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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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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캐롤라인 전쟁은 14세기 후반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의 백년 전쟁의 한 시기로, 잉글랜드가 브르타뉴와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하면서 시작되었다. 잉글랜드는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서 몽포르 가문을, 카스티야 내전에서는 잔혹왕 페드로를 지지했으나, 이로 인해 프랑스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재정적 손실과 적대감만 얻었다. 샤를 5세의 소모전 전략과 라 로셸 해전에서의 패배, 그리고 잉글랜드의 슈보셰 원정 실패로 프랑스가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1375년 브뤼헤 조약으로 휴전이 시도되었으나 아키텐 문제로 결렬되었고, 1377년 전쟁이 재개되었다.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과 서방 교회 대분열 등의 요인으로 전쟁은 장기화되었고, 결국 1389년 일련의 휴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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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롤라인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퐁발랑 전투
퐁발랑 전투
분쟁백년전쟁
시기1369년 – 1389년
장소프랑스 일대
결과프랑스의 승리
전쟁 재개1415년 전쟁 재개
교전 세력
프랑스 왕국 측[[파일:Blason France moderne.svg|15px]] 발루아 가
주요 참가 세력 (프랑스 측)[[파일:Armoiries Bretagne - Arms of Brittany.svg|15px]] 브르타뉴 공국
[[파일:Blason Nord-Pas-De-Calais.svg|15px]] 플랑드르 백국
[[파일:Philip the Good Arms.svg|15px]] 부르고뉴 공국
[[파일:Blason Castille Léon.svg|15px]] 카스티야 연합왕국
[[파일:Royal Arms of the Kingdom of Scotland.svg|16px]] 스코틀랜드 왕국
잉글랜드 왕국 측[[파일:Royal Banner of England.svg|x50px|가운데]] 플랜태저넷 가
주요 참가 세력 (잉글랜드 측)[[파일:Arms_of_Llywelyn.svg|15px]] 웨일스 공국
[[파일:Blason province fr Gascogne.svg|15px]] 가스코뉴 공국
[[파일:Blason region fr Aquitaine.svg|15px]] 아키텐 공국
[[파일:Blason Royaume Navarre.svg|15px]] 나바라 왕국
[[파일:Blason ville be Gand (Flandre-Orientale).svg|15px]] 플랑드르 반군
지휘관
프랑스 왕국 측 지휘관[[파일:France moderne.svg|15px]] 프랑스 국왕 샤를 5세 #
[[파일:France moderne.svg|15px]] 프랑스 국왕 샤를 6세
[[파일:Blason famille fr du Guesclin 2.svg|15px]] 베르트랑 뒤 귀슐랭 #
[[파일:Blason Clisson.svg|15px]] 올리비에 드 클리송
[[파일:Blason Jean de Vienne, Amiral de France.svg|15px]] 장 드 비엔
[[파일:Arms of the Duke of Burgundy (1364-1404).svg|15px]]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파일:Royal Arms of the Kingdom of Scotland.svg|15px]] 스코틀랜드 국왕 로베르 2세
[[파일:Blason Maison de Sancerre.svg|15px]] 루이 드 상세르
[[파일:Blason Castille Léon.svg|15px]] 암브로시오 보카네그라 #
잉글랜드 왕국 측 지휘관[[파일:Royal Arms of England (1340-1367).svg|15px]]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 #
[[파일:Royal Arms of England (1340-1367).svg|15px]] 잉글랜드 국왕 리처드 2세
[[파일:Arms of the Prince of Wales (Ancient).svg|15px]] 에드워드 흑태자 #
[[파일:Arms of John of Gaunt, 1st Duke of Lancaster.svg|15px]] 랭커스터 공작 존
[[파일:Arms of Edmund of Langley, 1st Duke of York.svg|15px]] 요크 공작 에드먼드
[[파일:Sir John Hastings, 2nd Earl of Pembroke, KG.png|15px]] 펨브룩 백작 존 헤이스팅스 #
[[파일:Blason Maison de Grailly.svg|15px]] 장 드 그라일리 #
[[파일:Arms of Knollys (Knolles, Knowles).svg|15px]] 로버트 놀스
헨트 반군 지휘관[[파일:Blason ville be Gand (Flandre-Orientale).svg|12px]] 필리프 판 아르테펠데
[[파일:Blason ville be Gand (Flandre-Orientale).svg|12px]] 프란스 아커만
[[파일:Blason ville be Gand (Flandre-Orientale).svg|12px]] 얀 효엔스
병력 규모
프랑스 왕국 측 병력불명
잉글랜드 왕국 측 병력불명
사상자 및 피해
프랑스 왕국 측 사상자불명
잉글랜드 왕국 측 사상자불명
주요 전투
주요 전투 목록코슈렐
리모게스
퐁발랑
라로셸
치제
존 오브 건트의 슈보셰
로제베케
이프르 공성전
브레스트 공성전
마게이트

2. 배경

브레티니 조약에서 에드워드 3세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아키텐 공작령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얻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양국 간의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카스티야 내전이라는 대리전을 통해 긴장이 계속되었다.

