쿨레르보 만네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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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쿨레르보 만네르는 핀란드의 정치인으로, 1900년 헬싱키 대학교에서 그리스-로마 문헌학을 공부하고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05년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하여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17년 핀란드 의회의 의장과 사민당 주석을 역임했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인민대표단 주석과 적위대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패배 후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핀란드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을 지냈지만, 1930년대에 숙청되어 굴라크에서 사망했다. 1962년 소련에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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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레르보 만네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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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쿨레르보 아킬레스 만네르 |
러시아어 이름 | Куллерво Густавович Маннер (쿨레르보 구스타보비치 만네르) |
출생 | 1880년 10월 12일 |
출생지 | 코케매키, 핀란드 대공국, 러시아 제국 |
사망 | 1939년 1월 15일 (58세) |
사망지 | 우흐타-페초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소련 |
배우자 | 올가 아리안네 (1925년 이혼) 한나 말름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핀란드 사회민주당 핀란드 공산당 |
주요 직책 | |
핀란드 인민대표단 주석 | 임기: 1918년 1월 29일 – 1918년 4월 25일 전임: (신설) 후임: (폐지) |
의회 의장 | 임기: 1917년 4월 4일 – 1917년 10월 31일 전임: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 후임: 요하네스 루드손 |
핀란드 공산당 주석 | 임기: 1920년 – 1935년 전임: 위리외 시롤라 후임: 하네스 매키넨 |
핀란드 사회민주당 주석 | 임기: 1917년 6월 18일 – 1918년 11월 5일 전임: 마티 파시부오리 후임: 배이뇌 탄네르 |
2. 내전 전
1910년 우시마 선거구에서 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쿨레르보 만네르는 1914년까지 의원직을 수행했고, 1917년 다시 의회에 복귀했다.[20] 사회민주당이 의회 과반수를 차지한 1917년 봄, 만네르는 의회의장 및 당 주석에 선출되었다.[22]
러시아 공화국 임시정부가 핀란드 보수파의 요청으로 사민당 과반 의회를 해산시키려 하자, 만네르는 이에 불복하고 의회 소집을 강행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이 헤이몰란 탈로(당시 의회 의사당) 접근을 막아 실패했고, 결국 재선거가 실시되어 사민당은 과반수를 잃었다.[16]
2. 1. 유년 시절과 교육
코케매키에서 교구 목사 구스타프 만네르(Gustaf Mannerfi)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스타프 만네르는 나중에 밤풀라의 주임사제를 지냈다. 모친은 알마 리몬(Alma Limónfi)으로, 키비얘르비 출신 요한네스 리몬(Johannes Limónfi)의 딸이었다.[15][13][16] 동생 아르보 만네르는 나중에 우파 정치인이 되었다.[15] 또다른 동생 라흐야 요한네스 만네르(Lahja Johannes Mannerfi)는 법학을 공부해 혁명법정의 법관이 되었는데, 1917년 5월 후이티넨에서 백군에게 살해당했다.1900년 학부를 졸업하고 헬싱키 대학교에서 그리스-로마 문헌학을 공부했다.[17] 포르보의 부르주아 언론에서 기자로 일했고 1905년부터는 논설주간도 지냈다. 하지만 1905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06년 8월 신문사에서 잘렸다.[18] 1906년 포르보에서 튀욀래이넨 지를 창간하고 1909년부터 주필이 되었다. 1909년 신문 내용 때문에 불경죄로 체포되어 6개월 복역했다.[19]
1908년 10월 26일 올가 아리안네(Olga Arjannefi)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06년부터 튀욀래이넨 지에서 함께 일했고, 신문 발행처 주소에서 살았다.[21]
2. 2. 언론 활동과 사회민주당 입당
코케매키에서 교구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1900년 학부를 졸업하고 헬싱키 대학교에서 그리스-로마 문헌학을 공부했다.[17] 포르보의 언론에서 기자로 일했으며, 1905년부터는 논설주간도 지냈다. 하지만 1905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06년 8월 신문사에서 해고되었다.[18] 1906년 포르보에서 튀욀래이넨 지를 창간하고 1909년부터 주필이 되었다. 1909년 신문 내용 때문에 불경죄로 체포되어 6개월간 복역했다.[19]1910년 헬싱키로 이동하여 튀외미에스 지 논설주간이 되었고, 우시마 선거구를 지역구로 하여 1910년-1914년, 1917년 의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20] 만네르는 당내 좌파인 실타사리파에 속했다.
