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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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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버클리는 1685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이다. 그는 경험주의 철학을 추구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주장을 통해 주관적 관념론을 펼쳤다. 주요 저서로는 《시각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에세이》, 《인간 지식의 원리에 관한 논문》, 《하일라스와 필로나스의 대화》 등이 있다. 그는 미적분학의 기초를 비판하며 수학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미국에 칼리지 설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버클리의 철학은 데이비드 흄 등 근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사상은 현대 심리학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시의 명칭에도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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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클리
기본 정보
존칭정교회 주교
이름조지 버클리
존 스미버트의 버클리 초상화, 1727년
교회아일랜드 교회
직위클로인 주교
관할 교구클로인
재임 기간1734년–1753년
이전 주교에드워드 싱
다음 주교제임스 스톱퍼드
서품1709년 (부제)
1710년 (사제)
축성1734년 1월 18일
출생일1685년 3월 12일
출생지Dysart Castle, 토마스타운 근처, 킬케니 주, 아일랜드
사망일1753년 1월 14일
사망지옥스퍼드, 잉글랜드
종교성공회
배우자앤 포스터
자녀6명
철학자 정보
철학 분야서양 철학
시대18세기 철학
학파/전통주관적 관념론 (현상주의)
경험주의
기초주의
개념주의
간접 실재론
교육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B.A., 1704년; M.A. 1707년)
소속 기관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
주요 관심사기독교
형이상학
인식론
언어 철학
수학 철학
지각
주요 사상주관적 관념론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다')
주인 논증
수동적 복종
서명
발음 정보
영어 발음 (IPA)/ˈbɑːrkli/
기타 정보
참고 자료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 (1709)
인용Richard A. Watson의 Berkeley Is Pronounced Barclay 논문

2. 생애

1685년 3월 12일 킬케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윌리엄은 군인이었다. 1696년 킬케니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707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펠로우로서 대학에 남았다.

1709년에는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에세이(시각 신론)』을 출판하였고, 1710년에는 『인간 지식의 원리에 관한 논문(인지 원리론)』을 출판하였다. 1713년에는 『하일라스와 필로나스의 대화(하이라스와 필로나스의 대화)』를 출판하였다. 1721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725년 조지 버클리는 영국 식민지 버뮤다에 성직자 양성 칼리지 설립 계획을 세웠다.[100]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를 위해 총사제 성직이 보장한 1,100 파운드의 노동소득을 포기하고, 100 파운드의 노동소득을 받는 아메리카 지역 선교사가 되어 미국으로 갔다.[100]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 근처에 상륙하여 플랜테이션 농장을 구매하고 "화이트홀"이라는 집을 지었다.[100] 그는 농장일을 위해 여러명의 노예로 팔린 아프리카인들을 구입했다.[17][18] 1730년 10월 4일, 버클리는 "14살쯤 된 필립이라는 이름의 흑인노예"를 샀고, 며칠 후에는 "20살쯤 된 에드워드라는 이름의 흑인노예"를 샀다. 1731년 6월 11일, 버클리는 세 명의 노예, "필립, 안토니, 그리고 아그네스 버클리"에게 세례를 주었다.[100]

1728년 8월 1일 런던의 세인트 메리르 스트랜드 교회[16]에서 버클리는 앤 포스터와 결혼했고, 그는 연봉 100파운드를 받고 미국으로 갔다.[16] 그는 미들타운에 있는 "화이트홀"이라는 농장을 샀다.[17] 버클리가 팔라디오 양식을 미국에 소개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집 화이트홀의 문틀 디자인을 [윌리엄] 켄트의 ''이니고 존스의 디자인''에서 빌렸다는 것이다.[20] 그는 또한 존 스미버트를 뉴잉글랜드로 데려왔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미국 초상화의 창시자로 여겨진다.[21] 그는 버뮤다에 건설할 계획인 이상적인 도시의 설계도를 작성했다.[22] 그는 대학 자금이 도착할 때까지 농장에서 살았지만, 자금은 제공되지 않았다.[23] 월폴은 점점 더 회의적이고 미온적이 되었고, 마침내 필수적인 의회의 지원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23] 1732년 그는 미국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23]

1734년 아일랜드 국교회의 클로인 주교로 임명되었다.[28] 주교로 서임된 후, 그는 《알치프론, 또는 세심한 철학자》를 출간하여 새프츠베리의 사상에 관심을 표명했고, 1734년부터 1737년까지는 《질문자》를 펴냈다. 그의 마지막 간행물은 《시리우스》와 《타르-물에 대한 깊은 생각》이었다.[28] 송진 타르는 피부 상처에 바르면 효과적인 방부제 및 소독제이지만, 버클리는 송진 타르를 광범위한 질병의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

그는 1752년까지 클로인에 머물다가 은퇴 후 옥스포드로 가서 아들 조지와 함께 살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여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 묻혔다.[24][25] 그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온화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했다.[25]

2. 1. 아일랜드와 교육

조지 버클리는 아일랜드 토머스타운 근처에 있는 다이저트 성에서 태어났으며, 버클리 귀족가문의 막내이었던 윌리엄 버클리의 큰아들이었다.[13][14]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글로스터에서 봉건 영주이자 지주로 활동했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킬케니 칼리지에서 교육을 받았고, 1696년 킬케니 대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칼리지(Trinity College, Dublin)에서 1707년 석사학위를 끝마쳤다.[13][14] 학위를 마친 후에도 그 학교에 남아 있으면서 그리스어 강사로 일했다. 그는 1702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의 장학생으로 선발되었고, 1704년 학사, 1707년에 석사 학위와 펠로우십을 수여받았다.

그의 초기 저술은 수학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에게 주목을 받게 한 첫 번째 저술은 1709년에 처음 출판된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에세이(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였다. 이 에세이에서 버클리는 시각적 거리, 크기, 위치 및 시각과 촉각의 문제를 검토한다. 이 작품은 당시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그 결론은 현재 광학 이론의 확립된 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1710년 출판된 ''인간 지식의 원리에 관한 논문(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은 그에게 지속적인 명성을 안겨주었다. 1713년에는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세 가지 대화(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가 출판되었는데, 여기서 그는 그의 철학 체계를 제시했다.

1721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 2. 초기 저술 및 철학 활동

조지 버클리는 1685년 3월 12일 킬케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윌리엄은 군인이었다. 1696년 킬케니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707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펠로우로서 대학에 남았다.

