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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레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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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시스 레더러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배우로, 프라하 음악 아카데미와 연극 아카데미에서 연기를 공부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지에서 배우로 활동하다가, 나치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하여 1939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영화와 연극 무대에서 모두 활동하며, '미드나잇', '나치 스파이의 고백'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말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했으며, 1950년대에는 카노가 공원의 명예 시장을 역임했다. 레더러는 세 번 결혼했으며, 부동산 투자로 부를 축적하여 지역 사회 활동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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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레더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칼 반 베크턴이 찍은 프란시스 레더러의 초상화
1932년의 레더러
출생 이름프란티셰크 레데러
출생일1899년 11월 6일
출생지오스트리아-헝가리 보헤미아 프라하 (현재의 체코 위치)
사망일2000년 5월 25일
사망지미국 캘리포니아주 팜스프링스
안장 장소캘리포니아주 커시드럴시티 포레스트 론 묘지
직업배우
활동 기간1919년–1971년
배우자아다 네예들라 (결혼: 19??; 이혼: 1928)
마고 (결혼: 1937; 이혼: 1940)
메리언 어바인 (결혼: 1941)

2. 초기 생애

프란티셰크(프란츠) 레더러는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는 트르제비치 출신의 로사(루제나) 오른슈타인이었고, 아버지 요제프 레더러는 가죽 상인이었다.[1] 프란티셰크는 프라하의 가난한 지역에서 성장했으며, 9살 때 부모님이 별거했다.[1] 그의 형 파벨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했고, 어머니와 남동생 루돌프는 나중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1] 프란츠는 잡화점에서 일했으며, 첫 연극 경험은 주요 배우들이 공연하는 동안 연극 배경에서 선반을 청소하는 역할이었는데, 스타들로부터 시선을 빼앗아 그 역할을 잃었다.[1]

3. 배우 경력

프란시스 레더러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하여 프라하의 음악 아카데미와 연극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았다.[2]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한 후, "타오르는 심장"이라는 연극에서 단역으로 뉴 독일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무대에 데뷔했다.[3] 그는 모라비아와 중앙 유럽을 순회하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독일의 극장에서 마티네 아이돌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의 공연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막스 라인하르트가 연출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맡은 것이었다.[3]

레더러는 루이스 브룩스가 주연을 맡은 G.W. 파브스트의 "판도라의 상자"와 "아틀란틱" (모두 1929년)에서 함께 작업했다.[2] 그는 같은 해에 "니나 페트로브나의 놀라운 거짓말"에도 출연했다. 당시 "프란츠"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레더러는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전환했다.

1931년, 레더러는 런던에서 볼포네 무대 공연을 했으며, 이듬해에는 도디 스미스의 ''가을 크로커스''에 출연했고, 이후 "프랜시스"라는 이름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여[4] 1932년과 1933년에 210회 공연을 했다.[5] 그는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이 연극을 공연했다.[3] 나치 운동의 부상과 반유대주의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정치 상황이 악화되자, 유대인이었던 레더러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다.[3] 그는 193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6]

그는 가끔 주연을 맡기도 했는데, 특히 미첼 레이즌의 1939년 영화 ''미드나잇''에서 클로데트 콜베르존 배리모어와 함께 바람둥이 역을 맡았다.[3]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레더러는 악당 역할을 포함하도록 배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3] 에드워드 G. 로빈슨은 1939년 영화 ''나치 스파이의 고백''에서 레더러의 독일계 미국인 번드 연기를 칭찬했고,[2] 조앤 베넷과 함께 출연한 ''내가 결혼한 남자''(1940)에서 파시스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찬사를 받았다.[3] 그는 또한 1958년 영화 ''드라큘라의 귀환''에서 드라큘라 백작 역할을 연기했다.

