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키디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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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키디데스는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실증적인 관점에서 기록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이다. 기원전 465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나 군사 지휘관으로 활동했으나 암피폴리스 전투 패배로 추방당했으며, 추방 기간 동안 전쟁사를 집필했다. 그는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국제 정치를 분석하고,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고찰했으며, 멜로스 대화에서 나타나는 힘의 논리를 통해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투키디데스는 서구 역사 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국제정치학에서도 현실주의 이론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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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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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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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기원전 460년경 |
출생지 | 할리무스, 아테네 (현재 알리모스) |
사망 | 기원전 400년경 |
아버지 | 올로로스 |
직업 | 역사학자, 장군 |
주요 작품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
인용구 | |
인용구 | '역사는 영원히 되풀이된다.'는 말을 남겼다. |
2. 생애
투키디데스의 생애에 관하여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간혹 언급된 개인적인 기록이 거의 전부이다.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케 출신인 올로로스의 아들로서 기원전 465년을 전후로 하여 아테네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20대 중반에 페리클레스 정책에 동조하여 기원전 425년 또는 기원전 424년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22년에 그가 지휘하는 아테나이군이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모국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다만 이 시기에 그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
역사가로서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현대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삶에 대해 비교적 알려진 바가 적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그 자신의 저서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얻을 수 있는데, 여기에서 그는 자신의 국적, 아버지, 출생지를 언급하고 있다. 투키디데스는 자신이 전쟁에서 싸웠고, 역병에 걸렸으며, 민주정부에 의해 추방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는 또한 사모스 반란 진압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9]
대표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실증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전쟁사(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Ιστορία του Πελοποννησιακού Πολέμου)이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에 장군으로서 일시 참여했으나, 기원전 422년 트라키아 암피폴리스 근교에서의 실패로 실각하여 20년간의 추방형을 받았다. 이 때문에 스파르타 지배 지역에도 머물렀던 적이 있으며, 이때의 경험으로 양측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또한 투키디데스의 함정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지금까지도 이유는 불명확하지만, 투키디데스 『전쟁사』의 기록은 기원전 411년의 기록에서 끊긴다(그 이후에도 그는 계속 살았으므로, 적어도 중단은 죽음 때문은 아니다). 후에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이 중단 부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기원전 362년까지를 기록한 『그리스 역사(헬레니카)』(Ἑλληνικά)를 저술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록을 완성했다.
투키디데스는 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히스토리아이)』(ἱστορίαι)와 대비된다. 특징으로는, 동시대의 역사를 다룬 저서에서는 특정 국가를 편애하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저술하고 있다는 점, 정치가·군인의 연설을 곳곳에 삽입하여 역사상의 인물에게 직접 말하게 하는 수법을 취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근거가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연설이나 대화도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연설 중에서는 개전 1년째 전몰자 합동 추도식에 즈음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가장 유명하다.
2. 1. 초기 생애와 배경
투키디데스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대부분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언급된 개인적인 기록이 전부이다.[10] 투키디데스는 그리스 북부 트라케 출신 올로로스(Olorus)의 아들로, 기원전 465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났다.[10] 그는 아테네인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올로로스이고 아테네의 할리무스(Halimous) 데메(deme) 출신이라고 스스로 밝혔다.[10]투키디데스는 10~12세 때 아버지와 함께 아테네 아고라(Ancient Agora of Athens)에 가서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의 강의를 들었고, 강의를 듣고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으며 역사를 쓰는 것이 자신의 평생의 소명이라고 결심했다는 일화가 있다.[11] 하지만 이 일화는 후대에 나온 기록일 가능성이 크다.[11]
20대 중반에 페리클레스 정책에 동조하여 기원전 425년 또는 기원전 424년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되었다.[10] 그는 아테네 페스트(Plague of Athens)를 겪었고, 이로 인해 페리클레스를 포함한 많은 아테네인들이 사망했다.[12][13] 그는 트라키아(Thrace) 해안 지역, 타소스(Thasos) 섬 맞은편에 있는 스캡테 힐레(Scapte Hyle)의 판가이온 산맥(Pangaion Hills)에 금광(gold mine)을 소유하고 있었다.[14]

기원전 424년, 투키디데스는 스트라테고스(strategos)(장군)로 타소스(Thasos)에 파견되었다.[15] 같은 해 겨울,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Brasidas)는 암피폴리스 전투(Battle of Amphipolis)를 일으켜 암피폴리스(Amphipolis)를 공격했다.[15] 암피폴리스의 아테네 지휘관 유클레스(Eucles)는 투키디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브라시다스는 투키디데스의 영향력을 알고 암피폴리스인들에게 항복 조건을 제시했고, 결국 투키디데스가 도착했을 때 암피폴리스는 이미 스파르타의 통제하에 있었다.[16]
암피폴리스는 전략적 중요성이 컸고, 그 함락 소식은 아테네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17] 투키디데스는 암피폴리스를 구하지 못한 책임으로 추방되었지만,[18] 그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제때 도착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추방 덕분에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 사이를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양측의 관점에서 전쟁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투키디데스는 전쟁 발발 직후 역사 쓰기를 시작했으며, 이 전쟁이 가장 위대한 전쟁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9]
헤로도토스(Herodotus)는 투키디데스 아버지의 이름인 올로로스(Olorus)가 트라키아(Thrace)와 트라키아 왕족과 관련이 있다고 썼다.[20] 투키디데스는 가족을 통해 아테네의 정치가이자 장군인 밀티아데스(Miltiades the Younger)와 그의 아들 키몬(Cimon)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가족은 트라키아(Thrace)에 금광(gold mines)을 포함한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가족은 상당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추방된 후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부동산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며 전업 역사 저술과 연구에 전념했다.
