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보병연대 (미국)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23보병연대(미국)는 1861년 창설된 미국 육군 정규 연대로, 남북 전쟁,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여러 주요 전쟁과 작전에 참전했다. 특히 한국 전쟁에서는 지평리 전투에 참여하여 중공군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기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는 대반군 작전을 수행했다. 현재 제2보병사단, 제4보병사단 예하 스트라이커 여단에 배속되어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유사시 한반도 방위에 투입될 예정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12년 설립 - 영국 육군사관학교
영국 육군사관학교는 1947년 설립된 영국 육군의 초급 장교 양성 기관으로, 정규, 예비역, 전문 자격 장교 과정을 운영하며 윈스턴 처칠, 해리 왕자, 윌리엄 왕자 등 유명 졸업생을 배출했다. - 1812년 설립 - 제6보병연대 (미국)
제6보병연대는 1812년 전쟁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쟁에 참전하며 임무를 수행해 온 미국 육군의 역사적인 부대이다. -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연대 - 제155보병연대 (미국)
제155보병연대는 1799년 창설되어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제퍼슨 데이비스가 조직한 "미시시피 소총병"으로 알려진 미국 육군의 주 방위군 연대이며, 여러 전쟁에 참전했고, 현재 제1대대는 제155기갑여단전투단에 배속되어 있다. -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연대 - 제11보병연대 (미국)
제11보병연대(미국)는 미국 육군의 보병 연대로, 유사 전쟁, 1812년 전쟁, 멕시코-미국 전쟁, 남북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재창설과 해산을 거듭했으며, 현재는 교육훈련 부대로 운영되고 있다. -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연대 - 제187보병연대 (미국)
제187보병연대는 "락카산"이라는 별칭으로 알려진 미국 육군의 보병 연대로, 여러 주요 군사 작전에 참전했으며 한국 전쟁에서 4명의 명예 훈장 수훈자를 배출했고 현재 제101공수사단에 배속되어 활약하고 있다. - 한국 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연대 - 제7기병연대 (미국)
제7기병연대는 1866년 창설된 미국 육군의 기병 연대로, 인디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 한국 전쟁 등 여러 전쟁에 참전했으며, 현재는 다양한 사단에 배속되어 정찰 임무를 수행한다.
제23보병연대 (미국)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별칭 | 토마호크 |
표어 | 우리가 복무한다 |
창설일 | 1861년 |
국가 | 미국 |
군종 | 육군 |
종류 | 보병 |
주둔지 | 포트 카슨, 콜로라도 포트 루이스, 워싱턴 |
기념일 | 해당 없음 |
전투 및 훈장 | |
참전 | 미국 남북 전쟁 인디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
훈장 | 미국 대통령 부대 표창 (7회) 전쟁 십자장 (3회)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3회) 공로 부대 표창 용맹 부대 표창 벨기에 육군 명령서에 언급됨 프랑스 포라제르 벨기에 포라제르 |
전투 훈장 | 해당 없음 |
지휘관 | |
현재 연대 대령 | LTC(R) Frederick Drew |
제1대대 | LTC John A. Meyer |
제2대대 | LTC Jonathan D. Bate |
제4대대 | LTC Ryan A. McLaughlin |
주요 지휘관 | 제퍼슨 C. 데이비스 그랜빌 O. 할러 헨리 M. 블랙 새뮤얼 오벤샤인 조지 휘트필드 데이비스 폴 L. 프리먼 주니어 피트 도킨스 버나드 W. 로저스 폴 B. 멀론 가이 H. 프레스턴 |
식별 | |
![]() |
2. 역사
1861년 5월 3일, 제23보병연대는 정규군에서 제14보병연대 제1대대로 창설되었다. 1866년 9월 21일 제23보병연대로 재지정되었다.[1]
제23보병연대는 창설 이후 미국 남북 전쟁, 인디언 전쟁, 미서전쟁, 미필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한국 전쟁, 베트남 전쟁,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 미국의 주요 전쟁에 참전했다.[1]
1957년 6월 20일, 전투병과 연대 시스템(CARS)에 따라 모 연대로 재편성되었다. 1983년에는 모든 보병이 전투병과 연대 시스템에서 철수하여 미국 육군 연대 시스템에 따라 재편성되었다.[1]
현재 제23보병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대대는 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에 소속되어 있다.
