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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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선제는 남조 진나라의 황제였다. 그는 진도담의 아들로, 530년에 태어났다. 후경의 난 이후 숙부 진패선에 의해 강릉으로 파견되었고, 서위에게 강릉이 함락된 후 장안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559년 안성왕으로 봉해졌으며, 562년 북주와의 협상으로 진나라로 돌아왔다. 569년 황제에 즉위하여 내정에 힘썼으며, 북제를 공격하여 회하 남북의 영토를 수복했으나, 북주의 침략으로 영토를 상실했다. 582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진숙보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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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선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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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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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진(陳) |
휘 | 진욱(陳頊) |
자 | 소세(紹世) |
아명 | 사리(師利) |
묘호 | 고종(高宗) |
시호 | 효선황제(孝宣皇帝) |
생년 | 530년 |
몰년 | 582년 |
능묘 | 현녕릉(顯寧陵, 현재의 위화타이 구, 난징) |
재위 | |
즉위 | 569년 2월 5일 |
퇴위 | 582년 2월 17일 |
연호 | 태건(太建): 569년–582년 |
전임자 | 폐제 |
후임자 | 후주 |
가족 관계 | |
부친 | 진도담 |
배우자 | 천씨(錢氏) 하동 유씨 |
2. 생애
진욱(陳頊)은 530년 양나라 궁궐 호위 대장 진도탄(陳道譚)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진도탄은 548년 또는 549년에 반란군 장군 후경이 수도 건강을 포위했을 때 궁궐 호위를 지휘하다 사망했다. 549년 궁궐이 함락된 후, 진욱의 형 진천과 사촌 진창은 후경에게 억류되었다. 이는 진창의 아버지인 장군 진패선이 양나라 원제인 소역의 휘하 장군 왕승변과 연합하여 후경에 대항했기 때문이다. 진욱도 억류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551년 왕승변은 진씨의 도움으로 후경을 격파하고 건강을 탈환했다. 소역은 황제를 칭했으나(원제), 건강으로 돌아가지 않고 강릉 (현재의 징저우, 후베이성)에 수도를 세우고 건강은 왕승변에게 맡겼다. 진패선은 징커우 (현재의 쩐장, 장쑤성)를 방어하는 직책을 받았다. 원제는 진창과 진욱을 강릉으로 불러들여 행정 업무를 수행하게 했으며, 인질 역할도 겸하게 했다. 둘 다 중간 직급을 받았다. 그는 진욱에게 부인, 즉 조카 유경언을 주었다. 진욱은 이전에 의흥 고향에서 전씨 부인과 결혼했지만, 전씨 부인은 그와 함께 강릉으로 가지 않았다.
554년 서위가 강릉을 공격하여 점령했고, 555년 초 원제를 처형했다. 진욱과 진창은 장안으로 끌려갔고, 유씨 부인과 아들 진숙보는 랑청에 남겨졌다. 왕승변과 진패선은 처음에는 원제의 아들 소방지를 진안왕으로 황제로 옹립하려 했지만, 북제의 군사적 압력으로 555년 여름 왕승변은 북제가 지지하는 후보 소원명을 황제로 옹립하는 데 동의했다. 진욱은 이에 반대했다. 555년 가을, 진패선은 건강을 기습 공격하여 왕승변을 살해하고 소원명을 폐위시킨 후 소방지를 황제로 옹립했다(경제). 557년 경제는 진패선에게 왕위를 양위하여 진나라를 건국하고, 그가 무제가 되었다. 진욱의 형 진천은 임천왕으로 책봉되었고, 진욱은 시흥왕으로 추봉되어 무제가 사후에 아버지 진도탄에게 추봉한 칭호를 상속하도록 했다.
무제는 559년에 사망했고, 진창도 여전히 장안에 억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천이 왕위를 계승했다(문제). 진욱은 아버지에게 제사를 드릴 수 없었기 때문에 문제는 자신의 아들 진백모를 시흥왕으로 책봉했고, 진욱의 칭호를 안성왕으로 변경했다. 560년 북주가 진나라에 접근하여 진욱을 돌려보낼 의사를 밝혔다. 562년 문제와 북주 사이에 루산을 북주에 넘겨주는 조건으로 진욱이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유씨 부인과 진숙보는 돌아오지 않았지만, 문제의 추가 협상 끝에 그들도 돌아왔다. 진욱은 첫 번째 부인 전씨 부인도 자신의 저택으로 맞이했지만, 유씨 부인은 양나라 공주의 딸로서 존경받는 신분이었으므로, 그녀가 진욱의 부인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으며, 전씨 부인에게 존경을 표했다.
진나라 문제(文帝)의 치세 동안, 진욱은 문제의 핵심 부하 중 한 명이 되었다. 562년 봄, 군벌 주적(周迪)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문제는 장군 오명철을 보냈지만, 오명철이 주적을 격파하지 못하자 진욱을 보냈다. 진욱은 계속 승진했지만, 565년 그의 측근 포승예(鮑僧叡)가 부적절한 행동으로 관리 서릉(徐陵)에게 고발당해 잠시 해임되었다.
