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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구려-당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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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은 667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고구려 내부의 권력 투쟁과 당나라와 신라의 동맹이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주요 전투로는 신성 전투, 금산 전투, 부여성 전투 등이 있었으며, 고구려는 압록강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결국 붕괴되었다. 당나라는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 전쟁의 결과로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었고, 고구려 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신라의 삼국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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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고구려-당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제3차 고구려-당 전쟁
개요
분쟁제3차 고구려-당 전쟁
전체고구려-당 전쟁
날짜666년 ~ 668년
장소랴오둥반도 일대 및 한반도 중·북부
결과당나라의 승리, 고구려의 멸망
교전 세력
교전국 1당나라
동돌궐, 신라
교전국 2고구려
말갈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측천무후
당 고종
이세적
글필하력
소정방
설인귀
지휘관 2보장왕
연개소문 ✝️
연남생
연남건
연남산
연정토 □
술탈 ✝️
신성 □
사부구
병력 규모
사상자 및 피해
지도

2. 전쟁 배경

高句麗-唐戰爭|고구려-당 전쟁중국어은 645년부터 668년까지 고구려당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총 3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끝이 났다.

고구려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당나라와는 표면적으로는 조공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실제로는 군사적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옹립한 후, 당나라에 대한 강경책을 펼치면서 양국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당나라는 644년 연개소문의 정변을 구실로 고구려 침공을 결정했다. 당 태종은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고, 연개소문영류왕을 시해한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나라의 멸망 이후 동아시아 패권을 확립하고, 고구려의 영토를 병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1]

645년 당 태종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했다(제1차 고구려-당 전쟁).

3. 주요 전투 및 사건

667년 9월, 고구려의 주요 요새였던 신성사부구 등의 내부 배신으로 함락되었다.[1] 이후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16개 성을 추가로 항복시켰다.[1]

667년 10월, 연남건이 이끄는 고구려 주력군은 금산 전투에서 방동선, 고간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게 초기 승리를 거두었으나, 설인귀의 지원군에 의해 패배하였다.[1] 이 전투로 고구려의 천리장성 방어선이 무너졌다.[1]

668년 2월, 설인귀부여성을 기습 점령하고, 주변 40여 성의 항복을 받아냈다.[1] 이로써 고구려는 북쪽 지역의 예비 병력 자원을 상실했다.[1]

고구려는 압록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저항했으나, 이세적은 대행성을 함락시키고 압록강을 넘어 고구려 성을 함락시키고 욕이성이라 이름 지었다.[1] 욕이성은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로 추정된다.[1]

안시성의 고구려군은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반격하여 승리하기도 했으나, 전세를 뒤집지는 못했다.

668년 당 고종유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아 추가 파병을 하였다.

668년 10월,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신라군이 평양성을 포위했다. 보장왕은 항복했으나, 연남건은 계속 저항했다. 결국 승려 신성의 배신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보장왕연남건은 포로로 잡히면서 고구려는 멸망했다.[2]

3. 1. 신성 전투 (667년 9월)

667년 9월 14일, 외세의 침략에도 굳건했던 고구려의 주요 요새인 신성이 함락되었다.[1]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 서쪽 변경의 전략적 요충지인 신성(新城, 현재의 랴오닝성 푸순시 북쪽의 고이산성)을 점령하고, 계필하력에게 성을 지키도록 했다.[1] 이세적은 요하를 건너기 전, "신성은 고구려 서쪽 변경의 요충지이므로 이곳을 먼저 얻어야 다른 성을 쉽게 빼앗을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1]

모용씨부터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신성은 당나라 군대의 공격에 오랫동안 강력하게 저항했다.[1] 그러나 신성은 내부 분열로 인해 함락되었다.[1]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끝까지 용맹하게 싸우던 신성 성주를 묶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서, 이세적은 군사를 이끌고 계속 진격하여 16개 성을 모두 항복시켰다.[1]

3. 2. 금산 전투 (667년 10월)

667년 10월, 방동선과 고간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동남쪽으로 진격했다. 이에 맞서 고구려 대막리지 연남건은 신성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 주력 정예부대 20만 대군을 소집하여 당나라 군대를 요격하려 했다.[1]

고구려 20만 대군은 동남쪽으로 진격하던 방동선과 고간의 당나라 선봉 부대를 금산에서 만나 치열하게 싸웠다. 방동선과 고간의 당나라 군대는 갑작스러운 고구려 대군에 밀려 크게 패하고 도망쳤고, 고구려군은 승기를 잡고 계속 추격했다. 하지만, 설인귀의 군대가 빠르게 구원하여 측면에서 갑작스럽게 반격했고,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져 5만 명을 잃고 무너져 후퇴했다.[1]

금산 전투는 당나라 초기에 드물게 보는 대규모 전투였고, 당나라 역사서에 기록된 당나라가 고구려와 싸운 4대 전투 중 전쟁의 향방을 가른 가장 중요한 전투였다. 주필산 전투처럼 고구려와 당나라의 대군이 격돌한 대규모 전투였다.[1]