1709년에는 『시각 신론』을 출판하였고, 1710년에는 『인지 원리론』을 출판하였다. 1713년에는 『하이라스와 필로나스의 대화』를 출판하였다. 1721년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 3. 유럽 여행과 성직 서품

버클리는 잉글랜드를 방문하여 애디슨, 포프, 스틸의 모임에 참여하였다. 1714년부터 1720년 사이에는 이탈리아 전역을 탐방한 그랜드 투어를 포함하여 유럽을 광범위하게 여행했다.[15] 1721년, 아일랜드 교회에서 성직 서품을 받고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다시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에 남아 신학과 히브리어를 강의했다.[15] 드로모어 대성당장이 된 것은 1721/2년이었고, 1724년에는 데리 대성당장이 되었다.[15]

1723년, 버클리는 에스터 반호마이의 공동 상속인으로 지명되었는데, 이는 반호마이가 조너선 스위프트와 격렬하게 다툰 후에 이루어진 일이었다.[15] 버클리는 매우 어릴 적에 그녀의 아버지를 알았지만, 반호마이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상속인으로 지정한 것은 많은 놀라움을 자아냈다.[15]

1725년, 버클리는 버뮤다에 칼리지를 설립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며, 이를 위해 1100파운드의 수입을 가진 대성당장직을 포기했다.[15]

2. 4. 식민지 선교와 미국 체류

1725년 조지 버클리는 영국 식민지 버뮤다에 성직자 양성 칼리지 설립 계획을 세웠다.[100]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를 위해 총사제 성직이 보장한 1,100 파운드의 노동소득을 포기하고, 100 파운드의 노동소득을 받는 아메리카 지역 선교사가 되어 미국으로 갔다.[100] 로드아일랜드주 뉴포트 근처에 상륙하여 플랜테이션 농장을 구매하고 "화이트홀"이라는 집을 지었다.[100] 그는 농장일을 위해 여러명의 노예로 팔린 아프리카인들을 구입했다.[17][18] 1730년 10월 4일, 버클리는 "14살쯤 된 필립이라는 이름의 흑인노예"를 샀고, 며칠 후에는 "20살쯤 된 에드워드라는 이름의 흑인노예"를 샀다. 1731년 6월 11일, 버클리는 세 명의 노예, "필립, 안토니, 그리고 아그네스 버클리"에게 세례를 주었다.[100]

1728년 8월 1일 런던의 세인트 메리르 스트랜드 교회[16]에서 버클리는 앤 포스터와 결혼했고, 그는 연봉 100파운드를 받고 미국으로 갔다.[16] 그는 미들타운에 있는 "화이트홀"이라는 농장을 샀다.[17] 버클리가 팔라디오 양식을 미국에 소개했다는 주장이 있는데, 로드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집 화이트홀의 문틀 디자인을 [윌리엄] 켄트의 ''이니고 존스의 디자인''에서 빌렸다는 것이다.[20] 그는 또한 존 스미버트를 뉴잉글랜드로 데려왔는데, 그는 일반적으로 미국 초상화의 창시자로 여겨진다.[21] 그는 버뮤다에 건설할 계획인 이상적인 도시의 설계도를 작성했다.[22] 그는 대학 자금이 도착할 때까지 농장에서 살았지만, 자금은 제공되지 않았다.[23] 월폴은 점점 더 회의적이고 미온적이 되었고, 마침내 필수적인 의회의 지원금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23] 1732년 그는 미국을 떠나 런던으로 돌아왔다.[23]

2023년 트리니티 칼리지 더블린은 그의 노예 소유와 노예 제도 적극 옹호 때문에 그의 이름을 도서관 하나에서 삭제했다.[19]

2. 5. 성공회 주교 임명과 은퇴

조지 버클리는 1734년 아일랜드 국교회의 클로인 주교로 임명되었다.[28] 주교로 서임된 후, 그는 《알치프론, 또는 세심한 철학자》를 출간하여 새프츠베리의 사상에 관심을 표명했고, 1734년부터 1737년까지는 《질문자》를 펴냈다. 그의 마지막 간행물은 《시리우스》와 《타르-물에 대한 깊은 생각》이었다.[28] 송진 타르는 피부 상처에 바르면 효과적인 방부제 및 소독제이지만, 버클리는 송진 타르를 광범위한 질병의 만병통치약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8]

그는 1752년까지 클로인에 머물다가 은퇴 후 옥스포드로 가서 아들 조지와 함께 살았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여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 대성당에 묻혔다.[24][25] 그의 다정다감한 성격과 온화한 태도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게 했다.[25]

3. 철학

1709년 발표한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98]으로 처음 주목을 받았다. 당시에는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오늘날 그의 결론은 기초적 광학이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버클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그의 이론에서 '''가장 극단적인 경험주의'''(Empiricism)를 추구했다. 젊은 시절, 버클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정확히 그들이 감지되는 만큼 존재한다'는 것을 이론화했다. 인식되는 대상은 오직 존재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객관적인 지식은 가능하다. '인식되는 대상의 실체인 "진짜" 대상은 없다'. 인식의 원인이 되며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진짜"대상("물질")은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며, 그것이 실제 대상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만이 존재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대상은 정확하게 그것이 드러난 것 자체이다'.[102]

이 주장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이 인식된 대상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존재의 감각에서 "물질적인" 것인가? 버클리는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이 그에게 말하는 식의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은 그 자신의 활동에서 처음 창조된 것이 아니며,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이 그의 경험과 일치한다는 것을 배운다고 대답한다. 따라서 사람은 자신의 존재와 세계가 모든 이들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102]

버클리에게 있어서 세상 모든 것은 관념적이다. 제 일원인이 되는 지성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감각은 외부의 물체에 의해서 기인하지 않는다. 그 물체들은 하느님의 지성에 있는 관념들이다.[102]


  • 경험적인 세계의 지식은 오직 직접적인 인식을 통해 획득된다.
  • 착오는 개인들이 인식하는 것에 관한 생각을 통해서 일어난다.
  • 사람, 사물,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작용에 대한 경험적인 세계의 지식은, 그들의 순수한 인식들로부터, 단지 그것의 언어와 함께 모든 관념을 제거함으로써만 완전해지고 정화될 수 있을 것이다.
  • 과학적인 지식의 이상적 형태는 순수한, 지식화되지 않은 인식들을 추구함으로써 획득된다.
  • 만약 개인들이 이것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자연적인 세계와 인간 관념의 세계 그리고 인간에게 유용한 작용에 대해 깊이있는 통찰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므로 모든 과학의 목표는 비(非)지식화 또는 비(非)개념화이며 그러한 노력의 결과는 순수한 인간의 인식들이다.[102]


신학적으로, 버클리 견해의 한 결론은, 사람들이 신에게 우리의 모든 경험들의 즉각적인 원인으로 임재해 달라고 요청한다는 것이다. 신은 대학교 뜰에 있는 나무의 성장을 유도하며 시간의 충만 속에 거하는, 뉴턴 이론적 기계의 멀리 떨어진 기획자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나무에 대한 인식은, 신의 정신이 나의 정신 속에 만들어 낸 하나의 관념이다. 그리고 신은 모든 것을 인식하는 무한한 정신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곳에 없을 때까지 나무는 뜰에 존재하기를 계속한다.[102]

