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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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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쿨라크는 19세기부터 사용된 용어로, 처음에는 토지를 소유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부유한 농민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소비에트 시대에는 집단농업에 반대하는 자영농민까지 포함하는 낙인으로 확대되었으며, 소련 정부는 쿨라크를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여 탄압했다. 이러한 탄압은 강제 이주, 처형, 기근을 초래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대기근은 쿨라크로 지목된 자영농에 대한 박해와 무리한 농업 집단화로 인해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쿨라크 탄압은 전체주의와 국가 폭력의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역사적 진실 규명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2. 정의

니콜라이 부하린이 발행한 소비에트 잡지 "프로젝토르(прожектор)" 1926년 3월 31일판에 실린 농민 세 계층의 사진. 사진 밑에는 "보로네시현 노보호페르스키군에서 현대 농촌 마을의 상황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진을 받았다."라고 쓰여있다.


쿨라크라는 용어는 19세기에 토지를 소유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더 부유한 농민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16] 스톨리핀 개혁은 농민들이 대지주들로부터 신용 대출을 통해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허락하여 새로운 지주 계층을 만들어냈다. 1903년에는 농민 중 11%가 남성 가족 구성원당(이 시기 러시아 농가는 자식이 대체로 6명에서 10명이었다.) 토지 8에이커 이상을 소유했으며 1912년에 들어서는 농민 중 16%까지 늘어났다. 8에이커란 기준은 중농과 부농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22]

소련 시대에는 쿨라크의 정의가 더욱 확대되어, 단순히 부유한 농민뿐 아니라 집단농업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등의 자영농민까지 포함하는 낙인으로 사용되었다.[13] 소련의 용어는 러시아 농민을 베드냐크/Беднякru(가난한 농민), 세레드냐크/Середнякru(중간 소득 농민), 쿨라크(더 큰 농장을 가진 고소득 농부)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으며, 고용된 토지 없는 계절적 농업 노동자인 바트라크/Батракru라는 범주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농촌은 경제 격차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부와 상관없이 연대감이 있었다.[13] 쿨라크는 "상상의 산물로서의 사회적 적이었다"라고 네이마크는 말한다.[13] 공산당이 지정하는 "쿨라크"란, 몇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거나, 주거의 지붕이 함석으로 되어 있거나, 또한 집단화에 반항적인지 여부로 결정되었다. 쿨라크는 "흡혈귀, 박해자, 기생충"으로 포스터에 그려졌다.[13] 마을의 교회의 사제와 그 가족도 쿨라크로 지정되었다.[13] 일본어 번역인 "부농(富農)"이라는 단어에서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농민"이라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

2. 1. 소비에트 러시아의 농민 계층 분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는 농민층을 다음과 같은 세 계층으로 분류하였다.

  • 소농을 뜻하는 ''베드냐크(Бедняк)''
  • 중농을 뜻하는 ''세레드냐크(Середняк)''
  • 부농을 뜻하는 ''쿨라크''

또한 고공을 뜻하는 ''바트라크(Батрак)''라는 표현도 사용하였다.[16]

스톨리핀 개혁은 농민들이 대지주들로부터 신용 대출을 통해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허락하여 새로운 지주 계층을 만들어냈다. 토지를 구입한 농민들은 농업 소득을 통해 대출금을 상환하였다. 1903년에는 농민 중 11%가 남성 가족 구성원당(이 시기 러시아 농가는 자식이 대체로 6명에서 10명이었다.) 토지 8에이커 이상을 소유했으며 1912년에 들어서는 농민 중 16%까지 늘어났다. 8에이커란 기준은 중농과 부농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러한 농민은 시골 지방 인구의 20%를 차지하였지만, 전체 곡물의 50%를 생산해냈다.[22]

이 용어는 19세기 에 토지를 소유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더 부유한 농민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

2. 2. 쿨라크 정의의 변천과 문제점

쿨라크라는 용어는 19세기에 토지를 소유하고 가난한 농민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더 부유한 농민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처음 사용되었다.[16] 스톨리핀 개혁은 농민들이 대지주들로부터 신용 대출을 통해 토지를 구입하는 것을 허락하여 새로운 지주 계층을 만들어냈다. 1903년에는 농민 중 11%가 남성 가족 구성원당(이 시기 러시아 농가는 자식이 대체로 6명에서 10명이었다.) 토지 8에이커 이상을 소유했으며 1912년에 들어서는 농민 중 16%까지 늘어났다. 8에이커란 기준은 중농과 부농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22]

