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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파노 (10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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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파노는 10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빼어난 미모로 알려졌으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2세와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 결혼했다. 로마노스 2세 사후 어린 아들들의 섭정을 시작했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니키포로스 2세와 결혼했으나, 그의 동료인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와 공모하여 니키포로스를 암살했다. 이후 요안니스 1세의 황후가 되려 했으나 실패하고 추방당했다가, 아들 바실리오스 2세에 의해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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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파노 (10세기)
기본 정보
요안니스 스킬리체스의 "역사"에 묘사됨 (11세기)
출생명아나스타시아
출생기원전 941년경
출생지라코니아
사망978년 이후
배우자 정보
배우자로마노스 2세
배우자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
자녀
자녀헬레나
자녀바실리오스 2세
자녀콘스탄티누스 8세
자녀안나 포르피로게니타
가족 관계
아버지크라테루스
작위 정보
작위비잔티움 제국 황후
통치 기간959년 – 963년 3월
통치 기간963년 8월 – 969년

2. 생애

테오파노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다고 전해진다. 956년로마노스 2세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테오파노라는 이름을 얻었다. 959년 시아버지 콘스탄티노스 7세가 죽었을 때 그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별다른 증거는 없다.[12] 남편 로마노스가 즉위했을 때 테오파노는 즉시 권력을 장악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황궁에서 제거하였고, 다른 정부와 궁정의 원로대신들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체하였다.

963년 로마노스가 갑자기 죽자 테오파노는 또다시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26]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가 얻을 게 없다는 점과 로마노스와의 사이의 막내딸 안나를 남편이 죽기 불과 이틀 전에 낳았다는 사실은 그녀의 소문이 거짓임을 반증한다.[35] 테오파노와 로마노스 사이의 두 아들 바실리우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녀는 섭정을 시작했는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원자가 필요했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장군인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손을 잡고 자신의 두 아들의 보호를 부탁했다. 니키포로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여 황제에 등극하였고 테오파노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니키포로스가 테오파노 자식들의 대부였기 때문에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혼인 무효였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의 반대를 받았으나 결국 무마되었다.

이후 테오파노는 남편 니키포로스 2세의 동료이자 총사령관인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사랑에 빠져 황제 암살을 모의했다.[35] 969년 12월 10일 요안니스와 그의 공모자들은 황궁에 침입, 니키포로스 2세를 암살하고 요안니스는 황제 지위에 올랐다.[35]

테오파노는 요안니스 황제의 황후가 될 것을 기대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총대주교에게 거역할 수 없었던 요안니스는 테오파노를 암살 주모자로 고발하고 궁정에서 추방하여,[29] 마르마라해의 프로티 섬으로 유배되었다.[35]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후, 테오파노의 아들 바실리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가 단독으로 권력을 잡았다. 황제들은 어머니를 유배에서 소환하는 것을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로 하였다.[20] 978년, 테오파노는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의 반란에 맞서 아들들을 지원해 줄 것을 타오의 토르니케에게 호소했다. 이것이 테오파노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며, 그녀는 아들들의 통치 초기에 비교적 일찍 사망했을 수 있다.

2. 1. 초기 생애와 로마노스 2세와의 결혼

테오파노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아버지는 펠로폰네소스의 여관주인 아나스타소였으며, 956년로마노스 2세를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에 테오파노라는 이름을 얻었다.[11] 콘스탄티노스 7세959년 죽었을 때 그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별다른 증거는 없다.[12]

테오파노는 그녀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테오파노가 시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를 독살하는 장면을 묘사한 ''스킬리체스 마드리텐시스''의 그림


테오파노는 라코니아 출신의 그리스인 혈통으로[1][2][3][4][5] 941년 펠로폰네소스 지역 라코니아[6], 아마도 스파르타에서 태어났다.[7] 테오파노의 본명은 아나스타시아였으며, 더 친숙하게는 아나스타소라고 불렸고,[8] 가난한 술집 주인 크라테루스의 딸이었다.[9][10]

테오파노의 미천한 출신 때문에 비잔틴 엘리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고, 시아버지 콘스탄티누스 7세가 사망했을 때 그녀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콘스탄티누스는 959년 몇 달 동안 지속된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의 증거는 없었다.

테오파노(10세기)의 신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연대기에 "술을 파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술집의 딸이거나 포도주 상인의 딸로 해석된다[22]. 본명은 아나스타소(Anastaso)였다. 평민의 딸이었던 테오파노가 어떤 경위로 황태자 로마노스와 알게 되었는지는 불명이다. 956년 전후에 정식으로 로마노스와 결혼했고, 그 시기에 테오파노로 개명했다. 남편 로마노스가 20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테오파노는 18살 정도였지만, 즉시 권력을 장악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황궁에서 제거하였고, 다른 정부와 궁정의 원로대신들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체하였다.