대표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실증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전쟁사(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Ιστορία του Πελοποννησιακού Πολέμου)이다.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의 실패로 20년간 추방형을 받았고, 이 경험으로 스파르타 지배 지역에 머무르며 양측을 객관적으로 관찰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투키디데스의 함정 등의 개념을 제시했다고 알려진다.
투키디데스 『전쟁사』의 기록은 기원전 411년에 중단되었지만, 후에 크세노폰이 『그리스 역사(헬레니카)』(Ἑλληνικά)를 저술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록을 완성했다.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의 『역사(히스토리아이)』(ἱστορίαι)와 대비된다. 동시대의 역사를 중립적인 시각에서 저술하고, 정치가·군인의 연설을 삽입하여 역사상의 인물에게 직접 말하게 하는 수법을 취했으며, 그중에는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가장 유명하다.
2. 2. 펠로폰네소스 전쟁 참전과 추방
투키디데스는 그리스의 북부 지방 트라케 출신 올로로스의 아들로, 기원전 465년경 아테네에서 태어났다.[10] 그는 아테네 페스트(Plague of Athens)에서 살아남았으며,[12] 이 전염병으로 페리클레스를 포함한 많은 아테네인들이 사망했다.[13] 20대 중반에 페리클레스 정책에 동조하여 군사 지휘관으로 선출되었으나,[10] 기원전 424년 겨울,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가 암피폴리스 전투(Battle of Amphipolis)에서 승리하면서 아테네 군은 패배했다.[15][16] 투키디데스는 암피폴리스를 구하지 못한 책임으로 추방되었는데,[17][18] 그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단지 제때 도착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암피폴리스는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도시였기에, 그 함락 소식은 아테네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17] 투키디데스는 이 사건 이후 20년간 조국에서 추방되는 운명을 맞았지만, 이 시기 동안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을 자유롭게 여행하며 양측의 관점에서 전쟁을 관찰할 수 있었다. 그는 트라키아(Thrace)에 금광(gold mines)까지 포함된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여,[20] 추방된 후 그곳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며 역사 저술과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전쟁 발발 직후부터 역사 기록을 시작했다.[19] 대표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실증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전쟁사(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Ιστορία του Πελοποννησιακού Πολέμου)이다. 그는 이 저서에서 특정 국가를 편애하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으로 서술했으며, 정치가·군인의 연설을 삽입하여 역사 속 인물에게 직접 말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이 중에는 근거가 불분명한 연설이나 대화도 포함되어 있으며, 개전 1년째 전몰자 합동 추도식에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가장 유명하다.
투키디데스는 암피폴리스 전투에서의 패배와 추방 이후, 스파르타 지배 지역에 머물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양측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전쟁사』 기록은 기원전 411년의 기록에서 중단되었지만, 이후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이 『그리스 역사(헬레니카)』(Ἑλληνικά)를 저술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록을 완성했다.
2. 3. 추방 기간과 저술 활동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자신을 아테네인이며, 아버지의 이름은 올로로스(Olorus)이고 아테네의 할리무스(Halimous) 데메(deme) 출신이라고 밝혔다.[10] 그는 트라키아(Thrace) 해안 지역에 있는 금광(gold mine)을 소유하고 있었으며,[14]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덕분에 기원전 424년에 스트라테고스(strategos)(장군)로 타소스(Thasos)에 파견되었다.[15]기원전 424~423년 겨울, 스파르타 장군 브라시다스(Brasidas)는 암피폴리스(Amphipolis)를 공격했고, 암피폴리스의 아테네 지휘관 유클레스(Eucles)는 투키디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5] 그러나 브라시다스는 타소스에 있는 투키디데스의 존재와 암피폴리스 주민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알고, 바다에서 도움이 도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항복에 대한 온건한 조건을 제시했고, 암피폴리스는 스파르타의 통제하에 들어갔다.[16] 암피폴리스는 전략적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 함락 소식은 아테네에 큰 동요를 일으켰다.[17] 투키디데스는 암피폴리스(Amphipolis)를 구하지 못한 것 때문에 추방되었으며,[18]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사건을 이해할 만한 나이에 그것을 모두 겪었고, 그것들에 대한 정확한 진실을 알기 위해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또한 암피폴리스(Amphipolis)에서의 지휘 후 20년 동안 조국에서 추방되는 운명을 맞았습니다."[18]
아테네에서 추방된 지위를 이용하여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 사이를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그는 양측의 관점에서 전쟁을 볼 수 있었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역사 쓰기를 시작했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 전쟁이 규모 면에서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가장 위대한 전쟁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9] 그의 가족은 트라키아(Thrace)에 금광(gold mines)까지 포함된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가족은 상당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추방된 후 투키디데스는 자신의 부동산에 영구적으로 거주하며, 금광에서 얻은 풍부한 수입 덕분에 전업 역사 저술과 연구에 전념할 수 있었다.
대표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실증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전쟁사(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Ιστορία του Πελοποννησιακού Πολέμου)이다. 투키디데스는 이 전쟁에 장군으로서 일시 참여했으나,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근교에서의 실패로 20년간의 추방형을 받았다. 그는 스파르타 지배 지역에도 머물렀던 경험으로 양측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투키디데스의 함정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고도 알려진다.
