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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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 선왕은 제 위왕의 아들로, 음악을 좋아하고 맹자를 초빙하여 정치를 논했다. 기원전 342년 한나라를 지원하여 위나라를 공격, 마릉 전투에서 승리했다. 학문을 장려하고 맹자를 후대하여 연나라를 제압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왕비는 선후와 종리춘이며, 아들로는 제 민왕이 있다. 긍정적으로는 학문 장려와 군사적 업적이 있으나, 사치스러운 생활과 연나라 공격 실패로 인한 외교적 실책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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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위왕은 기원전 357년에 즉위하여 37년간 제나라를 통치하며, 인재를 등용하고 정치 개혁을 추진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군사적 업적을 남기는 등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다. - 기원전 4세기 중국의 군주 - 위 문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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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선왕 | |
---|---|
기본 정보 | |
![]() | |
성 | 규(媯) |
씨 | 전(田) |
이름 | 벽강(辟疆) |
칭호 | 제 선왕(齊宣王) |
시대 | 중국 전국시대 |
출생 | 불명 |
사망 | 기원전 301년 |
아버지 | 제 위왕 |
배우자 | 선후 |
배우자 | 종리춘 |
자녀 | 제 민왕 |
재위 | |
즉위 | 기원전 319년 |
퇴위 | 기원전 301년 |
국가 | 제 (전국 시대) |
직함 | 제나라의 왕 |
이전 | 제 위왕 |
이후 | 제 민왕 |
2. 생애
제 위왕 사후, 그의 아들 제 선왕이 즉위했다. 제 선왕은 음악, 특히 우(생황) 합주를 즐겼다.[1] 그는 맹자(孟子)를 초빙하여 정치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제 선왕은 학문을 장려하여 직하의 학문이 크게 번성하게 했고, 이는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맹자(孟子)와 같은 현인들을 후하게 대우하고, 전기(田忌)의 계책을 받아들여 마릉 전투에서 위나라를 크게 격파하는 등 군사적 업적도 남겼다. 위나라와 한나라 군주들은 전영(田嬰)의 중재로 제 선왕에게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그의 곁에는 후궁에서 왕후가 된 종리춘(種離春)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외모는 추했으나 현명하여 제 선왕의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42년, 한의 남량(南梁)이 위에 공격받자, 한은 제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선왕은 즉시 구원할 것인지, 천천히 구원할 것인지를 두고 중신들과 의논했다. 장멸(張丏)은 즉시 구원을 주장했으나, 전기(田忌)는 한·위 양군이 지치기 전에 구원하면 제나라가 불리해질 것이라며 반대했다. 결국 선왕은 천천히 구원하기로 결정하고, 한의 사자에게 뜻을 전했다. 한은 다섯 번 싸워 모두 패배한 후 다시 제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제나라는 군사를 일으켜 마릉 전투에서 위나라를 크게 격파했다.
위나라가 패배하고 한나라가 약해진 후, 한·위의 국군은 전영(田嬰)의 중재로 제 선왕에게 조공했다.
한편, 정곽군(靖郭君)은 아설(兒說)을 잘 대우했는데, 아설은 정곽군이 제 선왕에게 미움을 받고 봉읍(封邑)인 설로 간 후, 선왕을 알현하여 정곽군이 선왕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렸다. 이에 감동한 선왕은 정곽군을 다시 불러들여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정곽군은 사양했다. 결국 정곽군은 재상직을 수락했지만, 7일 만에 병을 핑계로 사임하려 했고, 선왕은 3일째 되는 날에 허락했다.
선왕은 학문을 장려하여, 직하(稷下)의 학사들을 후하게 대우했다. 맹자(孟子)의 조언으로 연(燕)을 제압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여 연나라에 큰 원한을 심어주게 되었다. 정곽군 사후, 그의 아들 맹상군(孟嘗君)을 재상으로 삼아 국력을 높였다.
3. 가족
구분 이름 비고 왕비 선후 기원전 312년 사망 왕비 춘 제나라 종리씨 가문의 부인 후궁 하영춘 "유사종무염 무사하영춘(有事鍾無艷,無事夏迎春, 일이 있을 땐 종무염, 일이 없을 땐 하영춘)" 고사의 주인공 구분 이름 비고 아들 태자 지 제 민왕으로 즉위 (기원전 300년 ~ 284년 재위) 아들 공자 통 연(焉) 씨의 시조, 루 지역을 봉토로 받음
4. 업적 및 평가
그러나 점차 술과 여자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으며,[1] 정곽군(전영)과의 관계에서도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1]
4. 1. 긍정적 측면
제 선왕은 학문을 장려하여 직하의 학문이 크게 번성하게 하였고, 이는 천하에 널리 알려졌다. 뜻있는 선비와 학자들이 제나라로 모여들었으며, 맹자(孟子)와 같은 현인들을 후하게 대우했다. 맹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연(燕)나라를 제압하기도 했으나, 이 계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 연나라에 큰 원한을 사게 되었다.
