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2세 델 몬페라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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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니 2세 델 몬페라토는 1336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몬페라토를 통치했으며, 이웃 국가와의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그는 나폴리의 앙주 가문에 맞서 피에몬테와 사보이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1338년 아스티의 지사가 되었다. 나폴리 왕위 계승 분쟁을 틈타 북부 이탈리아에서 세력을 넓혔으며,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승리하고 여러 도시를 점령하여 권력을 강화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이탈리아 방문 시 지위를 인정받았지만, 마요르카 여왕과의 결혼으로 황제의 지지를 잃고 밀라노의 비스콘티 가문과 갈등을 겪었다. 조반니 2세는 파비아 영토를 아스티 지역과 교환하는 것으로 분쟁을 해결했으며, 많은 봉신을 잃었다. 그는 네 아들을 두었고, 세 아들이 그의 뒤를 이어 몬페라토 후작이 되었으며, 1372년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여 키바소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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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2세 델 몬페라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조반니 2세 |
작위 | 몬페라토 후작 |
재위 기간 | 1338년 - 1372년 |
이전 | 테오도로 1세 팔라이올로고스 |
이후 | 오토네 3세 팔라이올로고스 |
출생일 | 1321년 2월 5일 |
사망일 | 1372년 3월 19일 (51세) |
사망 장소 | 볼피아노 |
배우자 | 이사벨 데 마요르카 |
자녀 | 세콘도토, 몬페라토 후작 조반니 3세, 몬페라토 후작 테오도로 2세, 몬페라토 후작 마르가레타 굴리엘모 |
가문 | 팔레올로고스-몬페라토 가문 |
아버지 | 테오도로 1세 델 몬페라토 |
어머니 | 아르젠티나 스피놀라 |
2. 생애
조반니 2세는 몬페라토 후작 테오도로 1세의 아들로 태어나 1336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몬페라토 후작령을 다스렸다. 그의 통치 기간은 피에몬테 지역에서 앙주 가문의 세력에 맞서 영토를 확장하려는 노력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사촌인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과 비스콘티 가문의 도움을 받아 세력을 키웠으며, 가메나리오 전투에서의 승리를 포함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1355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를 수행하며 노바라, 파비아 등 여러 도시를 획득하기도 했으나, 이후 마지막 마요르카의 명목상 여왕 이사벨 데 마요르카와 혼인하면서 황제의 지지를 잃고 비스콘티 가문과 영토 분쟁을 겪기도 했다.
1372년 유언을 남기고 토리노 인근 볼피아노에서 사망했으며[2][3], 키바소에 묻혔다. 이사벨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중 세 명(오토네, 조반니, 테오도로)이 차례로 후작위를 계승했다.
2. 1. 초기 생애와 통치
조반니는 테오도로 1세의 아들로, 1336년부터 아버지와 함께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인접국을 상대로 영토 경계를 확장하는 데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사촌인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도움으로, 조반니는 피에몬테와 사부아 지역에 넓은 통제권을 지녔던 나폴리의 앙주 가문에 맞섰다. 1338년 10월 9일, 그는 아스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343년 나폴리 왕로베르토가 사망하고 그의 어린 손녀 조반나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조반니는 이탈리아 북부에서 자신의 세력을 늘릴 기회를 잡았다. 1344년까지 그는 알레산드리아, 아스티, 토르토나, 브라, 알바를 정복했다. 1345년 4월 22일,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그는 이 전투에서 사망한 앙주 가문의 세네샬 르포르스 다굴을 격퇴시켰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암묵적인 지원 하에, 조반니는 알바, 브라, 발렌차를 점령했으며, 1348년에는 쿠네오를 획득했다. 그의 세력은 135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방문했을 때 동행하면서 더욱 커졌다. 그때 그는 체라스코, 노바라, 파비아 등을 수여받았다.
