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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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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직은 잉글랜드 북서부의 레이크 디스트릭트 중심부에 위치한 시장 도시이다. 13세기에 시장 허가를 받았으며, 현재도 매주 시장이 열린다. 선사 시대 유적, 로마 시대 유물 등 풍부한 역사적 유산을 간직하고 있으며, 18세기부터 관광지로 발전하여 19세기에는 연필 제조로도 유명해졌다. 현재는 관광, 연필 산업, 문화 행사 등을 통해 지역 경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20세기에는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지정으로 개발이 제한되었다. 케직은 다양한 종교 시설과 호반 극장, 더웬트 연필 박물관 등 랜드마크를 갖추고 있으며, 윌리엄 워즈워스,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등 레이크 시인들이 거주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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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직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케즈윅 교구 교회, 성 요한
케즈윅 교구 교회, 성 요한
제닝스 뱅크 태번, 케즈윅
제닝스 뱅크 태번, 케즈윅
케즈윅 마켓 광장
케즈윅 마켓 광장
케즈윅 무트 홀
케즈윅 무트 홀
케즈윅, 컴브리아 파노라마 2 - 2009년 6월
케즈윅, 컴브리아 파노라마 2 - 2009년 6월
공식 명칭케즈윅
인구5,243명 (2011년)
우편 번호CA12
지역 번호017687
OS 그리드 참조NY270233
지리
면적4 마일 (6 km)
런던으로부터의 거리12 마일 (19 km)
행정 구역
국가잉글랜드
유닛 자치구컴브리아
의례 카운티컴브리아
리전노스 웨스트 잉글랜드
의회 선거구펜리스 앤드 솔웨이
민사 교구케즈윅
기타
로마자 표기Keswick

2. 역사

13세기의 기록에는 이 마을이 치즈를 만드는 농장이라는 의미의 "Kesewic"으로 기록되어 있었다.[21]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마켓 타운으로서의 칙허가 주어졌으며, 지금도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마을 중심에 있는 보행자 전용 메인 스트리트에서 시장이 열리고 있다. 16세기에 소규모 탄광업이 흥성하여 세계 최초로 흑연 연필의 원료가 만들어졌다.

천막 지붕 아래 노점이 있는 거리 시장
케직의 시장은 700년 이상 번성해 왔다.


=== 명칭 ===

이 마을은 13세기에 에드워드 1세의 헌장에 "Kesewik"으로 처음 기록되었다.[21]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이름을 고대 영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cēse"(치즈)에서 유래한 "치즈를 만드는 농장"을 의미하며, 스칸디나비아어 "k"와 "wīc"(특별한 장소 또는 거주지)가 사용되었지만,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리노이 대학교의 조지 플롬은 (1919) 케즈윅이 위치한 곳이 바이킹이 정착한 지역의 중심부였으므로 색슨 이름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는 근거로 이러한 어원을 거부했다. 대신 이 단어가 덴마크 또는 노르드 기원이며 "켈의 강굽이 근처 장소"를 의미한다고 제안했다.[3] 나중에 "치즈 농장" 지명학을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에일러트 에크발 (1960)과 A. D. 밀스 (2011) (둘 다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그리고 다이애나 웨일리 (2006)가 있으며, 그녀는 영국 지명 학회 소속이다.[4][6] "치즈 농장" 기원을 옹호하는 사람들 중 에크발과 웨일리는 케즈윅의 이름을 런던 지역 치즈윅의 이름과 동일시하며, 웨일리는 전자의 "K"가 스칸디나비아의 영향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6][7]

=== 선사 시대 ===

이 지역의 선사 시대 거주 증거로는 마을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캐슬리그 석원이 있으며, 이는 기원전 3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8] 19세기에 석원 안과 케직 중심부에서 신석기 시대 석기 도구가 발굴되었다. 1925년 지역의 발견물에 대해 언급하면서 골동품 수집가인 W. G. 콜링우드는 "석기 시대 사람이 레이크 디스트릭(Lake District)에서 꽤 편안하게 지냈다"고 썼다.[9] 청동기 시대에는 이 지역에 지속적인 정착의 증거가 거의 없지만, 언덕 요새 발굴을 통해 기원전 500년경 철기 시대에 일부 거주가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영구적이었는지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10]

로마 시대 영국에서 컴브리아는 카르베티이의 영토였다.[11]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서쪽 부분의 위치로서, 이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 카운티 북부에는 이 시대의 고고학적 증거가 풍부하지만, 현재 케직 지역에 로마의 거주가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은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마을 인근을 지나는 하나 이상의 로마 고속도로의 존재를 나타내는 발견물만 있을 뿐이다.[12] 로마 시대와 그들이 떠난 후의 시대에서 추적할 수 있는 인근 정착지는 주로 켈트족인 것으로 보인다. 더웬트 강을 포함한 이 시대의 많은 지역 지명은 켈트어로, 일부는 웨일스어에 상응하는 단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13]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여러 기독교 성인들이 잉글랜드 북부에서 복음을 설파했으며, 케직과 주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성 더웬트워터의 허버트와 그의 동시대인 성 켄티건이었다.[14] 전자는 성 린디스판의 커스버트의 제자이자 친구였으며,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더웬트워터의 섬에서 은둔자로 살았다.[14] 웨일스로 이동하기 전에 이 지역에서 살면서 설교했던 켄티건은 전통적으로 19세기까지 케직의 교구 교회였던 크로스웨이트 교회를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15]

캐슬리그 석원


=== 중세 시대 ===

케직의 기록된 역사는 중세 시대에 시작된다. 7세기에 앵글로색슨족의 노섬브리아 왕국에 정복되었지만, 9세기 말 바이킹에 의해 멸망했다. 10세기 초, 브리튼의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고, 약 1050년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가 컴브리아를 정복할 때까지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16] 1092년, 정복왕 윌리엄의 아들인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가 북쪽으로 진군하여 올러데일-비로우-더웬트, 올러데일-어보브-더웬트, 그레이스토크의 거대한 남작령을 세웠고, 그 경계는 케직에서 만났다.[17] 1181년 퍼니스 조슬린은 윌리엄 2세의 직계 후손인 올러데일의 여주인 앨리스 드 로밀리가 설립한 케직의 크로스웨이트 교구 교회에 대해 기록했다.[18] 1189년,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크로스웨이트의 교구 사택을 퐁텐 수도원의 시토회에 기증했다.[19]