투키디데스 『전쟁사』의 기록은 기원전 411년의 기록에서 중단되었지만, 후에 소크라테스의 제자 크세노폰이 중단 부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기원전 362년까지를 기록한 『그리스 역사(헬레니카)』(Ἑλληνικά)를 저술하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기록을 완성했다.
투키디데스는 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히스토리아이)』(ἱστορίαι)와 대비된다. 그는 동시대의 역사를 다룬 저서에서 특정 국가를 편애하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저술하고 있으며, 정치가·군인의 연설을 곳곳에 삽입하여 역사상의 인물에게 직접 말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2. 4. 사망과 평가
투키디데스의 생애에 관하여 알려진 것은 주로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언급된 개인적인 기록이 전부이다.[21][22][23][24] 그는 트라케 출신 올로로스의 아들로서 아테네에서 태어났으며,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모국에서 추방되었다.[25][26][27] 이후 그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집필한 것으로 여겨진다.투키디데스의 사망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마르켈리누스는 투키디데스가 사망한 지 약 천 년 후에 그의 전기를 썼다. 파우사니아스에 따르면, 투키디데스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길에 살해당했고, 그의 무덤은 멜리테 문 근처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스카프테 훌레에서 살해당했고 그의 유해가 아테네로 돌아와 키몬의 가족 묘지에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전통을 보존한다.[28] 디디무스는 트라키아에 또 다른 무덤을 언급한다.[32] 투키디데스의 서술은 기원전 411년 중반에 중단되며, 이는 그가 책을 쓰는 동안 사망했기 때문이라고 설명되어 왔지만, 다른 설명도 제시되었다.

투키디데스는 페리클레스를 존경하고 그를 따른 선동가들에게 혐오감을 보였다.[29] 그는 민주주의 평민이나 페리클레스가 도입한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좋은 지도자의 인도하에 민주주의는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했다.[30] 그는 암피폴리스 전투에서 자신의 실패를 최소화하지 않는 등 사건 제시에 공정성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클레온[31]과 히페르볼로스에 대한 평가에서는 강한 열정이 나타나기도 한다.[33]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고통과 인간 본성의 과도함에 대해 우려했으며, 코르퀴라 내전 중의 잔혹 행위 분석에서 "전쟁은 폭력적인 스승이다"(πόλεμος βίαιος διδάσκαλοςgrc)라는 구절을 남겼다.
대표작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실증적인 입장에서 서술한 『전쟁사(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역사)』(Ιστορία του Πελοποννησιακού Πολέμου)이다. 투키디데스의 함정 등의 개념을 만들어냈다고 전해진다.
투키디데스는 선대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히스토리아이)』(ἱστορίαι)와 대비된다. 그는 특정 국가를 편애하지 않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저술하고, 정치가·군인의 연설을 삽입하여 역사상의 인물에게 직접 말하게 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개전 1년째 전몰자 합동 추도식에 즈음한 페리클레스의 연설이 가장 유명하다.
3.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전례 없는 중요성을 지닌 사건이라고 믿었다.[34] 따라서 그는 기원전 431년 전쟁 발발과 함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35][36] 그는 자신의 의도가 "영원히 소장될" 기록을 쓰는 것이라고 선언했다.[37] 『역사』는 전쟁 21년차(기원전 411년) 말, 시라쿠사에서 아테네의 패배 직후에 끝나므로, 갈등의 마지막 7년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기원전 404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 수정되었는데, 제1권 1.13절[38]의 전쟁 종결에 대한 언급이 이를 보여준다.[39] 투키디데스 사후 그의 『역사』는 8권으로 나뉘었으며, 현대 제목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이다. 이러한 분류는 아마도 사서와 기록 보관 담당자, 즉 역사가이자 학자인 사람들이, 아마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했을 것이다.
투키디데스는 일반적으로 최초의 진정한 역사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역사의 아버지"로 알려진 그의 전임자 헤로도토스와 마찬가지로, 투키디데스는 직접 증언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자신이 직접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건에 대해 썼다. 그는 또한 문서를 꼼꼼하게 검토하고 참가자들에게 기록한 사건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신화적 이야기에서 종종 휴브리스가 신들의 분노를 초래한다고 가르치는 헤로도토스와 달리, 투키디데스는 인간사에 대한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는다.[40]
투키디데스는 후대 헬레니즘과 로마 역사가들에게 광범위한 역사 편찬적 영향을 미쳤지만, 많은 후대 역사가들과 관련된 그의 스타일의 정확한 설명은 불분명하다.[41] 고대의 독자들은 종종 투키디데스의 추정 지적 계승자인 크세노폰의 저술에서 『역사』의 문체적 유산의 계승을 보았다. 그러한 해석은 종종 크세노폰의 논문을 투키디데스의 『역사』를 "완성"하려는 시도로 묘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 중 상당수는 딜러리와 같은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회의론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는 크세노폰을 투키디데스로 해석하는 견해를 비판하며, 후자의 "근대적" 역사(문학적 및 역사적 주제를 바탕으로 구성된 것으로 정의됨)는 전자의 『헬레니카』의 서술과 상반된다고 주장한다. 『헬레니카』는 서문이나 머리말이 없고, 역사를 통일하는 "전반적인 개념"이 부족하여 헬레니즘 역사 편찬 전통에서 벗어난다.[42]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 방식과 현대 역사가들의 방식의 주목할 만한 차이점은 투키디데스가 긴 공식 연설을 포함시켰다는 점이다. 그는 이것이 실제로 말해진 내용의 인용문이 아니라 문학적 재구성이라고 말했다. 혹은 아마도 그가 "말해야 했다고" 믿었던 내용일 수도 있다. 주장하건대, 그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말해진 요지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역사가들이 참고할 수 있는 방대한 양의 문서, 기록, 기록 기술이 존재한다. 따라서 투키디데스의 방법은 대부분 구전 자료를 망각에서 "구출"하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인물들이 어떻게 말했는지 알 수 없다. 투키디데스의 재현은 영웅적인 문체적 기록을 사용한다. 유명한 예로 페리클레스의 장례 연설이 있는데, 이 연설은 죽은 자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명예로운 사람들의 무덤은 온 세상입니다. 그들은 자국 내 기념비와 비문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기념물에 새겨진 기록으로 존경받습니다. 돌에 새겨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에 새겨진 기념물로 말입니다. (2:43)