2. 1. 창설과 초기 활동 (1861년 ~ 1917년)
1861년 5월 3일, 제23보병연대는 정규군에서 제14보병연대 제1대대로 창설되었다. 1861년 7월 8일, 코네티컷주 포트 트럼불에서 편성되었으며, 1866년 9월 21일 제23보병연대로 재지정되었다.[1]제23보병연대는 남북전쟁(1861-1865)과 인디언 전쟁(1866-1890)에 참전하였다. 남북전쟁 기간 동안 반도 전역, 마나사스, 앤티텀, 프레데릭스버그, 챈슬러즈빌, 게티즈버그, 와일더니스, 스포트실베이니아, 콜드 하버, 피터스버그 등 주요 전투에 참여했다.[1] 인디언 전쟁에서는 리틀 빅혼, 애리조나(1866), 아이다호(1868)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다.[1]
이후 미서전쟁(1898)과 미필전쟁(1899-1902)에도 참전하여 마닐라, 말롤로스, 민다나오, 홀로 등지에서 전투를 수행했다.[1]
2. 2. 제1차 세계 대전 (1917년 ~ 1918년)
1917년 9월 22일, 제2보병사단에 배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1914년-1918년)에 참전하여 엔, 마른-엔, 생 미히엘, 뫼즈-아르곤, 일 드 프랑스 1918, 로렌 1918 전투에 참전했다.[1]2. 3. 제2차 세계 대전 (1939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노르망디, 북부 프랑스, 라인란트, 아르덴-알자스, 중부 유럽 등 주요 전선에서 전투를 치렀다.[1]2. 4. 한국 전쟁 (1950년 ~ 1953년)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제23보병연대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부산 교두보 전투(1950년 8월~9월), 지평리 전투(1951년 2월), 하트브레이크 능선 전투(1951년 9월~10월) 등 주요 전투에서 활약했다.부산 교두보 전투에서 제23보병연대는 대구 근처 '볼링 앨리'라 불리는 좁은 계곡에 배치되어 북한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한국군을 지원했다.
지평리 전투는 매튜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이 중공군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하면서 시작되었다. 1951년 2월 13일부터 14일까지, 제23연대 전투단은 쌍굴 전투 지역에서 정찰 매복 작전을 수행한 후, 지평리에서 결정적인 방어전을 펼쳤다.
폴 L. 프리먼 대령은 지평리를 둘러싼 8개의 언덕 대신, 지름 약 1.6km의 좁은 방어선 주변 저지대에 보병들을 배치했다. 제37야전포병대대, 제82대공포병자동화기대대 B포대, 제503야전포병대대 B포대가 연대에 배속되어 화력을 강화했다.
제23보병연대 2대대 G중대는 U자형 언덕의 남쪽 면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했다. G중대는 제75mm 무반동총, 중기관총, 81mm 박격포 등의 지원 화기를 보유했으며, 제37야전포병대대와 연대 중박격포 중대의 전방 관측자도 배치되었다.

2월 13일, 주간 정찰대는 지평리 북쪽, 동쪽, 서쪽에서 적의 활동이 증가했음을 보고했다. 2월 14일,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치열한 전투 끝에 미군은 탄약 부족과 1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제5기병연대의 지원과 공중 지원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이 패배하면서, 미군을 바다로 몰아내려던 중공군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유엔군은 킬러 작전과 리퍼 작전을 통해 중공군을 북쪽으로 밀어냈고, 1951년 7월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2]
하트브레이크 능선 전투에서 북한군은 피의 능선 전투에서 철수한 후, 1400m 떨어진 11km 길이의 언덕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미 제2사단은 북한군의 전력을 과소평가하고, 제23보병연대와 프랑스 대대에게 하트브레이크 능선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9월 13일,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미군은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미군은 대규모 포격, 공습, 전차를 동원했지만, 북한군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9월 27일, 제2사단장 로버트 N. 영 소장은 하트브레이크 능선에서의 공격을 중단시켰다.
제2사단은 하트브레이크 능선에 인접한 계곡과 언덕을 공격하여 북한군의 증원을 차단하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제72전차대대는 문등리 계곡으로 진격하여 북한군의 보급 기지를 파괴하는 임무를 맡았다. 10월 10일, 전차 대대의 기습 공격은 중공군 제204사단을 강타했고, 5일 동안 셔먼 전차는 문등리 계곡을 누비며 북한군의 보급 기지와 벙커를 파괴했다.
10월 13일, 프랑스군이 능선의 마지막 거점을 점령하면서 하트브레이크 능선 전투는 끝났다. 이 전투에서 유엔군과 한국군은 3,700명 이상, 북한군 및 중공군은 25,000명 이상이 사망하거나 부상당했다.