13세기 동안, 마을 주변의 농지는 퐁텐 수도원과 퍼니스 수도원에 의해 매입되었다. 퍼니스 수도원은 이미 양모 무역으로 번성하고 있었고, 양 사육을 확장하고자 1208년 앨리스 드 로밀리로부터 광대한 토지를 매입했다. 그녀는 또한 더웬트 섬, 와텐들라스, 크로스웨이트의 제분소, 보로우데일의 다른 토지를 판매한 퐁텐 수도원과 협상했다. 케직은 이 지역의 수도원 농장의 중심지였으며, 퐁텐 수도원은 마을에 집사를 두어 세입자들이 임대료를 지불했다.[17] 퍼니스 수도원은 철광석 채굴에 대한 수익성 있는 권리를 누렸다.[20]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1276년 케직에 시장 허가를 내렸다.[21] 이 시장은 700년 이상 중단 없이 이어져 왔다.[22] 시장 광장 주변의 건물 구조는 이 시기부터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대략적으로 동일하게 유지되었으며, 원래 목조 구조였던 집들이 광장을 향하고, 뒤쪽에는 견고하게 둘러싸인 정원이나 뜰이 있었다. 지역 전통에 따르면, 이 튼튼한 벽과 좁은 뜰 입구는 약탈하는 스코틀랜드 왕국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스코틀랜드 약탈자들이 케직 북쪽에 있는 칼라일, 컴브리아 에든 강과 비옥한 에든 계곡에서 더 풍부하고 접근하기 쉬운 목표물을 찾아 마을은 그런 공격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23]

=== 16-17세기: 농업과 산업 ===

수도원 해산(1536년~1541년)으로 퍼니스 수도원과 폰테인 수도원이 해체되면서 케직과 그 주변 농민들은 새로운 세속 지주에게 양과 양모를 매매하게 되었다.[24] 이는 케직의 시장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높였지만, 초기에는 큰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다. 1530년대에 존 릴랜드는 케직을 "작고 가난한 시장 도시"라고 썼다.[24]

16세기 후반, 구리 채굴로 케직은 부유해졌다. 1586년 윌리엄 캠던은 "잉글랜드 전체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매년 많은 양의 구리가 수출되는 이 구리 공장"의 중심에 "오랫동안 구리 공장으로 유명했던 작은 시장 도시 케직이 있으며, 이는 에드워드 4세 왕의 칙허장에서 나타나며, 현재 광부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25]

16세기 구리 광석을 분류하는 독일 광부들


초기 구리 채굴은 규모가 작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왕국 방위를 위해 무기 제조 및 전함 강화에 많은 양의 구리가 필요했다. 왕실은 영국 땅에서 추출된 금속에 대한 로열티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26] 엘리자베스 1세는 독일인 구리 채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아우크스부르크의 다니엘 헤흐슈테터에게 케직 지역 등에서 "금, 은, 구리 및 수은의 모든 종류의 광산과 광석을 탐사, 채굴, 시험, 굽고 녹일" 수 있는 면허를 부여했다.[26]

16세기부터의 역사를 자세히 설명하는 케직의 모트 홀 명판


구리 외에도 와드, 흑연, 흑납, 또는 검은 코크라고 불렸던 새로운 물질(현재는 흑연으로 알려짐)이 발견되어 활용되었다. 이 광물은 기계 마찰 감소, 도가니 내열성 유약, 영국 해군 대포 포탄 틀 제작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27] 특히, 더 둥글고 매끄러운 포탄을 만들어 더 멀리 발사할 수 있게 했다.[27] 18세기 후반부터는 연필 제조에 사용되었고, 케직은 이로 인해 유명해졌다.[27]

구리 광산은 약 70년 동안 번성했지만, 17세기 초 수요 감소와 높은 추출 비용으로 쇠퇴했다.[28] 흑연 채굴은 계속되었고, 슬레이트 채석이 중요해졌다. 태너리, 직조 등 다른 소규모 산업도 성장했다. 16세기 중반의 호황은 끝났지만, 도시 경제는 쇠퇴하지 않았고 인구는 1,000명 미만으로 대체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29]

=== 18-19세기: 관광의 시작 ===

필립 제임스 드 루터버그의 1787년 작품인 ''스카도, 컴벌랜드, 여름 저녁과 마차와 마부''는 18세기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풍경을 담고 있다.[30] 조지 보트는 존 달턴(1709–63)과 존 브라운(1715–66)을 레이크 디스트릭트 관광의 선구자로 평가한다.[30] 이들은 풍경의 웅장함을 칭찬하는 작품을 썼고, 이들의 열정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촉구했다. 1769년 케직을 방문한 시인 토마스 그레이는 케직의 경치를 "모든 푸르름을 간직한 엘리시움 계곡"이라고 묘사하며 펠과 호수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기록을 발표하여 케직을 효과적으로 홍보했다.[30][31] 더비의 토마스 스미스와 윌리엄 벨러스와 같은 화가들의 컴벌랜드 풍경화 판화가 대량으로 판매되어 이 지역의 명성을 높였다.[31]

1800년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일 년의 3분의 2 동안 우리는 완전한 은퇴 상태에 있다는 것은 작은 장점이 아니며, 나머지 3분의 1은 모든 모양과 크기의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고 썼다.[32] 콜리지는 그 해 케직으로 이사했고, 동료 호수 시인들과 함께 케직과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한 대중의 존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159]

18세기와 19세기에 유료 도로 신탁이 설립되면서 컴벌랜드의 주요 도로가 크게 개선되었다.[33] 마차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특히 유럽 본토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귀족들의 그랜드 투어가 불가능해지자 이 지역은 부유한 방문객들을 끌어들였다.[34] 1760년대에 정기적인 공공 마차 서비스가 확립되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다. 당시 시골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10실링 이하를 벌었고, 가장 부유한 소작농조차도 연간 수입이 200파운드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케직을 경유하여 화이트헤븐에서 펜리스까지 가는 10시간의 여행에 12 실링(60p와 수치적으로 동일)이 드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는 매 시즌 케직을 방문하는 관광객 수가 12,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산되었다.[36] 그레이가 머물렀던 퀸즈 호텔을 포함하여 부유한 방문객을 위한 케직 여관 중 일부는 호텔로 남아 있다.[34]

1850년대 케직의 연필 제조


19세기 중반 철도의 건설은 레이크 디스트릭트, 특히 케직의 접근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Cockermouth, Keswick and Penrith Railway (CKP) 노선 건설의 원래 동기는 중공업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베세머 공법의 제강은 서 컴벌랜드에서 풍부한 철광석과 동쪽의 더럼주에서 코크스 탄에 대한 큰 수요를 가져왔고, CKP는 양쪽 카운티의 제철소에서 광석과 석탄을 함께 가져올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37] 이 노선은 1864년에 화물 운송을 시작했고, 이듬해에 여객 운송을 시작했다.[38] 요금은 다양했지만, 휴가객은 할인된 가격으로 관광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39]

관광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 외에도 케직은 19세기 동안 연필 제조로 명성을 얻었다. 이는 1792년경부터 지역에서 채굴한 흑연을 사용하여 수공업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여러 회사가 자체적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더 산업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연필 제조는 19세기 중반까지 섬유 및 가죽 제품이 쇠퇴하면서 도시의 가장 중요한 제조업이었다.[40]