문체적으로, 이 구절의 배치는 바로 뒤에 이어지는 아테네의 역병 묘사와의 대조를 강조하는 역할을 한다. 이 묘사는 인간의 죽음의 공포를 생생하게 강조하여 강력한 사실성을 전달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장되지 않은 채 놓여 있었지만, 새와 짐승은 그들을 건드리지 않았거나 건드린 후 죽었다. [...]. 죽어가는 사람들의 시체가 서로 겹쳐 쌓여 있었고, 반쯤 죽은 생물들이 거리에서 비틀거리며 물을 갈망하며 모든 분수대 주변에 모여들었다. 그들이 주둔했던 신성한 장소들도 거기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 차 있었다. 재앙이 모든 한계를 넘어섰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들의 앞날을 알 수 없어서 신들의 재산과 의무에 대해서도 똑같이 무시하게 되었다. 이전에 사용되던 모든 매장 의식은 완전히 폐지되었고,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시체를 매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친구들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적절한 도구가 부족하여 가장 부끄러운 매장 방식을 사용했다. 때로는 무덤을 쌓은 사람들보다 먼저 자신의 시체를 다른 사람의 장작더미에 던져 불을 지폈고, 때로는 운반하던 시체를 다른 시체 위에 던져 불을 지피고 떠났다. (2:52)
투키디데스는 그의 책에 나오는 사건들이 일어났고 그가 자란 사회적 환경, 예술, 문학에 대한 논의를 생략한다. 그는 자신이 시대가 아니라 사건을 기록한다고 생각했고, 사소하거나 관련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3. 1. 역사 서술 방식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 방식에 대한 연구는 타나카 미치타로의 『투키디데스의 경우: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85], F.M. 콘포드의 『투키디데스: 신화적 역사가』, 사이토 신주이의 『그리스 문학 산책』[86], 사쿠라이 마리코의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의 시작』, 야나기누마 시게타케의 『지중해 세계를 물들인 사람들: 고전에 보는 인물상』, 『사람은 왜 전쟁을 선택하는가: 최고의 전쟁사에 배우는 사람이 전쟁으로 향하는 원리』, 쿠보 마사아키의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 야나기누마 시게타케의 『투키디데스 문체 연구』, 『위기를 둘러싼 역사학』, 데이비드 그린의 『그리스 정치 이론: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에 있어서의 남성 이미지』 등 다양한 저작에서 다루어지고 있다.[85][86]3. 2. 주요 내용
다음은 투키디데스에 대한 여러 연구 서적 및 자료들이다.- 타나카 미치타로 『투키디데스의 경우: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85] 치쿠마쇼보, 1970년, 『타나카 미치타로 전집 제12권 투키디데스의 경우』 치쿠마쇼보, 1988년 (해제 야나기누마 시게타케)
- F.M. 콘포드 『투키디데스: 신화적 역사가』 (오누마 타다히로·사콘지 쇼코 역, 미스즈쇼보, 1970년) - 원서는 1907년 런던에서 간행.
- 사이토 신주이 『그리스 문학 산책』[86] 이와나미쇼텐, 1987년/이와나미 겐다이 붕코, 2007년
- 사쿠라이 마리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의 시작』 <히스토리아 023>야마카와 슈판, 2002년/고단샤 가쿠주쓰 붕코, 2023년
- 야나기누마 시게타케 『지중해 세계를 물들인 사람들: 고전에 보는 인물상』 이와나미 겐다이 붕코, 2007년
- 『사람은 왜 전쟁을 선택하는가: 최고의 전쟁사에 배우는 사람이 전쟁으로 향하는 원리』 (요하나 하니크 편, 오타 유이치로 역, 모기 마코토 해설, 붕쿄샤, 2022년) - 입문서
- 쿠보 마사아키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 이와나미쇼텐, 1992년 - 전문서, 제2부 「투키디데스<전사>에 있어서의 서술 기법의 여러 모습」
- 야나기누마 시게타케 『투키디데스 문체 연구』 이와나미쇼텐, 2000년
- 『위기를 둘러싼 역사학』 야마시로 히로미치 편, 도수쇼보, 2006년 (서양사 학자 15명의 연구)
- 데이비드 그린 『그리스 정치 이론: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에 있어서의 남성 이미지』 (이이지마 쇼조·코타카 야스테루·콘도 카즈키·사사키 준 역, 후코샤, 2014년)
3. 3. 특징 및 영향
투키디데스에 대한 연구는 다양한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타나카 미치타로는 『투키디데스의 경우: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85]을 통해 투키디데스의 역사 기술 방식과 역사 인식을 분석했다. F.M. 콘포드는 『투키디데스: 신화적 역사가』에서 투키디데스를 신화적 역사가로 묘사했다.[85] 사이토 신주이는 『그리스 문학 산책』[86]에서 투키디데스를 그리스 문학의 주요 인물로 다루었다. 사쿠라이 마리코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의 시작』에서 투키디데스를 헤로도토스와 비교하며 역사학의 시작을 논했다.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지중해 세계를 물들인 사람들: 고전에 보는 인물상』에서 투키디데스가 묘사한 인물상에 주목했다.요하나 하니크는 『사람은 왜 전쟁을 선택하는가: 최고의 전쟁사에 배우는 사람이 전쟁으로 향하는 원리』에서 투키디데스의 전쟁사를 통해 전쟁의 원리를 분석했다. 쿠보 마사아키는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에서 투키디데스의 서술 기법을 분석했다.[85]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투키디데스 문체 연구』를 통해 투키디데스의 문체를 심층적으로 연구했다.[85] 야마시로 히로미치는 『위기를 둘러싼 역사학』에서 다양한 서양사 학자들의 투키디데스 연구를 소개했다. 데이비드 그린은 『그리스 정치 이론: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에 있어서의 남성 이미지』에서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의 남성 이미지를 비교 분석했다.