이후 잉글랜드는 브르타뉴 계승 전쟁과 카스티야 내전에서 초기에는 승리했지만, 결국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 못하고 프랑스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특히, 흑태자는 카스티야 내전에 개입하여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고, 아키텐에서 세금을 인상하려 하자 가스코뉴인들의 불만을 샀다. 이들은 프랑스 왕 샤를 5세에게 불만을 제기했고, 샤를 5세는 이를 구실로 흑태자를 소환했다. 에드워드 3세가 소환에 불응하면서 백년전쟁의 캐롤라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2. 1. 브르타뉴 계승 전쟁

브르타뉴 계승 전쟁은 잉글랜드가 드뢰 가문의 방계 가문인 몽포르 가문을, 프랑스가 블로아 가문을 지원하면서 벌어진 전쟁이다. 브르타뉴는 여성 상속을 허용했기 때문에 프랑스는 블로아 가문이 정당한 상속권을 가진다고 보았다. 1341년에 시작된 이 전쟁은 브레티니 조약 체결 이후에도 잉글랜드가 몽포르 가문을 계속 지원하면서 이어졌다. 1364년 오레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지원한 몽포르의 장이 프랑스가 지원한 샤를 드 블로아를 전사시키고 승리했다. 그러나 당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철회한 상태였기 때문에, 장 4세는 자신의 공작령을 평화롭게 유지하기 위해 프랑스 왕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잉글랜드는 이 전쟁에서 아무런 실익을 얻지 못했다. 반면, 프랑스는 브르타뉴 출신 사령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얻어 군사 지휘 능력을 강화했고, 뒤 게클랭은 프랑스의 샤를 5세의 가장 성공적인 장군 중 한 명이 되었다.[1]

2. 2. 카스티야 내전

샤를 5세는 잔혹왕 페드로를 폐위시키기 위해 베르트랑 뒤 게클랭을 파견했고, 카스티야 내전(1366-1369)이 발발했다.[1] 잉글랜드흑태자는 페드로를 지원했지만, 나헤라 전투 이후 페드로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잉글랜드는 재정적 손실과 카스티야의 적대감만 얻게 되었다.[1] 엔리케 2세가 즉위한 이후, 카스티야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잉글랜드를 공격했다. 세비야에 설립되었던 잉글랜드 상인 공동체는 엔리케의 명령에 따라 학살되었다.[1] 1372년과 1380년 사이, 카스티야 해적들은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비교적 안전하게 습격하여 백년전쟁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프랑스에 유리하게 돌렸다.[2]

3. 프랑스의 회복

브레티니 조약으로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신, 아키텐 공작령에 대한 완전한 주권을 얻었다. 이후 9년간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브르타뉴카스티야에서 충돌했다.

브르타뉴 계승 전쟁에서 잉글랜드는 몽포르 가문을, 프랑스는 블로아 가문을 지지했다. 1364년 오레 전투에서 잉글랜드가 지원한 몽포르의 장이 승리했지만, 프랑스 왕의 종주권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는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라는 유능한 지휘관을 얻었다.

카스티야 내전에서는 프랑스가 잔혹왕 페드로를 몰아내고 트라스타마라의 엔리케를 왕위에 앉히는데 지원하였다. 페드로는 흑태자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복위했지만, 약속했던 보상을 지불하지 않아 잉글랜드와 동맹이 깨졌다. 이후 페드로는 다시 폐위되고 목숨을 잃었다. 잉글랜드는 카스티야의 새로운 왕의 적대감만 얻었고, 카스티야는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1372년에서 1380년 사이, 카스티야 해적들은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습격하여 전쟁의 흐름을 프랑스에 유리하게 만들었다.[2]

흑태자의 카스티야 내전 개입과 페드로의 배신으로 흑태자의 재정이 고갈되었다. 그는 아키텐의 세금을 인상하여 이를 해결하려 했으나, 가스코뉴인들이 반발하며 프랑스 왕에게 불만을 제기했다. 샤를 5세는 이를 기회로 흑태자를 소환했지만, 흑태자는 거부했다. 이로써 백년 전쟁의 카롤린 시대가 시작되었다.