566년 봄, 문제가 심각하게 병들었고 진욱은 다른 핵심 관리인 도중거(到仲舉), 공환(孔奐), 원추(袁樞), 유사지(劉師之)와 함께 그를 보살폈다. 문제는 태자 진백종이 약하다고 생각하여 진욱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했지만, 진욱은 슬피 울며 사양했고, 도중거와 공환도 반대하여 문제는 계승 순서를 바꾸지 않았다. 문제가 사망했고, 진백종이 폐제(廢帝)로 즉위했다.
폐제가 황제였지만, 권력은 진욱, 도충거, 유지에게 분할되었고, 이들은 궁 안에 머물렀다. 유지는 진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은불녕(殷不佞)에게 진욱에게 궁을 떠나 양주(揚州) 업무를 처리하라고 알리도록 했다. 진욱이 이를 고려하자, 모희(毛喜)와 오명철이 궁에 머물러야 한다고 설득했다. 진욱은 유지를 회의에 초청했고, 모희에게 선태후 심묘용과 폐제에게 그가 궁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했다. 모희가 확인하자, 진욱은 유지를 체포하고 자결을 명령하는 한편, 도충거는 낮은 직위로 강등시켰다. 이때부터 행정은 진욱이 통제하게 되었다.
도충거와 한자고는 진욱에 대항하려 했지만, 음모가 진욱에게 보고되었고, 진욱은 그들을 체포한 후 폐제에게 자결을 명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 진욱이 유씨와 도씨, 한씨의 음모에 모두 참여했다고 믿었던 폐제의 동생 진백무(陳伯茂)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폐제와 동행하도록 명령받았다.
화교(華皎)는 567년 여름, 북주와 서량에 투항했다. 진욱은 오명철과 순우량을 보내 연합군에 맞서 함대를 이끌게 했다. 둔구(沌口)에서 만난 양측은 충돌했고, 화교와 북주 장군 우문직(宇文直)은 서량의 수도 강릉으로 도망쳤고, 북주 장군 원정(元定)은 포로로 잡혔다. 오명철은 568년 봄 강릉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했다.
진욱은 더 큰 칭호와 권한을 받았다. 진백무는 진욱을 비방했고, 진욱은 왕좌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 568년 겨울, 진욱은 태황태후 장요아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폐제가 유지와 화교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거짓 비난했다. 조서는 황제 문이 폐제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진욱이 왕위를 차지하도록 하려는 황제 문의 소망을 수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폐제는 폐위되어 임해왕으로 강등되었고, 진백무는 문마후로 강등된 후 암살당했다.
태건 원년(569년) 1월, 진욱은 건강의 태극전전에서 황제위에 올랐다(선제(宣帝)). 그는 태후 장씨(章氏)를 황태후로, 문제(文帝)의 부인 심태후(沈太后)는 문태후(文太后)로 받들었다. 부인 유씨(柳氏)를 황후로, 황태자 진숙보(陳叔寶)를 황태자로 세웠다. 문제의 아들들은 황족으로서 존경받는 지위를 유지하며 요직을 맡았지만,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569년 가을, 선제는 광주(廣州) 지사 ou양허(歐陽紇)가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건강(建康)으로 소환했다. ou양허는 소환에 응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선제는 장수 장자오다(章昭達)를 보내 ou양허를 공격하게 했다. 570년 봄, 장자오다는 ou양허를 사로잡아 참수했다. 장자오다는 서량(西梁)의 수도 강릉(江陵)을 공격했지만, 북주의 장수 루텅(陸騰)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이후 진과 북주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 사절을 교환했고, 북제에 대항하여 동맹을 형성했다.
573년 봄, 선제는 북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고, 오명철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오명철의 군대는 573년 여름까지 양쯔강과 회하 사이의 대부분의 영토를 확보했다. 573년 가을, 수양(壽陽)을 함락시켜, 왕린을 사로잡아 죽였다. 선제는 우명철에게 영예를 하사했다. 왕린의 머리를 건강 성문에 전시했지만, 주양(朱瑒)의 지적에 따라 왕린의 머리를 돌려주어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576년 겨울, 북주 무제는 북제를 공격하여 북제의 수도 예성을 점령했다. 577년 봄까지 북제 영토의 대부분을 병합했다. 선제는 북제 영토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고 오명철을 북쪽으로 진격시켰다. 577년 겨울, 오명철은 팽성(彭城)을 포위했고, 선제는 황하 이남 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578년 봄, 북주 장군 왕궤(王軌)가 오명철을 격파하고 사로잡았다. 578년 가을, 선제는 관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579년 겨울, 북주 선제는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 군대는 저항할 수 없었고, 북제로부터 점령했던 도시들이 함락되었다. 580년 새해까지, 양쯔강 북쪽의 거의 모든 영토가 북주에 함락되었다.
580년 여름, 북주 선제가 사망했고, 수 문제인 양견이 섭정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우치경은 양견에게 반기를 들었고, 사마소난(司馬消難)이 합류했다. 사마소난은 진나라에 항복하여 지원을 요청했다. 선제는 장군들을 보내 북주의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사마를 지원했고, 수공(隋公)으로 봉했다. 그러나 위소관은 우치경을 격파하여 자결하게 만들었고, 사마소난의 군대도 붕괴되었다. 그는 진나라 영토로 도망쳐야 했고, 그가 통제하던 영토는 북주에 유지되었다. 양견은 581년 봄 왕위를 찬탈하여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국했다.
