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성공 (1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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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 성공(13대)은 정나라의 13대 임금으로, 정 상공의 아들이며, 형 도공의 뒤를 이어 기원전 585년에 즉위했다. 즉위 후 진나라, 초나라 등 주변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 속에서 정치적 입지를 다졌다. 초나라와 동맹을 맺었다가 진나라에 억류되기도 했으며, 기원전 575년 언릉 전투에서 초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맞섰다. 기원전 571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운이 뒤를 이어 정 희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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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성공 (13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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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성공 희윤 |
작위 | 공 (주나라 작위 체계에 따르면 백) |
왕조 | 정 |
재위 기간 |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71년 |
도읍 | 신정 |
휘 | 희윤 |
시호 | 성공 |
생년 | 불명 |
몰년 | 기원전 571년 |
부친 | 양공 |
2. 생애
정 양공 2년(기원전 585년), 형 도공이 훙거하자 그 뒤를 이어 정나라 임금으로 세워졌다.[1]
성공 3년(기원전 582년), 초나라와의 화평에 참여했고, 진나라에 입조했다가 이것 때문에 사로잡혔다. 진나라가 중군 원수 난서를 보내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에서는 성공의 서형 수(繻)를 임금으로 세웠다. 진나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성공을 풀어주었고, 정나라는 성공이 돌아오자 수를 죽이고 성공을 맞이했으며 진나라 군은 철수했다.[1]
성공 10년(기원전 575년), 다시 초나라와 맹약을 맺었다. 진나라는 이에 정나라를 쳤고, 정나라와 이를 구원하러 온 초나라 군사를 언릉 전투에서 격파하여 필 전투 이래로 빼앗긴 패권을 되찾았다.[1]
성공 13년(기원전 572년), 진 도공은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정나라가 수비하자 퇴각했다. 이듬해(기원전 571년), 성공이 죽어 그 뒤를 아들 운이 이었다(정 희공).[1]
정 성공(13대)은 정의 상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도공 2년(기원전 585년) 6월, 형인 도공이 훙거했기 때문에, 곤완이 즉위하여 정군(이하 성공으로 표기)이 되었다. 가을, 정나라와 진나라가 동맹을 맺자, 초의 자중 (공자영제)이 정나라를 공격해왔다. 이에 진나라의 난서가 구원하러 와서 정나라를 구했다.
성공 원년(기원전 586년) 가을, 다시 초나라의 자중이 공격해왔지만, 동맹으로 인해 제후군이 구원에 달려왔고, 정나라의 대부인 공중과 후우는 초나라의 운공 종의를 사로잡아 진나라에 헌상했다. 8월, 진・제・송・위・정・노・조・거・주・기의 10개국은 마릉(위나라의 땅)에서 동맹을 맺었다.
성공 3년(기원전 582년) 봄, 초의 공왕이 정나라와 동맹을 맺기 위해 공자성을 보냈으므로, 성공은 몰래 초나라의 공자성과 등(채나라의 땅)에서 회합했다. 가을, 한편 성공은 진나라에 참조했지만, 초나라와 동맹을 맺은 것이 발각되어 동저(진나라의 땅)에서 붙잡히고 만다. 진의 경공은 난서에게 명하여 정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성공 4년(기원전 581년) 봄, 정나라는 군주 부재 상태에서 진나라의 명령을 받은 위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3월, 공자반은 새로 서형인 슈(시)를 세워 정군으로 삼았다. 4월, 정나라 사람들은 슈를 죽이고 곤완(곤간)을 세웠기 때문에, 공자반은 허나라로 망명했다. 5월, 진나라는 정나라가 신군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정나라를 공격했고, 정나라의 자한(공자희)의 뇌물 평화와 자연의 맹약을 받아 겨우 성공을 귀국시켰다. 6월, 성공은 자신의 부재 중에 신군을 세운 자들을 토벌하고, 숙신(공손신)과 그의 동생인 숙금을 죽였다.
성공 7년(기원전 578년) 5월, 성공은 진・제・송・위・노・조・주・등과 함께 진나라를 공격했다. 6월, 공자반이 자(시:정나라의 땅)에서 도성 대궁(조상의 묘)으로 쳐들어가려다 실패하고, 자인과 자우를 죽이고 도성 시장에 진을 쳤다. 자사(공자비)는 국인을 이끌고 대궁에서 맹세하고, 마침내 공자반의 군대를 불태워 공자반・자망(공자반의 동생)・손숙(공자반의 아들)・손지(자망의 아들) 등을 죽였다.
성공 8년(기원전 577년) 8월, 자한(공자희)이 허나라를 공격하여 패배했기 때문에, 성공은 허나라를 공격하여 외성까지 공격했다. 허나라 사람들은 숙신이 원했던 영토 경계를 정해주는 조건으로 평화를 제의했다.
성공 9년(기원전 576년) 3월, 성공은 진・제・송・위・노・조・주와 회합하여, 척(위나라의 땅)에서 동맹을 맺었다. 6월, 초의 공왕이 정나라를 침공했다. 이에 정나라의 자한은 초 본국을 습격하여, 신석을 빼앗았다.
성공 10년(기원전 575년), 정나라는 진나라와의 맹약을 깨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이에 진의 려공이 분노하여, 출병하여 정나라를 공격했지만, 초의 공왕의 도움으로 정나라는 구원받았다. 그 후, 진나라와 초나라가 언릉에서 싸워, 초나라가 패배했다.(언릉 전투)
성공 11년(기원전 574년) 1월, 자사가 진나라의 허와 활을 침공했기 때문에, 위나라의 북궁괄이 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정나라를 공격해왔다. 5월, 윤의 무공・단의 상공・진의 려공・제의 령공・송의 평공・위의 헌공・조의 성공・노의 성공・주의 사람들은 회합하여 정나라를 공격했다. 겨울, 제후군이 다시 정나라를 공격했지만, 초의 공자신의 도움으로 정나라는 구원받았고, 제후군은 철수했다.
