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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두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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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콘라두스 1세는 911년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된 프랑켄 공작이었다. 그는 튀링기아 공작 콘라트의 아들이자 카롤링거 왕조의 외손으로, 유아왕 루트비히 사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슈바벤, 바이에른, 작센 등 지역 공작들의 권력 강화에 직면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했으나, 마자르족의 침입과 내부 분열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그는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918년 사망했으며, 동생에게 작센의 하인리히 1세에게 왕위를 넘기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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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두스 1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콘라트의 인장
칭호동프랑크 왕
재위 기간911년 11월 10일 – 918년 12월 23일
이전 통치자유아왕 루트비히
다음 통치자하인리히 1세
칭호 1프랑코니아 공작
재위 기간 1906년 2월 27일 – 918년 12월 23일
이전 통치자 1콘라트 1세
다음 통치자 1에버하르트
왕가콘라딘 가문
아버지콘라트
어머니글리스무트
배우자슈바벤의 쿠니군데
출생일기원후 881년경
사망일918년 12월 23일
사망 장소바일부르크 성
매장지풀다 대성당

2. 생애

콘라두스 1세는 튀링겐 공작 콘라트("노인")와 그의 아내 글리스모다의 아들이었으며, 아르눌프의 아내이자 루트비히 4세의 어머니인 오타와 친척 관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란가우 지역 백작인 콘라딘 가문은 카롤링거 왕조의 충실한 지지자들이었다. 906년 콘라트 노인이 사망하자, 콘라트는 프랑켄 전체의 명실상부한 공작이 되었다. 그러나 삼촌인 게브하르트 공작 사후, 서부 로트링겐으로 콘라딘 가문의 통치를 확장하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콘라두스 1세, 코덱스 에버하르디, c. 1150


911년 11월 10일,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한 후, 콘라두스는 포르히하임에서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통치자들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되었다.[1] 공작들은 카롤링거 왕조 출신인 서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 단순왕의 왕위 계승을 막고, 루트비히 4세와 모계 혈연 관계에 있던 콘라두스를 선택했다. 콘라두스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로타린기아의 공작 레기나르만이 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서프랑크 왕국에 합류했다.

콘라두스 1세는 공작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은 915년까지 콘라두스 1세에 반기를 들었고,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과의 싸움은 콘라두스 1세의 생명을 앗아갔다. 슈바벤의 부르크하르트 2세 공작은 더 많은 자율성을 요구하여 얻어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반란에 대한 도움을 마자르족에게 요청했고, 패배했을 때 마자르족 영토로 도망쳤다. 이로 인해 그는 반역자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강력한 공작은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2]

913년, 콘라두스 1세는 리우트폴트의 미망인이자 슈바벤 백작 에르흐앙거의 여동생인 쿤군데와 결혼했다.[3] 그들은 913년에 태어난 쿤군데와 헤르만을 두었다. 같은 해 에르흐앙거는 콘라두스 1세에 반란을 일으켰고,[4] 914년에는 콘라두스의 최고 고문이었던 콘스탄츠의 주교 솔로몬 3세를 사로잡았다. 에르흐앙거는 추방되었지만, 콘스탄스 호수 근처 전투에서 왕실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결국 슈바벤의 호엔알테임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917년 1월 21일에 그의 형제 베르톨트와 함께 처형되었다.

콘라두스 1세의 왕국 (녹색), 로타린기아가 서프랑크 왕국에 합류


콘라두스의 치세는 지역 공작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왕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 시기였다. 로타린기아와 아헨을 되찾기 위한 샤를 단순왕과의 군사 작전은 실패했고, 트리어의 대주교 라트보드는 913년에 서프랑크 재상이 되었다. 콘라두스의 왕국은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대가 참패한 이후 마자르족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아 권위가 크게 쇠퇴했다. 916년 호엔알테임 시노드에서 브레멘의 대주교 운니가 이끄는 동프랑크 주교단을 동원하려 했으나, 다른 실패를 보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몇 차례 충돌 후, 콘라두스는 작센의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과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슈바벤의 공작 에르흐앙거 (917년 처형)와 부르크하르트 2세, 아르눌프는 끊임없는 위협이었다.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콘라두스는[5] 918년 12월 23일 바일부르크 성에서 사망했고, 풀다 대성당에 묻혔다.[6] 코르베의 비두킨트의 ''게스타 삭소니카''에 따르면, 콘라두스는 임종 시 동생 프랑켄의 에베르하르트에게 왕관을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에게 넘기라고 설득했다. 콘라두스는 하인리히를 공작들 간의 내부 경쟁과 마자르족의 습격에 맞서 왕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919년 5월, 에베르하르트와 다른 프랑크 귀족들은 콘라두스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하인리히는 프리츨라의 제국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2. 1. 프랑켄 공작 시절