이후, 1953년 7월 정전 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2. 5. 베트남 전쟁 (1960년 ~ 1973년)
1965년,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던 제23보병연대 제1대대가 베트남으로 이동하여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1] 연대는 반격전, 테트 반격전, 성역 반격전 등 주요 작전에 참여하여 활약했다.[1]참전 기간 | 주요 작전 |
---|---|
1965년 ~ 1970년대 초 | 반격전, 반격전 제2단계, 반격전 제3단계, 테트 반격전, 반격전 제4단계, 반격전 제5단계, 반격전 제6단계, 테트 69/반격전, 1969년 여름/가을, 1970년 겨울-봄, 성역 반격전, 반격전 제7단계[1] |
2. 6. 이라크 전쟁 (2003년 ~ 2011년)
2003년 10월, 제1 스트라이커 여단 소속 제3-2 스트라이커 전투여단(SBCT)의 일환으로 제1대대 제23보병연대가 이라크 자유 작전의 일환으로 쿠웨이트에서 이라크로 파병되었다.[1] 제1대대는 쿠웨이트에서 한 달간 훈련을 마친 후 전진작전기지(FOB) 페이스세터로 이동하여 제4보병사단 통제 하에 아드 델루이야에서 작전을 수행했다.[1] 12월 8일, 제1대대 B 중대는 첫 임무 수행 중 차량 전복 사고로 특등병 블리켄스타프, 특등병 웨슬리, 상사 브리지스를 잃었다.[1] 이후 부대는 아이비 블리자드 작전에 참가했고, 토마호크 대대는 이라크 모술로 이동하여 제101공수사단(공중강습) 부대와 교대했다.[1] 제1대대는 티그리스강 서쪽에 전투 초소를 점령하고 니네베 주의 반군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수많은 전투 작전을 수행했다.[1] 대대는 도시에서 반군을 제거하기 위해 급습, 교통 통제 지점 설치, 지역 사회 교전을 실시했으며, 이 과정은 콜비 버젤에 의해 기록되었다.[1] 특히 2004년 8월 4일, 대대 전체가 반군의 대규모 도시 공격을 격퇴했다.[1]제1대대는 이라크 자유 작전에 참전하여 다음과 같은 전투 및 작전을 수행하였다.
기간 | 작전명 | 지역 | 비고 |
---|---|---|---|
2003년 11월 ~ 2004년 12월 | 이라크 자유 작전 | 사마라, 텔 아파르, 모술, 알 쿠트, 알 하이, 알 수와리아, 유시피아 | |
2005년 8월 ~ 2006년 12월 | 이라크 자유 작전 | 모술, 라와, 텔 아파르, 바그다드 | |
2006년 6월 ~ 2007년 9월 | 이라크 자유 작전 | 바그다드 "애로우헤드 리퍼"; 급증; 바쿠바 (2007년 6월/9월) | |
2007년 4월 ~ 2008년 6월 (제2대대) | 이라크 자유 작전 | 급증; 바그다드 및 디얄라 주 | |
2009년 7월 ~ 2010년 8월 (제1대대) | 이라크 자유 작전 | 철수; 디얄라 주; 바쿠바 | |
2009년 9월 ~ 2010년 9월 (제2대대) | 이라크 자유 작전 | 철수; 바그다드; 알 타지 |
2. 7.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1년 ~ 2021년)
2009년, 제23보병연대 제4대대는 항구적 자유 작전 지원을 위해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 배치되었다. 이들은 자불 주와 헬만드 주 등지에서 탈레반에 대한 대반군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2010년에는 헬만드 주 중부의 탈레반 거점인 마르제를 제거하는 작전 모쉬타라크에 참여하여, 바둘라 쿨프 지역과 트레크 자부르 운하 일대에서 '헬만드 스파이더'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에서 4-23 보병연대는 적 15명을 사살하고 9명을 부상시켰으며, 23개의 급조폭발물(IED)를 제거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공로로 4-23 보병연대는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도록 추천되었다.[1]2012년, 제1, 2, 4대대가 아프가니스탄에 재배치되었다. 제4-23 보병연대는 마이완드와 자라이 지구에서, 제1-23 보병연대는 칸다하르 주 판즈와이 지역에서 탈레반과 교전을 벌였다.[1]
2. 8. 현재
현재 제23보병연대는 3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대대의 소속 및 주둔지는 다음과 같다.대대 | 소속 여단 | 주둔지 |
---|---|---|
제1대대 | 제2보병사단 제1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 |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
제2대대 | 제4보병사단 제1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 | 콜로라도주 포트 카슨 |
제4대대 | 제2보병사단 제2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 |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 |
제23보병연대는 창설 이후 다음과 같은 주요 전투 및 작전에 참여했다.
한반도 유사시, 이들 부대는 미군의 주요 증원 전력의 일부로 대한민국 방위에 투입될 예정이다.
