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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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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상은 오나라의 인물로, 손량의 국구이자 전황후의 아버지이다. 딸이 손노반의 총애를 받아 권력을 얻었으며, 손량 즉위 후 성문교위, 태상, 위장군 등을 역임했다. 제갈탄의 난 이후 전씨 일족이 몰락하는 가운데, 손침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여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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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상
기본 정보
전상
전상
이름전상(全尙)
자는 자업(子業)
생몰년? ~ 209년
가족 관계손권의 장인
관직도향후(都鄕侯), 비장군(裨將軍)
소속손권
생애
초기 생애전상은 오군 부춘현 사람이다.
손권과의 관계전상은 용모와 자태가 훌륭하여 손권의 눈에 띄어 손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손권은 전상을 매우 아끼고 사랑하여 집안에서 머물게 하고 함께 사냥하였다.
관직 생활전상은 도향후에 봉해지고 비장군이 되었다.
전상은 손권이 요술로 백성을 현혹한 우길을 죽이려 할 때 간언하여 살려주도록 하였다.
손권이 후회하며 우길을 다시 죽이려 하자, 전상은 병을 핑계로 이를 말리지 못했다.
사망전상은 건안 14년(209년)에 사망했다.
가족
아버지전유(全柔)
아내손권의 딸
아들전종
손자전서, 전단
증손자전황

2. 가족 관계

전종의 족자이며, 전기(全紀)[10]손량의 황후인 전부인의 부친으로, 황제 손량의 장인이다. 아내는 손침의 누이이다. 《삼국지》 오서(吳書)에 딸의 열전이 있다.

3. 생애

손권의 딸 손노반(전공주)의 총애를 받던 전상의 딸은, 황태자 손화 모자와 사이가 나빴던 손노반에 의해 손량의 비로 추천되었다. 손량이 황제가 되자 전상의 딸은 황후가 되었고, 전상은 성문교위에 임명된 후 도정후에 봉해졌다. 이후 등윤의 후임으로 태상, 위장군을 역임하고 영평후에 봉해졌으며, 녹상서사가 되었다. 황제의 외척으로서 전씨 일족 다섯 명이 후에 봉해지고 각자 병마 지휘권을 얻는 등 오나라에서 전례 없는 권세를 누렸다.

태평 2년(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씨 일족 대부분이 원군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 분쟁이 일어나 전단, 전역 등 주요 인물들이 위에 항복하면서 전씨 일족은 몰락했다.

태평 3년(258년), 손량손침을 제거하려 했고, 전상은 전공주, 장군 유승 등과 함께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3] 그러나 계획이 누설되어 손침이 군사를 이끌고 궁성을 점령, 유승을 죽이고 전상을 사로잡았다. 전상은 아내에게 기밀을 누설하여 계획이 실패한 것에 책임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

손량이 폐위된 후, 전황후는 후관에 유배되었고, 전공주는 예장에, 전상의 일족은 영릉에 유배되었으나 훗날 전상 등은 살해당했다.[11] 전부인은 경제 대에 손량이 자살한 후에도 후관에서 살았고, 오나라 멸망 후 중앙으로 돌아와 영녕 연간에 죽었다.[11]

3. 1. 초기 활동 및 외척 등용

손권의 딸 손노반(전공주)이 전상의 딸을 총애하였다. 손화 모자와 사이가 나빴던 전공주는 손권의 총애를 받던 손량 모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전상의 딸을 손량의 배필로 삼도록 권하였다.[11]

손량이 제위에 오른 후, 전상의 딸은 황후가 되었다. 전상은 성문교위(城門校尉)에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등윤의 후임으로 태상(太常) · 위장군(衛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영평후(永平侯)에 봉해지고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황제의 외척인 전씨 일족에서 다섯 명이 후(侯)에 봉해졌으며, 각자 병마의 지휘권을 얻었다. 또한 다른 자도 시랑(侍郞)과 기두위(騎都尉)에 임명되어 황제의 측근 및 경호를 맡게 되었다. 이는 오나라에서도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고 한다.[11]

3. 2. 제갈탄의 난과 전씨 일족의 몰락

태평 2년(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전씨 일족 대부분이 제갈탄에게 원군으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오나라에서 영지 분쟁이 일어나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전단, 전역, 전의(全禕), 전의(全儀) 등 전씨의 주요 인물 대부분이 위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전씨 일족은 쇠퇴하였다.

