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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데 암푸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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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드로 데 암푸디아는 스페인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멕시코로 이주한 멕시코 군인이다. 그는 알라모 전투와 샌재신토 전투에 참전했으며, 텍사스와의 국경 분쟁에서 활약했다. 1846년 멕시코 북부군 최고 사령관을 맡았으나, 정치적 갈등으로 좌천되었다. 미국-멕시코 전쟁 중 몬테레이 전투를 지휘했으나, 이후 해임되었다. 몬테레이에서의 퇴각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테일러를 격파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로 멕시코에서 전설로 여겨진다. 말년에는 자유주의를 지지하며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를 지원했고, 동부군 사령관으로 활약하다가 부상 후 186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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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데 암푸디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페드로 데 암푸디아 사진
이름페드로 암푸디아 이 그리마레스트
원어 이름Pedro de Ampudia y Grimarest
출생1805년 1월 30일
출생지쿠바 하바나
사망1868년 8월 7일
사망지멕시코시티, 멕시코
직업군인
경력
타바스코 주지사1843년 9월 1일 ~ 1844년 6월 30일
1844년 9월 5일 ~ 1845년 1월 2일
누에보레온 주지사1846년 9월 1일 ~ 1846년 9월 20일
1853년 6월 23일 ~ 1854년 10월 22일
유카탄 주지사1855년 2월 6일 ~ 1855년 11월 24일
멕시코 국방부 장관1860년 4월 29일 ~ 1860년 9월 20일

2. 생애

스페인군 장교로 군 경력을 시작한 페드로 데 암푸디아는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멕시코로 이주하여 멕시코군에 합류했다. 1836년 텍사스 혁명 당시 알라모 전투샌재신토 전투 등에 참전했으며, 1840년대 초에는 텍사스와의 국경 분쟁에서 활약하며 명성을 얻었다.

미국-멕시코 전쟁 중에는 북부군 최고 사령관을 여러 차례 역임했다. 1846년 몬테레이 전투에서는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후퇴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사수하려 했으나, 미군의 공세에 밀려 결국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그의 지휘 능력은 인정받아 "테일러를 격파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전쟁 중 정치적 라이벌과의 갈등으로 좌천되거나 행정직으로 밀려나기도 했으며, 1847년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서는 포병 부대를 지휘했다.

전쟁 이후 암푸디아는 점차 자유주의 성향으로 기울어, 프랑스의 제2차 멕시코 원정 시기에는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를 지지하며 자유주의파 동부군 사령관으로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1868년 전쟁 중 입은 상처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여 멕시코시티의 Panteón de San Fernando|판테온 데 산 페르난도es에 안장되었다.

2. 1. 초기 군 경력

암푸디아는 스페인군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으며, 멕시코 독립 전쟁 이후 멕시코로 이주했다. 1836년, 그는 알라모 전투에서 멕시코군 포병으로 복무했고, 이후 샌재신토 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경험했다. 1840년대텍사스와의 국경 분쟁에서는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아, 국경 너머의 텍사스 군으로부터도 경의를 받았다.

1846년 잠시 멕시코 북부군 최고 사령관을 맡았을 때, 암푸디아는 지역 게릴라 지도자를 잔인하게 공개 처형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수행하려 했다. 그는 콘세르바도르(conservador, 멕시코 보수 파벌) 소속이었으나,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자유주의파 장군 마리아노 아리스타를 지지하다가 곧바로 사무직으로 좌천되었다. 암푸디아는 팔로 알토 전투에서 아리스타의 전술을 “용납할 수 없는 전술적 대실패”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며, 아리스타가 패배한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 대해서도 비판을 이어갔다. 이 전투 패배의 책임 일부는 암푸디아에게도 돌려졌다.

2. 2. 미국-멕시코 전쟁

1846년 멕시코 북부군 최고 사령관을 잠시 맡아 지역 게릴라 지도자를 잔인하게 공개 처형하는 방식으로 임무를 해결하려 했다. 그는 보수파(콘세르바도르)였으나, 라이벌 관계인 자유주의파 장군 마리아노 아리스타를 지지하다가 행정직으로 좌천되었다. 암푸디아는 팔로 알토 전투에서 아리스타의 전술을 “용납할 수 없는 전술의 대실패”라고 강하게 비판했으며, 아리스타가 패배한 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 대해서도 비판을 이어갔다. 아리스타는 이 전투의 패배 원인 중 일부를 암푸디아에게 돌리기도 했다.