전기(田忌)의 계책을 받아들여 마릉 전투에서 위나라를 크게 격파하는 군사적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위나라가 패배하고 한나라가 약해지자, 한나라와 위나라 군주들은 전영(田嬰)의 중재로 제 선왕에게 조공을 바쳤다.
4. 2. 부정적 측면
제 선왕은 즉위 후 점차 술과 여자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1] 맹자의 조언을 받아들여 연을 공격했으나, 이는 훗날 연나라의 보복을 초래하는 외교적 실책이 되었다.[1]
신하인 정곽군(전영)과의 관계에서도 변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처음에는 정곽군을 불신하여 봉읍(封邑)인 설로 쫓아냈으나,[1] 아설의 설득으로 뒤늦게 그를 재상으로 등용했다.[1] 그러나 정곽군은 며칠 만에 병을 핑계로 사임했고, 선왕은 이를 허락했다.[1]
5. 전근대 사서 속 제 선왕
기원전 342년, 한의 남량(南梁)이 위에 공격받자, 한은 제(齊)에 구원을 요청했다. 제 선왕은 중신들을 불러 모아 구원 시기를 의논했다.
:선왕 왈, "즉시 구원할 것인가, 천천히 구원할 것인가, 어느 쪽이 좋겠는가?"
:장멸(張丏) 왈, "천천히 구원하면, 한은 좌절하여 위로 귀부할 것입니다. 즉시 구원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전기(田忌) 왈, "그것은 안 됩니다. 애초에 한·위 양군이 지치기 전에 구원에 나서면, 우리가 한을 대신하여 위를 공격하게 되어, 도리어 한의 지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본래 위는 한을 멸망시키려는 숙원(宿志)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이 멸망할 것으로 보이면, 반드시 동쪽 제에 호소해 올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밀히 한과 친교를 맺고, 천천히 위가 지쳤을 때를 틈타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국가는 더욱 중시되고, 이익을 얻으며, 명성은 존경받게 될 것입니다."
선왕은 전기의 계책을 받아들였고, 한의 사자에게 뜻을 전하여 돌려보냈다. 한은 제가 자기 편이라고 짐작하고 다섯 번 싸웠으나 모두 패배하여 제에게 호소해 왔다. 그래서 제는 군사를 일으켜 위를 공격하여, 마릉에서 크게 격파했다.
한편, 정곽군(靖郭君)은 아설(兒說)을 잘 대우했다. 식객(食客)과 맹상군(孟嘗君)이 간언했으나, 정곽군은 "내 집의 재산을 흩뿌려서라도 아설 선생을 후하게 대우하겠다"라고 격노하며 최고의 예로 후하게 대우했다. 제 위왕(威王)이 죽고 제 선왕이 즉위했으나, 선왕은 정곽군을 몹시 싫어했고, 정곽군도 그것을 알고 봉읍(封邑)인 설로 갔다.
얼마 후, 아설은 휴가를 얻어 선왕을 알현하게 해달라고 했다. 정곽군은 아설이 가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며 만류했으나, 아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설이 선왕을 알현하자, 선왕은 아설이 정곽군에게 중용되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아설은 자신이 정곽군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진 적은 없다고 말했다. 아설은 과거 정곽군에게 태자(제 선왕)를 폐위하고 교사(郊師)를 세우라고 진언했으나 거절당한 일과, 초나라 소양이 설 땅과 교환을 제안했을 때 반대했으나 역시 거절당한 일을 이야기했다.
선왕은 크게 한숨을 쉬며 정곽군이 자신을 생각해주었다는 것을 깨닫고, 아설에게 정곽군을 데려오게 했다. 선왕은 교외까지 나가 정곽군을 맞이하며 눈물을 흘렸다. 선왕은 정곽군에게 재상이 되어달라고 청했으나, 정곽군은 사퇴했다. 그러나 결국 재상의 인장을 받았지만, 7일 정도 지나 병을 칭하며 사임하려 했고, 선왕은 3일째 되는 날에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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