무트 홀은 1813년에 재건되었고, 1층은 토요일에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석탄 가스는 1846년부터 가스 공장에서 공급되었고, 케직 도서관은 1849년에 개관했으며,[41] 1856년에는 수도 시설이 가동되었고, 케직 경찰서는 1857년에 개관했다.[42] 지역 주간 신문인 ''The Keswick Reminder''는 1896년에 창간되었으며, 2019년에도 매주 금요일 발행되고 있다. 크리스토퍼 브래셔는 1978년 ''The Observer'' 기사에서 ''Reminder''가 번창하는 한, "이 섬들의 한 구석은 영원히 잉글랜드가 될 것"이라고 썼다.[43]

하드윅 로울리 목사


1883년 하드윅 로울리는 크로스웨이트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H. A. L. 라이스는 1974년 레이크 디스트릭트 마을에 대한 연구에서 케직에 대해 로울리를 언급하지 않고 쓴다는 것은 스트라트퍼드 어폰 에이번에 대해 셰익스피어를 언급하지 않고 쓰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로울리가 마을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금속 공예 및 목각을 가르치는 수업을 개설했고, 이것은 케직 공예 학교로 성장하여 1894년부터 1986년까지 지역 장인들을 교육했다.[44] 그는 마을에서 고대 메이데이 축제를 부활시켰고, 케직 스쿨,[45] 블렌캐스라 요양소, 카운티 농업 학교 설립의 주요 인물이었다.[46] 그는 내셔널 트러스트의 공동 설립자로서 1902년 브랜들로우 우드로 시작하여 데르웬트워터 주변의 인기 있는 풍경 토지를 트러스트가 인수하면서 케직이 관광 중심지로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47]

=== 20세기 이후 ===

20세기 케직의 역사는 관광 산업 의존도가 높아지고, 연필 산업이 두 번째로 큰 고용원이 된 시기였다. 컴벌랜드 연필 회사(Cumberland Pencil Company)는 세기 초 그레타 강 근처에 큰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다.[48] 보존 운동은 계속 발전하여, 로언슬리는 중세 그레타 다리와 포틴스케일 다리를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교체하는 것을 막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49] 내셔널 트러스트는 지역 토지를 계속 매입했다.[50]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케직은 많은 젊은이들을 잃었다. 피츠 공원 근처의 전쟁 기념관은 당시 인구가 4,500명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117명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51][52] 1930년대에 케직은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의 주요 관광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34년 ''가디언''(The Manchester Guardian)의 기사는 이곳을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수도"라고 칭하며, 워즈워스가 "인간이 발견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묘사한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53]

제2차 세계 대전 중, 리버풀 호프 대학교(Liverpool Hope University)의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 리버풀(St Katharine's College, Liverpool)와 서식스의 로데안 학교(Roedean School) 학생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민간인 대피(Evacuations of civilians in Britain during World War II)를 위해 케직으로 대피했다.[54] 센트럴 뉴캐슬 고등학교(Central Newcastle High School), 요크셔(Yorkshire)의 헌먼비 홀 학교(Hunmanby Hall School), 리버풀 고아원(Liverpool Orphanage)에서도 학생들이 케직으로 옮겨졌다.[55][56][57]

1951년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이 조성되면서 개발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져 케직은 전쟁 이전의 경계를 넘어 확장될 수 없었다.[58] 케직의 인구는 5,000명 미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59] 2006년 컴벌랜드 연필 회사가 생산 시설을 워킹턴으로 옮기면서 관광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커졌다. 더웬트 연필 박물관만이 옛 부지에 남아있게 되었다.[60] 21세기 초에는 인구의 60% 이상이 호텔, 레스토랑, 유통 분야에 종사했다.[61] 2000년 소매 상가 조사를 통해 야외 의류 상점, 카페 또는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의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61] 케직 인구의 연령대별 분포는 영국 평균보다 상당히 높았으며, 특히 75세에서 84세 사이의 인구 비율이 높았다.[62] 장기 실업률은 영국 평균보다 상당히 낮았다.[63]

2. 1. 명칭

이 마을은 13세기에 에드워드 1세의 헌장에 "Kesewik"으로 처음 기록되었다.[21]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 이름을 고대 영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고 있으며, "cēse"(치즈)에서 유래한 "치즈를 만드는 농장"을 의미하며, 스칸디나비아어 "k"와 "wīc"(특별한 장소 또는 거주지)가 사용되었지만, 모든 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일리노이 대학교의 조지 플롬은 (1919) 케즈윅이 위치한 곳이 바이킹이 정착한 지역의 중심부였으므로 색슨 이름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는 근거로 이러한 어원을 거부했다. 대신 이 단어가 덴마크 또는 노르드 기원이며 "켈의 강굽이 근처 장소"를 의미한다고 제안했다.[3] 나중에 "치즈 농장" 지명학을 지지하는 학자들로는 에일러트 에크발 (1960)과 A. D. 밀스 (2011) (둘 다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그리고 다이애나 웨일리 (2006)가 있으며, 그녀는 영국 지명 학회 소속이다.[4][6] "치즈 농장" 기원을 옹호하는 사람들 중 에크발과 웨일리는 케즈윅의 이름을 런던 지역 치즈윅의 이름과 동일시하며, 웨일리는 전자의 "K"가 스칸디나비아의 영향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6][7]

2. 2. 선사 시대

이 지역의 선사 시대 거주 증거로는 마을 동쪽 가장자리에 있는 캐슬리그 석원이 있으며, 이는 기원전 32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8] 19세기에 석원 안과 케직 중심부에서 신석기 시대 석기 도구가 발굴되었다. 1925년 지역의 발견물에 대해 언급하면서 골동품 수집가인 W. G. 콜링우드는 "석기 시대 사람이 레이크 디스트릭(Lake District)에서 꽤 편안하게 지냈다"고 썼다.[9] 청동기 시대에는 이 지역에 지속적인 정착의 증거가 거의 없지만, 언덕 요새 발굴을 통해 기원전 500년경 철기 시대에 일부 거주가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학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영구적이었는지에 대해 합의하지 못하고 있다.[10]

로마 시대 영국에서 컴브리아는 카르베티이의 영토였다.[11]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서쪽 부분의 위치로서, 이는 전략적 중요성을 지녔다. 카운티 북부에는 이 시대의 고고학적 증거가 풍부하지만, 현재 케직 지역에 로마의 거주가 있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은 없으며, 단지 오늘날의 마을 인근을 지나는 하나 이상의 로마 고속도로의 존재를 나타내는 발견물만 있을 뿐이다.[12] 로마 시대와 그들이 떠난 후의 시대에서 추적할 수 있는 인근 정착지는 주로 켈트족인 것으로 보인다. 더웬트 강을 포함한 이 시대의 많은 지역 지명은 켈트어로, 일부는 웨일스어에 상응하는 단어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13]

6세기 말과 7세기 초에 여러 기독교 성인들이 잉글랜드 북부에서 복음을 설파했으며, 케직과 주변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성 더웬트워터의 허버트와 그의 동시대인 성 켄티건이었다.[14] 전자는 성 린디스판의 커스버트의 제자이자 친구였으며, 현재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더웬트워터의 섬에서 은둔자로 살았다.[14] 웨일스로 이동하기 전에 이 지역에서 살면서 설교했던 켄티건은 전통적으로 19세기까지 케직의 교구 교회였던 크로스웨이트 교회를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15]