태건 14년(582년) 1월, 진욱은 병으로 인해 선복전에서 붕어했다.[1]
2. 1. 초기 생애
진도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승성 원년(552년)에 숙부 진패선이 후경의 난을 평정하고 경구에 주둔하자, 남조 양의 원제가 진패선의 자제들의 출사를 요구했기 때문에, 진욱은 강릉으로 가서 직합장군·중서시랑이 되었다. 승성 3년(554년)에 강릉이 서위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진욱은 관중으로 연행되었다. 영정 원년(557년)에 진나라가 건국되었지만, 진욱의 신병은 북주에 놓인 채, 진나라의 시흥군왕에 봉해졌다. 영정 3년(559년)에 형 문제가 즉위하자, 안성왕으로 개봉되었다. 천가 3년(562년) 3월에 북주에서 귀국하여, 시중·중서감·중위장군의 지위를 받았다. 같은 해 6월, 사지절·도독 양남서동양남예북강 5주 제군사·양주 자사가 되어, 표기장군으로 진급했다. 천가 4년(563년) 4월, 개부의동삼사의 지위를 받았다.2. 2. 남진 건국 이후
陳頊|진욱중국어은 562년에 건강(建康)으로 돌아와 시중, 중서감, 중위장군에 임명되었고 양주자사가 되었다. 천가 6년(565년) 4월에는 사공으로 승진했다. 진욱은 벼슬이 높았고 진천의 친동생이었으므로 권세가 대단했다. 직병 포승예는 진욱을 믿고 불법 행위를 했는데 어자중승 서릉이 진욱을 탄핵했다. 이에 진욱은 전상에서 형 진천을 모시고 서 있다가 식은 땀을 흘리며 낯빛이 변했고 그 일로 분노한 진천에 의해 시중, 중서감에서 해임되었다.천강 원년(566년) 3월, 진천이 위독해지자 진욱을 불렀는데, 진욱은 태자 진백종이 나약한 것을 걱정했다. 진천은 진욱에게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으나, 진욱은 눈물을 흘리면서 강력하게 거절했고, 결국 유사지, 도중거와 함께 진백종을 보좌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진도담의 차남으로, 승성 원년(552년)에 숙부 진패선이 후경의 난을 평정하고 경구에 주둔하자, 남조 양의 원제가 진패선의 자제들의 출사를 요구했기 때문에, 진욱은 강릉으로 가서 직합장군·중서시랑이 되었다. 승성 3년(554년)에 강릉이 서위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진욱은 관중으로 연행되었다. 영정 원년(557년)에 진나라가 건국되었지만, 진욱의 신병은 북주에 놓인 채, 진나라의 시흥군왕에 봉해졌다. 영정 3년(559년)에 형 문제가 즉위하자, 안성왕으로 개봉되었다. 천가 3년(562년) 3월에 북주에서 귀국하여, 시중·중서감·중위장군의 지위를 받았다. 6월, 사지절·도독 양남서동양남예북강 5주 제군사·양주 자사가 되어, 표기장군으로 진급했다. 천가 4년(563년) 4월, 개부의동삼사의 지위를 받았다. 천가 6년(565년) 4월에는 사공에 올랐다.[1]
천강 원년(566년) 3월, 상서령이 되었다. 4월에 문제가 붕어할 때, 유사지나 도중거 등과 함께 진백종을 보좌하는 유명을 받았다. 진백종이 즉위하자, 5월에 진욱은 사도·표기대장군·녹상서사·도독 중외 제군사가 되었다. 광대 원년(567년)에는 유사지나 도중거 등을 제거하여 진나라에서의 독재권을 확립했다. 이듬해 광대 2년(568년) 1월에 태부로 진급하고, 사도를 겸했다. 11월, 심태후의 명에 의해 진백종이 폐위되었다.[1]
2. 3. 폐제 진백종 시기
폐제 진백종이 황제였지만, 권력은 진욱, 도충거, 유지에게 분할되었고, 이 세 사람은 모두 민감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해 궁 안에 머물렀다.[2] 황제의 숙부였던 유지는 진욱의 존경받는 지위를 두려워하여 곧 진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2] 그는 관리 은불녕(殷不佞)에게 진욱에게 궁을 떠나 진욱이 지사이기도 한 수도 지역 양주(揚州)의 업무를 처리하라고 알렸다.[2] 진욱이 이를 고려하자, 그의 측근 모희(毛喜)와 장군 오명철이 그에게 궁에 머물러야 한다고 설득했다.[2] 이에 진욱은 유지를 회의에 초청했고,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모희에게 황제 문의 아내인 선태후 심묘용과 폐제에게 그가 궁을 떠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게 했다.[2] 모희가 그렇게 확인하자, 진욱은 유지를 체포하고 자결을 명령하는 한편, 도충거는 낮은 직위로 강등시켰다.[2] 이 시점부터 행정은 진욱이 통제하게 되었다.[2]이후 도충거와 장군 한자고는 진욱에 대항하는 행동을 고려했지만, 그들이 진욱에 대항하는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그들의 음모가 진욱에게 보고되었고, 진욱은 그들을 체포한 후 폐제에게 자결을 명하는 조서를 내리도록 했다.[3] 진욱이 유씨와 도씨, 한씨의 음모에 모두 참여했다고 믿었던 폐제의 동생 시흥왕 진백무(陳伯茂)는 관직을 박탈당하고 폐제와 동행하도록 명령받았다.[3]
