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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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자칭은 북송 태조 조광윤의 후손으로, 남송 시대의 인물이다. 1119년 사시에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최종 관직은 좌조봉대부에 이르렀다. 1143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 1143년 9월 29일에 사망했다. 그의 둘째 아들은 남송 고종의 양자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태자소사, 태사 중서령으로 추증되고 수왕에 추봉되었다. 조자칭의 후손으로는 조맹부가 있다.
조자칭은 태조 조광윤의 넷째 아들 진강혜왕 조덕방(趙德芳)의 5대손으로, 1112년생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생년은 알 수 없다.[1] 정강의 변으로 북송 황족들이 금나라에 끌려간 후, 고종은 종실 아들들을 양자로 들였는데, 조자칭의 둘째 아들 조백종(趙伯琮)도 이름을 원(瑗)으로 고치고 고종의 양자가 되었다.[1] 조백종은 1135년 건국공(建国公)에 봉해졌다가 후에 보안군왕(普安郡王)으로 진봉되었다.[1]
작자 미상의 조자칭 초상화가 근대 이전에 그려져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며, 2024년 공개되었다.[1] 그의 묘소는 수원(秀園)이다.
2024년 작자 미상으로 근대 이전에 그려진 그의 초상화가 후손들에게 전해졌으며 공개되었다.[1] 그의 묘소는 수원(秀園)이다.
2. 생애
조자칭은 1136년 사록관(祠禄官)을 거쳐 좌조봉대부(左朝奉大夫)에 이르렀고, 1143년 관직에서 물러났다.[1] 같은 해 9월 29일 수주(秀州, 현 저장성 자싱 시)에서 사망했으며, 고종의 명으로 양자인 보안군왕 원이 복상했다.[1]
1144년 태자소사(太子少师)로 추증되었고, 1161년 황태자의 생부라는 이유로 황형(皇兄) 칭호와 함께 증 태사 중서령(太師 中書令) 및 수왕(秀王)에 추봉되었으며, 안희(安僖)라는 시호를 받았다.[1] 이후 둘째 아들 효종이 즉위하면서 황백(皇伯)이라 칭해져, 수안희왕(秀安僖王) 또는 안희수왕(安僖秀王)으로 불렸다.[1]
2. 1. 가계와 초기 생애
조자칭의 생년은 미상이나, 1112년생이라는 설이 있지만 정확하지 않다. 생일은 기록에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태조 조광윤의 넷째 아들 진강혜왕 조덕방(趙德芳)의 5대손이다.[1]
조부는 화주관찰사 등을 지내고 사후 증 태사(贈太師) 복국공(福國公)에 추봉된 조세장(趙世將)이고, 할머니는 숙인으로 증 상국부인에 추봉된 이씨(李氏)이다.[1] 아버지는 서두공봉관, 무략대부 등을 지내고 경국공(慶國公)에 봉해졌으며 사후 증 태사, 익국공에 추봉된 조영회(趙令譮)이고, 어머니는 의인 또는 대부인이고 사후 증 제국부인에 추봉된 유씨(劉氏)이다.[1] 그의 부인 장씨(張氏)는 차남 효종이 즉위하는 것을 보고 1167년에 사망했다.[1] 장남 숭헌정왕 조백규(趙伯圭)의 4대손이 원나라의 문인 조맹부이다.[1]
외가 쪽 기록은 전하지 않으나, 할머니 수안현군 증 상국부인 이씨는 북송의 개국공신 중 한 사람이며, 북송 태종의 명덕황후 이씨(明德皇后 李氏)의 친정오라비 이계륭(李繼隆)의 증손녀였다.[1]
1119년(선화 원년) 사시(舍試)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라 선교랑 호주통판, 가흥현승 등을 역임하고 조청랑 비각수찬, 조봉랑 지처주사로 부임했다.[1]
2. 2. 관직 생활
1119년(선화 원년) 사시(舍試)에 합격, 선교랑(宣敎郎) 호주통판(湖州通判), 가흥현승(嘉興縣丞) 등을 역임하고 조청랑(朝请郎) 비각수찬(秘阁修撰), 조봉랑(朝奉郎) 지처주사(知處州事)로 부임했다. 정강의 변으로 북송의 많은 황족들이 금나라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자 남송 고종은 자신과 같은 항렬의 종실의 아들들을 양자로 입양했고, 그 중 조자칭의 둘째 아들 백종도 이름을 원(瑗)으로 개명하고 고종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1135년(소흥 5년) 고종의 양자로 입양된 차남 백종은 건국공(建国公)에 봉해지고 궁궐에서 양육됐으며 뒤에 보안군왕(普安郡王)으로 진봉됐다.
1136년(소흥 6년) 사록관(祠禄官)이 되기를 청하여 승인받고 사록관이 되었다. 최종 관직은 좌조봉대부(左朝奉大夫)에 이르렀다. 1143년(소흥 13년) 관직을 치사(致仕)하고 물러났다.
