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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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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는 1470년경 포르투갈 탐험가에 의해 발견된 섬으로, 상투메 섬은 성 토마스의 축일에 발견되어, 프린시페 섬은 포르투갈 왕자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485년 포르투갈의 정착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1493년 주앙 2세의 지시로 알바루 카미냐가 상투메 섬의 카피탕 모르로 임명되면서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 16세기 중반에는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 되었으나, 17세기에는 노예 반란과 브라질 식민지와의 경쟁으로 설탕 생산이 감소하고 노예 무역이 중심이 되었다. 1641년 네덜란드가 상투메 섬을 점령했으나, 1648년 포르투갈이 되찾았다. 1753년에는 해적과 사략선의 공격으로 수도가 프린시페 섬으로 이전되었고, 19세기 초에는 커피와 카카오 농업을 통해 경제가 성장했다. 1972년 독립을 목표로 하는 민족주의 정당이 결성되었고, 1974년 카네이션 혁명 이후 1975년 포르투갈은 상투메 프린시페의 독립을 승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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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공식 명칭상투메 프린시페 해외 지방
일반 명칭상투메 프린시페
국가포르투갈
상태포르투갈 식민지 (1485년–1951년)
포르투갈 해외 지방 (1951년–1975년)
시대제국주의
시작 연도1485년
종료 연도1975년
종료 날짜7월 12일
종료 사건상투메 프린시페 독립
수도상투메
공용어포르투갈어
통화상투메 프린시페 에스쿠도
현재 국가상투메 프린시페
상투메 프린시페 위치
상투메 프린시페 위치
정치
국가 원수아폰수 5세 (1470년–1481년)
프란시스코 다 코스타 고메스 (1974년–1975년)
대표주앙 드 파이바 (1485년–1490년, 최초)
António Elísio Capelo Pires Veloso (1974년–1975년, 최후)
국가
국기 (1910–1975)
국장 (1935–1975)

2. 역사

포르투갈령 상투메 프린시페 연대표 참조

주앙 드 산타렝과 페루 에스코바르는 1470년경 이 섬들을 발견했으며, 당시 무인도였다.[1][2] 상투메 섬은 사도 토마스의 축일에 발견되어 그의 이름을 땄고, 프린시페 섬은 포르투갈의 아폰수 왕자를 기려 이름 붙여졌다.[1]

1485년 최초의 정착 시도가 있었으나 실패했고, 1493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가 아우바루 카민하를 상투메 섬의 선장으로 임명하면서 성공적인 정착이 이루어졌다.[1] 초기 정착민 중에는 범죄자와 고아는 물론, 기독교인으로 양육하기 위해 부모에게서 데려온 유대인 아이들도 있었다.[3] 프린시페 섬 정착은 1500년에 시작되었다.[1]

1753년, 해적과 사략선의 빈번한 공격으로 상투메 섬의 수도는 프린시페의 상투 안토니우로 이전되었고, 이후 단일 총독이 통치하는 단일 식민지가 되었다.[4] 1852년 수도는 다시 상투메 섬으로 이전되었다.[9]

2. 1. 초기 정착과 식민지 시대

1470년경 포르투갈 탐험가 주앙 드 산타렝과 페루 이스코바르가 기니만을 항해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군도를 발견하였다.[1] 이 섬들 중 하나는 사도 토마의 축일에 발견되어 상투메섬(사도 토마의 섬)으로, 다른 하나는 포르투갈 왕자 아폰수를 기려 프린시페섬(왕자의 섬)으로 명명되었다.[1]

1485년 포르투갈 왕실이 주앙 드 파이바 (João de Paiva)에게 두 섬을 하사하면서 정착 시도가 시작되었으나, 정착민들은 섬의 열대 환경과 기후 속에서 식량을 구하기 어려웠고 열대병까지 돌아 실패했다.[1] 1493년 국왕 주앙 2세가 알바루 카미냐를 상투메섬 도독으로 임명하면서 본격적인 정착이 시작되었다.[1] 초기 정착민은 범죄자, 고아, 그리고 기독교인으로 양육하기 위해 부모에게서 빼앗은 유대인 아이들이었다.[3] 프린시페섬 정착은 1500년경부터 시작되었다.[1]