프란시스 레더러, 조앤 캠든과 에밀-에드윈 라이너트, 1952년 빈에서 ''도난당한 신분'' 제작 중


그의 경력 내내, 엘리아 카잔에게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배운 레더러는 연극 연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뉴욕시와 다른 곳에서 종종 무대 공연을 했다. 그는 ''황금 소년''(1937), ''일곱 번째 하늘''(1939), 로렌스 올리비에를 대신하여 출연한 ''코미디는 없다''(1939),[3] ''그것이 문제다''(1942), ''인형의 집''(1944), ''무기와 남자''(1950), ''잠자는 왕자''(1956), 그리고 ''안네의 일기''(1958)의 무대 프로덕션에 출연했다.[3][4]

1941년에 그는 연극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영화 제작을 잠시 중단했다. 그는 1944년에 ''바람 속의 목소리''와 ''샌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출연하며 스크린으로 돌아왔고, 장 르누아르의 ''하녀의 일기''(1946)와 ''백만 달러 주말''(1948)과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서렌더''(1950)를 제작한 후 1950년에 다시 할리우드를 떠났고, 1956년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와 함께 ''리스본''과 경쾌한 코미디 ''대사의 딸''로 돌아왔다. 그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은 1959년의 ''공포는 인간이다''였다.

1950년대에 그는 카노가 공원의 명예 시장을 역임했다.

레더러는 그 후 10년 동안 ''샐리'', ''언터처블'', ''벤 케이시'', ''블루 라이트'', ''미션 임파서블'' 및 ''그 여자''와 같은 쇼에 출연하며 텔레비전에 계속 출연했다. 그의 마지막 텔레비전 출연은 로드 서링의 ''나이트 갤러리'' 1971년 에피소드 "악마는 조롱받지 않는다"였다. 그는 거기에서 ''드라큘라의 귀환''에서 맡았던 드라큘라 역할을 다시 연기했다.

레더러는 다음과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 ''두 세계의 남자''(1934)
  • ''행복의 추구''(1934)
  • ''맨해튼의 로맨스''(1934)
  • ''게이 디셉션''(1935)
  • ''어느 비오는 오후''(1936)
  • ''나의 미국인 아내''(1936)
  • ''모두 당신의 것''(1937)
  • ''파리의 외로운 늑대''(1938)
  • ''미드나잇''(1939)
  • ''나치 스파이의 고백''(1939)
  • ''내가 결혼한 남자''(1940)
  • ''푸딩 헤드''(1941)
  • ''샌 루이스 레이의 다리''(1944)
  • ''바람의 목소리''(1944)
  • ''성모의 비밀''(1946)
  • ''어떤 하녀의 일기''(1946)
  • ''백만 달러 주말''(1948)
  • ''미국 육군 대위 캐리''(1949)
  • ''명망있는 여자''(1950)
  • ''항복''(1950)
  • ''대사의 딸''(1956)
  • ''리스본''(1956)
  • ''드라큘라의 귀환''(1958)
  • ''마라카이보''(1958)
  • ''테러는 남자다''(1959)
  • ''루이스 브룩스: 룰루를 찾아서''(1998)
  • 판도라의 상자
  • 니나 페트로브나
  • 캡틴 캐리 USA (1950년) - 바론 로코 드 그라피 역
  • 나치 스파이의 고백 (1939년) - 커트 슈나이더 역
  • 명랑한 사기 (1935년)
  • 행복의 추구 (1934년)
  • 허 마제스티, 러브 (1931년)
  • 판도라의 상자 (1929년) - 알바 쇤 역
  • 벤 케이시 (1961년)
  • 테러 이즈 어 맨 (1959년)
  • 리턴 오브 드라큐라 (1958년)
  • 대사의 딸 (1956년)

3. 1. 유럽 (1920년대 ~ 1931년)

프란시스 레더러는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하여 프라하의 음악 아카데미와 연극 아카데미에서 훈련을 받았다.[2]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에서 복무한 후, "타오르는 심장"이라는 연극에서 단역으로 뉴 독일 극장에서 견습생으로 무대에 데뷔했다.[3] 그는 모라비아와 중앙 유럽을 순회하며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오스트리아, 독일의 극장에서 마티네 아이돌로서 이름을 알렸다. 그의 공연 중 주목할 만한 것은 막스 라인하르트가 연출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맡은 것이었다.[3]

레더러는 루이스 브룩스가 주연을 맡은 G.W. 파브스트의 "판도라의 상자"와 "아틀란틱" (모두 1929년)에서 함께 작업했다.[2] 그는 같은 해에 "니나 페트로브나의 놀라운 거짓말"에도 출연했다. 당시 "프란츠"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레더러는 무성 영화에서 유성 영화로 전환했다.