3. 주요 전투 및 작전
3. 1. 미영 전쟁 (1812년)
1812년 6월 26일 의회 법안에 따라 25개의 보병 연대가 승인되었다. 1815년 전쟁 이후, 제23연대는 제6, 제16, 제22, 제32 보병 연대와 통합되어 현재의 제2보병연대가 되었으며, 이 연대가 제23연대의 명예를 계승했다.[1]
당시 기록에 따르면, 1812-15년 전쟁 동안 제23보병연대의 일부 또는 전체가 참여한 전투와 교전은 14건이었으며, 이는 나이아가라 전선 작전의 대부분을 차지한다.[1]
날짜 | 전투/교전 |
---|---|
1812년 10월 13일 | 퀸스턴 하이츠 전투 |
1812년 11월 28일 | 블랙 록 |
1813년 5월 27일 | 어퍼 캐나다의 포트 조지 전투 |
1813년 | 뉴욕주 새키츠 하버 방어 |
1813년 6월 6일 | 어퍼 캐나다의 스토니 크릭 전투 |
1813년 6월 24일 | 어퍼 캐나다의 비버 댐스 전투 |
1814년 7월 3일 | 어퍼 캐나다의 포트 이리 점령 |
1814년 7월 5일 | 어퍼 캐나다의 치퍼와 전투 |
1814년 7월 25일 | 런디스 레인 전투 (나이아가라 폭포) |
1814년 8월 15일 ~ 9월 17일 | 어퍼 캐나다의 포트 이리 포위전 |
3. 2. 한국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1950년 8월까지, 제23보병연대는 대구 근처의 "볼링 앨리"라고 불리는 좁은 계곡에 배치되어 부산 교두보를 방어하고 전투에서 대한민국 군대를 지원했다.[2]지평리는 미 제8군 사령관 매튜 리지웨이 중장이 중공군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한 곳이다.[2]
한국 전쟁 연대기에서 지평리 전투는 1950년 말 북한에서 철수한 이후, 1951년 2월 5일에 시작된 미 제8군의 짧은 공세와 일주일 후 시작된 중공군의 전면적인 반격에 이은 것이었다.[2]
제23연대 전투단은 1951년 2월 13일부터 14일까지 지평리 방어전을 결정적으로 수행했다. 이 작전은 정찰 매복 작전과 그 후 쌍굴 전투 지역(지평리에서 남동쪽으로 3마일 떨어진 고지)에서의 전투에 이은 것이었다. 쌍굴 작전 이후, 제23보병연대(제2보병사단)는 2월 3일 오후 지평리로 진격하여 방어 진지를 구축했다. 지평리는 길이 800m, 폭이 몇 블록에 불과한 작은 교차로 마을로, 단선 철도에 위치해 있었다. 기차역 외에도 몇 채의 벽돌 또는 목조 건물이 마을 중심부에 있었지만, 대부분의 건물은 흙, 나뭇가지, 짚으로 지어졌다. 적어도 절반은 이미 이전에 마을에서 벌어진 전투의 결과로 잿더미가 되었다.[2]
지평리를 둘러싸고 있는 8개의 두드러진 언덕은 계곡의 논과 건물 위로 평균 260m 높이로 솟아 있었다. 이 언덕들은 훌륭한 방어 위치를 제공했지만, 이들을 점령하는 것은 전선 방어 위치를 20km에 걸쳐 늘리고 지름이 5km~6km인 방어선을 형성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대신 연대장 폴 L. 프리먼 대령은 보병들을 지름 약 1.6km의 좁은 방어선 주변의 저지대에 배치했다. 마을의 세 면에서는 작은 언덕을 따라 방어선이 형성되었고, 북서쪽에서는 보병들이 800m 길이의 논밭에 참호를 팠다.[2]
지평리에 배치된 지 10일 동안, 프리먼 대령의 연대는 참호를 파고 진지를 강화했다. 제37야전포병대대가 2월 5일에 도착했다. 제82대공포병자동화기대대 B포대가 연대에 합류하여 M16 하프트랙 6대와 M19 대공포 차량 4대를 마을 방어에 추가했다. 며칠 후 제503야전포병대대 B포대(155mm 곡사포 부대)가 제37야전포병대대를 지원하기 위해 배속되었다.[2]
보병 중대는 기관총을 참호에 설치하고, 박격포를 조준하고, 대인 지뢰를 매설했으며, 주변 고지에서 매일 정찰 작전을 수행했다. 연대 중박격포 중대는 방어선의 각 구역에 소대와 분대의 화력을 분산 배치했고, 포병은 적의 접근 가능성이 있는 모든 진입로에 사격을 가했으며, 모든 부대는 훌륭한 통신망을 구축했다. 보병, 포병, 항공 지원을 효과적인 전투팀으로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2]
다음은 제23보병연대 2대대의 방어선 중 G중대가 맡았던 지역에서 벌어진 지평리 전투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503야전포병대대 B포대의 곡사포는 G중대 언덕 기슭에 배치되어 포병들도 같은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2대대장 제임스 W. 에드워즈(James W. Edwards) 중령은 자신의 대대에 할당된 구역을 방어하기 위해 세 개의 소총 중대를 모두 최전선에 배치했다. 이곳은 방어선의 남쪽 가장자리였다. 중대 내에서 두 명의 중대장이 세 개의 소총 소대를 투입했다. 나머지 중대(F중대)는 에드워즈 대령이 가장 작고 중앙에 위치한 구역을 할당했는데, 2개 소대만으로 방어선을 구성하고 지원 소대를 대대 예비대로 남겨두었다.[2]