황제 문과 가까운 사이였던 유지와 한자고의 죽음은 황제 문의 또 다른 측근인 상주(湘州, 현대 후난성 중부) 지사 화교(華皎)의 마음에 두려움을 가져왔다.[4] 567년 여름, 화교는 북주와 북주의 속국인 서량에 투항했다.[4] 진욱은 오명철과 순우량을 보내 화교, 북주, 서량의 연합군에 맞서 함대를 이끌게 했다.[4] 대치하는 세력은 둔구(沌口, 현대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만났다.[4] 오명철과 순우량은 화교, 북주, 서량의 함대를 충돌시켜 붕괴시킬 수 있었다.[4] 화교와 북주 장군 우문직(宇文直) 위공은 서량의 수도 강릉으로 도망쳤고, 북주 장군 원정(元定)은 포로로 잡혔다.[4] 오명철은 568년 봄 강릉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4]
한편, 진욱은 더 큰 공식적인 칭호와 권한을 받고 있었다.[5] 상황에 분노한 진백무는 진욱을 반복적으로 비방했고, 이에 진욱은 스스로 왕좌를 차지하기로 결심했다.[5] 568년 겨울, 진욱은 황제 무의 아내인 태황태후 장요아의 이름으로 조서를 내려 폐제가 유지와 화교의 음모에 가담했다고 거짓으로 비난했다.[5] 조서는 또한 황제 문이 이미 폐제가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진욱이 왕위를 차지하도록 하려는 황제 문의 소망을 수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5] 폐제는 폐위되어 임해왕으로 강등되었고, 진백무는 문마후로 강등된 후 암살당했다.[5]
2. 4. 황제 즉위
태건 원년(569년) 1월, 건강의 태극전전에서 황제위에 올랐다.[1] 그는 태후 장씨(章氏)를 황태후로 받들었고, 문제(文帝)의 부인 심태후(沈太后)는 문태후(文太后)로 불리게 되었다.[1] 그는 부인 유씨(柳氏)를 황후로 책봉했고, 황태자 진숙보(陳叔寶)를 황태자로 세웠다.[1] 문제의 아들들은 황족으로서 계속 존경받는 지위를 유지하며 요직을 맡았지만, 특히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1]569년 가을, 선제는 광주(廣州, 대략 현재의 광저우, 광둥)의 지사였던 ou양허(歐陽紇)가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ou양허를 건강(建康)으로 소환했다.[1] ou양허 또한 선제의 의도를 의심하여 소환에 응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1] 선제는 관리 쉬젠(徐儉, 쉬링(徐陵)의 아들)을 보내 ou양허를 설득하려 했지만, ou양허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1] 이에 선제는 장수 장자오다(章昭達)를 보내 ou양허를 공격하게 했다.[1] 570년 봄, 장자오다는 ou양허를 사로잡아 건강으로 압송했고, ou양허는 참수되었다.[1] 장자오다는 승리에 고무되어 서량(西梁)의 수도 강릉(江陵)을 공격했지만, 초기에는 약간의 전과를 올리고 강릉을 거의 함락할 뻔했으나, 북주의 장수 루텅(陸騰)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1] 그러나 이 원정 이후 진과 북주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자주 외교 사절을 교환했고, 북제에 대항하여 대략적인 동맹을 형성했다.[1]
573년 봄, 선제는 북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신하 및 장수들과 논의했을 때 의견이 갈렸다.[1] 선제는 쉬링의 건의에 따라, 장수들 중 유일하게 이 원정을 지지했던 오명철을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페이지(裴忌)와 황파취(黃法昬, 이름은 유니코드에 없음)를 그의 부장으로 삼았다.[1] 오명철의 군대는 북제에 대해 빠르게 전과를 올렸고, 573년 여름까지 양쯔강과 회하 사이의 대부분의 영토를 확보했다.[1] 573년 가을, 오명철은 중요한 도시 수양(壽陽, 현재 루안, 안후이)을 포위했고, 573년에 수양을 함락시켜, 도시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전 량(梁)의 장군 왕린을 사로잡아 죽였다.[1] 양쯔강과 회하 사이의 모든 지역이 이제 진의 수중에 들어왔다.[1] 선제는 매우 기뻐하며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오명철에게 다양한 영예를 하사했다.[1] 그는 또한 왕린의 머리를 건강 성문에 전시했지만, 주양(朱瑒)이 왕린이 량에 충성했으니 존경받아야 한다고 지적하자, 왕린의 머리를 돌려주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1] 그 후 몇 년 동안 진은 북제를 상대로 약간의 전과를 계속 올렸지만, 대규모 공격은 하지 않았다.[1]