3. 2. 미국 (1931년 ~ 1971년)

1931년, 레더러는 런던에서 볼포네 무대 공연을 했으며, 이듬해에는 도디 스미스의 ''가을 크로커스''에 출연했고, 이후 "프랜시스"라는 이름으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여[4] 1932년과 1933년에 210회 공연을 했다.[5] 그는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도 이 연극을 공연했다.[3] 나치 운동의 부상과 반유대주의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정치 상황이 악화되자, 유대인이었던 레더러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미국에 남기로 결정했다.[3] 그는 1939년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6]

그는 가끔 주연을 맡기도 했는데, 특히 미첼 레이즌의 1939년 영화 ''미드나잇''에서 클로데트 콜베르존 배리모어와 함께 바람둥이 역을 맡았다.[3]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 레더러는 악당 역할을 포함하도록 배역을 확장하기 시작했다.[3] 에드워드 G. 로빈슨은 1939년 영화 ''나치 스파이의 고백''에서 레더러의 독일계 미국인 번드 연기를 칭찬했고,[2] 조앤 베넷과 함께 출연한 ''내가 결혼한 남자''(1940)에서 파시스트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하여 찬사를 받았다.[3] 그는 또한 1958년 영화 ''드라큘라의 귀환''에서 드라큘라 백작 역할을 연기했다.

그의 경력 내내, 엘리아 카잔에게 액터스 스튜디오에서 배운 레더러는 연극 연기를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뉴욕시와 다른 곳에서 종종 무대 공연을 했다. 그는 ''황금 소년''(1937), ''일곱 번째 하늘''(1939), 로렌스 올리비에를 대신하여 출연한 ''코미디는 없다''(1939),[3] ''그것이 문제다''(1942), ''인형의 집''(1944), ''무기와 남자''(1950), ''잠자는 왕자''(1956), 그리고 ''안네의 일기''(1958)의 무대 프로덕션에 출연했다.[3][4]

1941년에 그는 연극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영화 제작을 잠시 중단했다. 그는 1944년에 ''바람 속의 목소리''와 ''샌 루이스 레이의 다리''에 출연하며 스크린으로 돌아왔고, 장 르누아르의 ''하녀의 일기''(1946)와 ''백만 달러 주말''(1948)과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서렌더''(1950)를 제작한 후 1950년에 다시 할리우드를 떠났고, 1956년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와 함께 ''리스본''과 경쾌한 코미디 ''대사의 딸''로 돌아왔다. 그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은 1959년의 ''공포는 인간이다''였다.

1950년대에 그는 카노가 공원의 명예 시장을 역임했다.

레더러는 그 후 10년 동안 ''샐리'', ''언터처블'', ''벤 케이시'', ''블루 라이트'', ''미션 임파서블'' 및 ''그 여자''와 같은 쇼에 출연하며 텔레비전에 계속 출연했다. 그의 마지막 텔레비전 출연은 로드 서링의 ''나이트 갤러리'' 1971년 에피소드 "악마는 조롱받지 않는다"였다. 그는 거기에서 ''드라큘라의 귀환''에서 맡았던 드라큘라 역할을 다시 연기했다.

레더러는 다음과 같은 영화에 출연했다.