소련 시대에는 쿨라크의 정의가 더욱 확대되어, 단순히 부유한 농민뿐 아니라 집단농업에 반대하는 우크라이나 등의 자영농민까지 포함하는 낙인으로 사용되었다.[13] 소련의 용어는 러시아 농민을 베드냐크(Бедняк, 가난한 농민), 세레드냐크(Середняк, 중간 소득 농민), 쿨라크(더 큰 농장을 가진 고소득 농부)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었으며, 고용된 토지 없는 계절적 농업 노동자인 바트라크(Батрак)라는 범주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련의 농촌은 경제 격차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부와 상관없이 연대감이 있었다[13]。 쿨라크는 "상상의 산물로서의 사회적 적이었다"라고 네이마크는 말한다[13]。 공산당이 지정하는 "쿨라크"란, 몇 마리의 소를 가지고 있거나, 주거의 지붕이 함석으로 되어 있거나, 또한 집단화에 반항적인지 여부로 결정되었다. 쿨라크는 "흡혈귀, 박해자, 기생충"으로 포스터에 그려졌다[13]。 마을의 교회의 사제와 그 가족도 쿨라크로 지정되었다[13]。 일본어 번역인 "부농(富農)"이라는 단어에서도 "공산주의에 반대하여 개인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농민"이라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

3. 역사적 배경

3. 1. 차르 시대의 쿨라크

19세기 초부터 많은 차르 관료와 그 반대 세력은 "쿨라크"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졌다.[3] 판사 아나톨리 코니는 "쿨라크"를 폭리꾼에 비유하며, 그들이 땅의 자원과 사람들을 착취한다고 주장했다.[3] 알렉세이 예르몰로프 (정치인),[4] 알렉산더 엥겔하르트 (과학자),[5] 로만 짐메르만/Циммерман, Роман Эмильевичru도 이러한 견해를 공유했다.[6]

펜자 주 주지사 이반 코슈코는 1899년 저서에서 "쿨라크"들이 농노 해방 이후 국영 농촌 은행의 무능을 이용하여 가난한 농민들에게 고리대금업을 강요하여 농민 경제를 장악했다고 언급했다.[7] 그는 9천만 명의 농민 인구 중 절반이 "쿨라크"에게 착취당하며, "쿨라크"들이 연간 최소 5억 루블을 벌어들인다고 주장했다.[8]

세기 전환기 총리 표트르 스톨리핀은 "쿨라크"가 되는 것이 빈곤 탈출의 유일한 방법이었지만, 다른 농민들의 희생이 따른다고 주장했다.[9] 스톨리핀 개혁은 농민들이 대지주로부터 토지를 획득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쿨라크" 계급의 발전을 촉진했다. 1912년까지 농민의 16%가 남성 가족 구성원당 3.2 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소유했으며, 이들은 농촌 인구의 20%를 차지하며 상품화 가능한 곡물의 거의 50%를 생산했다.

부지와 경작지를 한 곳에 울타리로 둘러싼 형태는 후톨이라고 불렸으며, 후톨 농민도 쿨라크로 박해받아 멸절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공동체의 토지를 한 곳에 울타리로 둘러쌌지만 가옥은 원래의 집락에 머무르는 형태는 오토르프라고 불렸다.

