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르니키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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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르니키오스는 조지아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바그라티오니 왕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에서 군 복무를 했다. 그는 963년경 군 장교직에서 물러난 후 아토스 산의 라브라 수도원에서 수도사가 되었다. 976년 바실 2세 황제 치세에 반란이 일어나자, 그는 타오의 다비드 3세와 동맹을 맺고 조지아 기병대를 지휘하여 반란 진압에 기여했다. 이후 이비론 수도원 건립에 기여하며 조지아 정교회 문화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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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르니키오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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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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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성인 |
이름 | 이오아네 토르니케 |
원어 이름 (조지아어) | იოანე თორნიკე |
원어 이름 (그리스어) | Ιωάννης Τορνίκιος |
기타 이름 (조지아어) | თორნიკე ერისთავი |
기타 이름 (그리스어) | Τορνίκιος Θορνίκης |
직함 | 아토스 산의 아버지 |
출생 | 기원전 920년경 |
출생지 | 이베리아 왕국 |
사망 | 985년 |
사망지 | 아토스 산 |
공경 대상 | 조지아 정교회 동방 정교회 |
주요 성지 | 이베론 수도원 |
축일 | 6월 12일 (교회력) |
수호 | 조지아 아토스 산 |
2. 생애
토르니케는 조지아의 주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바그라티오니 왕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의 부친 초르드바넬리는 95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네토스를 방문했었던 조지아의 왕자 아쇼트 2세 쿠로팔라테스의 수행원이었다. 그의 조카들 세 명은 군인 경력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 한 명인 바라즈바체는 1037~1038년에 비잔티움의 동쪽의 중요한 전초지가 될 에데사의 카테파노(군사 통치자)의 직책을 맡았다. 토르니케는 조지아의 바그라티드 왕조 아래서 성공적으로 군복무를 했고 조신의 경력(특히 그는 스트래티고스와 동등한 조지아인, 에리스타비였다.)이 있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칭호 파트리키오스를 받기도 했다. 그는 963년경에 조지아의 왕자 타오의 다비트 3세의 장군직인 그의 지위에서 물러났고, 아토스산에서 요한(요한네스 또는 존)의 이름으로 아타나시오의 라브라를 탈퇴했다. 요한 토르니키오스는 970년대 초반에 다른 조지아인 퇴역 장교인 요한과 그 아들 에우티미오와 합류했다.
976년, 황제 바실 2세의 통치 초기 때의 가장 큰 동란인 비잔티움 제국의 아시아 지역에서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스클레로스는 그 당시 충성스러웠던 바르다스 포카스장군에 대항하여 연속되는 전투를 이겼고, 아나톨리아를 통과하여 동쪽에서 콘스탄티노플로 행진했다. 바실은 사태를 해결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단으로, 타오의 다비드 3세와 동맹을 맺기 위하여 요한 토르니키오스를 그의 수도로 불러들였다. 수도사는 마지못해 승낙하였고, 주로, 그가 제국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토스산 공동체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하는 그의 제자 수사들에 의해 설득되었다. 다비드는 힘차게 대답했고, 그의 이전 장군에게 제국군을 강화하기 위해 보낸 12,000명 정도의 조지아인 기병들의 지휘를 맡겼다. 결정적인 전투는 979년 3월 24일 카이사레아 근처 판칼리아 전투에서 일어났고 반란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판이 났다.
2. 1. 가문과 초기 경력
토르니케는 조지아의 주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바그라티오니 왕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 초르드바넬리는 95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네토스를 방문한 조지아의 왕자 아쇼트 2세 쿠로팔라테스의 수행원이었다. 토르니케는 조지아 바그라티드 왕조 아래서 스트래티고스와 동등한 조지아인, 에리스타비였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칭호 파트리키오스를 받았다. 963년경, 그는 타오의 다비트 3세의 장군직에서 물러나 아토스산에서 요한(요한네스 또는 존)의 이름으로 아타나시오의 라브라를 탈퇴했다.976년, 황제 바실 2세 통치 초기에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바실은 타오의 다비드 3세와 동맹을 맺기 위해 요한 토르니키오스를 수도로 불러들였다. 다비드는 12,000명 정도의 조지아인 기병들을 보냈고, 카이사레아 근처의 판킬리아에서 979년 3월 24일 전투가 벌어져 반란군이 패배했다.