576년 겨울, 북주 무제는 북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여 북제의 부도인 진양(晉陽, 오늘날 산시성 타이위안)과 수도 예성을 빠르게 연이어 점령했다.[1] 곧, 그는 북제 황제 고위를 사로잡았고 577년 봄까지 북제 영토의 대부분을 병합했다.[1]
이상하게도, 선제는 북주의 승리 이후 북제 영토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고 오명철을 다시 북쪽으로 진격시켰다.[1] 577년 겨울, 오명철은 팽성(彭城, 오늘날 장쑤성 쉬저우)을 포위했고, 선제는 오명철이 곧 황하 이남 지역을 점령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1] 관료 채경력(蔡景歷)이 다른 의견을 제시하자 그는 매우 불쾌해하며 채경력을 군수 지위로 강등시켰다.[1] 578년 봄, 북주 장군 왕궤(王軌)가 오명철을 완전히 격파하고 그를 사로잡았다.[1]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 선제는 채경력을 수도로 소환했다.[1] 대패로 인해 민심이 흔들리자, 578년 가을, 선제는 관리들이 국가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는 의식을 거행했다.[1]
579년 겨울, 북주 선제 (무제의 아들이자 계승자)는 장군 위소관의 지휘 아래 진나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1] 진나라의 선제는 이에 맞서 군대를 동원했다.[1] 그러나 진나라 군대는 북주의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고, 이전 북제로부터 점령했던 모든 도시가 빠르게 함락되었다.[1] 580년 새해까지, 양쯔강 북쪽의 거의 모든 영토가 북주에 함락되었고, 이로 인해 대규모 난민이 양쯔강을 건너 진나라 영토로 도피했다.[1]
580년 여름, 북주 선제가 갑자기 사망했고, 장인이자 수 문제인 양견이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1] 장군 우치경은 양견에게 반기를 들었고, 장군 사마소난(司馬消難)과 왕겸(王謙)이 그와 합류했다.[1] 훈주(勛州, 대략 오늘날 후베이성 샤오간)의 지사이자 주변 아홉 개 주의 지사였던 사마소난은 곧 진나라에 항복하여 진나라의 지원을 요청했다.[1] 선제는 장군 범의(樊毅), 임충(任忠), 진혜기(陳慧紀)를 보내 북주의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사마를 지원했고, 그를 수공(隋公)으로 봉했다.[1] 그러나 위소관은 빠르게 우치경을 격파하여 자결하게 만들었고, 사마소난의 군대도 붕괴되었다.[1] 그는 진나라 영토로 도망쳐야 했고, 그가 통제하던 모든 영토는 북주에 유지되었다.[1] (양견은 곧 581년 봄에 왕위를 찬탈하여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국했다.)[1]
582년 봄, 선제가 사망했다.[1] 그의 아들 진숙릉(陳叔陵)이 문제의 아들 진백고(陳伯固)와 연합하여 왕위를 찬탈하려다 실패한 후, 태자 숙보가 왕위에 올랐다.[1] 태건 2년(570년) 4월에는 폐제의 임해왕 진백종을 살해했다.[2] 즉위 후에는 수로 정비와 개간, 유민 대책과 조세 감면 등 내정에 힘썼다.[2] 대외적으로는 태건 5년(573년)에 오명철의 북벌로 북제로부터 회남 지방을 탈취했다.[2] 그러나 태건 9년(577년)에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고 화북을 통일하자, 그 압박을 받게 되었고, 이듬해 태건 10년(578년)의 여량 전투의 패전으로 인해 회남의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2] 태건 12년(580년)에 북주에서 사마소난의 난이 일어나자, 이를 지원했고, 그 패배 후에는 망명을 받아들였다.[2]
2. 5. 사후
진천은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진백종을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카 진백종을 폐위시키고 황제가 된 진욱(진 선제)도 자신의 장남이자 후계자였던 진숙보를 걱정하며 눈을 감았다. 진백종은 나약했을 뿐이었고, 북조에서는 북주와 북제가 공존하고 있어 외정상 큰 위협이 없었지만, 진숙보 즉위 시에는 북주가 북제를 멸하고 수나라가 찬탈하여 진나라를 노리고 있었다. 게다가 진숙보는 어리석고 매우 막나가는 인물이었다.태건 14년(582년) 1월, 진욱은 병으로 인해 선복전에서 붕어했다.[1]
3. 정치
진 선제의 정치는 크게 내정과 외정으로 나눌 수 있다.
내정에서는 즉위 초 황족 및 관료 체계를 정비하고, 구양흘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내부 안정을 도모했다.