3. 2. 러시아 혁명과 볼셰비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볼셰비키는 바트라크와 베드냐크만을 진정한 동지로 여겼고, 세레드냐크는 신뢰할 수 없다고 간주되었다.[23][10] 쿨라크는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이웃을 착취하는 농민들"[23] 또는 인민의 적으로 취급되었으며,[23][10] 로버트 콘퀘스트는 쿨라크의 정의가 이후 가축을 소유하고 있는 농민까지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고 주장한다.[23] 그러나 누구를 쿨라크로 간주할 것인지에 대해 러시아 농민과 볼셰비키 모두 명확한 기준이 없었고, 주관적인 기준이나 개인적인 관계로 인해 남을 인민의 적으로 몰기 위해 쓰이기도 하였다.[24] 관리들은 쿨라크라는 용어를 임의로 사용하였으며 이는 권력 남용으로 이어졌다.[24][11] 콘퀘스트는 "1917년에서 1918년 사이 지주의 토지는 자연스럽게 농민들이 차지해갔다. 볼셰비키는 토지를 50에서 80 에이커 이상 가지고 있는 소수 부농층에게서 토지를 몰수했다. 그 후 마르크스주의 이론인 계급투쟁이 농촌 마을에 사실상 허상인 계급 분류를 발생시켰고, 소 두쌍과 이웃보다 토지 5에서 6 에이커 이상씩 가지고 있는 농민이 '쿨라크'로 분류되어 이들에 대한 계급투쟁이 선언되었다"라고 주장한다.[19]

1918년 여름 모스크바에서는 농촌으로 무장 병력을 파병하여 곡식을 수거하라 명령하였고, 이를 거부한 농민은 쿨라크라 불렸다.[15] 리처드 파이프스는 "공산주의 세력은 제1차 5개년 계획을 위해 도시와 붉은 군대에게 필요한 식량을 강탈하고, 볼셰비키 혁명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농촌지역에 자신의 권력을 보여주기 위해 농촌 주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라고 주장한다.[15] 쿨라크들은 이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1918년 8월 11일 블라디미르 레닌펜자의 동지에게 보낸 전보에서 ""이라고 알려진 지시를 내렸다.[25] "적어도 100명 이상의 알려진 ''쿨라크'', 부자, 피를 빠는 자를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반드시 교수형에 처하라. ... 수백 버스트 [킬로미터] 주변에서 사람들이 보고, 떨고, 알고, 외치도록 하라. 그들은 피를 빠는 ''쿨라크''를 억압하고 죽일 것이다." 레닌은 1918년에 발생한 258건의 봉기와 백색 테러의 위협으로 인해 ''쿨라크''의 반란에 대한 국가의 대응을 정당화했다.[12] 그는 "''쿨라크''가 방대한 수의 노동자를 학살하거나, 노동자들이 포식적인 ''쿨라크'' 소수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한다[...] 중간 과정은 있을 수 없다"는 자신의 견해를 요약했다.[12] 레닌이 탐보프에서 본보기로 농민을 교수형에 처하려 했던 것처럼, 쿨라크는 파괴되어야 할 상상의 산물로서의 적대 계급이 되었다.[13]

이반 블라디미로프/Владимиров,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ru작, 농민으로부터 곡물 징발.


전시 공산주의와 러시아 내전으로 쿨라크는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 후의 신경제 정책 기간에는 다시 부활했다.

4. 1930년대 쿨라크 탄압 (라스쿨라치바니예)

1928년 요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콜호스 창설을 통한 농업 집단화를 강행하면서 쿨라크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계급의 적으로 규정되어 억제가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쿨라크에게는 중과세가 부과되었고, 대부분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반란도 일어났지만, 정부는 반란에 대해 엄격한 태도로 임했고, 많은 쿨라크가 처형되었으며, 처형을 면한 자들도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는 설도 있다.

1929년 3월 인민위원평의회는 "쿨라크 가정"에 대한 개념을 공식화한 조례를 발표하였다.[16][28] 노동자 고용, 농업 기기나 시설 임대, 상업 활동 종사 등 특정 기준을 충족하는 가정은 쿨라크로 간주되었다.[16][28] 1930년에는 이 목록이 더욱 확장되어 제재소등 공업 시설을 세 놓는 자, 토지를 세 놓는 자 등도 포함되었다.[16]

1929년 7월, 소련의 공식 정책은 "쿨라크"를 테러해서는 안 되며 집단 농장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계속해서 명시했지만,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930년 1월 5일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집단화 속도와 집단 농장 건설에 대한 국가 지원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포고를 발표하였다. "쿨라크" 청산이라는 공식 목표는 정확한 지침 없이 이루어졌으며, 지방 지도자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취하도록 장려하여 신체적 제거로 이어졌다.