이 전투로 고구려의 주요 방위선이었던 천리장성 방어선은 무너졌다. 3차 고구려-당 전쟁에서는 금산 전투를 통해 고구려군의 주력 정예부대가 소멸되었고, 이후 전쟁은 당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었다.[1]

3. 3. 부여성 전투 (668년 2월)

설인귀는 2천 명의 현갑기(당나라의 정예병) 병사를 이끌고 667년 11월 하순 부여성으로 향했다. 병력이 너무 적다는 부하 장수들의 반대가 있었으나, 설인귀는 "병사는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신속하게 이동했다.[1]

한편, 부여성에서는 10만에 가까운 고구려 군대를 신성으로 보내 잃어버린 전쟁의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대가 이렇게 빨리 도착할 줄 몰랐다. 겨울인데다 눈이 내린 곳에서 흰 옷을 입은 설인귀의 2천 현갑기병이 기습하자, 크게 혼란에 빠진 고구려군은 2만여 명의 병사를 잃고, 나머지 7만여 명은 부여성으로 돌아가 수비에 들어갔다.[1]

668년 2월 20일, 설인귀부여성을 기습하여 점령하였다. 이에 놀란 부여성 주변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요청하였다.[1] 이로써 고구려는 북쪽 지역의 예비 병력 자원을 잃게 되어 전력의 열세가 더욱 심해졌다.[1]

3. 4. 압록강 방어선 구축과 붕괴

667년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신성에서 고구려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6개월 이상 고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사부구를 비롯한 신성 내부의 배신으로 인해 667년 9월 14일, 신성이 함락되었고, 이후 16개 성이 연이어 항복했다.[1]

이세적은 신성 방어에 소홀했고, 연남건은 즉시 군대를 보내 신성을 공격했다. 설인귀가 당군을 지원하여 가까스로 신성을 지켜냈다.[1]

한편, 곽대봉이 이끄는 당나라 수군은 해상을 통해 평양으로 진격했다. 원만경은 곽대봉에게 군량과 병기를 보냈으나, 원만경이 보낸 서신이 고구려군에게 발각되면서 고구려는 압록강 나루에 진을 쳐 당나라 군대의 진격을 막았다.[1] 당고종은 원만경의 이적 행위에 분노하여 그를 영남으로 유배 보냈다.[1]

이로써 고구려는 요하 방어선과 천리장성 방어선이 무너졌지만, 압록강 방어선을 구축하여 당나라에 저항했다. 하지만 국내성 등 압록강 중류 지역은 이미 당나라와 내통하고 있어 방어에 한계가 있었다.[1]

연남건은 부여성을 구원하기 위해 5만 명의 군사를 보냈으나, 설하수에서 이세적의 당나라 군대에게 대패하여 3만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연남건은 병력 분산이라는 전략적 실수를 범하여 각지에서 패전하고, 반격의 기회마저 잃게 되었다.[1]

이세적은 대행성을 함락시키고 다른 당나라 군대와 합류하여 압록책으로 진군했다. 고구려군은 압록강 남쪽으로 밀려났고, 이로써 압록강 방어선은 완전히 붕괴되었다.[1]

이세적은 압록강을 넘어 200여 리를 추격하여 고구려 성을 함락시키고 욕이성이라 이름 지었다. 욕이성은 지금의 평안남도 안주로 추정된다.[1]

3. 5. 안시성의 반격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요동도부대는 압록강 전선에서 고착화되어 있는 이세적, 연남생 등의 당의 대군과 합류하려 빠르게 진군하였다. 선봉부대 중 하나인 학처준의 부대는 안시성 부근에 도달하였다. 학처준의 당군이 안시성 부근에 진을 치고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 3만 명이 용맹하게 공격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다. 학처준은 의자에 앉아서 한참 마른 밥을 먹던 도중에 고구려의 맹렬한 공격을 받자,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고구려 군사를 겨우 물리치고 후퇴하였다. 이후 유인궤, 학처준의 부대는 이세적의 부대에 다같이 합류하여 압록강을 도하한 것으로 보아 안시성 등 요동지역에서 격렬히 저항하는 고구려의 성들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하여 압록강 전선에서 고구려군과 대치하던 이세적의 부대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3. 6. 당나라 추가 파병

668년 보장왕 27년 봄 정월, 당 고종은 이번이 고구려 정복을 위한 마지막 기회라 여기고 당나라의 남은 모든 국력을 쏟아붓고자 우상 유인궤를 요동도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과 김인문 등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여 추가로 병력을 파병하였다.