1908년 10월 26일 올가 아리안네(Olga Arjannefi)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06년부터 튀욀래이넨 지에서 함께 일했고, 신문 발행처 주소에서 살았다.[21]
2. 3. 핀란드 의회 의원
쿨레르보 만네르는 1910년 우시마 선거구에서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1910년-1914년, 1917년에 의원으로 활동했다.[20] 만네르는 사회민주당 내 좌파인 실타사리파에 속했다.2. 4. 결혼
1908년 10월 26일 올가 아리안네(Olga Arjanne)와 포르보 시청에서 결혼했다.[4][21] 두 사람은 1906년부터 튀욀래이넨(Työläinen) 지에서 함께 일했으며, 신문 발행처에서 함께 살았다.[4][21]3. 1917년 혁명과 의회 의장
October Revolution영어의 여파로 핀란드의 독립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1917년, 만네르는 핀란드 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1]
4. 핀란드 내전
1918년 핀란드 내전이 발발하자 쿨레르보 만네르는 인민대표단 주석으로 선출되어 적군(Red Guards)을 이끌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수세에 몰려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결국 내전에서 패배한 뒤 소비에트 러시아로 도피했다.
4. 1. 인민대표단 주석 및 적위대 총사령관
1918년 핀란드 내전이 벌어지자 만네르는 1918년 1월 28일 인민대표단 주석에 취임했다. 4월 10일에는 적위대 총사령으로 정부수반과 군부수반을 겸하게 되었으며,[16][23] 독재 권한을 부여받았다.[5]당시 만네르가 이끄는 적위대는 헬싱키와 다른 남부 도시들을 수개월 동안 통치했고,[6] 만네르헤임 장군이 이끄는 백위대는 핀란드 북부를 장악하고 있었다.[7] 하지만 전쟁에서 수세였기 때문에 만네르는 정부수반으로도, 군부수반으로도 제대로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내전에서 패배한 뒤 만네르는 다른 인민대표들과 함께 4월 25일 소비에트 러시아로 도피했다.
4. 2. 내전 패배와 망명
핀란드 내전에서 패배한 뒤, 만네르는 1918년 4월 25일 다른 핀란드 인민대표단과 함께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했다.[16][23]5.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활동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패배한 후, 만네르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하여 핀란드 공산당(SKP) 창당에 참여하고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며 국제 공산주의 운동에 기여했다.
공개 재판에서 만네르는 핀란드의 파시스트들과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했다. 이후 코미 공화국 우흐타-페초라의 굴라크로 끌려갔으며, 1937년에는 그의 모든 저술이 금서 처분되었다.[16][25][26]
소련에서 만네르는 비교적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 스웨덴에서 옷을 사 오거나 밀수하기도 했으며, 새 지갑과 낡은 지갑 두 개를 가지고 다녔다. 그의 첫 부인 올가는 핀란드 공산당에 소부르주아지로 고발당하기도 했다.[27]
만네르는 우흐타에서 석유 정제, 석탄 및 라듐 추출 노역을 했다. 1939년 1월 15일 굴라크에서 사망했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이지만 방사능 오염된 물로 인한 피폭이라고도 한다. 우흐타 근교 체브윤 마을에 묻혀 오스카리 토코이와 함께 핀란드 땅에 묻히지 못한 유이한 핀란드 의회의장이 되었다.[28]
1962년 소련에서 만네르는 복권되었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이전까지 소련 내부 자료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아 핀란드에서는 그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1971년 9월 7일 헬싱키 고등법원에서 사망선고를 내려 1971년 1월 1일을 사망일로 정하기도 했다.[16]
5. 1. 핀란드 공산당 활동
1918년 8월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이 창당되자 만네르는 참여했고, 1920년 위리외 시롤라의 뒤를 이어 2대 당 주석이 되었다. 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직에도 올랐다. 1920년대에는 스웨덴에서 여러 당무를 처리했다.[16]만네르는 강경한 이상주의자로, 공산당 지도부로서 그의 정책 방향은 대개 비현실적이거나 비실용적이라고 여겨졌다. 아내 올가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해 왔으나, 사이가 악화되어 별거하고 이후 한나 말름과 동거했다.[16]
시간이 지나면서 만네르는 오토 빌레 쿠시넨과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다. 1920년대에는 만네르가 우위에 있었으나, 1930년대 핀란드에서 라푸아 운동이 준동하면서 만네르와 말름은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었다. 1929년 스웨덴 경찰이 만네르와 말름이 거처하던 아파트에서 민감한 내용의 자료들을 발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만네르의 당내 입지는 추락하기 시작했다.[24]
만네르는 1934년 5월 당 중앙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여전히 코민테른 소속이기는 했으나 1935년 7월 완전히 당에서 제명되고 체포되어 10년 노역형에 처해졌다.[16]

내전 이후 만네르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도망쳐 이외르외 시롤라에 이어 핀란드 공산당 (SKP)의 두 번째 의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코민테른의 관료가 되었다.