마지막 명목상 마요르카의 여왕 이사벨 데 마요르카와 혼인하면서, 그는 황제의 지지를 잃고 황제와 비스콘티 군대의 공격을 막아야만 했다. 이 분쟁은 조반니가 차지한 파비아 주변 일대 영토를 비스콘티가 아스티 일대에 차지한 영토와 교환하기로 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반니는 비스콘티에게 많은 봉신들을 잃었다. 1372년에 작성한 유언에서, 조반니는 그의 자식들의 후견을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와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에게 맡겼다. 그는 아내 이사벨과의 사이에서 아들 네 명(오토네, 조반니, 테오도로, 굴리엘모)과 딸 한 명(마르가리타)을 두었는데, 아들 중 세 명(오토네, 조반니, 테오도로)은 차례대로 그의 자리를 계승했다. 조반니는 유언을 작성한 직후 토리노 인근 볼피아노에서 사망하였으며[3], 키바소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2. 2. 앙주 가문과의 대립과 영토 확장
조반니 2세는 아버지 테오도로 1세 델 몬페라토와 함께 1336년부터 몬페라토 변경백령을 공동 통치하며 이웃 국가들을 상대로 영토 확장에 성공했다. 그는 사촌인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의 도움을 받아 피에몬테와 사부아 지역에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던 나폴리의 앙주 가문에 맞섰다. 1338년 10월 9일, 조반니 2세는 아스티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1343년, 나폴리의 로베르토 1세 국왕이 사망하고 그의 어린 손녀 조반나 1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조반니 2세는 이를 북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로 삼았다. 1344년까지 그는 알레산드리아, 아스티, 토르토나, 브라, 알바를 정복했다. 1345년 4월 22일에 벌어진 가메나리오 전투에서는 앙주 가문의 대리인이었던 리포르스 다굴(Reforza d'Agoult)을 격파했으며, 리포르스 다굴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루키노 비스콘티의 암묵적인 지원 아래, 조반니 2세는 알바, 브라, 발렌차를 점령했고, 1348년에는 쿠네오까지 차지했다. 그의 세력은 1355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이탈리아 왕국을 순방할 때 동행하면서 더욱 커졌다. 이때 그는 케라스코, 노바라, 파비아 등의 도시를 획득했다.
그러나 명목상 마지막 마요르카의 여왕이었던 마요르카의 이사벨라와 결혼하면서 그는 황제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이후 황제군과 비스콘티 가문 군대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이 분쟁은 조반니 2세가 점령했던 파비아 주변 영토를 비스콘티 가문에게 넘겨주는 대신, 아스티 지역의 비스콘티 영토를 받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반니 2세는 많은 봉신들을 비스콘티 가문에게 빼앗겼다.
1372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조반니 2세는 자신의 자녀들의 후견을 사촌 오토 폰 브라운슈바이크-그루벤하겐과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 디 사보이아에게 맡겼다. 그는 아내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아들(오토네, 조반니, 테오도로, 굴리엘모)과 딸 마르게리타를 두었으며, 아들 중 세 명이 차례로 후작위를 계승했다. 조반니 2세는 유언장을 작성한 직후 토리노 근교의 볼피아노에서 사망했으며[2][3], 유언에 따라 키바소에 묻혔다.
2. 3.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1355년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을 순방하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를 조반니 2세가 수행하면서 그의 권력은 더욱 커졌다. 이때 황제로부터 케라스코, 노바라, 파비아 등의 도시를 수여받았다.그러나 마지막 명목상의 마요르카 여왕인 마요르카의 이사벨라와 결혼하면서 황제의 지지를 잃게 되었고, 이후 제국군과 비스콘티 가문 군대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갈등은 조반니 2세가 점령하고 있던 파비아 주변 영토를 아스티 지역의 비스콘티 영토와 교환하여 비스콘티 가문에게 반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반니 2세는 비스콘티 가문에게 많은 봉신들을 잃었다.
2. 4. 사망과 유산
마지막 마요르카 여왕인 이사벨 데 마요르카와 혼인하면서, 조반니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의 지지를 잃게 되었다. 이로 인해 황제와 비스콘티 가문 군대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이 분쟁은 조반니가 점령했던 파비아 주변 영토를 비스콘티 가문에 넘겨주는 대신, 아스티 지역의 비스콘티 영토를 받는 방식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반니는 많은 봉신들을 비스콘티 가문에게 빼앗겼다.1372년, 조반니는 유언장을 작성하여 자신의 자녀들의 후견을 사촌인 브라운슈바이크의 오토와 사보이아 백작 아메데오 6세에게 맡겼다. 그는 아내 이사벨라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아들(세콘도토, 조반니 3세, 테오도로 2세, 굴리엘모)과 딸 마르게리타 팔레올로기나를 두었다. 아들 중 세 명, 즉 세콘도토(오토네 3세), 조반니 3세, 테오도로 2세가 차례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몬페라토 후작위를 계승했다.
조반니 2세는 유언장을 작성한 직후인 1372년, 토리노 근처의 볼피아노에서 사망했으며[2][3], 키바소에 묻혔다.
3. 자녀
wikitext
이름 | 작위 | 생몰년 |
---|---|---|
오토네 3세 (세콘도토) | 몬페라토 후작 | 1358/61년 - 1378년 |
조반니 3세 | 몬페라토 후작 | 1362년경 - 1381년 |
테오도로 2세 | 몬페라토 후작 | 1364년 - 1418년 |
마르게리타 | 1364년 - 1420년 | |
구리에르모 | 1365년 - 1400년 |
참조
[1]
뉴스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http://www.marchesim[...]
Roma
2000
[2]
뉴스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http://www.marchesim[...]
Roma
2000
[3]
뉴스
Dizionario Biografico degli Italiani
http://www.marchesim[...]
Roma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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