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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안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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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추안핑은 1932년 상하이 광화대학 영어과를 졸업하고, 국민당 중앙일보 편집장을 거쳐 런던 정경대에서 유학한 인물이다. 1946년 잡지 '관차'를 창간했으나, 1948년 국민당 정권에 의해 불법화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복간되었으며, 1954년 사회 중앙위원회 위원, 선전부 부부장, 전국인민대표를 역임했다. 1957년 광명일보 편집장으로 재직하며 중국 공산당을 비판한 후, 반우파운동 기간 중 '반당 반인민 반사회주의 유산계급 우파'로 낙인 찍혔다. 1966년 문화 대혁명 시기 실종되었으며, 은둔, 망명, 자살, 타살 등 여러 추측이 제기되었다. 2015년 고향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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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안핑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츄안핑
츄안핑
본명추안핑 (储安平)
출생1909년 11월 5일
실종1966년 9월 (56세)
실종 상태실종 (56년 6개월째)
출신 학교광화대학
에든버러 대학교
배우자루시 돤무
자녀추 왕화

2. 이력

3. 실종과 의혹

1966년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추안핑은 박해를 받았고, 같은 해 9월 실종되었다. 그의 행방은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으며, 여러가지 의혹들이 제기되고 있다.[1] 2015년, 그의 고향인 이싱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실종에 대한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4]

3. 1. 실종 이후 제기된 의혹들

문화 대혁명이 시작되자 추안핑은 박해를 받아 여러 차례 투쟁에 참석해야 했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며칠 동안 구금되었다가 풀려나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1966년 9월, 그는 곧 실종되었다. 그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고, 은신했거나, 홍위병에게 맞아 죽었거나, 자살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의 최종 행방에 대한 몇 가지 구체적인 설이 있다.[1]

  • 은둔 생활: 샤먼 대학 중문과 교수 셰융의 독자 중 한 명이 그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그가 어렸을 때 난징 탕산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고 한다. 그들은 이싱 출신의 유명 인물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추안핑의 이름이 언급되자 그 노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하여 이상해졌고, 이로 인해 추안핑이 장쑤성에서 은둔 생활을 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 망명: 장이허는 우쭈광이 1980년대에 중국 밖으로 여행했을 때, 한 노년의 작가가 그에게 뉴욕에서 추안핑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가진 남자를 만났다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그 남자를 추안핑의 이름으로 불렀고, 그 남자는 겁에 질려 도망갔다.

  • 자살: 장이허는 또한 추안핑이 실종되기 전에 친구 리루창에게 "루창 형제, 내가 떠나네. 추"라고 적힌 메모를 남겼다고 언급했다. 스차하이에 있는 리루창의 집은 추안핑의 집에서 불과 2km 떨어져 있었고, 추안핑은 스차하이의 풍경을 좋아했으며 리루창의 집에 자주 방문했다. 그는 구금된 후 자살 충동을 느껴 죽을 장소로 스차하이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

  • 타살: 한 이웃은 홍위병들이 방문한 후 추안핑이 맞는 소리를 들었고, 집 전체에 피가 튀었다고 말했다. 그는 살해되어 시신이 은밀히 화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2][3]


2015년, 추안핑의 고향인 이싱에서 마침내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사진과 책이 함에 담겨 그의 세 아들에 의해 상징적인 묘에 매장되었다. 국영 언론은 과거를 재평가할 때가 아니라고 밝혔고, 그의 아들 추왕화는 "오늘은 슬픈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기념하고 기억하는 날입니다."라고 말했다.[4]

4. 평가

추안핑은 1957년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후 반우파운동 기간 중 '반당, 반인민, 반사회주의 우파'로 낙인찍혔다.[1]

4. 1. 부정적 평가

1957년 6월 1일, 중국 공산당 중앙통일전선부에서 개최한 심포지엄에서 추안핑은 "마오 주석과 저우 총리에 대한 의견"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마오쩌둥이 "세상을 당의 것으로" 보았다고 언급했다. 정부와 국민 모두 엄청난 반향을 느꼈다. ''인민일보''와 ''광명일보''는 다음날 머릿기사와 함께 전문을 주요 위치에 게재했다.[1]

1958년 1월, 반우파 투쟁에서 추안핑은 "반당 반인민 반사회주의 부르주아 우파"로 낙인 찍혔다.[1]

참조

[1] 논문 没有谜底的谜——"大右派"储安平的传奇人生 http://news.china.co[...] 2009-06-08
[2] 논문 储安平生死之谜又一说 http://www.edubridge[...] 2009-06-10
[3] 서적 余时书话 Fudan University Press
[4] 뉴스 Legacy of ‘rightist’ editor Chu Anping remains controversial five decades after his disappearance http://www.scmp.com/[...] South China Morning Post 2015-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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