2. 2. 설탕 생산과 노예 무역의 중심지

포르투갈 정착민들은 수년 동안 상투메 섬의 비옥한 화산 지대 토양을 기반으로 수익성이 높았던 사탕수수를 경작하기 위해 아프리카 본토에서 노예를 대거 수입하기 시작했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러 상투메 섬은 세계 최대의 설탕 생산국이 되었고, 포르투갈에 막대한 부를 안겼다.[20] 다만, 상투메 섬의 습한 기후는 설탕의 빠른 생산은 가능했어도, 고품질의 백설탕 생산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21]

17세기 초부터는 포르투갈령 브라질 식민지에서 운영되기 시작한 사탕수수 농장과의 생산 경쟁과 더불어, 섬 내에서 발생한 빈번한 노예 반란까지 겹쳐 상투메 섬의 사탕수수 재배가 서서히 타격을 입었다.[22] 이런 변화는 설탕 생산량의 감소는 물론, 현지 메스티수들의 손에 의존하고 있던 지역 경제가 노예 무역으로 전환되는 계기를 낳았다.[23][24] 기니 만 연안과 콩고 왕국에서 데려와 아메리카로 향하는 노예들의 집결지 역할을 했던 상투메 섬은 그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의 주요 교역소로 발돋움하게 되었다.[20][25]

1641년에는 네덜란드가 상투메 섬을 점령하였다. 7년 뒤인 1648년에서야 포르투갈의 영토로 되돌아왔다.[26] 이 시기 네덜란드는 프린시페 섬을 점령하지는 않았다.[25]

이 시기 포르투갈 정착민 대다수는 아프리카 여성과 결혼했다. 상투메 프린시페 식민지의 전성기였던 16세기에도 유럽인의 수는 1,000명을 넘지 않았으며 대다수가 아프리카 흑인이었다. 1528년부터 흑인들도 교회나 시청 내 직책을 처음 승인받기 시작했으며, 18세기부터는 아프리카와 포르투갈의 혼혈인 물라투 (mulatos)들이 부와 영향력을 쌓은 지주로 성장하여 고위직에 오르기 시작했다.[27] 이들 중에는 조상의 피를 물려받은 탓에 아프리카 본토 흑인과 거의 구별할 수 없었음에도 스스로를 이 땅의 백인 (brancos da terra)이라 칭했던 이들도 존재했다.[28]

2. 3. 커피와 카카오 생산, 그리고 독립

19세기 초, 포르투갈인들은 커피카카오 농사를 도입하여 로사스(Roças)라고 하는 대규모 농장을 대대적으로 일궈 지역 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31] 19세기 말부터 섬의 주요 생산품이 카카오로 바뀌면서 커피 농사는 자취를 감췄다.[31] 그 후 상투메 프린시페는 몇십 년에 걸쳐 세계적인 카카오 생산지로 변모하였으며, 20세기 초에는 연간 코코아 생산량 전 세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31]

1972년 적도 기니 내 망명자들을 주축으로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지닌 민족주의 정당인 상투메 프린시페 해방운동(MLSTP)이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결성되었다.[32] 1974년 포르투갈 본토에서 카네이션 혁명이 발생하여 포르투갈 제2공화국(이스타두 노부, Estado Novo)의 독재정권이 종식되면서, 아프리카 내 포르투갈 식민지의 탈식민화가 시작되었다.[32] 1975년 7월 12일, 포르투갈 신 정부는 상투메 프린시페의 독립을 승인하였다.[32]

3. 식민지 시대 건축


  • - (현 상투메 프린시페 국립박물관)

4. 통화

5. 갤러리

참조

[1]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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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26] 서적
[2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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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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