2. 3. 중세 시대

케직의 기록된 역사는 중세 시대에 시작된다. 7세기에 앵글로색슨족의 노섬브리아 왕국에 정복되었지만, 9세기 말 바이킹에 의해 멸망했다. 10세기 초, 브리튼의 스트래스클라이드 왕국이 이 지역을 점령했고, 약 1050년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가 컴브리아를 정복할 때까지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16] 1092년, 정복왕 윌리엄의 아들인 잉글랜드의 윌리엄 2세가 북쪽으로 진군하여 올러데일-비로우-더웬트, 올러데일-어보브-더웬트, 그레이스토크의 거대한 남작령을 세웠고, 그 경계는 케직에서 만났다.[17] 1181년 퍼니스 조슬린은 윌리엄 2세의 직계 후손인 올러데일의 여주인 앨리스 드 로밀리가 설립한 케직의 크로스웨이트 교구 교회에 대해 기록했다.[18] 1189년,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크로스웨이트의 교구 사택을 퐁텐 수도원의 시토회에 기증했다.[19]

13세기 동안, 마을 주변의 농지는 퐁텐 수도원과 퍼니스 수도원에 의해 매입되었다. 퍼니스 수도원은 이미 양모 무역으로 번성하고 있었고, 양 사육을 확장하고자 1208년 앨리스 드 로밀리로부터 광대한 토지를 매입했다. 그녀는 또한 더웬트 섬, 와텐들라스, 크로스웨이트의 제분소, 보로우데일의 다른 토지를 판매한 퐁텐 수도원과 협상했다. 케직은 이 지역의 수도원 농장의 중심지였으며, 퐁텐 수도원은 마을에 집사를 두어 세입자들이 임대료를 지불했다.[17] 퍼니스 수도원은 철광석 채굴에 대한 수익성 있는 권리를 누렸다.[20]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1276년 케직에 시장 허가를 내렸다.[21] 이 시장은 700년 이상 중단 없이 이어져 왔다.[22] 시장 광장 주변의 건물 구조는 이 시기부터 적어도 18세기 말까지 대략적으로 동일하게 유지되었으며, 원래 목조 구조였던 집들이 광장을 향하고, 뒤쪽에는 견고하게 둘러싸인 정원이나 뜰이 있었다. 지역 전통에 따르면, 이 튼튼한 벽과 좁은 뜰 입구는 약탈하는 스코틀랜드 왕국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는 스코틀랜드 약탈자들이 케직 북쪽에 있는 칼라일, 컴브리아 에든 강과 비옥한 에든 계곡에서 더 풍부하고 접근하기 쉬운 목표물을 찾아 마을은 그런 공격을 피한 것으로 보인다.[23]

13세기의 기록에는 이 마을이 치즈를 만드는 농장이라는 의미의 "Kesewic"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마켓 타운으로서의 칙허가 주어졌으며, 지금도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마을 중심에 있는 보행자 전용 메인 스트리트에서 시장이 열리고 있다.

2. 4. 16-17세기: 농업과 산업

수도원 해산(1536년~1541년)으로 퍼니스 수도원과 폰테인 수도원이 해체되면서 케직과 그 주변 농민들은 새로운 세속 지주에게 양과 양모를 매매하게 되었다.[24] 이는 케직의 시장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을 높였지만, 초기에는 큰 번영을 가져오지 못했다. 1530년대에 존 릴랜드는 케직을 "작고 가난한 시장 도시"라고 썼다.[24]

16세기 후반, 구리 채굴로 케직은 부유해졌다. 1586년 윌리엄 캠던은 "잉글랜드 전체에 충분할 뿐만 아니라 매년 많은 양의 구리가 수출되는 이 구리 공장"의 중심에 "오랫동안 구리 공장으로 유명했던 작은 시장 도시 케직이 있으며, 이는 에드워드 4세 왕의 칙허장에서 나타나며, 현재 광부들이 거주하고 있다"고 기록했다.[25]

초기 구리 채굴은 규모가 작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는 왕국 방위를 위해 무기 제조 및 전함 강화에 많은 양의 구리가 필요했다. 왕실은 영국 땅에서 추출된 금속에 대한 로열티를 받을 권리가 있었다.[26] 엘리자베스 1세는 독일인 구리 채굴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아우크스부르크의 다니엘 헤흐슈테터에게 케직 지역 등에서 "금, 은, 구리 및 수은의 모든 종류의 광산과 광석을 탐사, 채굴, 시험, 굽고 녹일" 수 있는 면허를 부여했다.[26]

구리 외에도 와드, 흑연, 흑납, 또는 검은 코크라고 불렸던 새로운 물질(현재는 흑연으로 알려짐)이 발견되어 활용되었다. 이 광물은 기계 마찰 감소, 도가니 내열성 유약, 영국 해군 대포 포탄 틀 제작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27] 특히, 더 둥글고 매끄러운 포탄을 만들어 더 멀리 발사할 수 있게 했다.[27] 18세기 후반부터는 연필 제조에 사용되었고, 케직은 이로 인해 유명해졌다.[27]

구리 광산은 약 70년 동안 번성했지만, 17세기 초 수요 감소와 높은 추출 비용으로 쇠퇴했다.[28] 흑연 채굴은 계속되었고, 슬레이트 채석이 중요해졌다. 태너리, 직조 등 다른 소규모 산업도 성장했다. 16세기 중반의 호황은 끝났지만, 도시 경제는 쇠퇴하지 않았고 인구는 1,000명 미만으로 대체로 일정하게 유지되었다.[29] 13세기의 기록에는 이 마을이 치즈를 만드는 농장이라는 의미의 "Kesewic"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에드워드 1세에 의해 마켓 타운으로서의 칙허가 주어졌으며, 지금도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마을 중심에 있는 보행자 전용 메인 스트리트에서 시장이 열리고 있다.

