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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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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조명리는 조선 영조 때의 학자이자 문신입니다. 1697년에 태어나 1756년에 사망했습니다. 자는 중례(仲禮), 호는 노강(蘆江)·도천(道川)입니다. 본관은 임천(林川)입니다.

조명리는 1717년(숙종 43) 생원시에 합격하고, 1718년(숙종 44)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습니다. 이후 봉교, 정언, 지평 등을 역임했습니다. 1735년(영조 11) 지평 이태중이 왕의 미움을 사 유배당하자, 이태중을 한림직에 추천했다는 이유로 삭직되었습니다. 이후 교리로 복직했다가 소론 이광좌의 당으로 지목되어 2년간 유배 생활을 했습니다.

1740년(영조 16) 다시 기용되어 동부승지, 의주부윤, 대사성, 부제학 등을 역임했습니다. 1746년(영조 22) 『광묘어제훈사(光廟御製訓辭)』를 찬집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가자되고, 동의금부사를 지냈습니다. 이후 도승지, 이조참판, 강원도관찰사, 대사헌을 거쳐 1755년(영조 31) 판윤으로 승진했습니다. 『천의소감(闡義昭鑑)』 편찬에 찬집당상으로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조명리는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으며, 문집으로 『도천집(道川集)』이 있습니다. 시조 4수가 『해동가요』와 『청구영언』에 전해지는데,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설악산 가는 길에 개골산 중을 만나 / 중더러 물은 말이 풍악이 어떻더니 / 이 사이 연하여 서리 치니 때 맞은가 하노라


이 시조는 금강산의 가을 절경을 문답식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조명리는 유배 생활 중에도 시를 지었는데, 다음은 유배지에서 겪는 시름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 밤중에만 뜰에 가득히 비치는 밝은 달만이 고향에 있는 듯한 착각을 일게 하는구나!


조명리는 1756년(영조 32)에 사망했으며, 시호는 문헌(文憲)입니다.

조명리
셜악산 가난 길
관련 정보셜악산
가난 길
개골산
등장 인물즁 (중)
내용셜악산 가난 길에서 개골산 중을 만나 풍악산의 가을 풍경에 대해 묻는 내용. 이미 서리가 내려 가을이 끝났음을 알림.
참고 자료
출처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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