객관성과 인과 관계에 관한 '''데이비드 흄'''의 철학은, 버클리 철학의 또다른 국면에서 나온 역작이다. 버클리의 사상이 진보함에 따라, 그의 저서들은 점점 플라톤적인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특별히 '시리우스'는 초기 저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깊고 난해하며 명상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20세기의 탁월한 버클리 학자인 루스(A.A. Luce)는 지속적으로 버클리 철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102]

버클리의 철학을 언급하며, 사무엘 존슨 박사는 무거운 돌을 발로 차면서 "나는 그것을 이렇게 논박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철학적인 경험주의자는 사무엘 존슨박사가 그의 귀로 듣고 그의 발로 느끼며 그의 눈으로 보는 것인 돌을 알고 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무엘 존슨 박사의 인식이 배타적으로 이루어낸 돌의 존재이다.[102]

버클리는 대화들에서 우리가 그것의 기본적이고 부차적인 질(質)적 측면에 의해 대상을 정의한다고 말함으로써 이것을 보여준다. 그는 부차적인 질(質)의 예로 다음의 것을 채택하였다. 만약 당신이 한 손으로 차가운 물을 담은 양동이를 들고 있고 당신의 다른 손으로 따뜻한 물이 담겨있는 양동이를 든 후에 양손으로 미적지근한 물을 들면, 당신의 손 중 하나는 당신에게 물이 차갑다고 말하고, 당신의 나머지 손은 물이 뜨겁다고 말할 것이다. 버클리는 두 가지 다른 대상(당신의 손들)이 물을 뜨겁거나 차갑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 온도는 물의 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본적인 질(質)은 같은 방식으로 다루어진다. 버클리는 크기가 대상의 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대상의 크기는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거리나 관찰자의 크기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다른 관찰자에 따라 다른 크기이기 때문에 크기는 대상의 질이 아니다. 버클리는 모양도 같은 논리로 논박하였고, 다음과 같이 물었다."만약 기본적인 질이나 부차적인 질 모두 물체의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관찰하는 질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102]

1710년인간 지식의 원리론(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99]1713년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 1713)[99]을 출간했다.

버클리 철학에서 "정신"과 "관념"이라는 개념의 사용은 중심적이다. 그가 사용한 이 개념들은 현대 용어로 번역하기 어렵다. 그의 "정신"이라는 개념은 "의식적 주체" 또는 "마음"이라는 개념과 가깝고, "관념"이라는 개념은 "감각" 또는 "마음 상태" 또는 "의식적 경험"이라는 개념과 가깝다.[26]

따라서 버클리는 물질을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사과나 산과 같은 물리적 대상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다.[26] 버클리 사상의 이 기본적인 주장, 즉 그의 "관념론"은 때때로 다소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비물질주의" 또는 때때로 관념론이라고 불린다. 그는 라틴어와 영어를 결합하여 "esse is percipi"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고 썼는데, 이는 대부분 약간 부정확하게 순수 라틴어 구절 '''''esse est percipi'''''로 버클리에게 귀속된다.[27] 이 구절은 권위 있는 철학적 자료에서 그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예를 들어, "버클리는 마음과 독립적인 그러한 사물은 없다고, 유명한 구절에서처럼 ''esse est percipi (aut percipere)''—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혹은 지각한다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28]

따라서 인간의 지식은 정신과 관념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축소된다 (''원리'' #86). 관념과는 대조적으로 정신은 지각될 수 없다. 관념을 지각하는 한 사람의 정신은 내적 감각이나 반성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원리'' #89). 버클리에 따르면, 우리는 정신에 대한 직접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경험에서 발견하는 목적있는 규칙성을 설명하기 때문에 다른 정신의 존재를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29] 이것이 버클리가 타자의 마음 문제에 대해 제시하는 해결책이다. 마지막으로, 세계와 특히 자연에 대한 우리의 경험 전체의 질서와 목적성은 그 질서를 초래하는 매우 강력하고 지적인 정신의 존재를 믿도록 우리를 압도한다. 버클리에 따르면, 그 외부 정신의 속성에 대한 반성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신과 동일시하게 한다. 따라서 사과와 같은 물질적인 것은 신의 정신에 의해 인간의 정신에 생겨나는 관념(모양, 색깔, 맛, 물리적 속성 등)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Esse percipi est, To be is to be perceived)라는 기본 원리를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6]

버클리(Berkeley)는 존 로크경험론을 계승하여,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관념의 결합・일치・불일치・배반의 지각이 지식이며, 모든 관념과 지식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버클리의 저서 『히라스와 필로나스와의 세 가지 대화』는, 소박실재론적인 생각을 하는 히라스에게 버클리의 대변자인 필로나스가 반론하는 대화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박실재론에 따르면, 내가 지각하는 것은 존재한다. 나의 마음과 나의 몸도 존재한다. 내가 지각하고 있는 눈앞의 책상과 세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버클리에 따르면, 세계는 관념이며, 예를 들어 내가 눈앞의 책상을 두드려 그 단단함을 인식하더라도, “책상의 단단함”으로서가 아니라, “지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며, “책상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주관적 관념론, 유아론으로 비판받았다. 이러한 비판을 받은 그는 『시각신론』을 먼저 발표하여 사람들을 어느 정도 그의 생각에 익숙하게 한 후, 그가 정말로 말하고 싶었던 『인지원리론』을 발표하는 절차를 밟았다. 나의 마음은 하나이며, 분할할 수 없고, 더 이상 연장할 수도 없으며, 형태도 없다. 따라서 나의 마음은 불멸이며, 이것은 실체이다. 나의 눈앞의 책상도 나의 몸도 세계조차도 내가 지각하는 한 “나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사물은 관념의 묶음이다.[96] 그는 물질을 부정하고, 감각적인 관념의 원인은 신이라고 하여, 지각하는 정신과 신만을 실체로 인정했다. 그는 성직자였으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를 연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는 물질을 실체라고 인정하는 것은 유물론적 무신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버클리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97] 추상관념이란, 구체적인 관념, 예를 들어 눈앞의 책상이나 컴퓨터에서 추출된 책상 일반의 관념이나 컴퓨터 일반의 관념이다. 이러한 추상관념의 기원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이데아론 등)과 부정하는 입장(유명론 등)으로 나뉜다.

1734년, 그는 이후 수학 발전에 영향력을 크게 끼쳤던, 과학의 기초에 대한 비평인 《The Analyst》를 출판했다.