1929년 스톡홀름에서 비밀 서류가 들어 있는 서류 가방을 분실하면서 만네르와 그의 아내 한나 말름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스웨덴 경찰은 핀란드 국가 경찰 에치바 께스쿠스폴리시의 제보를 바탕으로 만네르와 말름의 아파트를 급습하여 서류 가방을 확보했고, 이로 인해 핀란드에서 65명의 공산주의 요원이 체포되고 기소되었다.[8]
이듬해 극우 라푸아 운동이 핀란드에서 일어났다.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이 더 많은 노동자를 그들의 대의에 동원하고 혁명을 선동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지만, 만네르는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코민테른은 무대응에 대해 당을 질책했고, 만네르는 개인적으로 경미한 비판으로 살아남았지만 한나 말름은 중앙 위원회에서 제외되었다.[9]
당의 결함에 좌절한 만네르와 말름은 1918년 혁명의 실패 이유를 철저히 분석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제시한 이론은 핀란드 사회 민주당(SDP)의 만네르 자신과 다른 지도자들이 혁명적 순간에 너무 느리게 반응했다는 점과 볼셰비키를 지목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볼셰비키는 핀란드 내전에 간섭하지 않기로 동의했고,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이전에 약속했던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한나 말름은 1932년에 그들의 이론을 공개했다. SKP 지도부의 반응은 심각했다. 만네르는 자신의 의견을 재빨리 철회했지만 말름은 오토 빌레 쿠시넨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 위원을 문제의 전직 SDP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직접 지명했다. 그녀는 소비에트 카렐리아의 우흐투아로 1년 동안 추방되었다.
만네르는 1934년 5월에 대부분의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1935년 7월까지 라틴 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보고관으로 계속 일했다.[10]
5. 2. 코민테른 활동
1918년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이 창당되자 만네르는 참여했고, 1920년 위리외 시롤라의 뒤를 이어 2대 당 주석이 되었다. 또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직에도 올랐다.[16] 1920년대에는 스웨덴에서 여러 당무를 처리했다.[16]만네르는 강경한 이상주의자로, 공산당 지도부로서 그의 정책 방향은 대개 비현실적이거나 비실용적이라고 여겨졌다.[16] 시간이 지나면서 만네르는 오토 빌레 쿠시넨과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다. 1920년대에는 만네르가 우위에 있었으나, 1930년대 핀란드에서 라푸아 운동이 준동하면서 만네르와 한나 말름은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었다. 1929년 스웨덴 경찰이 만네르와 말름이 거처하던 아파트에서 민감한 내용의 자료들을 발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만네르의 당내 입지는 추락하기 시작했다.[24]
만네르는 1934년 5월 당 중앙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여전히 코민테른 소속이기는 했으나 1935년 7월 완전히 당에서 제명되었다.[16]
내전 이후 만네르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도망쳐 이외르외 시롤라에 이어 핀란드 공산당 (SKP)의 두 번째 의장이 되었다. 그는 또한 코민테른의 관료가 되었다.