4. 사상과 관점
폴 쇼리(Paul Shorey)는 투키디데스를 "도덕적 감수성이 결여된 냉소주의자"라고 부른다.[44] 또한 그는 투키디데스가 인간 본성을 기본적인 욕구와 더불어 엄격하게 물리적 및 사회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생각했다고 지적한다.[45] F.M. 콘포드는 좀 더 미묘한 견해를 제시했다. 투키디데스의 정치적 비전은 다음과 같은 비극적인 윤리적 비전에 의해 형성되었다.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고립되어 대립하며, 좁은 길을 따라 나아갑니다. 그 너머에 있는 것과는 무관하며, 인간의 '예지'(γνώμη/gnome)라는 희미한 광선이나 희망이라는 거짓되고 방황하는 불꽃에 의해서만 비춰집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성격 속에 스스로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것에서 발생하는 목적과 함께 그의 행로를 형성합니다. 투키디데스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다만 때때로 주변의 어둠 속에서 예측할 수 없고 예상치 못한 운명의 눈부신 타격이 찾아올 뿐입니다.[46]
투키디데스의 저술은 소피스트들의 가르침의 영향을 보여주는데, 이는 그의 『역사』의 사고와 성격에 상당한 기여를 한다.[47] 가능한 증거로는 정의와 도덕에 대한 그의 회의적인 생각이 포함된다.[48] 또한 『역사』에는 자연에 대한 그의 견해(사실적이고 경험적이며 인격화되지 않은 것에 중점을 둠)와 같이 그가 아낙사고라스와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철학자들의 견해를 적어도 알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요소들이 있다. 또한 히포크라테스 의학 저술의 일부에 대한 그의 지식을 보여주는 증거도 있다.[49]
투키디데스는 특히 인간의 지능과 판단,[50] 운명과 필연성,[51] 그리고 역사가 너무 비합리적이고 불확실하여 예측할 수 없다는 생각에 관심이 많았다.[52]
타나카 미치타로는 『투키디데스의 경우: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85] (치쿠마쇼보, 1970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F.M. 콘포드는 『투키디데스: 신화적 역사가』(오누마 타다히로, 사콘지 쇼코 역, 미스즈쇼보, 1970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사이토 신주이는 『그리스 문학 산책』[86] (이와나미쇼텐, 1987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사쿠라이 마리코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의 시작』(야마카와 슈판, 2002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지중해 세계를 물들인 사람들: 고전에 보는 인물상』(이와나미 겐다이 붕코, 2007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사람은 왜 전쟁을 선택하는가: 최고의 전쟁사에 배우는 사람이 전쟁으로 향하는 원리』(요하나 하니크 편, 모기 마코토 해설, 붕쿄샤, 2022년)는 투키디데스를 입문서로 다루었다. 쿠보 마사아키는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이와나미쇼텐, 1992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투키디데스 문체 연구』(이와나미쇼텐, 2000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데이비드 그린은 『그리스 정치 이론: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에 있어서의 남성 이미지』(후코샤, 2014년)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
== 현실주의적 관점 ==
투키디데스는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적 관점의 시조로 여겨진다.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힘의 논리와 국가 간의 권력 투쟁을 강조하며,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멜로스 대화에서 나타나는 강대국 아테네의 논리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약소국을 굴복시키는 현실주의적 국제정치의 전형을 보여준다.