남쪽으로 긴 후퇴를 하는 동안, 암푸디아는 몬테레이 전투를 지휘하기 위해 다시 북부군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는 살티요까지 철수하라고 명령했지만, 암푸디아는 이를 거부하고 몬테레이에서 미군을 요격하기로 결정했다.

암푸디아는 숙련된 도시 방어전을 펼쳤으나, 미군이 동서 양쪽에서 도시로 진입해 오자 시 광장에서 포위되어 포격을 받게 되었다. 결국 그는 정전 깃발을 올리고 타격을 입은 부대를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재커리 테일러와 맺은 휴전 협정에 따라, 멕시코 북부군은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채 최대한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고, 3개월 동안의 불가침 조약이 맺어졌다. 이후 살티요에서 몬테레이와 같은 방어를 시도했지만, 마을 주민들이 방비에 속수무책이었기 때문에 실패했고, 이로 인해 산타 안나에 의해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1847년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서는 멕시코군 포병 부대의 일부를 지휘했지만, 이전 사령관이었던 아리스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주로 행정 업무에 투입되었다.

몬테레이에서의 후퇴에 대해서는 찬반 양론이 있었지만, 암푸디아는 “테일러를 격파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로 평가받으며 멕시코의 전설로 남아 있다.

2. 3. 자유주의로 전향과 말년

멕시코-미국 전쟁 이후 암푸디아의 정책은 점차 자유주의 성향으로 기울었다. 그는 프랑스의 제2차 멕시코 원정 시기에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를 지지하였다. 이 시기 암푸디아는 자유주의파 동부군 사령관으로서 용감하고 유능하게 군을 지휘했으나, 전투 중 심한 부상을 입기도 했다.

1868년, 암푸디아는 과거 전쟁에서 입었던 상처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고, 멕시코시티의 Panteón de San Fernando|판테온 데 산 페르난도es에 묻혔다. 비록 몬테레이 전투에서의 후퇴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리지만, 일부에서는 그를 "테일러를 격파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로 평가하며 멕시코의 전설적인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하기도 한다.

3. 평가

암푸디아의 군 경력 초기는 긍정적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1840년대 초 텍사스와의 국경 분쟁에서는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으며, 적군인 텍사스 군으로부터도 경의를 받을 정도였다.

그러나 1846년 멕시코 북부군 최고 사령관을 잠시 맡았을 때는 지역 게릴라 지도자를 잔인하게 공개 처형하는 방식을 택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보수 파벌(conservador|콘세르바도르es) 소속이었으며,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자유주의파 장군 마리아노 아리스타를 지지하다가 곧바로 한직으로 밀려나기도 했다. 이후 팔로 알토 전투레사카 데 라 팔마 전투에서 아리스타의 지휘를 "용납할 수 없는 전술의 대실패"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몬테레이 전투에서는 최고 사령관으로 복귀하여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의 후퇴 명령에도 불구하고 도시 방어를 선택했다. 숙련된 방어전을 펼쳤으나 결국 미군에 포위되어 휴전 협정을 맺고 철수해야 했다. 이 후퇴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엇갈렸지만, 일각에서는 그를 "재커리 테일러를 격파할 수 있었던 유일한 남자"로 평가하며 멕시코의 전설적인 인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살티요 방어 실패로 다시 해임되었고, 1847년 부에나 비스타 전투 이후에는 행정 업무를 맡게 되었다.

전쟁 후 암푸디아의 정치적 입장은 점차 자유주의 쪽으로 기울었다. 프랑스개입 시기에는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아노 1세에 맞서 베니토 후아레스 정부를 지지했으며, 자유주의 동부군 사령관으로서 용감하고 유능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 시기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입었고, 결국 1868년 전쟁에서 입은 상처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여 판테온 데 산 페르난도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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