1930년 1월 30일, 정치국은 "쿨라크"를 계급으로 해체하는 것을 승인했다. 쿨라크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되었는데, 굴라그로 보내지거나, 북부 우랄과 카자흐스탄과 같은 먼 지방으로 이주되거나, 고향 지역 내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는 경우가 있었다. 농민들은 정부 당국에 농장 동물을 넘겨야 했지만, 많은 이들이 집단 농장에 넘겨주는 대신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선택했다. 1934년 소련 당 대회는 2,660만 마리의 소와 6,340만 마리의 양이 손실되었다고 보고했다. 광범위한 도살에 대응하여, 소련 인민 위원회는 "가축의 악의적인 도살"(хищнический убой скотаru)을 기소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쿨라크"의 저항을 종식시키기 위해 엄중한 조치를 명령했다. 1930년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쿨라크'''를 계급으로 몰아내기 위해 이 계급의 저항은 공개적인 전투에서 분쇄되어야 하며, 그들의 존재와 발전을 위한 생산적 근원을 박탈해야 한다. ... 그것이 바로 '쿨라크'를 계급으로 제거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이다."

1930년대 초반 라스쿨라치바니예(раскулачивание) 정책 실시 이후 쿨라크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평균적으로 가구당 170~400 루블이었다.[16] 소련의 농업 집산화 당시 쿨라크로 분류된 자들은 강제이주와 초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20][26][27]

특히 러시아 내전과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에서 애를 먹었던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태도는 가혹했고,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쿨라크라는 낙인이 찍혀 숙청되었다. 우크라이나인의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농촌에서 이전과 같은 자립 생활을 지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정부가 추진하는 농업 집단화 정책과 대립했다.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은 쿨라크로 불린 자영농에 대한 박해와 무리한 농업 집단화로 인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농민들은 각지에서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영 농지나 가축 등의 자산은 콜호스에 접수되었으며, 쿨라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1930년대 초반 라스쿨라치바니예(раскулачивание) 정책으로 쿨라크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몰수된 재산은 평균적으로 가구당 170~400 루블이었다.[16] 소련의 농업 집산화 당시 쿨라크로 분류된 사람들은 강제 이주와 사적 제재의 대상이 되었다.[20][26][27]

1929년 3월 인민위원평의회는 '쿨라크 가정'에 대한 기준을 공식화했다.[16][28] 노동자 고용, 특정 기계 소유, 농업 시설 임대, 상업 활동 종사 등의 기준 중 하나라도 충족하면 쿨라크로 간주되었다. 1930년에는 이 기준이 더욱 확대되어 제재소나 토지 임대업자 등도 포함되었다.[16]

요시프 스탈린은 쿨라크를 계급으로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1월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집단화와 쿨라크 청산을 결의했다. 쿨라크 청산은 구체적인 지침 없이 지방 지도자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져 신체적 제거로 이어졌다. 안드레이 수슬로프는 농민 재산 몰수가 농민 소유주라는 사회 집단 전체의 파괴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1930년 1월 30일, 정치국은 쿨라크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굴라그로 보내거나, 먼 지방으로 이주시키거나, 고향 지역 내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것을 승인했다. 농민들은 가축을 정부에 넘겨야 했지만, 많은 이들이 가축을 도살했다. 소련 인민 위원회는 가축의 악의적인 도살을 기소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쿨라크의 저항을 종식시키기 위해 쿨라크를 계급으로 몰아내고 생산적 근원을 박탈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928년 요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농업 집단화를 강행하면서 쿨라크는 억제가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쿨라크에게는 중과세가 부과되었고, 대부분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많은 쿨라크가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자 수는 100만 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러시아 내전과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을 겪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태도는 가혹했고,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쿨라크로 몰려 숙청되었다. 우크라이나대기근은 쿨라크로 불린 자영농에 대한 박해와 무리한 농업 집단화로 인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농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자산은 콜호스에 접수되었고, 쿨라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1930년대 초반 라스쿨라치바니예(раскулачивание) 정책 실시 이후 쿨라크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평균적으로 가구당 170~400 루블이었다.[16] 소련의 농업 집산화 당시 쿨라크로 분류된 자들은 강제이주와 사적제재의 대상이 되었다.[20][26] 1929년 3월 인민위원평의회는 "쿨라크 가정"에 대한 개념을 공식화한 조례를 발표하였다. 노동자 고용, 특정 기계 소유, 농업 시설 임대, 상업 활동 종사 등 특정 기준을 충족하는 가정은 쿨라크로 간주되었다.[16][28]