지평리에서 남서쪽으로 뻗어있는 좁은 보급 도로는 마을 남쪽 가장자리에서 철도 아래를 지나 500m 이내에 U자형 언덕의 양쪽 끝을 통과하는 도로 절개지 두 곳을 지나갔다. G중대는 이 두 도로 절개지 중 두 번째 지점에서 시작하여 U자형 언덕의 남쪽 면을 따라 왼쪽(동쪽)으로 뻗어 나갔다. 지도상에서는 몇 개의 등고선만 있는 작은 언덕이었다. 보병들은 몇 분 안에 매끄러운 흙 언덕을 오를 수 있었다. G중대 1소대는 도로 절개지 옆 언덕의 오른쪽 끝을 방어했다. 3소대는 중앙 위치(언덕의 가장 높은 부분)를 점령하고 U자형 언덕의 굽은 곳까지 방어선을 확장했다. 2소대는 3소대와 F중대 사이의 논에 위치했다.[2]
언덕에 위치한 두 소대의 병사들은 전면 경사면 바로 위에 참호를 팠다. 참호 위치는 사계(射界)를 다소 제한했지만, 특히 3소대의 경우 좋은 관측을 제공했는데, 3소대는 오른쪽 측면 바로 앞 건조한 계곡 바닥의 사각지대를 제외한 남쪽의 모든 지역을 볼 수 있었다.[2]
3소대 지역 근처에는 두 가지 중요한 지형지물이 더 있었다. 언덕 기슭과 건조한 계곡 바닥 너머에는 마산 마을을 이루는 15~20채의 건물들이 있었다. 두 번째 지형지물은 3소대 언덕과 남쪽의 큰 언덕을 연결하는 좁은 구릉이었다. 논에 위치한 2소대는 만족스러운 관측은 어려웠지만, 바로 앞의 평야를 가로질러 좋은 사계를 확보했다.[2]
G중대는 자체 무기 소대 외에도 제75mm 무반동총 1개 분대, H중대의 중기관총 1개 분대, 제임스 휘태커(James Whitaker) 중위의 지휘를 받는 81mm 박격포 1개 소대를 지원 무기로 보유했다. 박격포는 마을 가장자리에 참호를 팠고, G중대에 전방 관측자(휘태커 중위)를 배치했다. 또한 연대 중박격포 중대와 제37야전포병대대에서도 G중대에 전방 관측자를 파견했다. 낮 동안에는 제75mm 무반동총 분대 병사들이 무기를 운용했지만, 밤에는 무반동총의 후폭풍으로 위치가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50구경 기관총 2정으로 교체했다.[2]
탄약 및 선봉 소대는 두 개의 화염방사기(나팔름 드럼)를 설치했는데, 하나는 도로 절개지 바로 남쪽 도로에, 다른 하나는 2소대 앞 논에 설치했다. 도로 옆에 위치한 1소대는 도로와 진지 앞에 철조망을 쳤다. 그러나 중대 전선을 모두 덮을 만큼 충분한 철조망이 없었다. 에드워즈 대령은 모든 무기의 위치를 감독했고, 참호는 서서 방어할 수 있는 형태로 충분히 깊게 파도록 고집했다.[2]
제503야전포병대대 B포대가 도착했을 때, 제155mm 곡사포는 G중대가 한쪽을 점령한 U자형 능선이 형성하는 작은 분지 안에 자리 잡았다. 곡사포는 연대 방어선의 동쪽, 북쪽, 서쪽 구역을 지원하기 위해 소대별로 배치되었다. 곡사포 뒤편에는 포병들이 사격 지휘소(FDC) 요원을 위한 텐트를 설치했다. 그 뒤편, G중대 언덕 기슭 근처에는 식사 및 보급 부대를 위한 여러 개의 텐트가 있었다. 제37야전포병대대에서 B포대로 파견된 연락 장교 존 A. 엘레지(John A. Elledge) 대위와 G중대장 토마스 히스(Thomas Heath) 중위는 해당 구역의 합동 방어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은 최전선에 포병의 기관총을 사용하고, 필요하다면 일부 포병들을 소총수로 활용하는 한편, 곡사포에는 최소 인원만 남겨두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두 장교는 또한 도로 절개지에 6명으로 구성된 기관총 진지를 설치하여 .50구경 기관총 1정과 .30구경 기관총 1정을 운용하도록 했다. 이 도로 절개지는 에드워즈 대령의 2대대 구역과 프랑스 대대(제23보병연대 정규 대대) 구역을 나누는 경계선이기도 했다.[2]
제23보병연대가 방어선을 구축하는 동안, 2월 5일 제8군 사령관의 공세가 시작되어, 전선 중앙에 위치한 제10군단이 중요 적 증원 지역인 홍천군을 이중 포위 공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2월 11일 밤까지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중국군은 남쪽으로 두 개의 부대를 투입하여 횡성과 원주시를 목표로 하는 전면적인 반격을 시작했다. 이 강력한 적의 공격은 두 개의 대한민국 육군 사단을 돌파했으며, 유엔군의 공격을 약 8.05km~약 32.19km 남쪽으로 후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중국군 공격 이전, 제10군단의 전선은 프리먼 대령의 지평리 방어선보다 훨씬 앞서 있었지만, 부대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적의 봉쇄선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지평리는 군단의 왼쪽에서 눈에 띄는 돌출부가 되었다. 결국 이 돌출부는 제10군단과 격리되었고 제23연대는 완전히 포위되었다.[2]
'''전투 1일차'''