콘라트는 튀링겐과 프랑켄의 공작인 아버지 콘라트와 황제이자 동프랑크의 왕 아르눌프의 서녀 글리스무트의 아들로, 림뷔르흐 근처 바일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니더작센 일대에 살았으며, 콘라디안 왕가라고 불렸다.

906년 벌어진 바벤베르크 가문과의 전투에서 아버지 콘라트 공작이 죽자, 아들 콘라트가 프랑켄 공작 지위에 올랐다.[1] 콘라트 가문은 마인의 영주인 바벤베르크 가문과 프랑켄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902년 콘라트의 삼촌 에베르하르트가 바벤베르크와 싸우다가 전사했고, 906년 1월 아버지 콘라트는 바벤베르크 가문의 아달베르트의 삼형제와 싸우다가 그해 2월 7일 프리츨라르 근처에서 아달베르트에게 살해되었다. 콘라트의 가문과 바벤베르크 가문의 대립은 유아왕 루도비쿠스가 콘라트 가문의 손을 들어주면서 종식되었다.

908년과 910년에 마자르족의 침공에 맞서 싸웠으나, 로타링기아에 있던 그의 친삼촌 루돌프(908년)와 게브하르트는 마자르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913년 슈바벤 백작 에르찬가르의 누이이자 바이에른 후작 레오폴트(또는 리우트폴트)의 미망인이었던 슈바벤 공작가문 출신 알라홀핑가의 쿠니군데(Kunigunde)와 결혼했다.[8] 쿠니군데는 카롤링거 왕가의 외손으로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외손녀딸이자 공주 기셀라와 슈바벤의 팔라틴 백작 베르크톨드 1세의 딸이고, 카를 3세 비만왕, 청년 루트비히, 카를로만의 외조카 딸이었다.

한편 콘라트 1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생존 시부터 이미 왕국의 실권자로 활동했다. 909년 이래로 콘라트는 유아왕 루트비히의 문서와 정책 결정에 개입한 세속 영주였다.[9]

2. 2. 동프랑크의 국왕

콘라두스 1세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911년 11월 10일 포르히하임에서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아 선출되었다.[1] 카롤링거 왕조 출신인 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단순왕의 왕위 계승을 막고, 루트비히 4세와 모계 혈연 관계에 있던 콘라두스 가문의 후계자를 선택한 것이다. 로타링기아의 공작 레기나르만이 콘라두스 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서프랑크 왕국에 합류했다.

콘라두스 1세는 공작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915년까지 반기를 들었고,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과의 싸움에서 콘라두스 1세는 목숨을 잃을 뻔했다. 슈바벤의 부르크하르트 2세 공작은 더 많은 자율성을 요구하여 얻어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반란에 대한 도움을 마자르족에게 요청했고, 패배했을 때 마자르족 영토로 도망쳤다. 이로 인해 그는 반역자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강력한 공작이었기에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

913년 콘라두스 1세는 리우트폴트의 미망인이자 슈바벤 백작 에르흐앙거의 여동생인 쿤군데와 결혼했다.[2] 그들은 913년에 태어난 쿤군데와 헤르만을 두었다. 같은 해 에르흐앙거는 콘라두스 1세에 반란을 일으켰고,[3] 914년에는 콘라두스의 최고 고문이었던 콘스탄츠의 주교 솔로몬 3세를 사로잡았다. 에르흐앙거는 추방되었지만, 콘스탄스 호수 근처 전투에서 왕실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결국 슈바벤의 호엔알테임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917년 1월 21일에 그의 형제 베르톨트와 함께 처형되었다.[4]