성공 12년(기원전 573년) 6월, 성공은 송나라를 침공하여, 조문(송도의 문)에까지 이르렀고, 초의 공왕과 함께 조갑(초항)을 점령했다.
성공 13년(기원전 572년) 5월, 정군은 진의 도공에게 위수(이수) 가에서 패배하여, 성에 웅거했다. 그 때문에 진나라는 철수했다.
성공 14년(기원전 571년) 6월, 성공이 훙거하고, 아들인 곤완(곤간)이 즉위하여 정군(리공)이 되었다.
2. 1. 즉위와 초기 통치 (기원전 585년 ~ 기원전 582년)
정 양공 2년(기원전 585년), 형 도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정나라 임금으로 세워졌다.[1] 즉위 후, 정나라는 진나라와 동맹을 맺었으나, 초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이에 진나라가 구원하여 정나라를 구했다.[1]기원전 582년, 초나라와의 화평에 참여했고, 진나라에 입조했다가 초나라와 동맹을 맺은 것이 발각되어 사로잡혔다.[1] 진나라가 난서를 보내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에서는 성공의 서형 수(繻)를 임금으로 세웠다.[1] 진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성공을 풀어주었고, 정나라는 성공이 돌아오자 수를 죽이고 성공을 맞이했으며 진나라 군은 철수했다.[1]
2. 2. 진나라에 억류와 귀환 (기원전 582년 ~ 기원전 581년)
정 성공은 기원전 585년 형 도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정나라 임금이 되었다.[1] 기원전 582년, 초나라와의 화평에 참여했고, 진나라에 입조했다가 이것 때문에 사로잡혔다.[1] 진나라가 중군 원수 난서를 보내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에서는 성공의 서형 수(繻)를 임금으로 세웠다.[1]기원전 581년 봄, 정나라는 군주 부재 상태에서 진나라의 명령을 받은 위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3월, 공자반은 새로 서형인 슈(시)를 세워 정군으로 삼았다. 4월, 정나라 사람들은 슈를 죽이고 곤완(곤간)을 세웠기 때문에, 공자반은 허나라로 망명했다. 5월, 진나라는 정나라가 신군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정나라를 공격했고, 정나라의 자한(공자희)의 뇌물 평화와 자연의 맹약을 받아 겨우 성공을 귀국시켰다.[1] 진나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성공을 풀어주었고, 정나라는 성공이 돌아오자 수를 죽이고 성공을 맞이했으며 진나라 군은 철수했다.[1] 6월, 성공은 자신의 부재 중에 신군을 세운 자들을 토벌하고, 숙신(공손신)과 그의 동생인 숙금을 죽였다.
2. 3.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의 외교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75년)
정 성공 3년(기원전 582년), 초나라와의 화평에 참여했고, 진나라에 입조했다가 이것 때문에 사로잡혔다.[1] 진나라가 중군 원수 난서를 보내 정나라를 공격하자, 정나라에서는 성공의 서형 수(繻)를 임금으로 세웠다.[1] 진나라에서는 이 소식을 듣자 성공을 풀어주었고, 정나라는 성공이 돌아오자 수를 죽이고 성공을 맞이했으며 진나라 군은 철수했다.[1]기원전 581년 봄, 정나라는 군주 부재 상태에서 진나라의 명령을 받은 위나라의 침공을 받았다. 3월, 공자반은 새로 서형인 슈(시)를 세워 정군으로 삼았다. 4월, 정나라 사람들은 슈를 죽이고 곤완(곤간)을 세웠기 때문에, 공자반은 허나라로 망명했다. 5월, 진나라는 정나라가 신군을 세웠다는 소식을 듣고 정나라를 공격했고, 정나라의 자한(공자희)의 뇌물 평화와 자연의 맹약을 받아 겨우 성공을 귀국시켰다.
성공 10년(기원전 575년), 다시 초나라와 맹약을 맺었다.[1] 진나라는 이에 정나라를 쳤고, 정나라와 이를 구원하러 온 초나라 군사를 언릉 전투에서 격파하여 필 전투 이래로 빼앗긴 패권을 되찾았다.[1]
2. 4. 언릉 전투와 말년 (기원전 575년 ~ 기원전 571년)
정 성공은 형 도공이 기원전 585년에 죽자 정나라 임금이 되었다.[1] 기원전 582년, 초나라와의 화평에 참여하고 진나라에 입조했다가 사로잡혔다. 진나라는 난서를 보내 정나라를 공격했고, 정나라는 성공의 서형 수를 임금으로 세웠다. 진나라는 성공을 풀어주었고, 정나라는 수를 죽이고 성공을 맞이했으며 진나라 군은 철수했다.[1]기원전 575년, 정나라는 초나라와 맹약을 맺었다. 진나라는 이에 정나라를 쳤고, 언릉 전투에서 정나라와 초나라 군사를 격파하여 필 전투 이래로 빼앗긴 패권을 되찾았다.[1] 언릉 전투는 춘추시대의 주요 전투 중 하나로,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 벌어졌다.
기원전 572년, 진 도공은 정나라를 공격했으나 정나라가 수비하자 퇴각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571년, 성공이 죽고 아들 운이 뒤를 이어 정 희공이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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