23보병연대의 방어선에서, 2월 13일 주간 정찰대는 지평리 북쪽, 동쪽, 서쪽 세 방향에서 적의 활동이 증가했음을 보고했다. 연대와 함께 작전 중인 공군 정찰기는 북쪽과 동쪽에서 적 부대가 방어선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고했다. 관측병들은 사정거리에 있는 적 부대에 대한 포격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전술 항공 통제반은 포병 사정거리 밖에 있는 다른 적 부대에 대해 40차례의 항공기 출격을 지시했다. 오후 10시경부터 중국군은 제23보병연대를 방어선에서 몰아내기 위해 일련의 탐색 공격을 시작했다. 이러한 공격은 미국의 항공 통제로 인해 해가 뜬 직후 중단되었다.[2]
'''전투 2일차'''
미군은 탄약이 부족했고 1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2월 14일에는 공중 지원으로 중국군의 공격을 막았다. 해 질 무렵 중국군은 포격 공격을 재개했고, 곧이어 지상 공격이 이어졌다. 치열하고 장기간에 걸친 전투가 벌어졌고, 남쪽 측 부대는 위치에서 밀려났다. 남쪽 측 전투는 미국의 근접 항공 지원에도 불구하고 15일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중국군은 제23연대를 파괴하여 제10군단이 남쪽으로 후퇴하도록 밀어붙이려 했다. 늦은 오후에 중국군은 방어선 밖으로 밀려났다. 제5기병연대의 부대(크롬베즈 (Crombez) 특임부대)가 전차 지원을 받으며 전투가 끝나갈 무렵 중국군이 퇴각하면서 도착했다.[2]
'''결과'''
지평리에서 중국군이 제23연대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 것은 미국군을 바다로 몰아내려는 중국군의 노력을 사실상 종식시켰다. 유엔군의 사상자는 사망 51명, 부상 250명, 실종 42명이었다. 중국군은 약 2,000명이 사망하고 약 3,000명이 부상당했다. 제8군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유엔군은 킬러 작전과 리퍼 작전을 시작하여 중국군을 북쪽으로 밀어냈다. 그 결과 1951년 7월에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2]
3. 3. 아프가니스탄 전쟁
2009년 7월 9일, 제5대대 2여단 전투단(SBCT)은 항구적 자유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에서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공항으로 배치되었다. 장비 준비와 부대 지휘 절차를 완료한 후, 8월 5~6일에 자불 주 전진작전기지(FOB) 울버린까지 전술 도로 행진을 실시했다. A중대는 수르 가르 산맥 남쪽 FOB 스위니로 이동하여 미 육군 특수 부대(SF) ODA, 아프가니스탄 국가 육군과 함께 신카이 마을 주변에서 대반군 작전(COIN)을 시작했다. C중대는 찰라트를 거쳐 자불 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샤조이까지 도로 행진, "상가르" 중대 전투 초소를 설립하고 COIN 작전을 시작했다. B중대는 대대 본부와 함께 FOB 울버린에 남아 신카이 하위 지역 수리에서 작전을 시작했다.대대는 아프가니스탄 국가 육군 및 아프가니스탄 국가 안보군(ANSF)과 협력하여 선거를 준비, 자불 주 내 여러 투표소에서 경비를 제공했다. 투표는 사고 없이 진행되었으며, 이는 유권자를 위협할 수 없도록 노력한 군인과 ANSF의 공로였다. 라마단 기간 동안 C중대를 제외, 적과의 접촉은 제한적이었는데, C중대는 샤조이 바자르에서 자살 공격을 겪어 미군 15명과 통역 1명이 부상을 입었다. 첫 번째 대대 임무는 '롱뷰' 작전으로, 적이 주요 지역에 거점을 마련하는 것을 막는 것을 목표로 했다. 라마단이 끝나자 적은 수리에서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B중대는 "풋볼" 지역(듀크 도로와 불 도로 사이)에서 여러 차례 적과 교전했으며, 여기에는 자불 주 탈레반 전투기 부사령관 모하마드 칸도 포함되었다. 칸은 마도 마을 근처에 매복을 설치했지만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도주, 이후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탈레반은 복수를 위해 공격을 강화했다. 9월 24일, B중대 소속 병력은 오마르 자이 마을 근처에서 압력판 IED을 작동시켜 미군 3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로 인해 대대는 '라코니아' 작전을 통해 오마르 자이, 가작 칼레이, 볼란 칼레이, 파투켈 칼레이, 멜리자이 칼레이를 정찰했다. 이 작전은 ANA와 협력하여 2개의 IED 은닉처를 발견하고 FOB 울버린 남서쪽 IED 조직을 와해시켰다.