콘라두스의 치세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지역 공작들의 증가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왕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로타링기아와 제국 도시 아헨을 되찾기 위한 샤를 단순왕과의 군사 작전은 실패했다. 트리어의 대주교 라트보드는 913년에 서프랑크 재상이 되기까지 했다. 콘라두스의 왕국은 또한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대가 참패한 이후로 마자르족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아 그의 권위가 상당한 정도로 쇠퇴했다.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콘라두스는[5] 918년 12월 23일 바일부르크 성에서 사망했고, 풀다 대성당에 묻혔다.[6]

코르베의 비두킨트의 ''게스타 삭소니카''에 따르면, 콘라두스는 임종 시 그의 동생 프랑켄의 에베르하르트에게 왕실의 왕관을 그의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이었던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에게 넘기라고 설득했는데, 그는 하인리히를 공작들 간의 내부 경쟁과 끊임없는 마자르족의 습격에 직면하여 왕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공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6] 919년 5월이 되어서야 에베르하르트와 다른 프랑크 귀족들이 콘라두스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하인리히는 프리츨라의 제국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2. 2. 1. 선거에 의한 국왕 즉위

911년 동 프랑크 왕국의 마지막 카롤링거 왕가 출신 왕 유아왕 루트비히가 죽자, 즈벤티볼트의 어린 두 아들이 있었으나 서출이었기에, 콘라트는 외사촌 형제들을 제치고 11월 10일 동프랑크의 포르크하임(Forchheim)에서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되었다.[11] 콘라트를 지지한 인물은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의 귀족들이었다.[10]

카롤링거 왕조의 가까운 인척으로는 바이에른 공작이 지명되었으나, 전임 바이에른 공작 리우트폴트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딸 기셀라의 딸 쿠니군데와 결혼했으나 907년 마자르족과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그 아들 아르눌프는 소년이었으므로,[12] 귀족들은 콘라트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의 강력한 정적인 오토는 고령을 이유로 들어 왕위를 사양했지만 콘라트의 지지 기반은 매우 취약하였다. 귀족, 제후, 주교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된 국왕이었으므로, 각지의 귀족, 제후, 영주, 주교들의 입지는 커졌고, 왕권과 왕의 발언권은 약화되었다.

콘라트 1세 시대의 동프랑크 왕국 데나리온 동전


콘라트 1세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한 후, 콘라두스는 911년 11월 10일 포르히하임에서 작센, 슈바벤, 바이에른의 통치자들에 의해 동프랑크 왕국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공작들은 루트비히의 카롤링거 가문 친척인 서프랑크 왕국의 왕 샤를 단순왕의 왕위 계승을 막았다. 그들은 고(故) 왕과 모계 혈연 관계에 있던 콘라두스 가문의 후계자를 선택했다. 콘라두스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로타린기아의 공작 레기나르만이 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서프랑크 왕국에 합류했다.

왕을 선거로 결정하는 것은 게르만의 풍습으로, 소 피핀이나 아르눌프의 예가 있다.[1]

2. 2. 2. 내부 혼란과 왕권 실추

911년 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1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팔라틴 백작 에르찬가르 등 여러 귀족이 슈바벤 공작위를 놓고 다투었다. 이 과정에서 부르하르트 1세의 아들 부르하르트 2세는 유배되고, 동생 아달베르트는 콘스탄츠의 주교 솔로몬에게 살해되었다. 에르찬가르가 새 공작이 되었으나 콘라트 1세에게 계속 도전했다.

콘라트는 왕권 강화를 위해 로트링겐과 아헨 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907년 마자르 족의 침략에 바이에른의 프레센부르크에서 맞섰지만 참패하여(→프레센부르크의 전투 (907년)) 왕으로서의 권위를 크게 잃었다. 912년 1월에는 서프랑크의 샤를 3세가 알사스를 침공하기도 했다.

912년913년, 콘라트는 로타링기아를 침공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다. 913년 로트링기아 귀족들은 알자스를 침공하여 스트라스부르 성곽을 불태웠다.

913년 콘라트는 서프랑크의 총리이자 트리어 대주교인 트리어의 라트보트를 영입했다. 프레센부르크 전투 패배 후 귀족들은 그의 지도력을 의심했고, 그는 작센의 하인리히 등과 타협했다. 그러나 슈바벤의 공작 에르찬가르슈바벤 공작 부르하르트 2세는 계속 그를 괴롭혔다. 912년부터 917년까지 마자르 족의 침략으로 지역 지도자들은 스스로를 방어해야 했고, 국왕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913년 마자르 족은 팔라틴에서 백작 에르찬가르 등을 격파했고,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군대 대다수를 잃었다. 콘라트는 국내 갈등을 조절하지 못하고 913년 이후 권위를 크게 잃었다.