2. 5. 18-19세기: 관광의 시작

필립 제임스 드 루터버그의 1787년 작품인 ''스카도, 컴벌랜드, 여름 저녁과 마차와 마부''는 18세기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풍경을 담고 있다.[30] 조지 보트는 존 달턴(1709–63)과 존 브라운(1715–66)을 레이크 디스트릭트 관광의 선구자로 평가한다.[30] 이들은 풍경의 웅장함을 칭찬하는 작품을 썼고, 이들의 열정은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촉구했다. 1769년 케직을 방문한 시인 토마스 그레이는 케직의 경치를 "모든 푸르름을 간직한 엘리시움 계곡"이라고 묘사하며 펠과 호수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한 기록을 발표하여 케직을 효과적으로 홍보했다.[30][31] 더비의 토마스 스미스와 윌리엄 벨러스와 같은 화가들의 컴벌랜드 풍경화 판화가 대량으로 판매되어 이 지역의 명성을 높였다.[31]

1800년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일 년의 3분의 2 동안 우리는 완전한 은퇴 상태에 있다는 것은 작은 장점이 아니며, 나머지 3분의 1은 모든 모양과 크기의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다"고 썼다.[32] 콜리지는 그 해 케직으로 이사했고, 동료 호수 시인들과 함께 케직과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한 대중의 존경에 큰 영향을 미쳤다.[159]

18세기와 19세기에 유료 도로 신탁이 설립되면서 컴벌랜드의 주요 도로가 크게 개선되었다.[33] 마차로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접근이 가능해지면서, 특히 유럽 본토에서 전쟁이 벌어졌을 때 귀족들의 그랜드 투어가 불가능해지자 이 지역은 부유한 방문객들을 끌어들였다.[34] 1760년대에 정기적인 공공 마차 서비스가 확립되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었다. 당시 시골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10실링 이하를 벌었고, 가장 부유한 소작농조차도 연간 수입이 200파운드를 넘는 경우가 드물었기에, 케직을 경유하여 화이트헤븐에서 펜리스까지 가는 10시간의 여행에 12 실링(60p와 수치적으로 동일)이 드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었다.[3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에는 매 시즌 케직을 방문하는 관광객 수가 12,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산되었다.[36] 그레이가 머물렀던 퀸즈 호텔을 포함하여 부유한 방문객을 위한 케직 여관 중 일부는 호텔로 남아 있다.[34]

19세기 중반 철도의 건설은 레이크 디스트릭트, 특히 케직의 접근성을 더욱 높여주었다. Cockermouth, Keswick and Penrith Railway (CKP) 노선 건설의 원래 동기는 중공업에서 비롯되었다. 새로운 베세머 공법의 제강은 서 컴벌랜드에서 풍부한 철광석과 동쪽의 더럼주에서 코크스 탄에 대한 큰 수요를 가져왔고, CKP는 양쪽 카운티의 제철소에서 광석과 석탄을 함께 가져올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37] 이 노선은 1864년에 화물 운송을 시작했고, 이듬해에 여객 운송을 시작했다.[38] 요금은 다양했지만, 휴가객은 할인된 가격으로 관광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다.[39]

관광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이 커지는 것 외에도 케직은 19세기 동안 연필 제조로 명성을 얻었다. 이는 1792년경부터 지역에서 채굴한 흑연을 사용하여 수공업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여러 회사가 자체적으로 건설한 공장에서 더 산업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연필 제조는 19세기 중반까지 섬유 및 가죽 제품이 쇠퇴하면서 도시의 가장 중요한 제조업이었다.[40]

무트 홀은 1813년에 재건되었고, 1층은 토요일에 시장으로 사용되었다. 석탄 가스는 1846년부터 가스 공장에서 공급되었고, 케직 도서관은 1849년에 개관했으며,[41] 1856년에는 수도 시설이 가동되었고, 케직 경찰서는 1857년에 개관했다.[42] 지역 주간 신문인 ''The Keswick Reminder''는 1896년에 창간되었으며, 2019년에도 매주 금요일 발행되고 있다. 크리스토퍼 브래셔는 1978년 ''The Observer'' 기사에서 ''Reminder''가 번창하는 한, "이 섬들의 한 구석은 영원히 잉글랜드가 될 것"이라고 썼다.[43]

1883년 하드윅 로울리는 크로스웨이트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H. A. L. 라이스는 1974년 레이크 디스트릭트 마을에 대한 연구에서 케직에 대해 로울리를 언급하지 않고 쓴다는 것은 스트라트퍼드 어폰 에이번에 대해 셰익스피어를 언급하지 않고 쓰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로울리가 마을에 미친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와 함께 금속 공예 및 목각을 가르치는 수업을 개설했고, 이것은 케직 공예 학교로 성장하여 1894년부터 1986년까지 지역 장인들을 교육했다.[44] 그는 마을에서 고대 메이데이 축제를 부활시켰고, 케직 스쿨,[45] 블렌캐스라 요양소, 카운티 농업 학교 설립의 주요 인물이었다.[46] 그는 내셔널 트러스트의 공동 설립자로서 1902년 브랜들로우 우드로 시작하여 데르웬트워터 주변의 인기 있는 풍경 토지를 트러스트가 인수하면서 케직이 관광 중심지로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데 기여했다.[47]

2. 6. 20세기 이후

20세기 케직의 역사는 관광 산업 의존도가 높아지고, 연필 산업이 두 번째로 큰 고용원이 된 시기였다. 컴벌랜드 연필 회사(Cumberland Pencil Company)는 세기 초 그레타 강 근처에 큰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다.[48] 보존 운동은 계속 발전하여, 로언슬리는 중세 그레타 다리와 포틴스케일 다리를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교체하는 것을 막는 캠페인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49] 내셔널 트러스트는 지역 토지를 계속 매입했다.[50]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케직은 많은 젊은이들을 잃었다. 피츠 공원 근처의 전쟁 기념관은 당시 인구가 4,500명도 채 되지 않았음에도 117명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51][52] 1930년대에 케직은 컴벌랜드와 웨스트모어랜드의 주요 관광 중심지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34년 ''가디언''(The Manchester Guardian)의 기사는 이곳을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수도"라고 칭하며, 워즈워스가 "인간이 발견한 가장 사랑스러운 곳"이라고 묘사한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곳에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53]

제2차 세계 대전 중, 리버풀 호프 대학교(Liverpool Hope University)의 세인트 캐서린 칼리지, 리버풀(St Katharine's College, Liverpool)와 서식스의 로데안 학교(Roedean School) 학생들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민간인 대피(Evacuations of civilians in Britain during World War II)를 위해 케직으로 대피했다.[54] 센트럴 뉴캐슬 고등학교(Central Newcastle High School), 요크셔(Yorkshire)의 헌먼비 홀 학교(Hunmanby Hall School), 리버풀 고아원(Liverpool Orphanage)에서도 학생들이 케직으로 옮겨졌다.[55][56][57]

1951년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이 조성되면서 개발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루어져 케직은 전쟁 이전의 경계를 넘어 확장될 수 없었다.[58] 케직의 인구는 5,000명 미만으로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59] 2006년 컴벌랜드 연필 회사가 생산 시설을 워킹턴으로 옮기면서 관광에 대한 의존도가 더욱 커졌다. 더웬트 연필 박물관만이 옛 부지에 남아있게 되었다.[60] 21세기 초에는 인구의 60% 이상이 호텔, 레스토랑, 유통 분야에 종사했다.[61] 2000년 소매 상가 조사를 통해 야외 의류 상점, 카페 또는 레스토랑, 기념품 가게의 비율이 높게 나타났다.[61] 케직 인구의 연령대별 분포는 영국 평균보다 상당히 높았으며, 특히 75세에서 84세 사이의 인구 비율이 높았다.[62] 장기 실업률은 영국 평균보다 상당히 낮았다.[63]

