6세가 발광하여 통치 불능이 되자 용담공과 함께 정권에 복귀, 1401년에 랑그도크 섭정 지위를 되찾았다. 그 후 영지 보전과 백년 전쟁 중 프랑스 국내의 대립을 수습하기 위해 진력, 조카 오를레앙 공작루이와 용담공 사이의 평화 공작을 펼쳤다. 1404년 용담공이 죽자 그가 양육하던 아르튀르 드 리쉬몽을 거두어 증손자 루이 왕태자의 측근으로 발탁했다.[12]
용담공의 아들이자 조카 장 1세(무포공)가 오를레앙 공작과의 대립을 지속했을 때도 1405년에 양자를 화해시켰지만, 1407년에 오를레앙 공작이 무포공의 자객에게 암살되자 분개하여 무포공을 규탄했다. 1408년에 돌연 그를 정권에 불러들였지만, 1410년에 오를레앙 공작 샤를, 브르타뉴공작장 5세, 알랑송 백작장 1세,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 등 대귀족과 인척 관계에 있는 귀족들과 지앙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아르마냐크파라고 이름을 바꾸고 잉글랜드에 원군 파견을 타진하면서 무포공 등 부르고뉴파와 프랑스 각지에서 싸웠다.[13]
1415년 아쟁쿠르 전투에 샤를 6세와 그의 아들들이 불참한 것은 주로 장의 권고 때문이었다. 59년 전 푸아티에 전투 이후 포로가 된 그의 아버지의 운명을 기억하며, 그는 국왕과 그의 상속자들이 사로잡힐 경우 프랑스의 운명을 두려워했고, 따라서 그들의 참전을 성공적으로 막았다. 장은 그가 두려워했던 대로 재앙으로 판명된 전투 몇 달 후인 1416년 6월 15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1413년에 무포공이 파리의 민중 폭동으로 퇴거한 후에 파리를 탈취했지만, 1415년 잉글랜드군이 난입하여 아쟁쿠르 전투에서 아르마냐크파가 참패했다. 루이 왕태자가 사망하고 동생 장이 왕태자로 무포공에 의해 옹립되자, 아르마냐크 백작을 파리로 불러들여, 1416년에 75세로 사망했다. 아들이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소유지의 대부분은 왕령에 편입되었고, 1417년 장 왕태자 사후에 선택된 샤를 왕태자는 부르주를 근거지로 잉글랜드와 대치하게 된다.[13]
정치 이상으로, 장 1세는 미술품 수집가나 예술가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랑부르 형제에게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를 제작하게 한 외에도, 다양한 귀금속, 공예품, 채색 사본을 소유하고 있었다. 건축에도 열중하여 17에 달하는 성관을 짓고, 뤼시냥 성과 부르주의 교회 등 개축 사업과 컬렉션에 막대한 재산을 쏟아부어, 베리 공작령은 프랑스에서 가장 세금이 무거운 지역이 되었고, 장 1세 사후 상당한 액수의 부채가 남겨졌다고 한다.[14]
3. 예술 후원
장 드 베리는 ''트레 리슈르''와 같은 유명한 기도서를 의뢰한 주목할 만한 후원자였다.[7] 장 퓌셀의 예술 작품을 감상한 그는 림부르크 형제, 자크마르 드 에스댕 등 여러 유명 예술가들을 고용했다.[8] 그는 예술품 수집에 많은 돈을 지출하여 1416년 사망 당시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장 드 베리 공작은 1338년 유럽에 유입된 최초의 중국 도자기로 기록된 중국 징더전에서 제작된 폰트힐 화병의 소유자였다.[6]
그를 위해 제작된 작품으로는 ''트레 리슈르'', ''장 드 프랑스, 베리 공작의 벨르 르'', (일부) ''토리노-밀라노 기도서''가 있다. 금세공 작품으로는 성스러운 가시 유물함과 왕실 황금 잔이 있으며, 둘 다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은 장 드 베리가 자크마르 드 에스댕에서 림부르크 형제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을 끊임없이 탐구하여 그의 시대 예술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9]
정치 이상으로, 장 1세는 미술품 수집가나 예술가의 후원자로 알려져 있다. 랑부르 형제에게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시도서'''』를 제작하게 한 외에도, 다양한 귀금속, 공예품, 채색 사본을 소유하고 있었다.[14]
4. 가족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 잔과 1360년에 첫 번째 결혼을 하여 3남 2녀를 두었다.[3]
- 샤를(1362년 - 1382년) - 몽팡시에 백작
- 장(1363년 - 1402년) - 몽팡시에 백작
- 루이(1364년 - 1383년)
- 본(1365년 - 1435년) -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7세와 결혼, 이후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재혼. 사보이아 공 아메데오 8세의 어머니.