1929년 스톡홀름에서 비밀 서류가 들어 있는 서류 가방을 분실하면서 만네르와 그의 아내 한나 말름의 몰락은 시작되었다. 스웨덴 경찰은 핀란드 국가 경찰 에치바 께스쿠스폴리시의 제보를 바탕으로 만네르와 말름의 아파트를 급습하여 서류 가방을 확보했고, 이로 인해 핀란드에서 65명의 공산주의 요원이 체포되고 기소되었다.[8]
이듬해 극우 라푸아 운동이 핀란드에서 일어났다.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이것이 더 많은 노동자를 그들의 대의에 동원하고 혁명을 선동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믿었지만, 만네르는 수동적인 태도를 유지했다. 코민테른은 무대응에 대해 당을 질책했고, 만네르는 개인적으로 경미한 비판으로 살아남았지만 한나 말름은 중앙 위원회에서 제외되었다.[9]
당의 결함에 좌절한 만네르와 말름은 1918년 혁명의 실패 이유를 철저히 분석하기를 원했다. 그들이 제시한 이론은 핀란드 사회 민주당(SDP)의 만네르 자신과 다른 지도자들이 혁명적 순간에 너무 느리게 반응했다는 점과 볼셰비키를 지목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서 볼셰비키는 핀란드 내전에 간섭하지 않기로 동의했고,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이전에 약속했던 지원을 받지 못했다.
한나 말름은 1932년에 그들의 이론을 공개했다. SKP 지도부의 반응은 심각했다. 만네르는 자신의 의견을 재빨리 철회했지만 말름은 오토 빌레 쿠시넨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 위원을 문제의 전직 SDP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직접 지명했다. 그녀는 소비에트 카렐리아의 우흐투아로 1년 동안 추방되었다.
만네르는 1934년 5월에 대부분의 직무에서 해임되었다. 그는 1935년 7월까지 라틴 아메리카 문제에 대한 코민테른 보고관으로 계속 일했다.[10]
6. 숙청과 죽음
193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 만네르는 정치적 반대파로 몰려 굴라크로 보내졌다.
오토 빌레 쿠시넨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고, 라푸아 운동에 대한 책임 추궁과 스웨덴 경찰의 자료 발견 등으로 인해 당내 입지가 추락하였다. 결국 1934년 당 중앙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1935년에는 당에서 제명되어 체포, 10년 노역형을 선고받았다.[16] 공개 재판에서 핀란드 파시스트들과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한 후, 코미 공화국 우흐타-페초라의 굴라크로 끌려갔다.[16]
1937년 만네르의 모든 저술은 금서 처분되었다.[16][25][26] 굴라크에서 석유 정제, 석탄 및 라듐 추출 노역을 하던 중, 1939년 1월 15일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이었지만, 방사능 오염된 물로 인한 피폭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28] 우흐타 근교 체브윤에 묻혔으며, 오스카리 토코이와 함께 핀란드 땅에 묻히지 못한 유이한 핀란드 의회의장이 되었다.
