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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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채상덕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였고,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했다. 1922년 대한통군부 조직에 참여하고, 대한통의부로 통합된 후 의군부에 가담하여 총장으로 활동했다. 1925년 참의부의 고마령 참변 소식을 듣고 자결하여 순국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채상덕은 1895년 을미의병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남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1]
대한민국 정부는 채상덕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2. 생애
2. 1. 대한통군부와 대한통의부 조직
1920년 일본군의 만주 출병 이후 남만주 각지에 분산된 독립군들은 이념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1922년 2월,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벽창의용대 등 각 군단의 대표들이 관전현(寬甸縣)에 모여 남만통일회의(南滿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군부를 조직하였다.
대한통군부 성립 이후 참여하지 않은 독립운동단체들과도 통합을 추진하여, 1922년 8월 남만한족통일회가 다시 개최되었고, 그 결과 대한통의부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대한통의부 내에서는 양기탁과 전덕원의 불화가 있었다. 이는 1920년 이래로 계속되어 온 공화적 민주주의 계열과 복벽적 민족주의 계열 간의 이념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제5중대장 김명봉과 부대장 조태빈이 통의부를 불신한다는 혐의로 피살되고, 제5중대의 무기가 타 중대에 의해 강제로 압수되는 불상사가 발생하자, 전덕원은 환인현(桓仁縣)에서 새로이 항일군단을 조직하여 통의부에서 분립을 선언하고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2. 2. 의군부 분리와 활동
1923년 2월 대한통의부는 의군부(義軍府)와 분열되었고, 채상덕은 의군부에 가담하였다. 의군부에서 군무부장 전덕원, 정무부장 김유성(金有聲), 재무부장 이병기(李炳基), 사령장 오석영(吳錫泳), 부관 강규묵, 참모장 박대호(朴大浩), 대대장 박일초(朴一楚) 등과 함께 총장으로 활동하였다. 의군부는 융희(隆熙) 연호를 사용하였고, 통의부를 적대시하여 통의부 관할 지역을 점령하고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2. 3. 고마령 참변과 순국
1925년 참의부의 고마령 참변[1]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자결, 순국하였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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