- 마리(1367년 - 1434년) - 오베르뉴 여공. 샤티용의 루이 3세, 우 백작 필리프 다르투아, 부르봉 공작 장 1세와 결혼.
1389년에 오베르뉴 여백작 조안 2세 (c.1378-1424)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5] 오베르뉴 여백작이자 잔 2세였지만,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태어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 여성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오워드를 두었다.
- 오워드 (1370년-1382년 이전), 장 1세가 포로로 잡혀 있던 시기에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
4. 1. 첫 번째 결혼
베리 공작은 두 번 결혼했으며 첫 번째 아내인 아르마냐크의 조안나 (1346-1387)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얻었다.[3]- 베리의 본느 (1367-1435)는 사보이 백작 아메데오 7세[4]와 결혼했고, 그 다음에는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결혼했다.
- 베리의 샤를, 몽팡시에 백작 (1371-1383)
- 베리의 잔 (1373-1375)
- 베리의 베아트리스 (1374년 4월)
- 베리의 마리 (1375-1434)는 샤티용의 루이 3세와 결혼했고, 그 다음에는 아르투아의 필리프, 외 백작과, 마지막으로 부르봉 공작 장 1세와 결혼했다.
- 몽팡시에 백작 장 (1375/1376-1397)
- 베리의 루이 (1383, 요절)
아르마냐크 백작 장 1세의 딸 잔과 사이에서는 3남 2녀를 두었다.[3]
- 샤를(1362년 - 1382년)
- 장(1363년 - 1402년)
- 루이(1364년 - 1383년)
- 본(1365년 - 1435년)
- 마리(1367년 - 1434년)
4. 2. 두 번째 결혼
베리 공작은 두 번 결혼했다. 1360년에 첫 번째 부인인 아르마냐크의 조안나 (1346-1387)와 결혼하여 3남 2녀를 두었다.[3]- 베리의 본느 (1367-1435), 사보이 백작 아메데오 7세[4]와 결혼했고, 이후 아르마냐크 백작 베르나르 7세와 결혼했다.
- 베리의 샤를, 몽팡시에 백작 (1371-1383)
- 베리의 마리 (1375-1434), 오베르뉴 통치자로서 샤티용의 루이 3세와 결혼했고, 이후 아르투아의 필리프, 외 백작, 부르봉 공작 장 1세와 차례로 결혼했다.
- 몽팡시에 백작 장 (1375/1376-1397), 프랑스의 카트린 (1378-1388),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딸과 결혼했고, 이후 안 드 부르봉과 결혼했다.
- 베리의 루이 (1383, 요절)
1389년에는 오베르뉴 여백작 조안 2세 (c.1378-1424)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5]
4. 3. 사생아
장 1세는 스코틀랜드 여성과의 사이에서 사생아 오워드를 두었다. 오워드는 1370년에서 1382년 사이에 장 1세가 포로로 잡혀 있던 잉글랜드에서 태어났다.[5]5. 유산
참조
[1]
논문
Jean de Berry, la science et les Très Riches Heures, la devise Le temps venra et le chiffre EV
https://www.persee.f[...]
Bulletin de la Société nationale des Antiquaires de France
[2]
서적
Jean de France, duc de Berri, sa vie, son action politique (1340-1416)
Éditions A. et J. Picard et Cie.
[3]
서적
Ars subtilior and the Patronage of French Princes
Cambridge University Press
[4]
서적
Women, Manuscripts and Identity in Northern Europe, 1350–1550
Ashgate
[5]
서적
John, Duke of Berry
Routledge
[6]
웹사이트
Victoria and Albert Museum
http://www.vam.ac.uk[...]
[7]
서적
Dictionary of the middle ages
Scribner
[8]
서적
The Golden Age: Manuscript Painting at the Time of Jean, Duc de Berry
Book Club Associates
[9]
웹사이트
Dossier thématique : La France en 1400 : Jean de Berry
http://www.museedulo[...]
museedulouvre.fr
2008-02-20
[10]
서적
Le Jugement Du Roy de Behaigne and Remede de Fortune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Georgia Press
[11]
문서
樋口、P70 - P77。
[12]
문서
エチュヴェリー、P51、P58、P64 - P65、城戸、P91 - P93、樋口、P17 - P19、P26 - P33、P76、佐藤、P95 - P102、P108。
[13]
문서
エチュヴェリー、P65 - P75、P78 - P88、P97 - P98、城戸、P95 - P101、P123、樋口、P41 - P45、P51 - P56、佐藤、P113 - P121。
[14]
문서
樋口、P61 - P70、佐藤、P134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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