1962년 소련에서 만네르는 복권되었다. 1990년대 소련 붕괴 이전까지 관련 자료가 공개되지 않아, 핀란드에서는 1971년 9월 7일 헬싱키 고등법원에서 사망선고를 내려 1971년 1월 1일을 사망일로 정하기도 했다.[16]
6. 1. 몰락과 체포
오토 빌레 쿠시넨과 시간이 지나면서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1920년대에는 만네르가 우위에 있었으나, 1930년대 핀란드에서 라푸아 운동이 준동하면서 만네르와 그의 아내 한나 말름은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었다.[24] 1929년 스웨덴 경찰이 만네르와 말름이 거처하던 아파트에서 민감한 내용의 자료들을 발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만네르의 당내 입지는 추락하기 시작했다.[24]1934년 5월, 만네르는 당 중앙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여전히 코민테른 소속이기는 했으나 1935년 7월 완전히 당에서 제명되고 체포되어 10년 노역형에 처해졌다.[16] 공개 재판에서 만네르는 핀란드의 파시스트들과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했다. 이후 만네르는 코미 공화국 우흐타-페초라의 굴라크로 끌려갔다.[16]
6. 2. 굴라크 수감과 사망
만네르는 1934년 5월 당 중앙 업무에서 배제되었고, 1935년 7월에는 코민테른에서도 제명된 뒤 체포되어 10년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았다.[16] 공개 재판에서 만네르는 핀란드의 파시스트들과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했다.[16] 그는 코미 공화국 우흐타-페초라의 굴라크로 끌려갔다.[16] 1937년에는 만네르의 모든 저술이 금서 처분되었다.[16][25][26]굴라크에서 만네르는 석유 정제 및 석탄과 라듐 추출 노역을 했다.[28] 1939년 1월 15일 굴라크에서 사망했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이었지만, 방사능에 오염된 물로 인한 피폭이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28] 역사학 교수 알렉산더 포포프는 만네르가 라듐을 함유한 물을 사용했기 때문에 방사선 중독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우흐타 근교의 체브윤이라는 마을에 묻혔다.[28]
6. 3. 복권
1962년 소련에서 만네르의 명예가 복권되었다.[16] 이미 1957년에 재활되었다.[4]7. 유산
쿨레르보 만네르는 핀란드 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삶은 20세기 초 격동의 시대를 살아간 한 혁명가의 이상과 좌절을 보여준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사회 개혁과 민족 자결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될 수 있다.[16]
1918년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이 창당되자 만네르는 참여했고, 1920년 위리외 시롤라의 뒤를 이어 2대 당 주석이 되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직에도 올랐으며, 1920년대에는 스웨덴에서 여러 당무를 처리했다.[16]
만네르는 강경한 이상주의자였으며, 공산당 지도부로서 그의 정책 방향은 대개 비현실적이거나 비실용적이라고 여겨졌다. 아내 올가와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으나, 사이가 악화되어 별거하고 이후 한나 말름과 동거했다.[16]
시간이 지나면서 만네르는 오토 빌레 쿠시넨과 충돌하는 일이 많아졌다. 1920년대에는 만네르가 우위에 있었으나, 1930년대 핀란드에서 라푸아 운동이 준동하면서 만네르와 말름은 책임을 추궁당하게 되었다. 1929년 스웨덴 경찰이 만네르와 말름이 거처하던 아파트에서 민감한 내용의 자료들을 발견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만네르의 당내 입지는 추락하기 시작했다.[24]
1934년 5월 만네르는 당 중앙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여전히 코민테른 소속이었으나 1935년 7월 완전히 당에서 제명되고 체포되어 10년 노역형에 처해졌다.[16] 공개 재판에서 만네르는 핀란드의 파시스트들과 음모를 꾸몄다고 자백했다. 만네르는 코미 공화국 우흐타-페초라의 굴라크로 끌려갔다. 1937년에는 만네르의 모든 저술이 금서 처분되었다.[16][25][26]
소련에서 만네르는 비교적 사치스러운 삶을 살았다. 그는 스웨덴에서 옷을 사 왔고, 때로는 옷을 밀수해 오기도 했다. 새 지갑과 낡은 지갑 두 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첫 부인 올가는 핀란드 공산당에 소부르주아지로 고발당하기도 했다.[27]
만네르는 우흐타에서 석유 정제 및 석탄과 라듐 추출 노역을 했다. 1939년 1월 15일 굴라크에서 죽었는데, 공식적인 사인은 결핵으로 알려졌지만 방사능에 오염된 물로 인한 피폭이라고도 한다. 만네르는 우흐타 근교의 체브윤이라는 마을에 묻힘으로써[28] 오스카리 토코이와 함께 핀란드 땅에 묻히지 못한 유이한 핀란드 의회의장이 되었다.
1962년 소련에서 만네르를 복권했다. 소련이 붕괴한 1990년대 이전까지 소련 내부의 자료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만네르가 어떻게 된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고, 1971년 9월 7일 헬싱키 고등법원에서 사망선고가 내려져 1971년 1월 1일을 사망일로 정하기도 했다.[1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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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 Kullervo – Svinhufvud
http://finland100.f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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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P:n puheenjohtaja halusi punadiktaattoriksi, mutta kuoli Stalinin vankileirill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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