태평 3년(258년), 성장한 손량손침의 전횡을 증오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때 전상은 전공주와 장군 유승(劉丞) 등과 함께 암살 모의에 가담하였다.[3]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손침에게 알려졌고, 손침은 군세를 이끌고 궁성을 점령하여 유승을 죽이고 6월 26일 전상의 집을 야습하여 전상을 사로잡았다.[3] 이때 전상의 아들 전기는 황문시랑으로써 손량의 명령을 전상에게 전하였으나, 전상은 기밀을 아내에게 누설하여 계획이 실패하였다. 이에 손량과 전부인은 전상을 꾸짖었고, 전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

손량이 폐위되고 회계왕에서 후관후로 강등되었을 때, 전부인도 함께 후관에 유배되었다. 전공주는 예장에, 전상의 일족은 영릉에 유배되었으나,[4] 훗날 전상 등은 살해당하였다.[11]

3. 3. 손침 제거 시도와 죽음

258년, 손량손침의 전횡을 미워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때 전상은 전공주와 장군 유승(劉丞) 등과 함께 암살 모의에 가담하였다.[3]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손침에게 알려졌고, 손침은 군세를 이끌고 궁성을 점령하여 유승을 죽이고 6월 26일 전상의 집을 야습하여 전상을 사로잡았다.[3] 전상의 아들 전기는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서 손량의 명령을 전상에게 전하였으나, 전상은 기밀을 아내에게 누설하여 계획이 실패하였다. 손량과 전황후는 전상을 꾸짖었고, 전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7]

밀고자는 딸인 전황후였다고도 하고,[4] 손침의 사촌 누나인 전상의 아내였다고도 한다.[5][6]

3. 4. 사후

전공주의 총애를 받은 딸은 황태자 손화(孫和) 모자와 사이가 나빴던 전공주에 의해, 손권의 총애를 받던 손량(孫亮) 모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손량의 배필이 되었다.

손량이 제위에 오른 후, 딸은 황후가 되어 전상은 성문교위(城門校尉)에 임명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 이후 등윤(滕胤)의 후임으로 태상(太常) · 위장군(衛將軍)에 임명되었으며, 영평후(永平侯)에 봉해지고 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었다. 황제의 외척인 전씨 일족에서 다섯 명이 후(侯)에 봉해졌으며, 각자 병마의 지휘권을 얻었다. 또한 다른 자도 시랑(侍郞)과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어 황제의 측근 및 경호를 맡게 되었다.

태평 2년(257년), (魏)의 제갈탄(諸葛誕)이 반란을 일으켰다. 전씨의 대부분이 제갈탄에게 원군으로 파견되었으나, 자리를 비운 사이 나라에 영지 분쟁이 일어나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전단 · 전역 · 전의(全禕) · 전의(全儀) 등 전씨의 주요 인물 대부분이 위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전씨 일족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태평 3년(258년), 장성한 손량은 손침의 전횡을 증오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때 전상은 전공주와 장군(將軍) 유승(劉丞) 등과 함께 암살 모의에 가담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손침에게 알려졌고, 손침은 군세를 이끌고 궁성을 점령하여 유승을 죽이고 6월 26일 전상의 집을 야습하여 전상을 사로잡았다. 이때 전상의 아들 전기는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써 손량의 명령을 전상에게 전하였으나, 전상은 기밀을 아내에게 누설하여 계획이 실패하였다. 이에 손량과 전부인은 전상을 꾸짖었고, 전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손량이 폐위되고 회계왕(會稽王)에서 후관후(候官侯)로 강등되었을 때, 전부인도 함께 후관에 유배되었다. 전공주는 예장(豫章)에, 전상의 일족은 영릉(零陵)에 유배되었으나, 훗날 전상 등은 살해당하였다.

전부인은 경제(景帝) 대에 손량이 자살한 후에도 계속 후관에서 살았다. 오가 멸망한 후, 중앙으로 돌아와 영녕 연간에 죽었다.[11]

참조

[1] 서적 건강실록
[2] 서적 삼국지
[3] 서적 삼국지
[4] 서적 삼국지
[5] 서적 삼국지
[6] 문서 손성, 강표전 관련 기록
[7] 서적 삼국지
[8] 문서 강표전, 계획 누설 경위
[9] 서적 건강실록
[10] 서적 강표전
[11] 서적 오록
[12] 서적 허장사세보 진고 권20 주석
[13]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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