외정에서는 북제를 공격하여 양쯔강과 회하 사이의 영토를 확보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북주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하여 양쯔강 이북의 영토를 상실하였고,[5] 북주에서 발생한 내분 진압을 지원하였으나 실패하였다.[6]
3. 1. 내정
역사적으로 분명하지 않은 이유로 진(陳)의 쉬(陳頊)는 한 달 넘게 황제의 자리를 비워두었지만, 결국 569년 봄에 황위에 올랐다(선제(宣帝)로 즉위). 그는 태후 장씨(章氏)를 황태후로 받들었고, 문제(文帝)의 부인 심태후(沈太后)는 문태후(文太后)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부인 유씨(柳氏)를 황후로 책봉했고, 황태자 진숙보(陳叔寶)를 황태자로 세웠다. 문제의 아들들은 황족으로서 계속 존경받는 지위를 유지하며 요직을 맡았지만, 특히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569년 가을, 선제는 광주(廣州, 대략 현재의 광저우, 광둥)의 지사였던 구양흘(歐陽紇)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구양흘을 건강(建康)으로 소환했다. 구양흘 또한 선제의 의도를 의심하여 소환에 응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선제는 관리 쉬젠(徐儉, 쉬링(徐陵)의 아들)을 보내 구양흘을 설득하려 했지만, 구양흘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선제는 장수 장자오다(章昭達)를 보내 구양흘을 공격하게 했다. 570년 봄, 장자오다는 구양흘을 사로잡아 건강으로 압송했고, 구양흘은 참수되었다. 장자오다는 승리에 고무되어 서량(西梁)의 수도 강릉(江陵)을 공격했지만, 초기에는 약간의 전과를 올리고 강릉을 거의 함락할 뻔했으나, 북주(北周)의 장수 루텅(陸騰)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그러나 이 원정 이후 진과 북주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자주 외교 사절을 교환했고, 북제(北齊)에 대항하여 대략적인 동맹을 형성했다.
573년 봄, 선제는 북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 신하 및 장수들과 논의했을 때 의견이 갈렸다. 선제는 쉬링의 건의에 따라, 장수들 중 유일하게 이 원정을 지지했던 우밍체(吳明徹)를 군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페이지(裴忌)와 황법혼(黃法昬, 이름은 유니코드에 없음)을 그의 부장으로 삼았다. 우밍체의 군대는 북제에 대해 빠르게 전과를 올렸고, 573년 여름까지 양쯔강과 회하 사이의 대부분의 영토를 확보했다. 573년 가을, 우밍체는 중요한 도시 수양(壽陽, 현재 루안, 안후이)을 포위했고, 573년에 수양을 함락시켜, 도시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전 량(梁)의 장군 왕린을 사로잡아 죽였다. 양쯔강과 회하 사이의 모든 지역이 이제 진의 수중에 들어왔다. 선제는 매우 기뻐하며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우밍체에게 다양한 영예를 하사했다. 그는 또한 왕린의 머리를 건강 성문에 전시했지만, 주양(朱瑒)이 왕린이 량에 충성했으니 존경받아야 한다고 지적하자, 왕린의 머리를 돌려주어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르도록 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진은 북제를 상대로 약간의 전과를 계속 올렸지만, 대규모 공격은 하지 않았다.
3. 2. 외정
569년 가을, 진 선제는 광주(廣州, 대략 현재의 광저우, 광둥) 지사였던 구양흘(歐陽紇)이 반란을 일으킬까 의심하여 그를 건강(建康)으로 소환했다. 구양흘 또한 선제의 의도를 의심하여 소환에 응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선제는 장수 장소달(章昭達)을 보내 구양흘을 공격하게 했고, 570년 봄, 장소달은 구양흘을 사로잡아 참수했다. 장소달은 여세를 몰아 서량(西梁)의 수도 강릉(江陵)을 공격했지만, 북주(北周)의 장수 육등(陸騰)에게 패배하여 퇴각했다. 그러나 이 원정 이후 진과 북주는 대체로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 사절을 교환했고, 북제(北齊)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1]573년 봄, 선제는 북제를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장수 우명철(吳明徹)을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북제를 공격하게 했다. 우명철의 군대는 빠르게 전과를 올렸고, 573년 가을에는 중요한 도시 수양(壽陽, 현재 루안, 안후이)을 함락시켜, 전 량(梁)의 장군 왕린을 사로잡아 죽였다. 이로써 양쯔강과 회하 사이의 모든 지역이 진의 수중에 들어왔다. 이후 몇 년 동안 진은 북제를 상대로 소규모의 전과를 계속 올렸지만, 대규모 공격은 하지 않았다.[2]
576년 겨울, 북주 무제는 북제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시작하여 북제의 수도 예성을 점령하고, 577년 봄까지 북제 영토의 대부분을 병합했다.[3]
선제는 북주의 승리 이후 북제 영토의 일부를 차지할 수 있다고 믿고 우명철을 다시 북쪽으로 진격시켰다. 577년 겨울, 우명철은 팽성(彭城, 오늘날 장쑤성 쉬저우)을 포위했지만, 578년 봄, 북주 장군 왕궤(王軌)에게 대패하여 사로잡혔다.[4]
579년 겨울, 북주 선제는 장군 위소관의 지휘 아래 진나라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진나라 군대는 북주의 공격에 저항할 수 없었고, 이전 북제로부터 점령했던 모든 도시가 빠르게 함락되었다. 580년 새해까지, 양쯔강 북쪽의 거의 모든 영토가 북주에 함락되었다.[5]
580년 여름, 북주 선제가 갑자기 사망하고, 수 문제인 양견이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 장군 우치경은 양견에게 반기를 들었고, 장군 사마소난(司馬消難)이 그와 합류했다. 사마소난은 곧 진나라에 항복하여 지원을 요청했고, 선제는 군대를 보내 북주의 남부 지역을 공격하여 사마소난을 지원했지만,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사마소난은 진나라 영토로 도망쳐야 했고, 그가 통제하던 모든 영토는 북주에 유지되었다. (양견은 곧 581년 봄에 왕위를 찬탈하여 북주를 멸망시키고 수나라를 건국했다.)[6]
4. 가계도
진 선제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다음은 진 선제의 가계도이다.