10월, A중대는 '트레드스톤' 작전을 통해 신카이 북쪽 로가니, 반드 칼레이, 카림 켈 지역을 정찰했다. C중대는 샤조이 북쪽 친헤스 지역을 정찰하는 '친헤스'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곳은 자불의 그림자 총독 거주지로 알려졌다. 이 임무로 여러 IED 은닉처와 젊은이들이 자살 폭탄 테러범으로 훈련받는 마드라사가 발견되었다. 11월 4일, 제17보병대(1-17 IN)는 칸다하르 주 아르간답 계곡에서 IED 공격으로 7명의 군인을 잃었다. 이로 인해 B/4-23은 FOB 울버린에서 COP 젤라와로 이동하여 1-17 IN을 지원하는 '포커스 홀드' 작전이 시작되었다. C중대는 COP "상가르"를 건설하고 11월 19일까지 샤조이에서 순찰을 실시했는데, 이날 VBIED(자동차 폭탄)이 COP "상가르"와 FOB 불라드의 공동 ECP를 강타, 제1대대, 제508공수보병대(1-508 PIR) 공수부대원 2명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11월 20~24일 샤조이 시 통제를 강화하는 '라스 크루세스' 작전이 재개, COP 병력 보호 개선을 위한 엔지니어와 자재가 도착했다.
12월 6일, 여단은 COIN 작전을 중단하고 아프가니스탄 남부 고속도로 이동의 자유 확보에 집중하도록 임무를 변경받았다. 4-23 IN은 헬만드 주에 기지를 점령하여 고속도로 1번과 601번의 안보를 제공해야 했다. A중대는 자불을 떠나 칸다하르 주 마이완드 지역 FOB 램로드로 이동, 제2대대, 제1보병대(2-1 IN)와 함께 듀라이 분기점에서 라슈카르 가까지 HWY 601을 따라 지역 평가를 시작했다. B중대는 12월 28일에 1-17 IN에서 해제, FOB 툼스톤으로 이동하여 게레슈크시 서쪽 고속도로 1번을 따라 작전을 시작했다.
대대 본부와 C중대는 헬만드 주 게레슈크시 외곽 FOB 프라이스를 점령했다. FOB 프라이스 확장을 위해 대규모 건설 자재 및 생명 유지 장비 물류 이동이 필요했고, 원래 크기의 두 배 이상으로 성장했다. C중대는 게레슈크와 듀라이 분기점 사이 고속도로 1번 담당 섹터를 인수했다. 본부 중대는 모호크 아카데미 설립을 감독, 응급 처치 및 사격술 등 기본 기술로 ANA 군인을 훈련시켰다. 헬만드 주 도착 후, 대대는 6/4/205 ANA, 라슈카르 가 ANP와 협력, '헬만드 선라이즈' 작전을 수행했다. 이 작전은 교통 통제 지점, 배수로 차단, 지속적인 감시, HWY 1과 HWY 601을 따라 ANA와 ANP 훈련을 통해 고속도로를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1월, 제2해병원정여단과 RC South는 헬만드 주 중부 탈레반 거점 제거를 위한 작전 모쉬타라크를 계획했다. 4-23 보병연대가 참여, 1월 20일 FOB 드와이어에서 해병대 지휘관들과 만나 바둘라 쿨프 지역, 트레크 자부르 운하를 따른 역할에 중점을 둔 '헬만드 스파이더' 작전을 계획했다. 5/2 SBCT는 A/1-17 보병연대를 4-23 보병연대에 배속, B/1-17 보병연대는 FOB 툼스톤을 점령하여 B/4-23 보병연대 구역에서 작전했다. '헬만드 스파이더'는 2월 8일에 시작, 26일 동안 지속되었다. 태스크 포스 모호크는 1/1/205 ANA와 협력, 트레크 자부르 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진격, 나드-에 알리 지구 남부 "5포인트" 교차로에서 3/6 해병대와 연결했다. A/1-17 보병연대와 B/4-23 보병연대는 북부 마르제 지역으로 서쪽으로 진격, 교란 작전을 수행했고, 정찰 소대는 북부 회랑을 따라 차단 작전을 수행했다. 태스크 포스 모호크는 3월 6일까지 작전을 계속했다.