3. 1. 경험론과 관념론

1709년 발표한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에서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지각하는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당시 많은 논란을 일으켰지만 기초적 광학이론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지는 결론을 제시했다.[98]

버클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그의 이론에서 '''가장 극단적인 경험주의'''(Empiricism)를 추구했다.[102]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정확히 그들이 감지되는 만큼 존재한다'고 이론화했으며, 인식되는 대상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지식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인식의 원인이 되며 '우리의 인식을 "넘어서는" "진짜"대상("물질")은 없다'고 주장하며,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며 그것이 실제 대상이라고 강조했다.[102]

이러한 주장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존재의 감각에서 "물질적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버클리는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은 자신의 활동에서 처음 창조된 것이 아니며,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이 자신의 경험과 일치한다는 것을 배운다고 답한다. 따라서 자신의 존재와 세계가 모든 이들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것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다.[102]

버클리는 세상 모든 것은 제일원인이 되는 지성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감각은 외부의 물체에 의해서 기인하지 않고 하느님의 지성에 있는 관념들이라고 주장했다.[102] 그는 경험적인 세계의 지식은 오직 직접적인 인식을 통해 획득되며, 착오는 개인들이 인식하는 것에 관한 생각을 통해서 일어난다고 보았다. 또한, 순수한 인식들을 추구함으로써 자연적인 세계와 인간 관념의 세계, 그리고 인간에게 유용한 작용에 대해 깊이있는 통찰들을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102]

신학적으로 버클리는 사람들이 신에게 우리의 모든 경험들의 즉각적인 원인으로 임재해 달라고 요청한다고 보았다. 신은 멀리 떨어진 기획자가 아니라, 모든 것을 인식하는 무한한 정신이기 때문에 "아무도" 없을 때에도 나무는 뜰에 존재하기를 계속한다는 것이다.[102]

데이비드 흄의 객관성과 인과 관계에 관한 철학은 버클리 철학의 또 다른 국면에서 나온 역작이다. 버클리의 사상은 점차 플라톤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특히 '시리우스'에서는 깊고 난해하며 명상적인 형이상학에 대한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20세기의 탁월한 버클리 학자인 루스(A.A. Luce)는 버클리 철학의 연속성을 강조한다.[102]

버클리의 철학을 언급하며, 사무엘 존슨 박사는 무거운 돌을 발로 차면서 "나는 그것을 이렇게 논박합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철학적인 경험주의자는 존슨 박사가 그의 감각을 통해 배타적으로 돌의 존재를 인식했다고 대답할 것이다.[102]

버클리는 대화들에서 우리가 그것의 기본적이고 부차적인 질(質)적 측면에 의해 대상을 정의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부차적인 질(質)의 예로 물의 온도를 들며, 두 가지 다른 대상(손)이 물을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에 온도는 물의 질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또한, 크기 역시 대상과 관찰자 사이의 거리나 관찰자의 크기에 의존하기 때문에 대상의 질이 아니라고 말하며, 모양도 같은 논리로 논박한다.[102]

1710년인간 지식의 원리론》(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99], 1713년 《힐라스와 필로누스의 대화》(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를 출간하여 자신의 철학 체계를 제시했다. 이 책에서 그는 '우리의 감각이 재현하는 세계가 지각되는 그것의 존재에 의존한다'는 핵심 원리를 제시했다. 그의 이론은 당시 우세했던 유물론에 맞서 싸우는 것을 주요 목적으로 했다.[99]

버클리 철학에서 "정신"과 "관념"이라는 개념은 중심적이며, 현대 용어로는 "의식적 주체" 또는 "마음", "감각", "마음 상태", "의식적 경험"과 가깝다.[26] 그는 물질을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물리적 대상의 존재는 부정하지 않았다.[26] 그의 "관념론"은 "비물질주의" 또는 관념론이라고 불리며, "esse is percipi"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구절로 대표된다.[27][28]

버클리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정신과 관념이라는 두 가지 요소로 축소되며, 정신은 지각될 수 없지만 내적 감각이나 반성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29] 그는 타자의 마음 문제에 대해, 경험에서 발견하는 목적있는 규칙성을 통해 다른 정신의 존재를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제시한다.[29]

철학자 칼 포퍼는 버클리의 주요 과학 저서 ''운동에 관하여(De Motu)''를 연구하면서 오컴의 면도날보다 더 강력한 "버클리의 면도날"이라는 추론 규칙을 제안했다. 이는 과학적 방법이 세상의 본질에 대한 진정한 통찰력을 제공하지 않으며, 세상의 본질은 적절한 형이상학적 사색과 추론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다는 극단적인 경험론적 관점을 나타낸다.[8][48] 포퍼는 버클리를 기능주의 철학자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과학 이론은 유용한 허구이며 참이라고 주장할 의도가 없다고 보았다.[49][50]

조지 버클리의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은 "감각적으로 인지되는 것만이 감각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다.[63] 그는 『인간 지식의 원리』에서 "감각의 관념은 상상의 관념보다 더 강력하고, 생생하며, 명료하며, 또한 안정적이고, 질서 정연하고, 일관성이 있다"고 말하며, 이를 통해 우리가 지각하는 것이 진정한 실재임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64]

모든 지식은 지각에서 비롯되며,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사물 자체가 아니라 관념이다. 사물 자체는 경험 밖에 있어야 하므로, 세계는 관념과 그 관념을 지각하는 정신으로만 구성된다.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거나 지각받는 한에서만 존재한다.[65] 버클리는 "'존재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말할 때는 지각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받는 것이다(esse est percipi)'이고, 주어에 대해 말할 때는 지각하거나 '지각한다(percipere)'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66]

버클리는 "집, 산, 강, 그리고 한마디로 모든 감각 대상은 지각되는 것과는 별개로 자연적이거나 실재적인 존재를 갖는다"는 견해를 공격하며, 이러한 관념이 모순된다고 믿는다.[64] 그는 사람들이 지각이 물질적 대상에 대해 암시하거나 추론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오류가 발생한다고 믿으며, 이 개념을 '추상적 관념'이라고 부른다. 그는 사람들이 실제 감각을 통해서만 감각으로 물질을 감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 개념을 반박한다.[64]

버클리의 사상은 데카르트의 철학을 반박했고, 존 로크에 의해 확장되었으며, 18세기 여러 철학자들에 의해 그의 경험론 형태가 거부되었기 때문에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로크의 철학은 세계에 물리적 원인의 존재를 암시하며, 버클리의 철학과 모순된다.[65]

버클리의 이론은 그의 경험론 형태에 크게 의존하며, 이는 다시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 그의 경험론은 모든 중요한 단어는 관념을 나타내고, 모든 사물에 대한 지식은 관념에 관한 것이며, 모든 관념은 외부 또는 내부에서 온다는 등의 다섯 가지 명제로 정의할 수 있다.[68]