배우자 | 자녀 |
---|---|
황후 유씨(河東柳氏) | |
귀비(貴妃) 전씨(錢氏) | 진숙헌 (아홉째 아들) |
귀인(貴人) 팽씨(彭氏) | 진숙릉 (둘째 아들) |
숙화(淑華) 조씨(曹氏) | 진숙영 (셋째 아들) |
숙의(淑儀) 하씨(何氏) | |
소용(昭容) 위씨(魏氏) | 진숙경 (다섯째 아들) |
소용(昭容) 원씨(袁氏) | |
소의(昭儀) 유씨(劉氏) | 진숙제 (열한째 아들) |
수화(修華) 왕씨(王氏) | 진숙우 (열아홉째 아들) |
수용(修容) 위씨(韋氏) | 진숙평 (스무째 아들) |
첩여(婕妤) 신씨(申氏) | |
미인(美人) 증씨(曾氏) | 임천공주 (스물넷째 딸, 양견과 589년에 결혼) |
왕씨(王氏) | |
오씨(吳氏) | |
허씨(徐氏) | 진숙엄 (열다섯째 아들) |
순우씨(淳于氏) | 진숙신 (열여섯째 아들) |
시씨(施氏) | |
증씨(曾氏) | 진숙선 (스물두째 아들) |
양씨(楊氏) | 진숙무 (스물셋째 아들) |
원씨(袁氏) | 진숙순 (스물여덟째 아들) |
오씨(吳氏) | 진숙모 (스물아홉째 아들) |
유씨(劉氏) | 진숙현 (서른째 아들) |
진씨(秦氏) | |
미상 |
4. 1. 조부모와 부모
- '''조부''' : 태조(太祖) 경황제(景皇帝) 진문찬
- '''조모''' : 경문황후(景文皇后) 동씨(童氏)
- '''부친''' : 시흥소열왕(始興昭烈王) 진도탄
- '''모친''' : 효비(孝妃)
4. 2. 황후
황후 유씨(柳氏, 533년 ~ 615년)는 진 후주의 황후였다. 하동(河東, 현재의 산시성 윈청 시) 출신이다.4. 3. 후궁
배우자 | 자녀 |
---|---|
황후 유씨(河東柳氏) | |
귀비(貴妃) 전씨(錢氏) | 진숙헌 (아홉째 아들) |
귀인(貴人) 팽씨(彭氏) | 진숙릉 (둘째 아들) |
숙화(淑華) 조씨(曹氏) | 진숙영 (셋째 아들) |
숙의(淑儀) 하씨(何氏) | |
소용(昭容) 위씨(魏氏) | 진숙경 (다섯째 아들) |
소용(昭容) 원씨(袁氏) | |
소의(昭儀) 유씨(劉氏) | 진숙제 (열한째 아들) |
수화(修華) 왕씨(王氏) | 진숙우 (열아홉째 아들) |
수용(修容) 위씨(韋氏) | 진숙평 (스무째 아들) |
첩여(婕妤) 신씨(申氏) | |
미인(美人) 증씨(曾氏) | 임천공주(臨川公主) (스물넷째 딸, 양견과 589년에 결혼) |
왕씨(王氏) | |
오씨(吳氏) | |
허씨(徐氏) | 진숙엄 (열다섯째 아들) |
순우씨(淳于氏) | 진숙신 (열여섯째 아들) |
시씨(施氏) | |
증씨(曾氏) | 진숙선 (스물두째 아들) |
양씨(楊氏) | 진숙무 (스물셋째 아들) |
원씨(袁氏) | 진숙순 (스물여덟째 아들) |
오씨(吳氏) | 진숙모 (스물아홉째 아들) |
유씨(劉氏) | 진숙현 (서른째 아들) |
진씨(秦氏) | |
미상 |
4. 4. 황자
순번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비고 |
---|---|---|---|---|---|---|
1 | 황태자(皇太子) | 진숙보(陳叔寶) | 553년 ~ 604년 | 황후 류경언 | 제5대 황제 진숙보(後主)[6] | |
2 | 시흥왕(始興王) | 진숙릉(陳叔陵) | 554년 ~ 582년 | 귀인 팽씨 | [7] | |
3 | 예장왕(豫章王) | 진숙영(陳叔英) | 숙화 조씨 | [8] | ||
4 | 장사왕(長沙王) | 진숙견(陳叔堅) | 숙의 하씨 | |||
5 | 건안왕(建安王) | 진숙경(陳叔卿) | 소용 위씨 | |||
6 | 의도왕(宜都王) | 진숙명(陳叔明) | 562년 ~ 615년 | 숙의 하씨 | ||
7 | 하동왕(河東王) | 강간(康簡) | 진숙헌(陳叔獻) | 564년 ~ 581년 | 귀비 전씨 | |
8 | 신채왕(新蔡王) | 진숙제(陳叔齊) | 569년 ~ 608년 | 소의 유씨 | ||
9 | 진희왕(晉熙王) | 진숙문(陳叔文) | 소용 원씨 | |||
10 | 회남왕(淮南王) | 진숙표(陳叔彪) | 왕희 | |||
11 | 시흥왕(始興王) | 진숙중(陳叔重) | 대오희 | |||
12 | 심양왕(尋陽王) | 진숙엄(陳叔儼) | 서희 | |||