요시프 스탈린은 "계급으로서의 쿨라크를 청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1932~1933년 소련 대기근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 기근으로 인해 쿨라크 처형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60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1990년에 공개된 소련 기록 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1930년과 1931년에 1,803,392명이 노동 식민지와 수용소로 보내졌고, 이 중 1,317,022명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노동 식민지에서 사망한 쿨라크와 그 친척의 수는 389,521명으로 보고되었다.

1928년 요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농업 집단화를 강행하면서 쿨라크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계급의 적으로 규정되어 억제가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쿨라크에게는 중과세가 부과되었고, 대부분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많은 쿨라크가 처형되었으며, 처형을 면한 자들도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는 설도 있다.

특히 러시아 내전과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을 겪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태도는 가혹했고,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쿨라크로 몰려 숙청되었다. 우크라이나대기근은 쿨라크로 불린 자영농에 대한 박해와 무리한 농업 집단화로 인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전 쿨라크와 그 가족은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 희생자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669,929명이 체포되고 376,202명이 처형되었다.

4. 1.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정책

1928년 요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콜호스 창설을 통한 농업 집단화를 강행하면서 쿨라크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계급의 적으로 규정되어 억제가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쿨라크에게는 중과세가 부과되었고, 대부분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반란도 일어났지만, 정부는 반란에 대해 엄격한 태도로 임했고, 많은 쿨라크가 처형되었으며, 처형을 면한 자들도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는 설도 있다.

1929년 3월 인민위원평의회는 "쿨라크 가정"에 대한 개념을 공식화한 조례를 발표하였다.[16][28] 노동자 고용, 농업 기기나 시설 임대, 상업 활동 종사 등 특정 기준을 충족하는 가정은 쿨라크로 간주되었다.[16][28] 1930년에는 이 목록이 더욱 확장되어 제재소등 공업 시설을 세 놓는 자, 토지를 세 놓는 자 등도 포함되었다.[16]

1929년 7월, 소련의 공식 정책은 "쿨라크"를 테러해서는 안 되며 집단 농장에 합류시켜야 한다고 계속해서 명시했지만, 스탈린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1930년 1월 5일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집단화 속도와 집단 농장 건설에 대한 국가 지원에 관하여"라는 제목의 포고를 발표하였다. "쿨라크" 청산이라는 공식 목표는 정확한 지침 없이 이루어졌으며, 지방 지도자들에게 과격한 행동을 취하도록 장려하여 신체적 제거로 이어졌다.

1930년 1월 30일, 정치국은 "쿨라크"를 계급으로 해체하는 것을 승인했다. 쿨라크는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되었는데, 굴라그로 보내지거나, 북부 우랄과 카자흐스탄과 같은 먼 지방으로 이주되거나, 고향 지역 내 다른 지역으로 보내지는 경우가 있었다. 농민들은 정부 당국에 농장 동물을 넘겨야 했지만, 많은 이들이 집단 농장에 넘겨주는 대신 가축을 도살하는 것을 선택했다. 1934년 소련 당 대회는 2,660만 마리의 소와 6,340만 마리의 양이 손실되었다고 보고했다. 광범위한 도살에 대응하여, 소련 인민 위원회는 "가축의 악의적인 도살"(хищнический убой скотаru)을 기소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쿨라크"의 저항을 종식시키기 위해 엄중한 조치를 명령했다. 1930년 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쿨라크'''를 계급으로 몰아내기 위해 이 계급의 저항은 공개적인 전투에서 분쇄되어야 하며, 그들의 존재와 발전을 위한 생산적 근원을 박탈해야 한다. ... 그것이 바로 '쿨라크'를 계급으로 제거하는 정책으로의 전환이다."