3. 지리



케직은 잉글랜드 북서부에 위치하며, 북부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중심부에 있다. 이 도시는 칼라일에서 남서쪽으로 31.5 마일 (50.7 km), 윈더미어에서 북서쪽으로 22 마일 (35 km), 코커머스에서 남동쪽으로 14.25 마일 (23 km) 떨어져 있다.[69] 마을 남서쪽에 있는 데르웬터 호수는 약 3 마일 × 1 마일 (4.8 km × 1.6 km) 크기이며 깊이는 약 72 피트 (22 m)이다. 이곳에는 여러 섬들이 있는데, 데르웬트 아일, 로드 아일랜드, 램스홀름 아일랜드, 세인트 허버트 아일랜드가 포함되며, 세인트 허버트 아일랜드가 가장 크다. 데르웬트 아일은 호수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거주하는 섬으로, 내셔널 트러스트에서 관리하며 1년에 5일 동안 방문객에게 개방된다.[70] 케직과 호수 사이의 땅은 주로 밭과 숲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스트머스 우드, 콕샷 우드, 캐슬헤드 우드, 호스클로스, 그레이트 우드가 남쪽에 더 있다. 강 데르웬트는 데르웬터 호수에서 컴브리아 호수 중 가장 북쪽에 있는 배선스웨이트 호수로 흐른다. 데르웬트와 지류인 그레타는 케직을 통과하여 포틴스케일 동쪽에서 합류한다.[69] 그레타 강의 발원지는 스토 존스 벡과 강 글렌데라마킨이 합류하는 지점인 트렐켈드 근처에 있다.[71]

케직은 스키도 그룹의 풍하측에 위치하며, 이곳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군이다. 이 산등성이들은 오르도비스기에 형성되었으며, 4억 8800만 년에서 4억 4300만 년 전이다.[72] 이들은 케직을 보호하는 삼각형을 이루며, 스키도 자체에서는 최대 931 m의 높이에 이른다.[73] 포틴스케일 서쪽, 손스웨이트 마을의 남서쪽에는 윈래터 포레스트 공원과 그리데일 파이크가 있다.[69] 동쪽, 캐슬리그 석기 유적지를 지나면 헬벨린 산맥 기슭에 세인트 존스 인 더 베일이 있으며, 이곳은 케직에서 출발하는 등산객들에게 인기가 많다. 2010년에는 Electricity North West, United Utilities, 레이크 디스트릭트 국립공원 관리청, 환경 보호 자선 단체인 Friends of the Lake District가 경관 개선을 위해 10만 파운드를 투자하여 전력선을 제거하고 지하 케이블로 교체했다.[74]

기후적으로 케직은 영국의 북서부 지역에 속하며, 이 지역은 서늘한 여름, 온화한 겨울, 그리고 연중 높은 강우량을 특징으로 한다.[75] 케직의 강수량은 연말에 가장 많으며, 10월에 평균 189.3 mm로 최고조에 달한다.

location = 케직 (1991–2020 평균)
metric first = 예
single line = 예
Jan high C = 7.4Feb high C = 7.8Mar high C = 9.7Apr high C = 12.4May high C = 15.8Jun high C = 18.2Jul high C = 19.8Aug high C = 19.2Sep high C = 17.0Oct high C = 13.5Nov high C = 10.0Dec high C = 7.8year high C = 13.2
Jan mean C = 4.7Feb mean C = 4.8Mar mean C = 6.3Apr mean C = 8.4May mean C = 11.3Jun mean C = 14.0Jul mean C = 15.7Aug mean C = 15.3Sep mean C = 13.2Oct mean C = 10.2Nov mean C = 7.1Dec mean C = 4.9
Jan low C = 2.0Feb low C = 1.8Mar low C = 2.8Apr low C = 4.4May low C = 6.8Jun low C = 9.7Jul low C = 11.6Aug low C = 11.4Sep low C = 9.4Oct low C = 6.8Nov low C = 4.2Dec low C = 1.9year low C = 6.1
precipitation colour = greenJan precipitation mm = 172.5Feb precipitation mm = 135.4Mar precipitation mm = 114.9Apr precipitation mm = 82.8May precipitation mm = 81.6Jun precipitation mm = 89.9Jul precipitation mm = 94.9Aug precipitation mm = 120.2Sep precipitation mm = 124.4Oct precipitation mm = 175.0Nov precipitation mm = 188.6Dec precipitation mm = 195.2year precipitation mm =
unit precipitation days = 1 mmJan precipitation days = 16.8Feb precipitation days = 14.3Mar precipitation days = 14.1Apr precipitation days = 12.5May precipitation days = 12.4Jun precipitation days = 12.7Jul precipitation days = 13.5Aug precipitation days = 15.2Sep precipitation days = 13.5Oct precipitation days = 17.0Nov precipitation days = 18.2Dec precipitation days = 17.8year precipitation days =
source 1 = 영국 기상청[76]source =


3. 1. 기후

케직의 연중 기온은 다음과 같다.[170]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평균
최고 기온 (°C)7.27.49.411.915.617.919.719.116.713.39.77.512.95
평균 기온 (°C)5.04.06.010.012.015.017.016.014.010.07.04.0-
최저 기온 (°C)1.61.42.84.26.49.311.511.9.06.73.91.55.78



케직의 연중 강수량 및 일조 시간은 다음과 같다.[170]

1월2월3월4월5월6월7월8월9월10월11월12월연간
강수량 (mm)169.1119.9127.881.779.484.388.1104.1126.6183.9177.9173.01521.0
일조 시간9311215521021721824021715015590331943


4. 인구 통계

크로스웨이트 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1623년에 238건의 매장이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교구 전체 인구의 12분의 1에서 10분의 1 사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77] 1640년대에는 케직, 칼라일, 코커마우스, 크로스웨이트 및 기타 지역에 영향을 미친 1645–47년의 흑사병 유행으로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다.[78]

1801년 인구 조사에서 케직 읍은 마을과 주변 촌락을 포함하여 1,350명의 인구를 보고했다.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여 1811년에 1,683명, 1821년에 1,901명, 1831년에 2,159명, 1841년에 2,442명, 1851년에 2,618명으로 증가했다.[79] 1871년에는 읍의 인구가 2,777명이었다.[80] 인구는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여 1901년에는 4,451명에 달했다.[81] 그 이후 인구 변동은 거의 없었으며, 1991년 인구 조사에서 마을의 인구는 4,836명이었다. 2001년 인구 조사에서는 4,984명이 기록되었고, 2011년에는 4,821명이 기록되었다.[82] 2021년 인구 조사에서 인구의 54.3%가 기독교인, 37.8%가 무교, 0.4%가 불교, 0.3%가 이슬람교, 0.2%가 힌두교로 식별되었고, 0.3%는 기타 종교로 식별되었다. 나머지 6.7%는 종교를 명시하지 않았다.[83]