버클리는 "감각에 각인된다", "정신의 열정과 작용에 주의를 기울여 지각된다", 또는 "기억과 상상의 도움으로 형성된다"라고 말하면서 관념 사이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68] 그의 사상에 대한 반박 중 하나는 방을 나가서 지각을 멈추면 그 방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버클리는 그것이 여전히 하느님에 의해 지각되고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이에 답한다.[65]

버클리는 유물론자가 표상적 유물론적 관점을 취할 수 있음을 예상하고, "관념은 관념 외에는 아무것과도 유사할 수 없습니다"라는 유사성 원칙으로 반박한다.[64] 그는 정신에 의존적인 관념과 정신과 무관한 물질적 실체를 구별하며, 그것들은 서로 유사하지 않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버클리는 관념이 어떻게 지식의 다양한 대상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려고 시도했으며, 비물질주의에 대한 그의 믿음을 통해 신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했다.[69][39] 그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기본 원리를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클리는 존 로크경험론을 계승하여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관념의 결합 등이 지식이며, 모든 관념과 지식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히라스와 필로나스와의 세 가지 대화』에서 소박실재론적인 생각을 하는 히라스에게 자신의 대변자인 필로나스가 반론하는 대화편 형식을 취했다. 버클리에 따르면 세계는 관념이며,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책상 그 자체"가 아니라 "지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96]

버클리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97] 추상관념이란 구체적인 관념에서 추출된 일반적인 관념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추상관념의 기원이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과 부정하는 입장으로 나뉜다고 보았다.

3. 2. 추상 관념 비판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Esse percipi est, To be is to be perceived)라는 기본 원리를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6]

버클리(Berkeley)는 존 로크경험론을 계승하여,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관념의 결합・일치・불일치・배반의 지각이 지식이며, 모든 관념과 지식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버클리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97] 추상관념이란, 구체적인 관념, 예를 들어 눈앞의 책상이나 컴퓨터에서 추출된 책상 일반의 관념이나 컴퓨터 일반의 관념이다. 이러한 추상관념의 기원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이데아론 등)과 부정하는 입장(유명론 등)으로 나뉜다.

3. 3. 신의 역할

버클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극단적인 경험주의를 추구했다.[102]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은 정확히 그들이 감지되는 만큼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이며, 그것이 실제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다른 사람들의 개인적인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일치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한다. 버클리는 다른 사람들의 경험이 자신의 활동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며, 그들의 세계관이 자신의 경험과 일치한다고 믿었다.[102]

버클리는 세상 모든 것이 관념적이며, 제일원인이 되는 지성 밖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감각은 외부의 물체에 의해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지성에 있는 관념들이라고 주장했다.[102]

버클리의 견해에 따르면, 경험적 세계의 지식은 직접적인 인식을 통해 획득되며, 착오는 개인들이 인식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통해 일어난다. 따라서 과학적 지식의 이상적 형태는 순수한 인식들을 추구함으로써 획득된다.[102]

버클리는 신이 우리의 모든 경험들의 즉각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신이 대학교 뜰에 있는 나무의 성장을 유도하는 멀리 떨어진 기획자가 아니라, 우리의 인식 자체가 신의 정신이 만들어 낸 관념이라고 보았다. 신은 모든 것을 인식하는 무한한 정신이기 때문에, "아무도" 그 곳에 없을 때까지 나무는 뜰에 존재하기를 계속한다고 했다.[102]

데이비드 흄의 인과 관계와 객관성에 관한 철학은 버클리 철학의 또 다른 측면을 상세히 설명한 것이다. A.A. 루스는 버클리 철학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버클리가 평생 동안 자신의 주요 저술로 돌아가 사소한 변화만을 가진 개정판을 발행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중요한 변화를 돌린다는 어떤 이론에도 반박된다고 주장했다.[31]

버클리의 사고실험은 로날드 녹스에 의해 오행속요의 형태로 요약 및 답변되었다.[102] 새뮤얼 존슨은 무거운 돌을 발로 차면서 버클리의 철학을 논박하려 했지만, 철학적인 경험주의자는 존슨 박사가 인지한 돌은 그의 인식에서 배타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대답했다.[102]

버클리는 대화들에서 우리가 대상의 기본적인 질과 부차적인 질적 측면에 의해 대상을 정의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차적인 질의 예로 물의 온도를 들었는데, 두 가지 다른 대상(손)이 물을 다르게 인식하기 때문에 온도는 물의 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기본적인 질(크기, 모양)도 같은 방식으로 논박하며, 기본적인 질이나 부차적인 질 모두 물체의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관찰하는 질 이상의 무엇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102]

아서 칼리어는 버클리의 책과 유사한 주장을 담은 책을 출판했지만, 두 저자 사이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03] 아서 쇼펜하우어는 버클리가 유심론의 아버지라고 평가했다.[104]

버클리는 신이 인간에게 감각을 주었고, 인간은 그 안에서 신의 말씀을 담은 징표와 상징을 보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30] 그는 물질이 의식과는 독립된 현실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과 신 사이에 아무것도 분리시키지 않는다고 주장했다.[30]

T. I. 오이저만은 버클리의 관념론이 신의 계시가 인간에게 직접 접근할 수 있게 한다고 설명했다.[30] 버클리는 신이 아이작 뉴턴의 기계장치의 먼 엔지니어가 아니라고 믿었다. 나무에 대한 인식은 신의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이며, "아무도" 없을 때도 나무는 구내에 계속 존재하는데, 그 이유는 신이 모든 것을 인지하는 무한한 마음이기 때문이다.[31]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라는 기본 원리를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96] 버클리는 존 로크경험론을 계승하여,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관념의 결합 등이 지식이며, 모든 관념과 지식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96] 그는 물질을 부정하고, 감각적인 관념의 원인은 신이라고 하여, 지각하는 정신과 신만을 실체로 인정했다. 그는 성직자였으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를 연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는 물질을 실체라고 인정하는 것은 유물론적 무신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96]

버클리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97]

3. 4. 상대성 논증

존 로크는 대상을 일차적 속성과 이차적 속성으로 정의하며, 열을 이차적 속성의 예로 들었다. 로크는 서로 다른 두 손이 같은 물을 다르게 인지하는 것을 근거로 열이 물의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버클리는 로크의 주장을 일차적 속성에도 적용했다. 그는 크기는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나 관찰자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므로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형태도 관찰자에 따라 다르게 인지되므로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버클리는 일차적 속성과 이차적 속성 모두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면, 우리가 관찰하는 속성 이상의 무엇이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상대성은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없다는 개념으로, 한 대상의 존재가 다른 대상의 존재에 의존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로크는 모양, 크기 등의 일차적 속성은 정신에 독립적이지만, 맛과 색깔과 같은 이차적 속성은 정신에 의존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버클리는 일차적 속성과 이차적 속성을 분리할 수 없다고 반박하며, 지각은 관찰자와 대상 사이의 거리에 따라 달라지므로 "확장되지만 (그 자체로는) 색깔이 없는 기계적 물질적 신체를 상상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32]

