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명제 황6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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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천명제 황6녀는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의 딸로, 1613년 효자고황후의 동족 아들인 엽혁나랍씨 소납에게 시집갔다. 그녀는 봉호가 없어 격격으로 불렸으며, 숭덕 원년(1636년) 홍타이지가 자매들을 공주로 책봉할 때 종대격격이 찰살극공주로 봉해졌으나, 황6녀의 이름은 기록되지 않았다. 순치 3년(1646년) 47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아들 소극살합은 강희제 즉위 전에 오배에게 처형당했다. 이후 건륭 3년(1738년) 화석공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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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제 황6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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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칭호 | 화석공주 |
부친 | 누르하치 |
모친 | 서비 가목호각라씨 |
친인척 | 바부타이 (동복 오빠) 목고십 (동복 언니) 바부하이 (동복 오빠) 화각공주 (동복 언니) 손자 7명 소이내 (증손자) |
출생일 | 1600년 |
사망일 | 순치 3년 9월 (1646년) |
배우자 | 엽혁나랍 소납 |
자녀 | 소극살합 |
2. 생애
명 만력 41년 (1613년), 누르하치의 여섯째 딸은 효자고황후와 같은 부족 출신인 엽혁나랍씨 소납(葉赫那拉氏 蘇納)과 혼인하였다. 당시 공식적인 봉호는 없었으며, 격격(格格)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덕 원년 (1636년), 오빠 홍타이지가 누이들을 공주로 책봉할 때 '종대격격(宗岱格格)'을 찰살극공주(扎薩克公主)로 봉했으나, 이 인물이 황6녀인지 그의 이복동생인 황7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순치 3년 (1646년) 9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후 그녀의 아들인 소극살합(蘇克薩哈)은 강희제 초기 4대 보정대신 중 한 명으로 권력을 잡았으나, 오배(鰲拜)와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 사건의 여파로 황6녀의 손자 7명은 능지처참 혹은 참수형에 처해졌고, 소극살합의 친동생 일가와 다른 친족들까지 화를 입었다.
건륭 3년 (1738년) 12월 2일, 증손자인 삼등시위(三等侍衛) 소이내(索爾訥)의 청원으로 건륭제에 의해 화석공주(和碩公主)로 추존되었다. 건륭제는 화석공주의 예에 따라 묘역을 정비하고 관리 가구를 배정하도록 명하였다.
2. 1. 혼인
만력 41년 (1613년), 누르하치의 여섯째 딸은 효자고황후와 같은 부족 출신인 엽혁나랍씨 소납(葉赫那拉氏 蘇納)에게 시집갔다. 《옥첩(玉牒)》과 《애신각라종보 성원집경(愛新覺羅宗譜·星源集慶)》에 따르면, 당시 황6녀에게는 공식적인 봉호가 없었으며, 당시 풍습에 따라 격격(格格)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숭덕 원년 (1636년), 오빠인 홍타이지가 누이들을 공주로 책봉할 때, '황(皇)자매 종대격격(宗岱格格)'을 찰살극공주(扎薩克公主)로 봉했다. 하지만 이때 생존해 있던 누이는 황6녀와 이복동생인 황7녀였는데, 기록에 이름이 명시되지 않아 종대격격이 황6녀인지 황7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순치 3년 (1646년) 9월, 황6녀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와 소납 사이에는 아들 소극살합(蘇克薩哈)이 있었다. 소극살합은 훗날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기 전 4명의 보정대신 중 한 명이었으나, 오배(鰲拜)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황6녀의 손자 7명은 능지처참 또는 참수형을 당했고, 소극살합의 친동생 일가 역시 참수당하는 비극을 겪었다. 오배는 소극살합의 숙부와 사촌들까지 제거했다.
건륭 3년 (1738년) 12월 2일, 황6녀의 증손자인 삼등시위(三等侍衛) 소이내(索爾訥)는 증조모를 화석공주(和碩公主)로 추존해 줄 것을 건륭제에게 청원했다. 건륭제는 이를 받아들여 화석공주의 예에 따라 묘역을 정비하고 관리 가구를 배정하도록 명했다. 이로써 황6녀는 사후에 화석공주로 추존되었다.