2. 2. 로마노스 2세 황후 시절

테오파노는 당대 최고의 미녀였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펠로폰네소스의 여관주인 아나스타소의 딸이었으며, 956년로마노스 2세와 만나 사랑에 빠져 결혼한 후 테오파노라는 이름을 얻었다.[11] 콘스탄티노스 7세959년 죽었을 때 그녀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별다른 증거는 없다.[12] 남편 로마노스가 20살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테오파노는 18살 정도였지만, 즉시 권력을 장악하고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을 황궁에서 제거하였고, 다른 정부와 궁정의 원로대신들도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들로 교체하였다.

963년 로마노스가 갑자기 죽자 테오파노는 또다시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돌았으나,[26] 남편의 죽음으로 그녀가 얻을 게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특히 로마노스와의 사이의 막내딸 안나(키예프 대공블라디미르 1세의 왕비)를 남편이 죽기 불과 이틀 전에 낳았다는 사실은 그녀의 소문이 거짓임을 반증한다.[35] 그녀와 로마노스 사이의 두 아들 바실리우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 아들들의 섭정을 시작했는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지원자가 필요했다. 그녀는 당대의 유명한 장군인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손을 잡고 자신의 두 아들의 보호를 부탁했다. 니키포로스는 자신의 정적인 요셉푸스 브링가스라는 환관을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여 약간의 유혈 사태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고 테오파노와 니키포로스는 결혼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애정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정략적인 결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테오파노는 라코니아 출신의 그리스인 혈통으로,[1][2][3][4][5] 941년 펠로폰네소스 지역 라코니아[6], 아마도 스파르타에서 태어났다.[7] 테오파노의 본명은 아나스타시아였으며, 더 친숙하게는 아나스타소라고 불렸고,[8] 가난한 술집 주인 크라테루스의 딸이었다.[9][10] 테오파노는 빼어난 미모로 명성이 높았고, 황위 계승자인 로마노스는 956년경 그녀와 사랑에 빠져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7세 황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결혼했다.[11]

테오파노의 미천한 출신 때문에 비잔틴 엘리트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고, 시아버지 콘스탄티누스 7세가 사망했을 때 그녀가 그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졌다.[12] 콘스탄티누스는 959년 몇 달 동안 지속된 열병으로 사망했으며, 독살의 증거는 없었다. 현명하고 지적인 테오파노는 남편 로마노스에게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는 궁정의 경쟁자들에게 시기심을 유발했으며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59년에 급사한 로마노스 2세의 아버지, 황제 콘스탄티노스 7세는 테오파노가 독살했다고 소문이 돌았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의 사인은 열병이었으며, 독살의 증거도 없다. 정치에 관심이 없던 로마노스는 아내의 말에 따라 수년간 테오파노의 꼭두각시였다고도 한다. 유흥을 즐기던 남편 로마노스를 보좌한 것은 부황제 시대부터의 중신인 환관 요세프 브린가스와 명장 니케포로스 포카스였다.[24]

바실리우스 2세, 콘스탄티노스 8세라는 후계자를 낳고 궁정의 안주인이 된 테오파노는 눈엣가시였던 시누이들 (로마노스의 여동생)을 수도원으로 내쫓았으며, 더 나아가 시어머니인 태후 헬레네도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로마노스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로마노스도 결국 이 일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수도원에 들어간 여동생들에게도 궁정에 있을 때와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지만, 헬레네는 딸들의 불행을 슬퍼하며 병사했다. 이것은 간접적으로 테오파노가 시어머니를 죽인 것과 같았다.[25]

963년 3월 15일, 로마노스는 부활절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길도 없는 산속으로 사냥을 나갔고, 그 와중에 사고로 26세의 나이로 급사했다.[26] 다시, 테오파노가 독살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지만, 남편이 황제였기 때문에 그녀는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었으며, 만약 독살해도 아무런 이득이 없으므로 그 가능성은 낮다.

2. 3. 니키포로스 2세 포카스와의 결혼

테오파노는 로마노스 2세가 갑작스럽게 죽자, 어린 두 아들 바실 2세와 콘스탄티누스 8세의 섭정이 되었다. 그러나 세습은 전통이었을 뿐, 법이 아니었기에, 테오파노는 자신의 지위와 아들들의 미래를 위해 강력한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녀는 당대 최고의 장군이었던 니키포로스 포카스와 동맹을 맺었다.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와 결혼하는 대가로, 그녀의 자녀와 그들의 이익을 보호하겠다는 신성한 약속을 했다.[14]

964년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는 킬리키아 원정을 떠났고, 테오파노는 아이들과 함께 드리지온 요새에 머물렀다.