5. 랜드마크

케직은 1999년에 개관한 호반 극장의 본거지이다.[84] 이 극장은 전문 레퍼토리 극단의 영구적인 본거지이자 순회 공연자 및 축제를 위한 장소라는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85] 이는 이동식 극장으로 비슷한 기간 동안 활동한 후 케직의 호숫가 부지에 영구적으로 자리 잡고 25년을 보낸 세기 극장 ("블루 박스")를 대체했다.[84][86] 세인트 존 스트리트에 있는 알함브라 영화관은 1913년에 개관하여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영화관 중 하나이며 디지털 기술과 위성 수신 장비를 갖추고 있어 국립 극장, 로열 오페라 하우스 및 기타 장소에서 연극, 오페라, 발레를 실시간으로 상영할 수 있다.[87]

이 마을에는 더웬트 연필 박물관이 있으며, 전시품 중 하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색연필이라고 주장되는 것이다.[88] 그리타 강둑에 있는 피츠 공원에는 케직 박물관 및 미술관이 있으며, 이곳은 빅토리아 시대 박물관으로 스킬도 돌 음악, 사우디 원고, 엡스타인, 존 오피, 리처드 웨스톨 등의 작품을 포함한 지역 및 더 넓은 중요성을 가진 조각 및 그림 컬렉션을 전시한다.[89] 광범위한 복원 및 확장을 거쳐 2014년에 박물관이 재개관했다.[90] 2001년 피츠 공원의 크리켓 경기장은 ''위스덴 크리켓 월간지''에 의해 잉글랜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으로 선정되었다.[91]

그레타 홀은 1등급 지정 건축물이다. 1800년부터 1804년까지 콜리지의 집이었고 1803년부터 1843년까지 사우디의 집이었으며, 이후 케직 학교의 일부가 되었고 현재는 개인 소유로, 일부는 휴가용 아파트로 나뉘어 있다.[92] 3층짜리 이 집은 18세기 후반에 지어졌으며 고딕 양식의 상단 패널과 베네치아식 창문이 있는 평면 패널 중앙 이중문이 특징이다. 내부의 조각된 참나무 벽난로는 16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93] 모트 홀은 메인 스트리트 남쪽에 위치한 눈에 띄는 2등급* 지정 건축물이다. 1571년에 지어졌고 1695년에 재건되었으며, 현재 건물은 1813년에 지어졌다. 석회로 씻은 석재와 슬레이트 벽으로 지어졌으며, 북쪽 끝에는 둥근 아치형 출입구와 외부 계단이 있는 사각형 탑이 있다.[94] 탑 꼭대기에는 케직 관광 안내소에서 "특이한 한 손 시계"라고 설명하는 것이 있다. 이전에는 집회 건물이었으며,[95] 모트 홀에는 1층에 관광 안내소가 있고 2층에는 미술관이 있다.[96]

모트 홀


케직과 관련이 있는 저명한 사회 사상가이자 미술 평론가인 존 러스킨은 프라이어스 크래그에 있는 기념관으로 기념된다. 1900년에 로운슬리의 주도로 세워진 이 기념관은 2등급 지정 구조물이다.[97]

6. 문화

6. 1. 교회

Victorian Gothic church, exterior view
1838년에 건축된 성공회 교회인 성 요한 교회


1838년까지 케직에는 마을 경계 내에 성공회 교회가 없었고, 광범위한 크로스웨이트 교구의 일부였다. 현재의 교구 교회인 성 요한 교회는 앤서니 샐빈이 설계하여 1838년에 봉헌되었다. 분홍색 성 모양의 애슐러 사암과 슬레이트 지붕으로 기하학적 양식을 띤다. 1862년, 1882년, 1889년에 교구의 기부자인 마샬 가문에 의해 교회가 확장되었고, 성가대 창문은 헨리 홀리데이가 디자인하여 1879년에 설치되었으며, 1889년에 성가대가 확장되면서 철거 및 재설치되었다.[98] 성 요한 교회는 1951년에 2등급* 건물로 지정되었다.[99] 케직의 이전 교구 교회인 성 켄티건 교회는 마을 바로 외곽의 크로스웨이트에 위치해 있으며, 이 역시 2등급* 건물로 지정되어 있다. 최소 14세기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튜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1523년에 확장되었으며, 이후 1844년에 조지 길버트 스콧에 의해 복원되었다.[100]

퀘이커들은 이 마을에 초창기 예배당을 가지고 있었으며, 1715년에 언더스키다우에 예배당으로 대체되었다. 영국 비국교도들은 1705년 또는 그 이전부터 개인 주택에서 모임을 가졌으며, 18세기 후반에 레이크 로드의 예배당으로 이동했다.[101] 회중 교회 예배당은 1858-59년에 건축되었다.[101] 첫 번째 웨슬리교 예배당은 메인 스트리트에서 작은 뜰에 331파운드 10실링을 들여 1814년에 지어졌으며, 현재의 감리교 교회는 사우시 스트리트에 있다.[102] 1928년부터 케직의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하이 힐에 있는 호수의 성모와 성 찰스 교회의 봉사를 받았다. 새로운 퀘이커 예배당이 1994년에 마을에 문을 열었다.[101] 동방 정교회 교회는 2007년에 개관하여 케직과 인근 마을인 브레이스웨이트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103]

케직에는 다른 종교 건물은 없으며, 이슬람 예배는 메인 스트리트의 지역 의회 건물에 있는 방에서 금요일에 진행되었으나 현재는 중단되었다.[104]

6. 2. 행사

케직 영화제는 매년 2월에서 3월 사이에 열리며, 옛 영화와 신작 영화 상영, 감독 인터뷰, 지역 영화 제작자들의 단편 영화를 위한 오스프리상 시상식이 열린다.[141] 매년 3월에는 열흘간 문학 축제인 워즈 바이 더 워터(Words by the Water)가 극장 바이 더 레이크에서 열린다.[142] 이 축제는 1995년에 시작되었으며, 멜빈 브래그, 루이 드 베르니에르, 저메인 그리어, 스티브 존스, 페넬로페 라이블리, 켄트 공작 부인, 마이클 로젠, 조앤나 트롤로프 등이 행사를 진행했다.[142]

극장 바이 더 레이크, 워즈 바이 더 워터 축제 개최지


매년 5월에는 케직 하프 마라톤, 케직 재즈 페스티벌, 케직 산악 축제가 열린다. 케직 하프 마라톤은 참가자들이 더웬트워터 주변을 달리며 뉴랜즈 밸리로 추가 루프를 돈다.[143] 케직 재즈 페스티벌은 4일간 12곳의 지역 행사장에서 100개 이상의 재즈 행사가 열리며, 주류 및 전통 재즈의 영국 및 국제적인 대표자들이 참여한다.[143] 케직 산악 축제는 4일간 계곡 스크램블링, 산악 자전거 타기, 가이드 워크, 지도 읽기, 카누, 등반, 철인 3종 경기 등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143]

6월에는 케직 맥주 축제가 열리며, 매년 5,000명 이상의 참가자가 참여하는 이틀간의 행사이다.[143] 7월에는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의 국제 모임인 케직 컨벤션이 열린다.[144] 이 컨벤션은 성경적 가르침과 경건한 생활 방식을 장려하며,[145] 프랭크 부흐만과 빌리 그래함이 이 행사와 관련되어 있다.[146] 이 행사는 1주일에서 3주로 확대되어 7월 후반과 8월 초에 걸쳐 열린다.[143]