버클리는 지각되는 것이 같은 유형의 속성일지라도, 서로 다른 위치와 지각 때문에 완전히 반대일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이차적 속성인 색깔은 사과, 딸기, 토마토에서 빨간색으로 인지될 수 있지만, 색깔이 없다면 이것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따라서 일차적 속성과 이차적 속성 모두 정신에 의존적이며, 정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버클리는 합리론과 "고전적" 경험론에 반대했던 철학자로, 현실은 비물질적인 의식적인 정신과 그들의 관념으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 "주관적 관념론자"였다. 그는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을 의미함(esse est percipi)"[34]을 주장하며, 지각하는 주체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버클리의 상대성 주장은 대상의 지각이 서로 다른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에서, 지각되는 것이 실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버클리는 "간접적으로 지각할 때, 다른 것을 지각함으로써 한 관념을 지각한다"고 믿었다.[38] 이는 처음 지각된 기준이 다르면 그 후 지각되는 것도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예를 들어, 열 지각에서 한 손은 물이 뜨겁다고 지각하고 다른 손은 물이 차갑다고 지각하는 것은 상대성 때문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라는 개념을 적용하면, 두 지각 모두 다른 손에 의해 지각되기 때문에 물은 차갑고 뜨거워야 한다. 그러나 물은 동시에 차갑고 뜨거울 수 없으므로, 이는 지각되는 것이 항상 참이 아님을 보여준다.

버클리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97] 그는 구체적인 관념에서 추출된 추상관념은 플라톤이데아론과 같은 것이라 보고, 이러한 입장을 부정했다.

3. 5. 시각 이론

조지 버클리는 1709년에 출간한 《시각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위한 소론》(''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을 통해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40] 당시 그의 이론은 많은 논쟁을 일으켰으나, 오늘날에는 광학 이론에서 그의 결론은 확실하게 인정받는다.

버클리는 이 책에서 몰리뉴(William Molyneux), 월리스(Wallis), 맬브랑슈(Nicolas Malebranche), 데카르트(René Descartes)를 포함하는 '시각 연구가들(Optic Writers)'의 견해를 비판했다.[40] 그는 1~51절에서 시각의 고전 학자들에 반박하며, "지각자와 지각 대상을 분리하는 거리인 공간적 깊이는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는 공간을 직접 보거나 광학 법칙을 사용하여 논리적으로 그 형태를 추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버클리에게 공간은 시각적 감각과 촉각적 감각이 규칙적인 순서로 서로를 따를 것이라는 우연적인 기대 이상의 것이 아니며, 우리는 습관을 통해 이를 기대하게 된다.

버클리는 물체의 지각된 크기 또는 '혼란'과 같은 시각적 단서를 사용하여 거리를 간접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는 관찰자가 시각적 단서를 촉각적 감각과 연관시키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간접적인 거리 지각에 관한 비유를 제시했는데, 사람의 당황함을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것처럼 거리를 간접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당황한 사람을 볼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는 붉은색을 관찰하여 그 사람이 당황하고 있다고 간접적으로 추론한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붉은 얼굴이 당황함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두 가지를 연관시키는 것을 배웠다.

공간의 가시성에 관한 질문은 르네상스 시대의 원근법 전통과 공간적 깊이의 그림 표현 발전에 있어 고전 광학에 대한 의존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문제는 11세기 아랍의 다방면 학자이자 수학자인 알하젠(Abū ʿAlī al-Ḥasan ibn al-Ḥasan ibn al-Haytham)이 실험적 맥락에서 공간의 가시성을 확인한 이후로 학자들 사이에서 논쟁이 되어 왔다. 버클리의 시각 이론에서 제기된 이 문제는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Phenomenology of Perception)''에서 공간적 깊이(''la profondeur'')의 시각적 지각을 확인하고 버클리의 논제를 반박하는 맥락에서 자세히 다루어졌다.[41]

버클리는 거리뿐만 아니라 크기의 지각에 대해서도 서술했다. 그는 종종 시각 연구가들이 믿었던 크기-거리 불변성(size–distance invariance)을 믿었다고 잘못 인용된다. 이 개념은 우리가 기하학적인 방식으로 거리에 따라 이미지 크기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저명한 역사가이자 심리학자인 E. G. 보링이 이러한 오류를 퍼뜨렸기 때문에 이러한 오류가 일반화되었을 것이다.[42] 사실 버클리는 거리를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단서가 크기를 불러일으키며, 우리가 먼저 크기를 보고 거리를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43] 이 문제에 대한 버클리의 말을 인용할 가치가 있다(53절):

사람들을 이러한 오류로 이끄는 것은 (기하학으로 보게 만드는 유머 외에도) 거리를 시사하는 것과 같은 지각이나 관념이 크기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 저는 그것들이 먼저 거리를 시사하고 나서 판단이 그것을 매개체로 사용하여 크기를 수집하게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크기와 거리와 똑같이 밀접하고 직접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으며, 크기를 거리와 독립적으로 시사하는 것처럼 거리를 크기와 독립적으로 시사합니다.


버클리는 그의 시각 이론이 1728년 선천성 백내장 수술을 받은 13세 소년 다니엘 돌린스(Daniel Dolins)의 시력 회복에 관한 보고서에 의해 "입증"되었다고 주장했다.[44] 이 수술은 외과의사 윌리엄 체셀던(William Cheselden)이 집도했다.[44] 버클리는 돌린스 가족을 알고 있었고, 시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와 체셀던의 환자가 소개된 캐롤라인 공주(Princess Caroline)를 포함하여 체셀던과 많은 사회적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다.[44] 보고서에서는 체셀던의 이름을 잘못 표기했고, 버클리의 전형적인 언어를 사용했으며, 심지어 버클리가 대필했을 가능성도 있다.[44] 그러나 돌린스는 독서할 만큼 충분히 볼 수 없었으며, 30세에 사망하기 전 어느 시점에서도 수술이 돌린스의 시력을 개선했다는 증거는 없다.[44]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이다”(Esse percipi est, To be is to be perceived)라는 기본 원리를 제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버클리는 존 로크경험론을 계승하여,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관념의 결합・일치・불일치・배반의 지각이 지식이며, 모든 관념과 지식은 인간이 경험을 통해 형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저서 『히라스와 필로나스와의 세 가지 대화』는, 소박실재론적인 생각을 하는 히라스에게 버클리의 대변자인 필로나스가 반론하는 대화편 형식을 취하고 있다. 소박실재론에 따르면, 내가 지각하는 것은 존재한다. 그러나 버클리에 따르면, 세계는 관념이며, 예를 들어 내가 눈앞의 책상을 두드려 그 단단함을 인식하더라도, “책상의 단단함”으로서가 아니라, “지각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며, “책상 그 자체”를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주관적 관념론, 유아론으로 비판받았다. 그는 『시각신론』을 먼저 발표하여 사람들을 어느 정도 그의 생각에 익숙하게 한 후, 『인지원리론』을 발표했다.[96] 그는 물질을 부정하고, 감각적인 관념의 원인은 신이라고 하여, 지각하는 정신과 신만을 실체로 인정했다. 그는 성직자였으며, 종교적인 관점에서 영혼의 불멸과 신의 존재를 연결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그는 물질을 실체라고 인정하는 것은 유물론적 무신론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버클리는 추상관념의 존재를 부정한다.[97] 추상관념이란, 구체적인 관념에서 추출된 일반적인 관념이다. 이러한 추상관념의 기원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그 존재를 긍정하는 입장(이데아론 등)과 부정하는 입장(유명론 등)으로 나뉜다.