963년 8월 14일, 니키포로스는 로마노스의 전 고문이자 환관 궁정 관리인 요세프 브린가스의 저항을 물리치고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했다. 니키포로스는 8월 16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즉위했고, 곧 테오파노 황후와 결혼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강화했다.[14] 이 결혼은 정략적인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이 결혼은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니키포로스가 테오파노 자식들의 대부였기 때문에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혼인이 무효였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는 이 결혼에 반대했지만, 바르다스 포카스 등이 니키포로스가 테오파노 자녀들의 대부가 아니라고 증언하여, 폴리에우크토스는 니키포로스가 테오파노를 아내로 맞는 것을 허락했다.[15]

니키포로스는 테오파노의 아이들의 수호자가 되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아름다운 아내를 사랑했다고 한다.[28] 그러나 테오파노는 용맹한 군인이자 경건한 기독교 신자인 고지식한 남편을 싫어했다. 그녀는 전 남편 로마노스의 죽음으로 잃을 뻔했던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니키포로스와 결혼했던 것이다.

2. 4. 요안니스 1세 치미스키스와의 공모와 몰락

테오파노는 남편 니키포로스 2세의 동료이자 총사령관인 요안니스 치미스키스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황제 암살을 모의했다.[35] 969년 12월 10일 요안니스와 그의 공모자들은 여자로 변장하여 황궁에 침입, 니키포로스 2세를 암살하고 요안니스는 황제 지위에 올랐다.[35]

요안니스는 잘생기고 매력적인 인물이었으며, 당시 작가들은 그와 테오파노가 연인 관계였다고 기록했다. 이들은 황제 암살 음모에 대해 서로 이해하고 있었다. 암살이 있던 밤, 테오파노는 의심스럽게도 황제의 침실을 떠나면서 문을 잠그지 않았다.

테오파노는 요안니스 황제의 황후가 될 것을 기대했으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의 반대에 부딪혔다. 총대주교에게 거역할 수 없었던 요안니스는 테오파노를 암살 주모자로 고발하고 궁정에서 추방했다.[29] 결국 테오파노는 마르마라해의 프로티 섬으로 추방되었다.[35] 폴리에우크토스는 이 조치에 만족하여[30] 요안니스의 대관식을 주관했다.

요안니스는 테오파노가 수도원으로 내쫓았던 로마노스 2세의 여동생 테오도라[31]를 황후로 맞이하여, 마케도니아 왕조와의 친족 관계를 맺고 제위의 정통성을 확보했다.[32]

2. 5. 복권과 최후

요안니스 1세는 테오파노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그러나 테오파노는 이미 소문으로 큰 피해를 입은 상태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폴리에욱토스는 요안니스가 암살 공모자들을 처벌하고, 궁정에서 테오파노를 제거하며, 교회의 이익에 반하는 전임자의 칙령을 모두 폐지하지 않으면 대관식을 거부했다.[16][17] 요안니스는 교회의 승인이 황후와의 결혼보다 자신의 정통성을 강화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총대주교의 요구를 수락했다.[18][19] 테오파노는 프린키포 섬(때로는 '프로테'라고도 함)으로 유배되었다.

976년 1월 요안니스 1세가 사망한 후, 테오파노의 아들 바실리오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가 단독으로 권력을 잡았다. 황제들은 어머니를 유배에서 소환하는 것을 첫 번째 행동 중 하나로 하였다.[20]

978년, 테오파노는 은퇴한 조지아 장군 타오의 토르니케에게 타오의 다비트 3세와의 동맹을 중재하여 장군 바르다스 스클레로스의 반란에 맞서 아들들을 지원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것이 테오파노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며, 그녀는 아들들의 통치 초기에 비교적 일찍 사망했을 수 있다.

테오파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앞바다에 있는 프린키포스 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탈출하여 수도로 돌아와 하기아 소피아에 보호를 요청했다. 총대주교 폴리에우크토스는 테오파노를 요안니스 1세에게 인도했다. 다시 만나면 이전의 관계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요안니스는 그녀에게 냉담하게 다시 유배를 선고했다. 친위대에 붙잡힌 테오파노는 요안니스를 욕하고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시종들에게 몸을 던졌다고 한다.[33]

요안니스 1세가 976년에 급사한 원인은 테오파노가 자신을 배신한 요안니스에게 복수했다는 설도 있지만, 당시 그녀는 유배지인 수도원에 감금되어 있었으므로 사실이 아니며, "악녀 테오파노"라는 이미지에 의한 상상에 불과하다.[34] 성인이 된 바실리우스 2세와 콘스탄티노스 8세의 본격적인 치세가 시작되자, 테오파노는 아들 바실리우스 2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불려왔지만, 그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34]

3. 평가 및 유산

테오파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녀가 권력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지만, 비잔티움 제국을 안정시키고 외세로부터 보호한 유능한 통치자였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이러한 평가는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발생한 사건들과 그녀의 성격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서 비롯된다.