한 달간 작전에서, 태스크 포스는 적 15명을 사살, 9명 부상, 23개 IED 제거, 8번 IED 공격, 497명 생체 인식 시스템 등록을 기록했다. 4-23 보병연대와 지원 부대는 대통령 부대 표창을 받도록 추천되었다. 2월, HWY 601과 야흐찰 계곡에서 중대 작전이 수행되었다. A 중대는 야흐찰 남부 가브반을 통해 북쪽으로 진격하는 '601 쿠거' 작전을 수행, 해당 지역 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C 중대는 HWY 1에 영향을 미치는 적군 교란을 위해 모하마드 카림 칼레이와 야흐찰에서 임무를 수행했다. 4-23 보병연대는 고속도로 이동 자유를 제공하며 제2 스트라이커 기병 연대에 차량과 장비를 넘겨주고, 헬만드 전투 지역을 제2 해병원정여단과 덴마크 전투단에 넘겨줄 계획을 세웠다. 마지막 대대 작전은 제2 스트라이커 기병 연대가 책임을 맡도록 자불 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4-23 보병연대는 12개월 파병 후 2010년 7월 포트 루이스로 귀환했다. 이 대대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최초 스트라이커 부대, 자불 주 외딴 산악 지형 작전 유일 스트라이커 대대, 두 개 주를 가로질러 이동하여 새로운 지역 작전 유일 보병 부대, '모쉬타라크' 작전 참여 유일 미 육군 부대, 불안정한 헬만드 주 작전 유일 미 육군 보병 대대였다.
2012년 4월, 제4-23 보병연대는 "랜서"로 알려진 제2 스트라이커 여단, 제2 보병사단 소속으로 마이완드와 자라이 지구에 배치, 2013년 1월 조인트 베이스 루이스-맥코드 기지로 귀환했다.
제1-23 보병연대는 2012년 3월, 제3 스트라이커 여단 전투단 소속으로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 주 판즈와이 지역에 배치되었다. 탈레반은 1990년대 초 판즈와이를 탈레반 운동 발상지라고 선언했다. 제1-64 기갑연대가 배치되어 임무 수행 기간 동안 제1-23 보병연대에 배속되었다.
4. 부대 재편
부대는 제1기갑사단이 만하임(독일)에서 임무를 수행했던 제8보병연대 제4대대에서 유래했으며, 1994년 여름 나머지 여단과 함께 워싱턴주 포트 루이스로 이동했다. 그해 가을, 대대는 제2보병사단 제1대대, 제23보병연대로 재지정되었다.
5. 포상
표창 종류 | 내용 |
---|---|
대통령 부대 표창 (육군) | 브레스트, 비르츠펠트, 크링켈터 발트, 생비트, 트윈 터널, 지평리, 홍천 |
용맹 부대 훈장 | 사이공, 떠이닌 성, 바쿠바 (애로우헤드 리퍼 작전), 아프가니스탄 남부 RC (2012년 4월 – 2013년 1월) |
베트남 공화국 무공십자장(Palm) | 베트남 1966-1968 (제4대대), 베트남 1968-1970 (제4대대) |
베트남 공화국 민사 활동 명예 훈장, 1등 | 베트남 1966-1970 (제4대대) |
프랑스 무공십자장 (Palm) | 샤토티에리, 엔-마른, 뫼즈-아르곤, 포라제르 |
벨기에 포라제르 1940 | 아르덴, 엘젠본 크레스트 |
대한민국 대통령 부대 표창 | 낙동강 방어선, 한국 1950-1953, 한국 1952-1953 |
공로 부대 훈장 | (제1대대) 이라크 자유 작전 (모술, 탈 아파르, 사마라, 알 쿠트) (2003년 11월 - 2004년 11월), (제1대대) 바그다드 (2006년 6월 - 2007년 9월), (제2대대) 이라크 자유 작전 (바그다드 및 디얄라 주) (2007년 4월 – 2008년 6월), (제2대대) 자유의 수호자 작전 (난가르하르, 헤라트, 카불 주) (2018년 4월 - 2019년 1월) |
대통령 부대 표창 | (제2대대) 이라크 자유 작전 (바그다드 및 디얄라 주) (2009년 8월 - 2010년) |
참조
[1]
간행물
The Twenty Third Regiment of Infantry
http://www.history.a[...]
The Army of the United States, Historical Sketches of Staff and Line With Portraits of Generals-In-Chief. BG Theo F Rodenbough and Maj William S Haskin Ed. by 1896
[2]
웹사이트
Allies mark 60th anniversary of Chipyong-ni victory
https://web.archive.[...]
2013-06-13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