3. 1. 소모전 전략

샤를 5세가 전쟁을 재개했을 때, 프랑스는 서유럽에서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였던 반면, 잉글랜드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들을 잃었다. 에드워드 3세는 늙었고 흑태자는 병약했으며, 1370년 12월에는 푸아투의 경험 많은 총독(seneschal) 존 챈도스가 루삭-레-샤토 근처 전투에서 사망했다.[1] 1370년 11월 프랑스 원수로 임명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조언에 따라 프랑스는 소모전 전략을 채택했다.[2]

프랑스는 전투를 벌이기보다는, 브레티니 조약에서 할양된 지역을 하나씩 되찾는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통해 잉글랜드를 지치게 만들었고, 1372년에는 푸아티에를 포함한 지역을 탈환했다.[3]

1372년 8월, 잉글랜드는 라 로셸 해전에서 카스티야 함대에 의해 보급 호송선이 나포되어 침몰하는 큰 해상 패배를 겪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해안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습격을 받았고, 가스코뉴는 고립되었으며, 전쟁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커졌다. 또한, 챈도스의 공백을 메우며 잉글랜드를 위해 싸우던 가스코뉴 출신 장 3세 드 그레일리, 뷔슈의 캡탈(Captal de Buch)이 라 로셸 주변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 샤를 5세는 그를 석방하기에는 너무 위험하다며 몸값을 지불하는 것을 거부하고, 감옥에 가두어 1376년에 사망하게 했다.

잉글랜드는 뒤 게클랭을 전투로 유도하기 위해 프랑스 영토에 대한 파괴적인 군사 원정인 슈보셰(chevauchée)로 대응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373년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원정이었다. 1369년과 1375년 흑사병의 두 차례 발병 사이에 시작된 이 원정은 경제적 타격을 주어 원정 자금 조달을 어렵게 만들었다. 연대기 작가 장 프로아사르에 따르면, 슈보셰는 3년 동안 계획되었다고 한다. 잉글랜드는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능숙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잉글랜드의 계획은 칼레에서 샹파뉴, 부르고뉴를 거쳐 아키텐으로 행군하는 것으로, 5개월에 걸쳐 1,600km가 넘는 여정이었다.

저택, 제분소, 마을을 불태움으로써, 프랑스 조세 기반을 파괴하고 샤를 5세의 신민을 보호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 했으며, 적이 대응하기 전에 타격을 가하고 철수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때 샤를 5세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라는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농민들에게 요새화된 마을로 피신하라고 명령했다. 잉글랜드 군대가 부르고뉴에 들어서자, 뒤 게클랭의 가장 유능한 부관 중 한 명인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그들을 추격하여 600명 이상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다. 10월에는 루아르 강과 알리에 강을 건너면서 대부분의 짐과 수송 수단을 잃어 보급품이 부족해졌다.

137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보르도에 도착했을 때, 잉글랜드 군대는 질병과 기아로 인해 초토화되었고, 많은 기사들이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패배는 잉글랜드에서 존 오브 곤트에 대한 큰 분노와 원한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는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인물로 남아 있었지만, 그의 인기는 프랑스와의 평화 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하게 했다. 1374년까지 브레티니 조약은 사실상 무효화되었고, 칼레를 제외하고는 잉글랜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인 1346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보유하지 못했다.

3. 2. 라 로셸 해전

1372년 8월, 라 로셸 해전에서 잉글랜드는 참혹한 해상 패배를 겪었다. 아키텐으로 병력을 수송하고 병사들의 급여로 20000GBP를 운반하던 보급 호송선이 카스티야 함대에 의해 나포되어 침몰했다.[2] 이로 인해 잉글랜드 해안은 프랑스스페인의 습격을 받았고, 가스코뉴는 고립되었으며, 전쟁에 대한 대중의 반대가 커졌다.[2]

3. 3. 잉글랜드의 슈보셰 (Chevauchée)