3. 1. 문학 작품에서의 테오파노


  • 영국의 작가 프레데릭 해리슨은 《테오파노: 10세기의 십자군》(Theophano: The Crusade of the Tenth Century, 1904)을 저술했다.
  • 그리스의 역사 소설 작가 코스타스 키리아지스(1920년 출생)는 그녀에 대한 전기 《테오파노》(Theophano, 1963)를 썼고, 이어서 그녀의 아들에 대한 《바실 불가로크토누스》(Basil Bulgaroktonus, 1964)를 저술했다.
  • 그리스의 만화 작가 테오차리스 스피로스는 크리사 사켈의 그림으로 그려진 그래픽 노블 《테오파노: 비잔틴 이야기》(Theophano: A Byzantine Tale, 2020)를 썼다.
  • 테오파노는 조나단 해리스의 《테오시스》(Theosis, 2023)에 등장한다.

참조

[1] 서적 The empresses of Constantinople https://archive.org/[...] R.G. Badger
[2] 서적 The History of Leo the Deacon: Byzantine Military Expansion in the Tenth Century Dumbarton Oaks
[3] 서적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Camb. Univ. Press
[4] 서적 The Story of Civilization: The age of Faith; a history of medieval civilization - Christian, Islamic, and Judaic - from Constantine to Dante: A.D. 325-1300. Simon and Schuster
[5] 서적 Varangian Cuthan Books
[6] 서적 A handbook of the coinage of the Byzantine Empire Spink
[7] 서적 Essays on the Latin Orient A. M. Hakkert
[8] 서적 The Empress Theophano: Byzantium and the West at the Turn of the First Millennium Cambridge University Press
[9] 서적 The life and death of Byzantium North-Holland Pub. Co
[10] 서적 Byzantine portraits https://archive.org/[...] A.A. Knopf
[11] 서적 A Byzantine Journey I.B. Tauris & Co. Ltd.
[12] 서적 The Ris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 Ballantyne, Hanson & CO.
[13] 서적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c. 900-c. 1024 Cambridge University Press
[14] 서적 History of The Byzantine State https://archive.org/[...] Rutgers University Press
[15] 서적 Byzantium: The Apogee Alfred A. Knopf
[16] 서적 A Byzantine Journey, 1995 I.B. Tauris & Co. Ltd., London
[17] 서적 Byzantium: The Apogee Penguin Books
[18] 서적 A Byzantine Journey I.B. Tauris & Co. Ltd., London
[19] 서적 Byzantium: The Apogee Penguin Books
[20] 서적 Streams of Gold, Rivers of Blood: The Rise and Fall of Byzantium, 955 A.D. to the First Crusade OUP USA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서적
[26] 서적
[27] 문서 스코라이軍團의 長官은 事實上 全 東로마 陸軍의 司令長官의 役割을 擔っていた。詳細은 [[타그마]]의 記事를 參照할 것。
[28] 서적
[29] 서적
[30] 문서 皇帝가 總主教에 屈한 이 事件을 「비잔츠의 [[카놋사의 屈辱|카놋사]]」라고 부르는 學者도 있지만、이 境遇 요하네스는 用済みになった 테오파노를 體よく 追い払う 것에 成功하고 있다し、폴리유에우크토스는 先帝 니케포로스가 出한 教會・修道院의 土地所有를 制限하는 勅令을 撤回한다는 條件을 呑ませた 上で、眞犯人이 요하네스인 것을 知っていた에도 關わらず 戴冠을 行っている다는、都合主義적인 妥協의 産物である。(井上(2009) P177-178)
[31] 문서 東로마의 歷史家들은 「絶世의 美女지만 惡女」「放縱한 成り上がり者」테오파노에 對し、콘스탄티노스7世의 皇女인 테오도라를 「美貌나 肉體的 魅力에서는 大したことがなかったが、淑やかさ나 その他의 德이라는 點에서는 あらゆる 女性에 優っていた」고 對照的な 存在에 描いている。테오파노는 惡의 象徵으로서 扱われ、民衆의 間では 테오파노가 요하네스에 捨てられた 것을 蔑む 戱れ歌가 流行したという。(井上(2009) P178)
[32] 서적
[33] 서적
[34] 서적
[35] 서적 《비잔티움 연대기》제2권:번영과 절정 바다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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