1930년대 초반 라스쿨라치바니예(раскулачивание) 정책 실시 이후 쿨라크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평균적으로 가구당 170~400 루블이었다.[16] 소련의 농업 집산화 당시 쿨라크로 분류된 자들은 강제이주와 초법적 처벌의 대상이 되었다.[20][26][27]

특히 러시아 내전과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에서 애를 먹었던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태도는 가혹했고,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쿨라크라는 낙인이 찍혀 숙청되었다. 우크라이나인의 대부분은 농민이었고, 농촌에서 이전과 같은 자립 생활을 지속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정부가 추진하는 농업 집단화 정책과 대립했다.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은 쿨라크로 불린 자영농에 대한 박해와 무리한 농업 집단화로 인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농민들은 각지에서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저항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영 농지나 가축 등의 자산은 콜호스에 접수되었으며, 쿨라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4. 2. 쿨라크의 강제 이주와 처형

1930년대 초반 라스쿨라치바니예(раскулачивание) 정책으로 쿨라크의 재산은 몰수되었으며, 몰수된 재산은 평균적으로 가구당 170~400 루블이었다.[16] 소련의 농업 집산화 당시 쿨라크로 분류된 사람들은 강제 이주와 사적 제재의 대상이 되었다.[20][26][27]

1929년 3월 인민위원평의회는 '쿨라크 가정'에 대한 기준을 공식화했다.[16][28] 노동자 고용, 특정 기계 소유, 농업 시설 임대, 상업 활동 종사 등의 기준 중 하나라도 충족하면 쿨라크로 간주되었다. 1930년에는 이 기준이 더욱 확대되어 제재소나 토지 임대업자 등도 포함되었다.[16]

요시프 스탈린은 쿨라크를 계급으로서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0년 1월 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집단화와 쿨라크 청산을 결의했다. 쿨라크 청산은 구체적인 지침 없이 지방 지도자들의 과격한 행동으로 이어져 신체적 제거로 이어졌다. 안드레이 수슬로프는 농민 재산 몰수가 농민 소유주라는 사회 집단 전체의 파괴로 이어졌다고 주장한다.

1930년 1월 30일, 정치국은 쿨라크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굴라그로 보내거나, 먼 지방으로 이주시키거나, 고향 지역 내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것을 승인했다. 농민들은 가축을 정부에 넘겨야 했지만, 많은 이들이 가축을 도살했다. 소련 인민 위원회는 가축의 악의적인 도살을 기소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스탈린은 쿨라크의 저항을 종식시키기 위해 쿨라크를 계급으로 몰아내고 생산적 근원을 박탈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928년 요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농업 집단화를 강행하면서 쿨라크는 억제가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쿨라크에게는 중과세가 부과되었고, 대부분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많은 쿨라크가 처형되거나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희생자 수는 100만 명이 넘는다는 설도 있다.

러시아 내전과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을 겪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태도는 가혹했고,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쿨라크로 몰려 숙청되었다. 우크라이나대기근은 쿨라크로 불린 자영농에 대한 박해와 무리한 농업 집단화로 인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농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결국 자산은 콜호스에 접수되었고, 쿨라크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4. 3. 쿨라크 탄압의 인적 피해

1930년대 초반 라스쿨라치바니예(раскулачивание) 정책 실시 이후 쿨라크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평균적으로 가구당 170~400 루블이었다.[16] 소련의 농업 집산화 당시 쿨라크로 분류된 자들은 강제이주와 사적제재의 대상이 되었다.[20][26] 1929년 3월 인민위원평의회는 "쿨라크 가정"에 대한 개념을 공식화한 조례를 발표하였다. 노동자 고용, 특정 기계 소유, 농업 시설 임대, 상업 활동 종사 등 특정 기준을 충족하는 가정은 쿨라크로 간주되었다.[16][28]

요시프 스탈린은 "계급으로서의 쿨라크를 청산"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는 1932~1933년 소련 대기근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 기근으로 인해 쿨라크 처형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600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1990년에 공개된 소련 기록 보관소 자료에 따르면, 1930년과 1931년에 1,803,392명이 노동 식민지와 수용소로 보내졌고, 이 중 1,317,022명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다. 1932년부터 1940년까지 노동 식민지에서 사망한 쿨라크와 그 친척의 수는 389,521명으로 보고되었다.