작센의 오토 광휘공은 그의 강력한 정적이었다. 콘라트는 오토의 아들 하인리히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913년 콘라트는 슈바벤 공작의 미망인이자 슈바벤 백작 에르찬가르의 누이인 쿠니군데와 결혼했다. 쿠니군데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등을 낳았고, 콘라트에게 딸 쿠니군데와 아들 헤르만을 안겨주었으나 헤르만은 요절했다. 913년 초, 에르찬가르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콘라트는 기적적으로 승리하고 평화협정을 체결, 에르찬가르의 누이와 결혼했다.

그러나 부르하르트 2세가 반역을 기도했고, 에르찬가르는 부르하르트 2세를 지원했다. 콘라트는 부르하르트를 격파했으나, 작센 공작 작센의 하인리히의 침입으로 철군했다.

그 해 에르찬가르는 콘라트의 자문 솔로몬 주교를 납치했고, 콘라트는 솔로몬 주교를 구출한 후 에르찬가르를 추방했다가 풀어주었다. 솔로몬 주교는 에르찬가르를 설득했으나 듣지 않았다.

913년부터 917년 사이 마자르족이 최소 4번 이상 동프랑크 제국을 침공했으나, 콘라트 1세는 대응하지 않았다. 지역 귀족들은 스스로 자신의 지역을 방어하였다.

915년 콘라트는 에베르하르트 3세를 보내 하인리히 1세를 공격했으나 에레스부르크에서 크게 패했다. 콘라트는 직접 군사를 이끌고 작센으로 갔고, 하인리히는 일단 충성을 맹세했다.

콘라두스 1세는 공작들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는 데 매우 어려움을 겪었다.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915년까지 콘라두스 1세에 반기를 들었고, 바이에른의 아르눌프 공작과의 싸움은 콘라두스 1세의 생명을 앗아갔다. 슈바벤의 부르크하르트 2세 공작은 더 많은 자율성을 요구하여 얻어냈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는 반란에 대한 도움을 마자르족에게 요청했고, 패배했을 때 마자르족 영토로 도망쳤다. 이로 인해 그는 반역자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강력한 공작은 처형을 피할 수 있었다.

913년 콘라두스 1세는 리우트폴트의 미망인이자 슈바벤 백작 에르흐앙거의 여동생인 쿤군데와 결혼했다.[2] 그들은 913년에 태어난 쿤군데와 헤르만을 두었다.

913년 에르흐앙거는 콘라두스 1세에 반란을 일으켰고,[3] 914년에는 콘라두스의 최고 고문이었던 콘스탄츠의 주교 솔로몬 3세를 사로잡았다. 에르흐앙거는 추방되었지만, 콘스탄스 호수 근처 전투에서 왕실 군대를 격파했다. 그는 결국 슈바벤의 호엔알테임에서 열린 귀족 회의에서 반역죄로 체포되었고, 917년 1월 21일에 그의 형제 베르톨트와 함께 처형되었다.[4]

콘라두스의 치세는 끊임없이 이어졌고, 일반적으로 지역 공작들의 증가하는 권력에 대항하여 왕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노력은 성공하지 못했다. 로타린기아와 제국 도시 아헨을 되찾기 위한 샤를 단순왕과의 군사 작전은 실패했다. 트리어의 대주교 라트보드는 913년에 서프랑크 재상이 되기까지 했다. 콘라두스의 왕국은 또한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대가 참패한 이후로 마자르족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아 그의 권위가 상당한 정도로 쇠퇴했다.