13 | 악양왕(岳陽王) | 진숙신(陳叔愼) | 572년 ~ 589년 | 순우희 | ||
14 | 의양왕(義陽王) | 진숙달(陳叔達) | 572년 ~ 635년 | 소용 원씨 | ||
15 | 파산왕(巴山王) | 진숙웅(陳叔雄) | 572년 ~ ? | 왕희 | ||
16 | 무창왕(武昌王) | 진숙우(陳叔虞) | 572년 ~ ? | 수화 왕씨 | ||
17 | 상동왕(湘東王) | 진숙평(陳叔平) | 572년 ~ ? | 수용 위씨 | ||
18 | 임하왕(臨賀王) | 진숙오(陳叔敖) | 572년 ~ ? | 시희 | ||
19 | 양산왕(陽山王) | 진숙선(陳叔宣) | 증희 | |||
20 | 서양왕(西陽王) | 진숙목(陳叔穆) | 양희 | |||
21 | 남안왕(南安王) | 진숙검(陳叔儉) | 첩여 신씨 | |||
22 | 남군왕(南郡王) | 진숙징(陳叔澄) | 첩여 신씨 | |||
23 | 원릉왕(沅陵王) | 진숙흥(陳叔興) | 573년 ~ 607년 | 시희 | ||
24 | 악산왕(岳山王) | 진숙소(陳叔韶) | 첩여 신씨 | |||
25 | 신흥왕(新興王) | 진숙순(陳叔純) | 원희 | |||
26 | 파동왕(巴東王) | 진숙모(陳叔謨) | 소오희 | |||
27 | 임강왕(臨江王) | 진숙현(陳叔顯) | 유희 | |||
28 | 신회왕(新會王) | 진숙탄(陳叔坦) | 소용 원씨 | |||
29 | 신녕왕(新寧王) | 진숙륭(陳叔隆) | 진희 | |||
30 | 신창왕(新昌王) | 진숙영(陳叔榮) | 577년 ~ 612년 | 진희 | ||
31 | 태원왕(太原王) | 진숙광(陳叔匡) | 첩여 신씨 | |||
32 | 진숙예(陳叔叡) | |||||
33 | 영성왕(永城王) | 진숙충(陳叔忠) | 582년 ~ 611년 |
진 선제는 슬하에 총 42명의 아들을 두었다.
4. 5. 황녀
순서 | 봉호 | 이름 | 생몰년도 | 생모 | 부마 | 비고 |
---|---|---|---|---|---|---|
1 | 제희공주(齊熙公主) | 진정령(陳淨玲) | 574년 ~ 650년 | 오흥정공(吳興定公) 심숙안(沈叔安) | [9] | |
2 | 영원공주(寧遠公主) | 577년 ~ 605년 | 시희 | 양견(楊堅) | [10] [11] | |
3 | 임천공주(臨川公主) | 증희 | 양견(楊堅) | [12] [13] | ||
4 | 무성공주(武成公主) | 오희 | ||||
5 | 공주(公主) | 기국공(杞國公) 하약필(賀若弼) | ||||
6 | 낙창공주(樂昌公主) | 서덕신(徐德言) |
5. 연호
연호 | 기간 | 햇수 | 육십간지 | 서력 |
---|---|---|---|---|
광대(光大) | 567년 ~ 568년 11월 | 2년 | 무자(戊子) ~ 기축(己丑) | 567년 ~ 568년 |
태건(太建) | 569년 1월 ~ 582년 | 14년 | 기축(己丑) ~ 임인(壬寅) | 569년 ~ 582년 |
참조
[1]
서적
"jia'wu'' day of the 1st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Tai'jian'' era"
Zizhi Tongjian
[2]
서적
"jia'yin'' day of the 1st month of the 14th year of the ''Tai'jian'' era"
Book of Chen
[3]
서적
新唐書·宰相世系表
[4]
서적
南史
[5]
문서
시흥왕비(始興王妃)/안성왕비(安成王妃)/황태후(皇太后)/홍범태후(弘範太后)/효선황후(孝宣皇后)
[6]
문서
안성왕세자(安成王世子)
[7]
문서
강악후(康樂侯)
[8]
문서
건안후(建安侯)
[9]
문서
무강국부인(武康國夫人)/오흥군부인(吳興郡夫人)
[10]
문서
선화부인(宣華夫人)
[11]
문서
진 멸망 후 수 문제의 후궁으로 봉해짐.
[12]
문서
홍정부인(弘政夫人)
[13]
문서
진 멸망 후 수 문제의 후궁으로 봉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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