8월에는 더웬트워터 레가타가 열린다. 이 행사는 1792년 조셉 포클링턴에 의해 시작되었고,[147] 2세기 이상 중단되었다가 2013년에 부활했다.[148] 주최측은 이 행사를 "더웬트워터에서 다양한 경주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통해 물 위에서 펼쳐지는 혼돈과 광란의 주말"이라고 설명한다.[143] 1860년에 설립된 케직 농업 박람회는 전통적으로 8월 은행 휴일 월요일에 하우라스(Howrahs)로 알려진 개방된 땅의 크로싱 필드(Crossing Fields) 구역에서 열린다. 이 박람회에는 상업 및 자선 단체가 참여하며, 많은 수의 경쟁자, 출품자 및 관람객이 모인다.[143] 2014년부터는 브레이스웨이트를 향해 시내 중심가에서 몇 백 야드 떨어진 펌프 필드로 장소가 변경되었다.[150]

레이크 디스트릭트 여름 음악 축제와 함께 1947년에 설립된 케직 합창 협회[151] 및 케직 음악 협회를 통해 클래식 음악이 연중 상영된다.[155] 케직에서 공연한 연주자로는 칠린기리안 콰르텟,[152] 로열 노던 신포니아,[153] 태스민 리틀,[154] 런던 시 신포니아,[155] 레드 프리스트[155] 및 니콜라이 데미덴코 등이 있다.[156]

6. 3. 레이크 시인과 케직의 주요 인물

윌리엄 워즈워스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가까운 친구이자 협력자였다. 1799년 말 워즈워스와 그의 여동생 도로시가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정착했을 때, 콜리지도 그들을 따라 이 지역으로 이주했다.[157] 워즈워스 부부가 그라스미어의 도브 코티지로 이사한 지 6개월 후, 콜리지는 케직에 있는 그레타 홀을 임대했다.[157] 1803년, 콜리지의 매형인 로버트 사우디가 콜리지 가족과 함께 그레타 홀에서 살기 시작했다. 사우디는 1804년 콜리지가 떠난 후에도 그레타 홀에 남아 1843년 사망할 때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다.[158]
19th century drawing of substantial country house
그레타 다리 뒤 그레타 홀
워즈워스, 찰스 앤 메리 램, 토머스 드 퀸시, 윌리엄 해즐릿, 퍼시 비시 셸리, 월터 스콧 경 등 많은 유명 문인들이 이 시기에 그레타 홀을 방문했다.[159] 런던 출신으로 고향에 대한 애정이 깊었던 램은 레이크 디스트릭트의 매력에 회의적이었지만, 그레타 홀을 방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지역의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하며 글을 썼고, 이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방문 욕구를 높였다.[159] 사우디는 지역에서 좋은 평판을 얻었지만, 마을 생활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159] 그는 크로스웨이트 교회 묘지에 묻혔으며, 교회 내부에는 워즈워스가 쓴 비문과 함께 그를 기리는 기념물이 있다.[160]

3 images of middle-aged men
케직의 주요 인사: 뱅크스, 마이어스, 월폴


레이크 시인들 이전에 케직의 주요 인물로는 잉글랜드 내전 당시 왕당파 지도자였던 존 뱅크스 경이 있다. 잉글랜드의 찰스 1세의 법무 장관이자 대법원장이었던 뱅크스는 1589년 케직 근처 캐슬리그에서 태어났다.[161] 그의 기념 흉상은 박물관 근처의 어퍼 피츠 공원에 있다.[162] 2014년에는 전 케직 법원을 그의 이름을 따서 "The Chief Justice of the Common Pleas"라는 이름의 바로 개조하여 그를 더욱 기념했다.[163]

이후 이 지역의 거주자로는 고전 학자이자 수필가, 시인이자 심령 연구 협회의 창립자인 프레데릭 마이어스가 있으며, 그는 케직에서 태어났다.[164] 동물 복지 운동가이자 비건 협회의 창립자인 도널드 왓슨은 교직에서 은퇴한 후 케직에서 살았다.[165] 선구적인 산악인이자 사진 작가인 조지 & 애슐리 아브라함 형제는 케직에서 살며 일했다.[166] 1887년에 지어진 레이크 로드의 그들의 사진 상점은 나중에 지역 산악인이자 의류 상인 조지 피셔에게 인수되었으며, 이 상점에는 아브라함 형제 시대의 사진을 포함한 기념품이 아직 보관되어 있다.[167]

레이크 시인 이후 케직과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문학가는 소설가 휴 월폴이었다. 1924년 그는 더웬트워터 반대편 끝에 있는 케직과 그레인지 사이의 브래컨번으로 이사했다.[168] 이전 세기의 레이크 시인처럼, 그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대해 열정적으로 글을 썼고, 그곳의 풍경과 분위기는 종종 그의 소설에 등장했다. 그는 1939년에 "내가 모든 마음과 영혼으로 컴벌랜드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 헤리스 책을 쓰는 데 기쁨을 느끼는 또 다른 이유이다. 내가 컴브리안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컴브리안 사람들이 나에게 그렇게 친절하다는 것은 나의 행운이다."라고 썼다.[169]

7. 교통

케직은 A66 도로를 통해 워킹턴과 페니쓰를 연결하며, A591을 통해 윈더미어, 켄달 및 칼라일 (A595 경유)과 연결된다.[129]

케직에는 철도 연결이 없다. 커커머스, 케직 & 페니쓰 철도를 위해 1860년대에 건설된 노선은 1972년에 폐쇄되었다.[130] 1990년대부터 이 노선을 재건하려는 계획이 논의되어 왔다.[131] 철도의 토공 작업의 약 90%가 여전히 존재하지만, 2000년 추산에 따르면 재개통에는 2,500만 파운드가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132] 2014년 현재, 옛 철도 노선 상의 도시와 마을을 운행하는 유일한 대중교통 수단은 주로 1시간 간격으로 운행되는 버스 서비스이다. 페니쓰의 주요 역에서 케직까지의 버스 여행은 예정된 시간으로 47분이 소요된다.[133]

이 도시는 칼라일, 커커머스, 켄달, 랭커스터, 페니쓰, 윈더미어, 워킹턴, 그리고 북서부의 다른 도시와 마을과 직접 연결되는 다른 버스 노선이 운행된다.[134] 1974년 A66이 새로운 우회로로 변경된 후 페니쓰에서 커커머스 및 그 너머로의 교통 흐름이 완화되었는데, 이는 도시 북쪽의 그레타 협곡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잇는 새로운 고가교로 인해 논란을 야기했다.[135]

대다수의 방문객은 자동차로 도착하며, 3개의 시내 주차장, 더 레이크 극장 옆의 또 다른 대형 주차장, 그리고 도시 내 다른 소규모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다.[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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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웹사이트 Keswick http://www.metoffice[...] 2014-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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