투키디데스의 현실주의적 관점은 후대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에 이르러 투키디데스의 사상은 국제정치학, 특히 현실주의 이론의 중요한 기반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 민주주의에 대한 복합적 시각 ==
투키디데스는 민주주의에 대해 복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와 위험성을 지적했다.[85][86]
4. 1. 현실주의적 관점
투키디데스는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적 관점의 시조로 여겨진다.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힘의 논리와 국가 간의 권력 투쟁을 강조하며,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묘사하고 있다. 특히 멜로스 대화에서 나타나는 강대국 아테네의 논리는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약소국을 굴복시키는 현실주의적 국제정치의 전형을 보여준다.투키디데스의 현실주의적 관점은 후대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타나카 미치타로는 『투키디데스의 경우: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에서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 방식과 역사 인식을 분석하였다.[85] F.M. 콘포드는 『투키디데스: 신화적 역사가』에서 투키디데스를 신화적 역사가로 평가했다.[85] 사이토 신주이는 『그리스 문학 산책』에서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86] 사쿠라이 마리코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의 시작』에서 투키디데스를 헤로도토스와 비교하여 역사학의 시작을 논했다.[86]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지중해 세계를 물들인 사람들: 고전에 보는 인물상』에서 투키디데스의 인물 묘사를 분석했다.[86]
현대에 이르러 투키디데스의 사상은 국제정치학, 특히 현실주의 이론의 중요한 기반으로 재조명되고 있다. 『사람은 왜 전쟁을 선택하는가: 최고의 전쟁사에 배우는 사람이 전쟁으로 향하는 원리』에서는 투키디데스의 전쟁사를 통해 인간이 전쟁을 선택하는 원리를 분석한다.[86] 쿠보 마사아키는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에서 투키디데스의 서술 기법을 분석했다.[86]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투키디데스 문체 연구』를 통해 투키디데스의 문체를 심층적으로 연구했다.[86] 데이비드 그린은 『그리스 정치 이론: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에 있어서의 남성 이미지』에서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의 남성 이미지를 비교 분석했다.[86]
4. 2. 민주주의에 대한 복합적 시각
투키디데스는 민주주의에 대해 복합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민주주의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그 한계와 위험성을 지적했다.[85][86]5. 현대적 의의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투키디데스가 민주주의는 지도력이 필요하지만 그 지도력이 민주주의에 위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인식하고 가르쳤다고 보았다. 레오 슈트라우스(Leo Strauss)는 (''도시와 인간(The City and Man)''에서) 그 문제의 원인을 아테네 민주주의의 본질에서 찾았는데, 그는 투키디데스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투키디데스의 "지혜는" 개인의 대담함, 기업가 정신, 그리고 의문 제기하는 정신을 해방시킨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해졌다. 이러한 해방은 무한한 정치적 야망의 성장을 허용함으로써 제국주의로, 그리고 결국 시민적 갈등으로 이어졌다.[53]
캐나다 역사가 찰스 노리스 코크레인(Charles Norris Cochrane, 1889–1945)에게 투키디데스의 꼼꼼한 관찰 현상에 대한 헌신, 인과 관계에 대한 집중, 그리고 다른 요인들의 엄격한 배제는 20세기 과학적 실증주의를 예상하는 것이었다. 의사의 아들이었던 코크레인은 투키디데스가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아테네의 역병을 묘사할 때) 코스(Kos)의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초기 의학 저술가들의 방법과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전 학자 자클린 드 로밀리(Jacqueline de Romilly)는 아테네 제국주의의 문제가 투키디데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으며, 그의 역사를 국제 정치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맥락에서 위치시켰다. 그녀의 연구가 등장한 이후, 다른 학자들은 투키디데스의 ''현실 정치''에 대한 다루는 방식을 더 자세히 조사했다.
다른 학자들은 그들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 전통에서 보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견되고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정의와 고통의 개념과 관련된 ''역사''의 문학적 특성을 부각시켰다.[54] 리처드 네드 레보(Richard Ned Lebow)는 투키디데스를 "비극 작가 중 마지막"이라고 부르며, "투키디데스는 서사시와 비극을 많이 활용하여 그의 역사를 구성했는데, 놀랍지 않게도 이 역사는 서사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55] 이러한 관점에서 아테네인들(그리고 실제로 다른 모든 행위자들)의 맹목적이고 과도한 행동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의 ''역사''는 역사가의 객관성이 아닌 편년사가의 아첨으로 그들의 행동을 감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지도자들에게 더 신중하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56]
역사가 J. B. 버리(J. B. Bury)는 투키디데스의 저술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역사를 오늘날과 같이 만드는 데 이루어진 가장 길고 결정적인 발걸음"이라고 썼다.[57]
역사가 H. D. F. 키토(H. D. F. Kitto)는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쓴 것은 그것이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가장 많이 야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투키디데스의 책에는 "사포 자신보다 훨씬 뛰어넘는 강렬한 감정으로" 쓰여진 구절이 여러 개 있다.[58]
그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칼 포퍼는 투키디데스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고 썼다. 포퍼는 계속해서 투키디데스의 작품은 "해석, 관점"을 나타내며 "이 점에 대해 우리는 그와 동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테네 민주주의와 "스파르타의 정체된 과두 정치 부족주의" 사이의 전쟁에서 우리는 투키디데스의 "무의식적인 편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그의 마음은 그의 고향인 아테네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투키디데스영어는 전쟁 내내 적과 공모한 아테네 과두파 클럽의 극단적인 세력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히 과두파에 속했으며, 그를 추방한 아테네 백성인 데모스(demos)나 그들의 제국주의 정책과는 친하지 않았다.[59]
타나카 미치타로 『투키디데스의 경우: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85] 치쿠마쇼보, 1970년
- *『타나카 미치타로 전집 제12권 투키디데스의 경우』 치쿠마쇼보, 1988년 (해제 야나기누마 시게타케)
- F.M. 콘포드 『투키디데스: 신화적 역사가』
::오누마 타다히로·사콘지 쇼코 역, 미스즈쇼보, 1970년 - 원서는 1907년 런던에서 간행.