2. 2. 3. 치세 후반

914년 6월 콘라트는 계약서를 작성, 아내 쿠니군데가 왕국의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명시하였다. 콘라트는 아들을 얻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들 헤르만은 어려서 요절했고 딸 쿠니군데만이 성인이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 918년 2월 7일 왕비 쿠니군데가 사망했다. 쿠니군데는 풀다 수도원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로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18세기에 로쉬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쿠니군데의 시신은 도난당했다.[5]

916년 9월 20일 콘라트 1세는 동프랑크 왕국 내 교회 지도자 회의를 소집했다. 이 회의는 교황의 승인을 얻어 프랑코니아 주교 오르트의 페트로(Petero von Orte)에 의해 호엔알테임(Hohenaltheim)에서 열렸으며, 왕권 강화와 교회-왕 사이의 동맹 강화를 목표로 했다. 콘라트는 교계와의 연대를 통해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916년 바이에른의 아르눌프가 레겐스부르크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헝가리로 도주했다. 콘라트는 자신의 형제 에베르하르트를 바이에른 공작으로 임명했으나, 1년 뒤 아르눌프는 돌아와 에베르하르트에게 돈을 주고 바이에른 영지를 회복하였다.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얻은 상처는 콘라트 1세의 사망 원인이 되었다.[5]

콘라두스 1세의 치세는 지역 공작들의 권력 강화에 맞서 왕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번번이 실패로 돌아간 시기였다. 로타린기아와 아헨을 되찾기 위한 샤를 단순왕과의 군사 작전은 실패했고, 트리어의 대주교 라트보드는 913년에 서프랑크 재상이 되었다. 콘라두스의 왕국은 907년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바이에른 군대가 참패한 이후 마자르족의 끊임없는 습격을 받아 권위가 크게 쇠퇴했다. 916년 호엔알테임 시노드에서 브레멘의 대주교 운니가 이끄는 동프랑크 주교단을 동원하려 했으나, 다른 실패를 보상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몇 차례 충돌 후, 콘라두스는 작센의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과 합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슈바벤의 공작 에르흐앙거 (917년 처형)와 부르크하르트 2세, 아르눌프는 끊임없는 위협이었다.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5] 콘라두스는 918년 12월 23일 바일부르크 성에서 사망했고, 풀다 대성당에 묻혔다.[6]

코르베의 비두킨트의 ''게스타 삭소니카''에 따르면, 콘라두스는 임종 시 동생 프랑켄의 에베르하르트에게 왕관을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에게 넘기라고 설득했다. 콘라두스는 하인리히를 공작들 간의 내부 경쟁과 마자르족의 습격에 맞서 왕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6]

2. 2. 4. 최후

917년 1월 23일 콘라트는 호엔알테임에서 소집한 주교회의에서 자신의 정적인 슈바벤 공작 에르찬가르와 베르톨드, 그리고 그들의 조카 리우트프리드를 수도원에 감금하기로 했다가, 곧 참수형에 처했다.[4] 이들의 재산을 몰수한 콘라트는 909년부터 911년까지 잠시 선출직 슈바벤 공작이었던 부르하르트 1세의 아들로 일찍이 유배되었던 부르하르트 2세를 슈바벤 공작에 임명하였다.

콘라트는 바이에른의 아르눌프와 교전 중에 얻은 부상 후유증으로 병석에 누웠다가 918년 12월 23일 낫소의 바일부르크(Weilburg)에서 죽었는데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5] 외아들 헤르만의 요절로 아들이 없던 콘라트는 임종 시에 자신의 동생 에베르하르트에게 유언으로 왕위를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에게 넘기라고 유언을 남겼다. 콘라두스는 에베르하르트에게 왕위 욕심을 단념하라고 요구했고, 그를 새 왕에게 상징물을 전달하는 역할을 내정하였다. 당시 하인리히는 침범하는 마자르족에 맞서 왕국의 영토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영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에베르하르트와 다른 귀족들은 유언을 지켜 프리츨러의 의회에서 하인리히를 독일의 왕으로 선출했다.

풀다 대성당내에 안치된 콘라트 1세의 묘비


아르눌프와의 전투에서 심각한 부상을 입은 콘라두스는 918년 12월 23일 바일부르크 성의 거주지에서 사망했다.[5] 그는 풀다 대성당에 묻혔다.