2. 2. 공주 책봉 논란
명 만력 41년 (1613년) 황6녀는 효자고황후 동족의 아들인 엽혁나랍씨 소납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옥첩(玉牒)》과 《애신각라종보 성원집경(爱新觉罗宗谱·星源集庆)》 기록에 따르면, 누르하치의 황6녀에게는 공식적인 봉호가 없었다. 당시 만주족의 풍습에 비추어 볼 때, '격격'이라고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숭덕 원년 (1636년)에 오빠인 홍타이지가 황제의 자매들을 공주로 책봉했다. 이때 황자매 중 '종대격격(宗代格格)'이라는 인물을 '찰살극공주(扎萨克公主)'로 봉했는데, 당시 생존해 있던 누르하치의 딸은 황6녀와 이복동생인 황7녀였다. 하지만 기록에 이름이 명확히 남아있지 않아, 찰살극공주로 봉해진 종대격격이 황6녀인지 황7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2. 3. 사망
순치 3년 (1646년) 9월,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3. 가계
명 만력 41년 (1613년), 누르하치의 여섯째 딸인 황6녀는 효자고황후의 동족인 엽혁나랍씨 소납에게 시집갔다. 당시 기록인 《옥첩(玉牒)》이나 《애신각라종보 성원집경(爱新觉罗宗谱·星源集庆)》에는 황6녀의 정식 봉호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당시 풍습에 따라 격격(格格)으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숭덕 원년 (1636년), 오빠인 홍타이지가 자매들에게 공주 작위를 내릴 때, '황(皇)자매 종대격격'을 찰살극공주(扎萨克公主)로 봉했다. 하지만 당시 생존해 있던 누르하치의 딸은 황6녀와 황7녀였고, 기록에 이름이 명시되지 않아 이 '종대격격'이 황6녀인지 황7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황6녀는 순치 3년 (1646년) 9월에 4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와 남편 소납 사이에는 아들 소극살합(苏克萨哈)을 두었다.
건륭 3년 (1738년) 12월 2일, 황6녀의 증손자인 삼등시위 소이내(苏尔耐)가 고조모인 황6녀를 화석공주(和硕公主)로 추존해 줄 것을 건륭제에게 청원했다. 건륭제는 이를 받아들여 화석공주의 예에 따라 묘역을 정비하고 봉호(墳號)를 세우도록 명했다. 이로써 황6녀는 사후에 화석공주로 추존되었다.
3. 1. 아들 소극살합의 처형
황6녀에게는 아들 소극살합(苏克萨哈)이 있었다. 강희제가 친정하기 전, 소극살합은 4대 보정대신 중 한 명으로 권력을 가졌으나, 이후 오배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소극살합뿐만 아니라 그의 가문 전체가 큰 화를 입었다. 황6녀의 손자인 소극살합의 아들 7명은 능지처사 또는 참형을 선고받았고, 소극살합의 친동생 일가 역시 참형을 당했다. 오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극살합의 삼촌과 사촌까지 "소극살합의 도적을 말리지 않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처형하는 등 관련 인물들을 철저히 제거했다.3. 2. 후손들의 몰락
황6녀는 아들 苏克萨哈|소극살합중국어을 두었다.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기 전, 소극살합은 4명의 보정대신 중 한 명으로 권력을 행사했으나, 이후 오배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 처형당했다. 이 사건은 황6녀 후손들의 비극적인 몰락으로 이어졌다. 소극살합의 아들 7명, 즉 누르하치의 외손자들은 능지처사 또는 참형이라는 가혹한 형벌을 받고 처형되었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소극살합의 친동생 일가 역시 모두 참형에 처해졌다. 또한 오배는 소극살합의 숙부와 사촌들까지 제거했는데, "소극살합의 도적을 말리면 안된다"는 명분을 내세워 이들을 참수하며 숙청의 범위를 넓혔다.4. 화석공주 추존
건륭 3년 (1738년) 12월 2일, 황6녀의 증손자인 삼등시위 소이내의 요청에 따라 건륭제는 황6녀를 화석공주로 추존하였다. 또한 화석공주의 격식에 맞게 묘역을 수리하고 관리 가구를 배정하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누르하치의 여섯째 딸은 사후에 공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4. 1. 추존 배경
건륭 3년 12월 2일, 삼등시위 소이내는 자신의 증조할머니가 누르하치의 여섯째 딸이라고 밝히며, 화석공주로 추존해 줄 것을 건륭제에게 요청했다. 건륭제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황6녀를 화석공주로 추존하고, 화석공주의 격식에 맞게 묘역을 수리하고 관리할 가구를 배정하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누르하치의 황6녀는 사후에 화석공주로 추존되었다.황6녀가 사후에 추존된 배경에는 그의 아들 소극살합과 그 가문이 겪은 비극이 있다. 소극살합은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하기 전 4명의 보정대신 중 한 명이었으나, 권력 다툼 과정에서 오배에게 제거당했다. 이 사건으로 소극살합의 아들 7명은 능지처참이나 참수형을 당했으며, 그의 친동생 일가와 삼촌, 사촌들까지 연루되어 처형당하는 참혹한 결과를 맞았다. 이러한 가문의 비극 이후, 증손자인 소이내가 황실 후예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고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증조할머니의 추존을 요청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4. 2. 추존 과정
건륭 3년 (1738년) 12월 2일, 황6녀의 증손자인 삼등시위 소이내는 자신의 증조할머니가 누르하치의 제6녀임을 밝히며 화석공주로 추존해 줄 것을 건륭제에게 정식으로 요청하였다. 건륭제는 소이내의 요청을 받아들여 황6녀를 화석공주로 추존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이와 함께 화석공주의 격식에 따라 분원을 수리하고 분호를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이로써 황6녀는 사후에 화석공주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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