  • ''두 세계의 남자''(1934)
  • ''행복의 추구''(1934)
  • ''맨해튼의 로맨스''(1934)
  • ''게이 디셉션''(1935)
  • ''어느 비오는 오후''(1936)
  • ''나의 미국인 아내''(1936)
  • ''모두 당신의 것''(1937)
  • ''파리의 외로운 늑대''(1938)
  • ''미드나잇''(1939)
  • ''나치 스파이의 고백''(1939)
  • ''내가 결혼한 남자''(1940)
  • ''푸딩 헤드''(1941)
  • ''샌 루이스 레이의 다리''(1944)
  • ''바람의 목소리''(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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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테러는 남자다''(1959)
  • ''루이스 브룩스: 룰루를 찾아서''(1998)
  • 판도라의 상자
  • 니나 페트로브나

4. 기타 활동

1934년, 레더러는 장인 건축가 존 R. 리트케의 도움을 받아 시미힐스와 오웬스마우스의 언덕에 대규모 목장을 건설했다. 그는 이곳에 자신의 랜드마크 저택과 마구간을 설계하고 건설했다.[10] 이 지역은 카노가 파크로 개명되었다가 이후 웨스트힐스로 변경되었다.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서부 샌페르난도 밸리에 위치하며, 셔먼 웨이의 서쪽 끝에 있다. 이 집은 지중해 부흥 건축 양식과 미션 리바이벌 양식을 혼합한 형태이다.

저택과 마구간은 모두 보호받는 로스앤젤레스 역사-문화 기념물이다.[10] 1994년 노스리지 지진으로 집이 손상된 후, 부동산은 완전히 개조되었다. 이 부동산은 1845년 멕시코 토지 보조금인 대규모 란초 엘 에스코피온 옆에 위치해 있으며, 이곳은 레더러의 남부 전원 경관이었고 1959년까지 미개발된 개방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집과 부지는 여전히 가족 소유이다.[11]

5. 사생활

레더러는 부동산 투자로 매우 부유해졌으며, 특히 캐노가 파크(1987년에 정의된 웨스트힐스 포함) 지역에 투자했다.[3] 그는 지역 및 로스앤젤레스 시의 행사, 자선 활동 및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로스앤젤레스 시의 레크리에이션 및 공원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도시 미화 노력에 대한 상을 받았다.[3] 그는 한동안 캐노가 파크의 명예 시장을 지냈다.[3] 그는 평화 운동에 참여했고, 연기 지도를 했으며, 로스앤젤레스의 미국 국립 공연 예술 아카데미와 워싱턴 D.C.의 국제 공연 예술 아카데미의 창립 멤버 중 한 명이었다.[3] 2000년, 오스트리아 정부는 그에게 과학 예술 공로 십자 훈장 1등급을 수여했다.[3]

레더러는 세 번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오페라 가수 아다 네제들리와의 결혼이었는데, 결혼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1928년에 이혼했다.[7] 1937년에는 배우 마고와 결혼했지만 3년 만에 이혼했다. 레더러의 마지막 결혼은 캐나다 출신으로 평생 캘리포니아에서 살았던 매리언 엘리너 어바인과 했다.[3][8] 1941년에 결혼한 그와 매리언은 유니세프 홍보를 포함하여 다양한 지역 사회 프로젝트 및 국제 인도주의 봉사를 지원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8] 그들은 2000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거의 60년 동안 함께했다.[9]

참조

[1] 학술지 Francis Lederer: Man of Two Worlds https://archive.org/[...] 1934-01
[2] 웹사이트 Biography (Allmovie) http://www.allmovie.[...]
[3] 웹사이트 Biography http://www.tcm.com/t[...] TCM
[4] 웹사이트 49275 IBDB
[5] 웹사이트 Autumn Crocus https://www.ibdb.com[...] Internet Broadway Database
[6] 문서 Frantisek Lederer, Petition for Naturalization, U.S. District Court of Los Angeles, Jan. 21, 1939. Ancestry.com. Selected U.S. Naturalization Records: Original Documents, 1790–1974 (World Archives Project) The Generations Network, Inc. 2009
[7] 서적 Silent Stars Speak: Interviews with Twelve Cinema Pioneers McFarland & Company
[8] 뉴스 Marion Lederer Obituary http://obituaries.de[...] 2011-04-21
[9] 뉴스 Francis Lederer: [1 Edition] 2000-06-13
[10] 웹사이트 SFVHS Valley History http://www.sfvhs.com[...] 2010-03-11
[11] 블로그 Big Orange-Lederer Environs http://bigorange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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