4. 수학 분야의 업적

조지 버클리는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발전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51] 그는 1734년 《해석자》(The Analyst)를 출판하여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발전시킨 미적분학의 기초와 원리, 특히 플럭션(Method of Fluxions) 또는 무한소 변화의 개념을 비판했다.[52]

버클리는 미적분학 비판을 뉴턴적 기계론의 종교적 적용에 맞서는 광범위한 운동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모두 무한소를 때로는 양수의 영이 아닌 양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0과 같은 수로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뉴턴의 미적분(그리고 미적분에 기반한 운동 법칙)에는 엄격한 이론적 기초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미적분이 현실 세계의 진실을 산출한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수학자들이 거짓 원리로부터 참된 명제를 추론하고, 결론에서는 옳지만 전제에서는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56]

버클리가 제기한 문제는 코시의 연구에도 존재했지만, 결국 바이어슈트라스가 엡실론-델타(ε, δ) 극한 정의를 통해 무한소를 제거하면서 해결되었다. 최근에는 아브라함 로빈슨이 1966년 저서 《비표준 해석》(Non-standard analysis)에서 무한소가 엄밀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였다.[55]

4. 1. 미적분학 비판

조지 버클리는 철학뿐만 아니라 수학 발전에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51] 그는 1734년 《해석자》(The Analyst)를 출판하여 뉴턴과 라이프니츠가 발전시킨 미적분학의 기초와 원리, 특히 플럭션(Method of Fluxions) 또는 무한소 변화의 개념을 비판했다.[52]

버클리는 미적분학 비판을 뉴턴적 기계론의 종교적 적용에 맞서는 광범위한 운동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 모두 무한소를 때로는 양수의 영이 아닌 양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0과 같은 수로 사용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는 뉴턴의 미적분(그리고 미적분에 기반한 운동 법칙)에는 엄격한 이론적 기초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며, 미적분이 현실 세계의 진실을 산출한다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수학자들이 거짓 원리로부터 참된 명제를 추론하고, 결론에서는 옳지만 전제에서는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역설적이라고 생각했다.[56]

버클리가 제기한 문제는 코시의 연구에도 존재했지만, 결국 바이어슈트라스가 엡실론-델타(ε, δ) 극한 정의를 통해 무한소를 제거하면서 해결되었다. 최근에는 아브라함 로빈슨이 1966년 저서 《비표준 해석》(Non-standard analysis)에서 무한소가 엄밀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보였다.[55]

버클리는 뉴턴의 유율법(미적분학)을 엄밀한 수학이 아니라고 배척했다. 그는 분수 ds/dt는 결국 무의미한 식 0/0이며, 계산 과정에서 dt0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dt0과 같다고 두는 것은 잘못된 추론이라고 주장했다.

4. 2. 비표준 해석학

뉴턴의 유율법(미적분학)을 엄밀한 수학이 아니라고 배척했다. 분수 ds/dt는 결국 무의미한 식 0/0이며, 계산 과정에서는 dt0이 아니라고 하면서, 마지막에 dt0과 같다고 두는 것은 잘못된 추론이라고 말했다.

5. 저작

조지 버클리의 주요 저작은 다음과 같다.


  • ''산술 (Arithmetica)'' (1707)
  • ''잡다한 수학 (Miscellanea Mathematica)'' (1707)
  • ''철학적 주석 (Philosophical Commentaries)'' 또는 ''공통 장소 책 (Common-Place Book)'' (1707–08, 수첩)
  • ''시각의 새로운 이론에 대한 에세이 (An 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 (1709)
  • ''인간 지식의 원리에 관한 논문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제1부 (1710)
  • ''수동적 복종, 또는 최고 권력에 저항하지 않는 그리스도교 교리 (Passive Obedience, or the Christian doctrine of not resisting the Supreme Power)'' (1712)
  • ''힐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세 편의 대화 (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 (1713)
  • ''대영제국의 멸망을 막기 위한 에세이 (An Essay Towards Preventing the Ruin of Great Britain)'' (1721)
  • ''운동에 관하여 (De Motu)'' (1721)
  • ''해외 식민지의 교회를 더 잘 공급하고 서머 아일랜드에 설립될 대학을 통해 야만적인 아메리카 원주민을 기독교로 개종하기 위한 제안 (A Proposal for Better Supplying Churches in our Foreign Plantations, and for converting the Savage Americans to Christianity by a College to be erected in the Summer Islands)'' (1725)
  • ''해외 선교를 위한 통합 협회 앞에서 행한 설교 (A Sermon preached before the incorporated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1732)
  • ''알키프론, 또는 섬세한 철학자 (Alciphron, or the Minute Philosopher)'' (1732)
  • ''시각에 대한 새로운 이론을 향한 에세이 (Essays toward a new theory of vision)'' (1732, 이탈리아어 번역)
  • ''시각 이론, 또는 시각 언어, 신의 즉각적인 현존과 섭리를 보여주고, 옹호하고, 설명하는 (The Theory of Vision, or Visual Language, shewing the immediate presence and providence of a Deity, vindicated and explained)'' (1733)
  • ''분석가: 불신하는 수학자에게 보내는 논문 (The Analyst: A Discourse Addressed to an Infidel Mathematician)'' (1734)
  • ''수학에 대한 자유 사상에 대한 변호, 아이작 뉴턴 경의 플럭션 원리를 옹호하는 월턴 씨의 부록과 함께 (A Defence of Free-thinking in Mathematics, with Appendix concerning Mr. Walton's vindication of Sir Isaac Newton's Principle of Fluxions)'' (1735)
  • ''월턴 씨의 완전한 답변에 답하지 않는 이유 (Reasons for not replying to Mr. Walton's Full Answer)'' (1735)
  • ''질문자, 대중의 고려를 위해 제기된 여러 질문을 포함하는 (The Querist, containing several queries proposed to the consideration of the public)'' (세 부분, 1735–37).
  • ''관리들과 권위자들에게 보내는 논문 (A Discourse addressed to Magistrates and Men of Authority)'' (1736)
  • ''시리스, 타르수의 효능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질문의 연쇄 (Siris, a chain of philosophical reflections and inquiries, concerning the virtues of tar-water)'' (1744).
  • ''클로인 교구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 (A Letter to the Roman Catholics of the Diocese of Cloyne)'' (1745)
  • ''현명한 사람들에게 한마디, 또는 아일랜드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들에게 하는 권고 (A Word to the Wise, or an exhortation to the Roman Catholic clergy of Ireland)'' (1749)
  • ''애국심에 관한 격언 (Maxims concerning Patriotism)'' (1750)
  • ''타르수에 대한 추가적인 생각 (Farther Thoughts on Tar-water)'' (1752)
  • ''잡다한 글 (Miscellany)'' (1752)