1928년 요시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농업 집단화를 강행하면서 쿨라크는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계급의 적으로 규정되어 억제가 아닌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쿨라크에게는 중과세가 부과되었고, 대부분이 이를 견디지 못하고 소멸했다. 많은 쿨라크가 처형되었으며, 처형을 면한 자들도 강제 수용소로 연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희생자 수는 100만 명을 넘는다는 설도 있다.

특히 러시아 내전과 우크라이나-소비에트 전쟁을 겪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모스크바 정부의 태도는 가혹했고,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이 쿨라크로 몰려 숙청되었다. 우크라이나대기근은 쿨라크로 불린 자영농에 대한 박해와 무리한 농업 집단화로 인해 인위적으로 발생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전 쿨라크와 그 가족은 1930년대 후반의 대숙청 희생자의 대다수를 차지했으며, 669,929명이 체포되고 376,202명이 처형되었다.

5. 우크라이나 대기근 (홀로도모르)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곡물 할당량이 인위적으로 증가했다. 농민들은 곡물을 숨기고 땅에 묻으려 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컨퀘스트에 따르면, 각 여단은 곡물 은닉처를 찾아 땅을 쑤시는 데 사용할 긴 쇠막대기를 갖추었고, 굶주림의 징후를 보이지 않는 농민은 특히 식량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컨퀘스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눈이 녹자 진짜 굶주림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의 얼굴과 다리, 배가 부어올랐다. 그들은 소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무엇이든 먹었다. 쥐, 쥐, 참새, 개미, 지렁이를 잡았다. 뼈를 가루로 갈았고, 가죽과 신발 밑창도 그렇게 했다...".

체포와 추방을 돕기 위해 국가정치지도부(비밀경찰)를 도운 당 활동가들은 바실리 그로스만의 말처럼 "서로를 잘 알고, 피해자들을 알고 있었지만, 이 일을 수행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지고 멍해졌다." 그로스만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들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아이들을 '쿨라크' 놈들이라고 부르며 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했고, '피 빨아먹는 자들!'이라고 소리쳤다... 그들은 소위 '쿨라크'가 부랑자, 불가촉천민, 해충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기생충'의 식탁에 앉지 않았고, '쿨라크' 아이는 혐오스러웠으며, 어린 '쿨라크' 소녀는 이보다 더 낮았다."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당 활동가들은 인지 부조화에 빠져 이념을 통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나중에 소련 반체제 인사가 된 레프 코펠레프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듣는 것은 고통스러웠다. 그리고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은 더욱 나빴다. ... 그리고 나는 나 자신을 설득하고 설명했다. 나는 쇠약하게 만드는 연민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역사적 필연성을 실현하고 있었다. 우리는 혁명적 의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5개년 계획을 위해 곡물을 확보하고 있었다."

5. 1.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탄압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곡물 할당량이 인위적으로 증가하면서 농민들은 곡물을 숨기거나 땅에 묻으려 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컨퀘스트에 따르면, 각 여단은 곡물 은닉처를 찾기 위해 긴 쇠막대기를 사용했고, 굶주림의 징후가 없는 농민은 식량을 숨기고 있다는 의심을 받았다. 눈이 녹으면서 굶주림이 심해져 사람들은 쥐, 개미, 지렁이 등 닥치는 대로 먹었으며, 가죽과 신발 밑창까지 먹는 상황에 이르렀다.

국가정치지도부를 도와 체포와 추방에 가담한 당 활동가들은 바실리 그로스만의 표현처럼 "정신이 혼미해지고 멍해진" 상태였다. 그들은 쿨라크를 부랑자, 불가촉천민, 해충으로 여기며 혐오했고, 심지어 어린아이나 소녀에게까지 잔혹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잔혹 행위는 인지 부조화를 통해 이념적으로 합리화되었는데, 훗날 소련 반체제 인사가 된 레프 코펠레프는 "역사적 필연성을 실현하고 혁명적 의무를 수행"하며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곡물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자기 설득을 통해 연민을 억눌렀다고 회고했다.