- 사이토 신주이 『그리스 문학 산책』[86] 이와나미쇼텐, 1987년/이와나미 겐다이 붕코, 2007년
- 사쿠라이 마리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의 시작』 <히스토리아 023>야마카와 슈판, 2002년/고단샤 가쿠주쓰 붕코, 2023년
- 야나기누마 시게타케 『지중해 세계를 물들인 사람들: 고전에 보는 인물상』 이와나미 겐다이 붕코, 2007년
- 『사람은 왜 전쟁을 선택하는가: 최고의 전쟁사에 배우는 사람이 전쟁으로 향하는 원리』
::요하나 하니크 편, 오타 유이치로 역, 모기 마코토 해설, 붕쿄샤, 2022년. 입문서
- 쿠보 마사아키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 이와나미쇼텐, 1992년 - 이하는 전문서
::제2부 「투키디데스<전사>에 있어서의 서술 기법의 여러 모습」
- 야나기누마 시게타케 『투키디데스 문체 연구』 이와나미쇼텐, 2000년
- 『위기를 둘러싼 역사학』 야마시로 히로미치 편, 도수쇼보, 2006년 (서양사 학자 15명의 연구)
- 데이비드 그린『그리스 정치 이론: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에 있어서의 남성 이미지』
::이이지마 쇼조·코타카 야스테루·콘도 카즈키·사사키 준 역, 후코샤, 2014년
5. 1. 현실주의 국제정치 이론
투키디데스는 국제정치학에서 현실주의 이론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그의 저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국가 간의 권력 투쟁과 안보 딜레마를 분석한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특히 멜로스 대화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국제 관계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투키디데스의 사상과 관련된 연구는 다음과 같다:
- 타나카 미치타로는 『투키디데스의 경우: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에서 투키디데스의 역사 서술 방식과 역사 인식을 분석했다.[85]
- F.M. 콘포드는 『투키디데스: 신화적 역사가』에서 투키디데스를 신화적 역사관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다.
- 사이토 신주이는 『그리스 문학 산책』에서 투키디데스를 포함한 그리스 문학 전반을 다루었다.[86]
- 사쿠라이 마리코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역사학의 시작』에서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의 역사 서술 방식을 비교했다.
-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지중해 세계를 물들인 사람들: 고전에 보는 인물상』에서 투키디데스를 포함한 고대 지중해 인물들을 조명했다.
- 요하나 하니크는 『사람은 왜 전쟁을 선택하는가: 최고의 전쟁사에 배우는 사람이 전쟁으로 향하는 원리』에서 투키디데스의 전쟁사를 통해 전쟁의 원리를 분석했다.
- 쿠보 마사아키는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에서 투키디데스의 서술 기법을 분석했다.
-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투키디데스 문체 연구』에서 투키디데스의 문체를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 야마시로 히로미치는 『위기를 둘러싼 역사학』에서 투키디데스를 포함한 여러 역사학자들의 위기 인식 방식을 분석했다.
- 데이비드 그린은 『그리스 정치 이론: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에 있어서의 남성 이미지』에서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의 남성 이미지를 비교 분석했다.
5. 2. 민주주의와 리더십에 대한 성찰
투키디데스는 민주주의와 리더십에 대해 깊이 성찰한 역사가로 평가받는다.[85] 그의 저작은 단순한 사건의 기록을 넘어, 정치 체제의 장단점과 지도자의 자질이 국가의 운명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다.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아테네 민주주의의 한계와 페리클레스와 같은 지도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86]타나카 미치타로는 투키디데스의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을 분석하며, 그의 저작이 단순한 역사 기록을 넘어선 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고 평가했다.[85] F.M. 콘포드는 투키디데스를 신화적 역사가로 규정하며, 그의 저작에 나타난 역사관을 분석했다.[85] 사이토 신주이는 투키디데스를 통해 그리스 문학을 조명하며, 그의 문학적 성취를 강조했다.[86]
사쿠라이 마리코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비교하며, 역사학의 시작을 탐구했다.[86]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투키디데스의 문체 연구를 통해 그의 역사 서술 방식을 분석했다.[85] 또한, 투키디데스의 저작은 위기 상황에서의 인간 행동과 선택을 분석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86] 쿠보 마사아키는 투키디데스의 서술 기법을 연구하여 그의 역사관을 심층적으로 분석했다.[85]
5. 3. 한국 사회에 주는 교훈
투키디데스에 대한 연구는 현대 한국 사회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시한다. 그의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다.[85] 타나카 미치타로는 투키디데스의 역사 기술과 역사 인식을 분석한 저서를 출간했다.[85] 사이토 신주이는 자신의 저서에서 그리스 문학과 함께 투키디데스를 다루었다.[86] 사쿠라이 마리코는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비교하며 역사학의 시작을 조명하는 연구를 발표했다.[85]쿠보 마사아키는 투키디데스의 서술 기법을 중심으로 그리스·라틴 문학 연구를 진행했다. 야나기누마 시게타케는 투키디데스의 문체를 연구하고, 위기 상황을 둘러싼 역사학 연구에도 참여했다. 데이비드 그린은 투키디데스와 플라톤의 남성 이미지를 통해 그리스 정치 이론을 분석했다.
6. 비판
학자들은 전통적으로 투키디데스가 민주주의는 지도력이 필요하지만 그 지도력이 민주주의에 위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인식하고 가르쳤다고 보았다. 레오 슈트라우스(Leo Strauss)는 (''도시와 인간(The City and Man)''에서) 그 문제의 원인을 아테네 민주주의의 본질에서 찾았는데, 그는 투키디데스가 아테네 민주주의에 대해 모호한 태도를 지녔다고 주장했다. 투키디데스의 "지혜는" 개인의 대담함, 기업가 정신, 그리고 의문 제기하는 정신을 해방시킨 페리클레스 시대의 민주주의에 의해 가능해졌다. 이러한 해방은 무한한 정치적 야망의 성장을 허용함으로써 제국주의로, 그리고 결국 시민적 갈등으로 이어졌다.[53]
캐나다 역사가 찰스 노리스 코크레인(Charles Norris Cochrane, 1889–1945)에게 투키디데스의 꼼꼼한 관찰 현상에 대한 헌신, 인과 관계에 대한 집중, 그리고 다른 요인들의 엄격한 배제는 20세기 과학적 실증주의를 예상하는 것이었다. 의사의 아들이었던 코크레인은 투키디데스가 일반적으로 (그리고 특히 아테네의 역병을 묘사할 때) 코스(Kos)의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초기 의학 저술가들의 방법과 사고방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추측했다.[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고전 학자 자클린 드 로밀리(Jacqueline de Romilly)는 아테네 제국주의의 문제가 투키디데스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였으며, 그의 역사를 국제 정치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맥락에서 위치시켰다. 그녀의 연구가 등장한 이후, 다른 학자들은 투키디데스의 ''현실 정치''에 대한 다루는 방식을 더 자세히 조사했다.