버클리의 저작들은 이노세 마사키(一ノ瀬正樹)에 의해 번역되어 일본에서 출판되기도 하였다. 그의 철학 연구 노트인 『철학적 주석』은 『철학』10호(철학서방, 1990)에 요약 번역되어 있다. 시모조 신스케(下條信輔), 우에무라 코이치로, 이노세 마사키는 『시각 신론』을 일본어로 번역하여 경초서방에서 출판했다. 오츠키 하루히코(大槻春彦)는 『인간 지식 원리론』을, 미야타케 아키라(宮武昭)는 동일 저서를 치쿠마 가쿠게이 문고에서 번역 및 출판했다. 나고에 에쓰와 나고에 사토루는 『하이라스와 필로누스의 삼 대화』를 사쓰마 서관에서 출판했고, 토다 쓰네후미(戸田剛文)는 이와나미 문고에서 번역 및 출판했다. 가와무라 다이젠과 히젠 에이이치는 『묻는 사람』을 도쿄대학 출판회에서 출판했다.

6. 영향 및 유산

버클리의 『인간 지식의 원리에 관한 논고』(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는 아서 콜리어(Arthur Collier)의 『만유의 열쇠』(Clavis Universalis)가 출판되기 3년 전에 출판되었는데, 콜리어의 주장은 버클리의 주장과 유사했다.[70] 그러나 두 저자 사이에는 어떠한 영향이나 교류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71]

독일 철학자 아서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그에 대해 "그러므로 버클리는 주관적인 출발점을 진정으로 심각하게 다루고 그 절대적 필요성을 반박할 수 없이 증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관념론의 아버지이다..."라고 썼다.[72] 버클리는 영국 경험론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73] 흔히 존 로크(Locke), 버클리(Berkeley), 데이비드 흄(Hume)으로 이어지는 세 명의 위대한 "영국 경험론자"들로부터 이어지는 선형적 발전 과정이 추적된다.[74]

버클리는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많은 근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75] 토마스 리드는 오랫동안 버클리의 철학 체계를 존경했지만, 나중에 버클리 사상에 대한 극단적인 비판을 제기했다고 인정했다.[75]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버클리의 사상은 흄의 작업, 그리고 따라서 칸트의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76] 어떤 저자들은 버클리와 에드문트 후설 사이의 유사점을 지적한다.[77]

버클리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교육자 새뮤얼 존슨이 그를 방문했고, 두 사람은 나중에 서신을 주고받았다. 존슨은 버클리가 예일대학교에 장학금 프로그램을 설립하고, 철학자가 영국으로 돌아왔을 때 많은 책과 그의 농장을 대학교에 기증하도록 설득했다. 이것은 예일대학교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기증 중 하나였으며, 도서관 소장품을 두 배로 늘리고 대학의 재정 상태를 개선했으며, 앵글리칸 종교 사상과 영국 문화를 뉴잉글랜드에 가져왔다.[78] 존슨은 또한 버클리의 철학을 받아들여 그 일부를 자신의 미국 실용 관념론 철학 학교의 틀로 사용했다. 1743년부터 1776년까지 미국 대학 졸업생의 약 절반이 존슨의 철학을 배웠고,[79] 독립 선언서 기고자의 절반 이상이 이와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80] 버클리의 사상은 간접적으로 미국 정신의 기초가 되었다.

미국을 제외하고 버클리 생전에는 그의 철학적 사상은 비교적 영향력이 없었다.[81] 그러나 19세기 최고의 버클리 학자인 알렉산더 캠벨 프레이저(Alexander Campbell Fraser)가 『조지 버클리의 작품』(The Works of George Berkeley)을 출판한 1870년대부터 그의 학설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82] 20세기 최고의 버클리 학자 중 두 명인 A. A. 루스(A. A. Luce)와 토마스 에드먼드 제솝(Thomas Edmund Jessop)은 버클리 연구가 역사 철학 과학의 특별 분야의 지위를 얻도록 했고, 이는 버클리 철학에 대한 심각한 연구에 강력한 자극을 주었다.[83] 철학자 콜린 머레이 터베인(Colin Murray Turbayne)은 시각적, 생리적, 자연적, 형이상학적 관계에 대한 모델로서 버클리의 언어 사용에 대해 광범위하게 저술했다.[84][85][86][87]

철학사 문헌에서 버클리 연구의 비중은 증가하고 있다. 1709년부터 1932년까지 버클리에 관한 약 300편의 저술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연간 1.5편에 해당한다. 1932년부터 1979년까지 1,000편이 넘는 작품이 출판되었는데, 이는 연간 20편에 해당한다. 그 이후로 출판물 수는 연간 30편에 이르렀다.[88] 1977년에는 아일랜드에서 버클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특별 저널(버클리 연구(Berkeley Studies))의 출판이 시작되었다. 1988년에는 호주 철학자 콜린 머레이 터베인이 버클리의 작품에 대한 학문과 연구를 진전시키기 위해 로체스터 대학교에서 국제 버클리 에세이상 경연 대회를 설립했다.[89][90]

철학 외에도 버클리는 존 로크의 연합 이론과 그것이 인간이 물리적 세계에서 지식을 얻는 방법을 설명하는 데 어떻게 사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연구를 통해 현대 심리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지각을 설명하기 위해 이 이론을 사용하여 모든 속성은 로크가 부르는 바와 같이 "2차적 속성"이므로 지각은 대상이 아닌 지각자에게 전적으로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모두 오늘날 현대 심리학에서 연구되는 주제이다.[91]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의 소재지인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시는 조지 버클리의 이름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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