2. 3. 사망과 추증
1143년 9월 29일 수주(秀州, 현 저장성 자싱 시)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때 고종은 특명을 내려 보안군왕 원(瑗)에게 복상하게 했다.[1]
1144년 6월 3일 특증(特贈) 태자소사(太子少师)에 추증되었고,[1] 1161년 6월 중서사인 당문약(唐文若), 황의(黄矣) 등의 상소로 황태자의 소생부(所生父)라 하여 추증이 건의되어, 특별히 황형(皇兄)의 칭호와 증직이 더해져 증 태사 중서령(太師 中書令)에 추증되고 수왕(秀王)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안희(安僖)의 시호를 받았다.[1] 둘째 아들 효종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황백(皇伯)이라 칭해졌다.[1] 따라서 수안희왕(秀安僖王) 또는 안희수왕(安僖秀王)으로 불린다.[1]
3. 가계
관계 이름 비고 아버지 조백규(趙伯圭) 영양군왕(滎陽郡王) 숭헌정왕(崇憲靖王) 아들 조사기(趙師夔) 영흥군절도사(永興軍節度使)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신안군공영왕(新安郡恭榮王), 사수왕(嗣秀王) 아들 조사규(趙師揆)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 증(贈) 풍공혜왕(澧恭惠王) 아들 조사수(趙師垂) 신흥공량군왕(新興恭良郡王), 조맹부의 고조부 아들 조사직(趙師稷) 요절 아들 조사우(趙師禹) 보강군절도사(保康軍節度使) 천수군개국공(天水郡開國公), 증(贈) 태부(太傅) 증(贈) 화단숙왕(和端肅王) 추봉 아들 조사고(趙師皐) 보경군승선사(保慶軍承宣使) 제거우신관(提舉佑神觀), 증(贈) 함녕소숙왕(咸寧昭肅王) 아들 조사암(趙師岩) 수왕(秀王), 증(贈) 영민혜왕(贈 永敏惠王) 아들 조사미(趙師彌) 수왕(秀王), 증(贈) 윤절혜왕(贈 潤節惠王) 아들 조사공(趙師貢) 선교랑(宣教郎) 참차통판(添差通判) 광덕군사(廣德軍事) 아들 조사설(趙師卨) 탐주방어사(深州防禦使) 제거우신관(提舉佑神觀), 증(贈) 소경군절도사(昭慶軍節度使) 추봉(追封) 신국공(信國公) 딸 가흥현주(嘉興縣主) 정사종(鄭嗣宗)의 처 딸 영가군주(永嘉郡主) 장이매(張似續)의 처 딸 신안군주(新安郡主) 사미원(史彌遠)의 친동생 사미견(史彌堅)의 처 4. 후손
조자칭의 아들 영양군왕(滎陽郡王) 숭헌정왕 조백규(崇憲靖王 趙伯圭)는 기록에 전하는 아들만 10명이다.이름 설명 조사기(趙師夔) 영흥군절도사 개부의동삼사(永興軍節度使開府儀同三司), 신안군공영왕(新安郡恭榮王), 사수왕(嗣秀王) 조사규(趙師揆) 봉국군절도사(奉國軍節度使), 증 풍공혜왕(贈 澧恭惠王) 조사수(趙師垂) 신흥공량군왕(新興恭良郡王) 조사직(趙師稷) 요절 조사우(趙師禹) 보강군절도사(保康軍節度使) 천수군개국공(ㅍ天水郡開國公), 증 태부 증 화단숙왕(贈 和端肅王) 추봉 조사고(趙師皐) 보경군승선사 제거우신관(保慶軍承宣使 提舉佑神觀), 증 함녕소숙왕(咸寧昭肅王) 조사암(趙師岩) 수왕(秀王), 증 영민혜왕(贈 永敏惠王) 조사미(趙師彌) 수왕(秀王), 증 윤절혜왕(贈 潤節惠王) 조사공(趙師貢) 선교랑 참차통판 광덕군사(宣教郎 添差通判 廣德軍事) 조사설(趙師卨) 탐주방어사 제거우신관(深州防禦使 提舉佑神觀), 증 소경군절도사 추봉 신국공(贈 昭慶軍節度使 追封信國公)
조자칭의 딸은 기록에 3명이 전한다.
수왕가계는 조백규를 거쳐 증 풍공혜왕 조사규에게로 이어졌다. 조백규의 3남 신흥공량군왕 조사수는 조맹부의 고조부가 된다. 신흥공량군왕 조사수의 아들은 오흥군공 조희연(吳興郡公 趙希戭), 손자는 조여은(趙與訔), 임해군왕 조여택(臨海郡王 趙與澤) 등인데 조여은이 조맹부의 아버지이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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