2. 2. 수도 생활
토르니케는 조지아의 주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바그라티오니 왕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의 부친 초르드바넬리는 95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7세를 방문했던 조지아의 왕자 아쇼트 2세 쿠로팔라테스의 수행원이었다. 그는 타오의 다비트 3세의 장군직에서 물러난 후 963년경 아토스 산의 라브라 수도원에 들어가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수도사가 되었다. 970년대 초, 그는 퇴역한 조지아 장교 요한과 그의 아들 에우티미오와 함께 수도 생활을 하였다.2. 3. 바르다스 스클레로스 반란 진압
토르니케는 조지아의 주요 귀족 가문 출신으로, 바그라티오니 왕조와 인척 관계에 있었다. 그의 부친 초르드바넬리는 950년경 콘스탄티노플에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포르피로게네토스를 방문했었던 조지아의 왕자 아쇼트 2세 쿠로팔라테스의 수행원이었다. 그의 조카들 세 명은 군인 경력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 한 명인 바라즈바체는 1037~1038년에 비잔티움의 동쪽의 중요한 전초지가 될 에데사의 카테파노(군사 통치자)의 직책을 맡았다. 토르니케는 조지아의 바그라티드 왕조 아래서 성공적으로 군복무를 했고 조신의 경력(특히 그는 스트래티고스와 동등한 조지아인, 에리스타비였다.)이 있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칭호 파트리키오스를 받기도 했다. 그는 963년경에 조지아의 왕자 타오의 다비트 3세의 장군직인 그의 지위에서 물러났고, 아토스산에서 요한(요한네스 또는 존)의 이름으로 아타나시오의 라브라를 탈퇴했다. 요한 토르니키오스는 970년대 초반에 다른 조지아인 퇴역 장교인 요한과 그 아들 에우티미오와 합류했다.976년, 황제 바실 2세의 통치 초기 때의 가장 큰 동란인 비잔티움 제국의 아시아 지역에서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스클레로스는 그 당시 충성스러웠던 바르다스 포카스장군에 대항하여 연속되는 전투를 이겼고, 아나톨리아를 통과하여 동쪽에서 콘스탄티노플로 행진했다. 바실은 사태를 해결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수단으로, 타오의 다비드 3세와 동맹을 맺기 위하여 요한 토르니키오스를 그의 수도로 불러들였다. 수도사는 마지못해 승낙하였고, 주로, 그가 제국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토스산 공동체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라고 하는 그의 제자 수사들에 의해 설득되었다. 다비드는 힘차게 대답했고, 그의 이전 장군에게 제국군을 강화하기 위해 보낸 12,000명 정도의 조지아인 기병들의 지휘를 맡겼다. 결정적인 전투는 979년 3월 24일 카이사레아 근처 판칼리아 전투에서 일어났고 반란군의 참담한 패배로 결판이 났다.
3. 이비론 수도원 건립
토르니케는 조지아의 주요 귀족 가문 태생으로 바그라티오니 가와 인척 관계에 있었다. 976년 바실 2세 통치 초기에 바르다스 스클레로스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나자, 바실 2세는 타오의 다비트 3세와 동맹을 맺기 위해 요한 토르니키오스를 수도에서 불러들였다. 토르니키오스는 다비트 3세가 보낸 12,000명의 조지아 기병을 지휘하여 979년 3월 24일 카이사레아 근처 판킬리아 전투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로 다비드 3세는 북동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영토를 평생 관리하는 권한을 받았고, 토르니케는 싱켈로스(총대주교의 조력자) 칭호를 받았다. 토르니케는 전리품으로 얻은 1,200 lb의 금과 값비싼 물건들을 바탕으로 아토스산에 조지아인들의 수도원인 이비론 수도원을 건립했다. 그리스인들이 거주하고 있지만, 이 수도원은 오늘날까지 그리스어로 "이베리아인", 즉 조지아인의 ''이비론''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는 수도원에 토지와 특권, 보조금, 세금 면제 혜택을 주었다. 이베리아의 요한이 헤구메노스(수도원장)를 맡고 토르니케가 크테토르(설립자)가 되어, 이비론 수도원은 조지아 정교회 문화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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