다른 학자들은 그들이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의 서사 전통에서 보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발견되고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에서 의문을 제기하는 정의와 고통의 개념과 관련된 ''역사''의 문학적 특성을 부각시켰다.[54] 리처드 네드 레보(Richard Ned Lebow)는 투키디데스를 "비극 작가 중 마지막"이라고 부르며, "투키디데스는 서사시와 비극을 많이 활용하여 그의 역사를 구성했는데, 놀랍지 않게도 이 역사는 서사적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55] 이러한 관점에서 아테네인들(그리고 실제로 다른 모든 행위자들)의 맹목적이고 과도한 행동은 인간 본성에 내재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들의 몰락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그의 ''역사''는 역사가의 객관성이 아닌 편년사가의 아첨으로 그들의 행동을 감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림으로써 지도자들에게 더 신중하도록 경고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56]
역사가 J. B. 버리(J. B. Bury)는 투키디데스의 저술이 "단 한 사람에 의해 역사를 오늘날과 같이 만드는 데 이루어진 가장 길고 결정적인 발걸음"이라고 썼다.[57]
역사가 H. D. F. 키토(H. D. F. Kitto)는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대해 쓴 것은 그것이 고대에서 가장 중요한 전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고통을 가장 많이 야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투키디데스의 책에는 "사포 자신보다 훨씬 뛰어넘는 강렬한 감정으로" 쓰여진 구절이 여러 개 있다.[58]
그의 책 ''열린 사회와 그 적들''에서 칼 포퍼는 투키디데스가 "아마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역사가"라고 썼다. 포퍼는 계속해서 투키디데스의 작품은 "해석, 관점"을 나타내며 "이 점에 대해 우리는 그와 동의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테네 민주주의와 "스파르타의 정체된 과두 정치 부족주의" 사이의 전쟁에서 우리는 투키디데스의 "무의식적인 편견"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며, "그의 마음은 그의 고향인 아테네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는 전쟁 내내 적과 공모한 아테네 과두파 클럽의 극단적인 세력에 속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확실히 과두파에 속했으며, 그를 추방한 아테네 백성인 데모스(demos)나 그들의 제국주의 정책과는 친하지 않았다.[59]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아테네 중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85][86]
투키디데스는 멜로스 대화에서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드러냈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제시하지 않았다.[85][86] 이는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의 패권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6. 1. 아테네 중심적 시각
투키디데스는 아테네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저작은 아테네 중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85][86]6. 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부재
투키디데스는 멜로스 대화에서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태도를 드러냈지만, 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은 제시하지 않았다.[85][86] 이는 투키디데스가 아테네의 패권과 그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를 객관적으로 묘사하려 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7. 한국어 번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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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같이 보기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는 서구 역사서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투키디데스는 직접적으로 헤로도토스를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서문은 헤로도토스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60][61]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사건뿐만 아니라 지리적, 민족지적 정보와 우화를 기록했으며, 상충되는 이야기에 대해서는 양측 모두를 제시하고 독자 스스로 판단하도록 했다.[62] 반면 투키디데스는 모호하지 않고 직접적이며 목격자의 증언에 기반한 사실적인 보고에 집중했다.[65]
후대 그리스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저술을 진실된 역사의 모델로 높이 평가했다.[66] 루키아누스는 투키디데스가 그리스 역사가들에게 '행해진 일' (ὡς ἐπράχθηgrc)을 말하도록 요구했다고 언급했다.[66] 키케로는 헤로도토스를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지만,[68] 플루타르코스는 헤로도토스를 비판하기도 했다.[69]
중세 동안 투키디데스와 헤로도토스는 서유럽에서 잊혀졌지만, 비잔틴 제국에서는 그 영향력이 계속되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로렌초 발라가 투키디데스를 라틴어로 번역했고, 알도 마누치오가 그리스어 판본을 출판했다.[70] 17세기 토마스 홉스는 투키디데스를 영어로 번역했다. 투키디데스, 홉스, 마키아벨리는 정치 현실주의의 창시자로 여겨진다.[71]
19세기 실증주의 역사가들은 투키디데스의 객관성과 증거 처리 방식을 강조했으며, 니체와 같은 철학자들도 투키디데스를 높이 평가했다.[72] 에두아르트 마이어, 토마스 바빙턴 매콜레이, 레오폴트 폰 랑케 등에게 투키디데스는 모범적인 역사가였다.[73][74][75]
20세기에는 국제 관계 분야에서 투키디데스의 영향력이 커졌다.[79][80] 어빙 크리스톨은 투키디데스를 "외교 정책에 대한 가장 좋아하는 신보수주의 텍스트"라고 언급했으며,[81] 해군 전쟁 대학의 필수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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