연대기 작가 코르베의 비두킨트의 ''게스타 삭소니카''에 따르면, 콘라두스는 임종 시 그의 동생 프랑켄의 에베르하르트에게 왕실의 왕관을 그의 주요 반대자 중 한 명이었던 작센의 공작 하인리히 사냥꾼 공작에게 넘기라고 설득했는데, 그는 하인리히를 공작들 간의 내부 경쟁과 끊임없는 마자르족의 습격에 직면하여 왕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공작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919년 5월이 되어서야 에베르하르트와 다른 프랑크 귀족들이 콘라두스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하인리히는 프리츨라의 제국 의회에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이제 왕위는 프랑크족에서 작센족으로 바뀌었고, 작센족은 샤를마뉴의 정복 기간 동안 큰 고통을 겪었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에 자부심을 느꼈다.

3. 가계

콘라두스 1세는 튀링겐과 프랑켄의 공작인 아버지 콘라트와 황제이자 동프랑크의 왕 아르눌프의 서녀 글리스무트 사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즈벤티볼트와 라톨드, 유아왕 루트비히의 외조카가 된다.

아버지 콘라트는 튀링겐과 프랑켄공작이자 헤센가우의 백작 등을 역임하였다. 증조부는 랑가우의 백작 게브하르트 폰 랑가우였고, 할아버지는 네우스트리아의 우도였다. 콘라두스 가문은 대대로 니더작센 일대에 살았으며, 콘라디안 왕가라고 불렸다.

형제로는 에버하르트 3세, 우도(오토), 그리고 부르크하르트에게 시집간 딸 등이 있었다. 콘라트 1세의 친삼촌인 루돌프는 뷔르츠부르크주교와 로트링겐의 주교를 역임하였다. 게브하르트 역시 콘라트의 숙부였으나 콘라트 즉위 전에 사망했다. 어머니 글리스무트는 황제 아르눌프의 서녀로, 튀링겐 공작가문의 딸로 추정된다.

913년 슈바벤 백작 에르찬가르의 누이이자 바이에른 후작 레오폴트(또는 리우트폴트)의 미망인이었던 쿠니군데와 결혼했다.[8] 쿠니군데는 카롤링거 왕가의 외손으로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외손녀딸이자 카를 3세 비만왕 등의 외조카 딸이었다. 쿠니군데는 리우트폴트와의 사이에서 아르눌프 대머리와 베르크톨드 두 아들이 있었다.

콘라두스 가문의 가계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증조부게브하르트랑가우의 백작
할아버지우도 2세베터라우 공작
숙부베렌가르헤센 백작
아버지콘라트튀링겐 공작, 906년 사망
어머니글리스무트아르눌프의 딸, 924년 사망
동생에버하르트
동생오토(우도)918년 사망
부인쿠니군데870년/878년/880년경 ~ 918년 2월 7일, 독일인 루트비히 2세의 외손녀
쿠니군데
사위에베르하르트
외손콘라트955년 사망, 오토 1세의 사위, 콘라트 2세의 증조부
아들헤르만요절
장인베르톨드슈바벤과 팔라틴백작
장모이자 외증대이모기셀라루트비히 2세 독일인의 딸
처남에르찬가르 2세슈바벤 공작(915-917), 917년 사망


4. 평가

프륌의 종교 연대기 작가는 콘라트 1세에 대해 "항상 온화하고 현명한 사람이자 신성한 가르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평을 남겼다.[13]

크레모나의 리우트프란트는 "프랑크 족과 작센 족과의 강력한 전쟁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자신의 선거에 즈음하여 자신의 반대자들을 설득시켜 극복하고, 지혜의 힘과 그의 용기의 강도에 의해 반항적인 귀족들을 정복한 사람이라는 평을 남겼다.

참조

[1] 서적 瀬原、p. 62
[2] 서적 瀬原、p. 63
[3] 서적 Reuter, p. 135-136
[4] 서적 瀬原、p. 64
[5] 서적 成瀬他、p. 102
[6] 서적 瀬原、p. 65
[7] 서적 瀬原、p. 77
[8] 문서 쿠니군데의 전 남편인 바이에른 후작 레오폴트는 907년에 사망했다.
[9] 간행물 Die konradinischbabenbergische Fehde um 900. Ursachen, Anlass, Folgen. Bochum 2006
[10] 웹사이트 콘라트 1세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11] 문서 당시 유력 왕위 후보인 작센 공작 오토가 양보했다는 설도 있다.
[12] 간행물 Das Adelsgeschlecht der Konradiner vor und während der Regierungszeit Konrads I. Bochum 2006
[13] 문서 Continuatio Reginonis a.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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