5. 2. 인위적 기근 발생

1929년부터 1933년까지 곡물 할당량이 인위적으로 증가하면서 농민들은 곡물을 숨기거나 땅에 묻으려 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컨퀘스트에 따르면, 각 여단은 곡물 은닉처를 찾기 위해 긴 쇠막대기를 사용했고, 굶주림의 징후가 없는 농민은 식량 은닉 의심을 받았다. 눈이 녹으면서 굶주림이 심해져 사람들은 쥐, 쥐, 참새, 개미, 지렁이 등을 먹거나 뼈와 가죽을 가루로 만들어 먹었다.

국가정치지도부를 도와 체포와 추방에 가담한 당 활동가들은 바실리 그로스만의 표현대로 "정신이 혼미해지고 멍해졌다." 그들은 쿨라크를 부랑자, 불가촉천민, 해충으로 여기며 쿨라크 아이들과 소녀들을 혐오했다. 굶주린 마을 사람들을 잔혹하게 대한 당 활동가들은 인지 부조화를 겪으며 이념으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레프 코펠레프는 "역사적 필연성을 실현하고 혁명적 의무를 수행하며 사회주의 조국을 위해 곡물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자신을 설득했다.

6. 현대적 의의와 교훈

6. 1. 전체주의와 국가 폭력의 위험성

6. 2. 역사 왜곡과 진실 규명의 중요성

6. 3.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참조

[1] 서적 Investigation of the Ukrainian famine, 1932–1933: Oral History Project of the Commission on the Ukraine Famine https://books.google[...]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90
[2] 서적 Everyday Stalinism: Ordinary Life in Extraordinary Times: Soviet Russia in the 1930s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1-11-20
[3] 서적 Best Speeches AST
[4] 서적 Crop failure and national disaster https://library6.com[...]
[5] 서적 Letters from the village (1872-1887) http://www.hist.msu.[...]
[6] 서적 Kulakism: usury and its socio-economic significance 1899
[7] 서적 Small public credit as a powerful means of combating the impoverishment of our peasants https://commons.wiki[...] 1899
[8] 서적 Small public credit as a powerful means of combating the impoverishment of our peasants https://commons.wiki[...] 1899
[9] 서적 The boundaries of a politician's talent http://dugward.ru/li[...] ROSSPEN 2006
[10] 서적 The socialist offensive : the collectivisation of Soviet agriculture, 1929–1930 https://www.worldcat[...] Macmillan Press 1980
[11] 웹사이트 Peasant Rebels Under Stalin: Collectivization and the Culture of Peasant Resistance http://web.pdx.edu/~[...] Oxford University Press 1996-01
[12] 서적 Lenin's Terror: The Ideological Origins of Early Soviet State Violenc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2-06-25
[13] 서적 スターリンのジェノサイド みすず書房
[14] 웹인용 Azərbaycan SSR-də 1920-1940-cı illərdə sənayeləşdirmə və zorakı kolxozlaşdırma http://www.anl.az/do[...] 2012-11-27
[15] 서적 Communism: A Brief History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Digital 2001
[16] 서적 The Harvest of Sorrow: Soviet Collectivization and the Terror-Famine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17] 서적 Everyday Stalinism: Ordinary Life in Extraordinary Times: Soviet Russia in the 1930s https://www.google.i[...]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18] 서적 Comrade Workers, Forward to the Last, Decisive Fight! http://www.marxists.[...] Progress Publisher
[19] 서적 Reflections on a Ravaged Century https://books.google[...] W. W. Norton & Company
[20] 서적 Memoirs Doubleday 1995-10-01
[21] 서적 Stalin and Stalinism https://archive.org/[...] Longman
[22] 웹사이트 Kulaks (Korkulism) http://leksika.com.u[...]
[23] 서적 Harvest of Sorrow
[24] 웹인용 Peasant Rebels Under Stalin: Collectivization and the Culture of Peasant Resistance http://web.pdx.edu/~[...] 옥스퍼드 대학교 출판부 1996-01
[25] 서적 Communism: A Brief History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Digital, Inc. 2001-09-01
[26] 문서 Khrushchev Remembers
[27] 서적 Stalin: Triumph and Tragedy 1996
[28] 간행물 On the characteristics of kulak farms subject to the Labor Code Academy of Sciences of the USSR, Institute of History, Moscow 1929-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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