유인궤가 이끄는 당나라 요동도부대는 압록강 전선에서 고착화되어 있는 이세적, 연남생 등의 당의 대군과 합류하려 빠르게 진군하였다. 선봉부대 중 하나인 학처준의 부대는 안시성 부근에 도달하였다. 학처준의 당군이 안시성 부근에 진을 치고 아직 군사 대열을 짓지 못하였을 때, 안시성의 고구려 군사 3만 명이 공격하여 당나라 군사들이 크게 패하였다. 학처준은 의자에 앉아서 한참 마른 밥을 먹던 도중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자, 정예 군사를 선발하여 고구려 군사를 겨우 물리치고 후퇴하였다. 이후 유인궤, 학처준의 부대는 이세적의 부대에 다같이 합류하여 압록강을 도하한 것으로 보아 안시성 등 요동 지역에서 격렬히 저항하는 고구려의 성들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하여 압록강 전선에서 고구려군과 대치하던 이세적의 부대에 합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668년 여름 4월, 혜성이 필성과 묘성 사이에 나타났다. 이때 당나라에 있던 허경종이 “혜성이 동북방에 보이는 것은 고구려가 장차 멸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3. 7. 평양성 함락 (668년 10월)

668년 10월 31일(음력 9월 21일),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김흠순, 김인문이 이끄는 신라군은 평양성을 포위했다. 이미 여러 성에서 고구려인들이 도망치거나 항복하는 상황이었다.[2] 계필하력이 먼저 평양성 밖에 도착했고, 이세적 휘하의 대군과 연남생이 이끄는 고구려 투항병도 합류했다. 곧이어 신라군도 합류하여 한 달 넘게 평양성을 포위했다.

마침내 보장왕연남산을 시켜 98명의 수령과 함께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이세적은 예를 갖춰 이들을 맞이했다.[2]

하지만 대막리지 연남건은 항복하지 않고 성문을 닫고 저항했다. 연남건은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가 싸웠으나 번번이 패했다. 그는 승려 신성에게 군사 지휘를 맡겼다.[2]

신성은 소장 오사, 고요묘[2] 등과 함께 이세적에게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 내응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5일 후, 신성이 성문을 열었다. 이세적은 군사를 풀어 성 위에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불을 지르게 했다. 당나라군, 연남생의 투항한 고구려군, 신라군이 성 안으로 쇄도하여 격전이 벌어졌다.[2] 연남생을 따라 당에 항복한 고구려군 중 용맹한 고현[3]도 선봉에 섰고, 평양성 군주 술탈은 신라군과의 교전 중 전사했다. 연남건은 스스로 칼을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2]

결국 당나라 군사가 보장왕연남건 등을 붙잡았다. 고구려 병사들은 계속 저항했지만, 결국 고구려는 멸망했다.[2]

4. 전쟁의 결과

제3차 고구려-당 전쟁의 결과는 고구려의 멸망과 한반도 정세의 급격한 변화로 이어졌다.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고구려-당 전쟁은 한국사에서 중요한 전쟁 중 하나로, 고구려의 멸망과 한반도 세력 구도의 변화를 가져왔다. 이 전쟁은 군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정치, 외교, 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을 여러 차례 막아내며 동북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했지만, 잦은 전쟁과 내부 분열로 인해 국력이 약화되었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권력 다툼은 고구려의 멸망을 가속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667년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요충지인 신성을 함락하고, 금산 전투에서 고구려 주력 부대가 궤멸되면서 고구려는 급격히 붕괴되었다. 연남건의 전략적 판단 오류도 패배의 한 원인이었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 영토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접 지배하려 했으나,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과 신라의 성장으로 인해 실패했다. 신라나당 전쟁에서 승리하며 삼국통일을 이루었지만,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상실하게 되었다.

5. 1. 군사적 관점

667년 이세적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요충지인 신성을 함락시켰다. 신성은 과거 모용씨부터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기까지 수백 차례의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철옹성이었으나, 내부 분열로 인해 함락되었다.[1] 신성 사람 사부구 등이 성주를 배신하고 당에 항복하면서 성문이 열렸다.[1]

신성 함락 후, 연남건은 신성을 탈환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다.[1] 이후 방동선과 고간이 이끄는 당나라 선봉 부대가 금산에서 고구려군과 격돌했으나, 설인귀의 구원군에 의해 고구려군은 5만 명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1]

금산 전투는 고구려와 당나라 양측의 대규모 병력이 격돌한 전투로, 이 전투의 패배로 고구려는 주력 부대를 상실하게 되었다.[1] 이는 1차 고구려-당 전쟁 당시 주필산 전투와 비견될 만한 큰 패배였다.[1]

이후 설인귀는 2천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부여성을 기습 공격하여 함락시켰다.[1] 부여성 주변 40여 개 성도 항복하면서 고구려는 북쪽 지역의 예비 병력 자원까지 상실하게 되었다.[1]

이처럼 3차 고구려-당 전쟁에서 고구려는 주요 방어 거점이었던 신성과 금산 전투에서 연패하고, 북쪽의 부여성까지 함락당하면서 군사적으로 붕괴되었다.[1] 특히 연남건은 신성 수복을 위해 주력 부대를 투입했다가 궤멸당하는 전략적 판단 오류를 범했다.[1]

참조

[1] 간행물 중국 허난성(河南省) 뤄양시(洛陽市) 신안셴(新安縣) 톄먼전(鐵門鎭)에 소재한 고대 묘지명 컬렉션인 천당지재(千唐誌齋)의 고구려 유민 묘비명의 내용을 참조
[2] 뉴스 고구려 멸망 부른 역적 '요묘' 묘지명 中서 발견 https://news.v.daum.[...] 2009-10-22
[3] 웹사이트 연남생을 따라 당에 투항한 고구려 유민 고현 묘지명 http://gsm.nricp.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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