잉글랜드는 뒤 게클랭을 전투로 유도하기 위해 프랑스 영토에 대한 일련의 파괴적인 군사 원정인 슈보셰(chevauchée)로 대응했다.[1] 1373년 존 오브 곤트가 이끈 원정은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1369년과 1375년 흑사병의 두 차례 발병 사이에 시작된 이 원정은 파괴적인 경제적 영향을 미쳐 원정 자금 조달을 어렵게 만들었다.[1] 장 프로아사르에 따르면, 슈보셰는 3년 동안 계획되었으며, 잉글랜드는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능숙한 것으로 알려졌다.[1] 잉글랜드의 계획은 칼레에서 샹파뉴, 부르고뉴를 거쳐 아키텐으로 행군하는 것으로, 5개월에 걸쳐 1600km가 넘는 여정이었다.[2]

잉글랜드군은 저택, 제분소, 마을을 불태움으로써 프랑스 조세 기반을 파괴하고 샤를 5세가 신민을 보호할 수 없음을 보여주려 했다. 또한, 적이 대응하기 전에 타격을 가하고 철수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이동했다.[1] 이때 샤를 5세는 대규모 전투를 피하라는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농민들에게 요새화된 마을로 피신하라고 명령했다.[2] 잉글랜드 군대가 부르고뉴에 들어서자, 뒤 게클랭의 가장 유능한 부관 중 한 명인 올리비에 드 클리송이 그들을 추격하여 600명 이상을 죽이고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잡았다.[1] 잉글랜드군은 10월에 루아르 강과 알리에 강을 건너면서 대부분의 짐과 수송 수단을 잃어 보급품이 부족해졌다.[1]

137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보르도에 도착했을 때, 잉글랜드 군대는 질병과 기아로 인해 초토화되었고, 많은 기사들이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1] 이 패배는 잉글랜드에서 존 오브 곤트에 대한 큰 분노와 원한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여전히 강력한 정치적 인물이었지만, 프랑스와의 평화 협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해 인기가 떨어졌다.[1] 1374년까지 브레티니 조약은 사실상 무효화되었고, 칼레를 제외하고는 잉글랜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하기 전인 1346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보유하지 못했다.[2]

4. 브뤼헤 조약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의 제안으로 1375년 브뤼헤 조약을 통해 양측은 12개월간 휴전에 합의하고 전투 종식을 협상했다.[3] 프랑스는 필리프 2세(부르고뉴 공작)가, 잉글랜드는 존 오브 곤트가 대표했다. 그러나 아키텐 문제로 협상은 결렬되었다. 잉글랜드는 완전한 주권을 원했고, 프랑스는 발루아 왕가가 이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의 중재 시도에도 불구하고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고, 1377년에 전쟁이 재개되었다.

4. 1. 잉글랜드 왕위 계승

에드워드 3세는 1376년 흑태자가 사망하고 1377년에는 에드워드 3세 자신이 사망하면서, 그의 10세 손자 리처드 2세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3] 샤를 5세는 아담 호턴을 협상을 위해 보냈으나, 에드워드 3세의 사망으로 협상은 중단되었다. 리처드 2세가 그의 사촌 헨리 볼링브로크에게 폐위된 후에야 랭커스터 왕가 아래 잉글랜드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주장을 강력하게 되살릴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1389년에 일련의 휴전이 체결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4. 2. 프랑스의 상황

샤를 5세는 1380년 9월에 사망했고 그의 어린 아들 샤를 6세가 왕위를 계승했으며, 샤를 6세는 세 명의 삼촌의 공동 섭정하에 놓였다. 샤를 5세는 성공적인 통치로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고 믿었을 수 있다. 샤를 5세는 임종 시 전쟁 자금 조달에 필요한 왕실 과세를 철폐했다. 섭정들이 과세를 다시 시행하려 하자 루앙에서 하렐로 알려진 민중 반란이 일어났다.[3] 세금 징수원들이 다른 프랑스 도시들에 도착하면서 반란이 확산되었고, 파리와 프랑스 북부의 대부분의 다른 도시에서 폭력이 발생했다. 섭정은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과세를 철회해야 했다.

5. 서방 교회 대분열

1378년, 샤를 5세가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선출을 지지하면서 서방 교회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이 사건으로 교회는 거의 40년 동안 분열되었고, 이는 교황이 백년전쟁을 막거나 종식시키려는 노력을 좌절시켰다. 교황 계승에 대한 논쟁으로 여러 교황 계열이 국가 통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전쟁의 정치적 분열이 악화되었다. 14세기 내내 교황이 평화 회의에 참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이 이를 강요할 만큼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에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1]

참조

[1] 서적 Medieval Culture and the Mexican American Borderlands https://archive.org/[...] Texas A&M University Press 2001
[2] 서적 Portugal in European and World History Reaktion Books 2009
[3] 서적 Treaty of Bruges 1375 The Oxford Companion to British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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