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5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프레데리크 5세는 1723년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태어나, 1746년부터 1766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재위했다. 그는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와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통치를 펼쳤으나, 쾌락주의에 빠져 국정은 아담 고틀로브 몰트케 등 유능한 대신들에게 맡겨졌다. 그의 치세 동안 예술과 과학이 번성하고,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매입했으며, 왕립 덴마크 극장과 왕립 미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다. 그는 영국 공주 루이즈와 결혼하여 크리스티안 7세를 포함한 자녀를 두었으며, 두 번째 결혼에서는 프레데리크 왕자를 얻었다. 만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42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현재 그의 기마상은 코펜하겐의 아말리엔보르 궁전 광장에 위치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766년 사망 -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 폰 다운 백작은 18세기 오스트리아의 군인으로, 여러 전쟁에 참전하여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고 육군 원수로 승진했으며, 7년 전쟁에서 콜린 전투 승리를 이끌었다. - 1766년 사망 - 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
요한 크리스토프 고트셰트는 18세기 독일 문학 개혁을 주도한 작가, 문학 이론가, 극작가로, 프랑스 고전주의를 옹호하고 독일어 표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저서 『비판적 시학의 시도』를 통해 독일 문학에 영향을 미쳤다. - 1723년 출생 - 조슈아 레이놀즈
18세기 잉글랜드의 초상화가이자 미술 이론가인 조슈아 레이놀즈는 왕립예술아카데미 초대 회장을 역임하고 기사 작위를 받았으며, '고상한 양식'을 추구하며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고, 당대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영국 화가의 직업적 지위 확립에 기여했다. - 1723년 출생 - 윌리엄 블랙스톤
윌리엄 블랙스톤은 1723년에 태어나 1780년에 사망한 영국의 법학자이자 법관이며, 《잉글랜드 법 해설》을 저술하여 영국과 미국의 법률 교육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올덴부르크가 -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는 프레데리크 왕자와 조피 프리데리케 사이에서 태어나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과 결혼하여 1남 5녀를 두었고, 예술과 시에 관심을 보이며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하다가 사위에게 유리하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후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사망했다. - 올덴부르크가 - 크리스티안 4세
크리스티안 4세는 1588년부터 1648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치한 국왕으로, 국방 및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해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30년 전쟁과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패배하여 발트 해에서의 세력을 상실했으며, 르네상스 군주로서 예술과 문화를 장려하다가 1648년 사망했다.
프레데리크 5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칭호 | 덴마크 국왕 및 노르웨이 국왕 |
통치 기간 | 1746년 8월 6일 – 1766년 1월 14일 |
대관식 | 프레데릭스보르 성당, 1747년 9월 4일 |
이전 국왕 | 크리스티안 6세 |
다음 국왕 | 크리스티안 7세 |
출생일 | 1723년 3월 31일 |
출생지 | 덴마크, 코펜하겐, 코펜하겐 성 |
사망일 | 1766년 1월 14일 |
사망지 | 덴마크, 코펜하겐,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 |
매장지 | 로스킬레 대성당 |
종교 | 루터교 |
![]() | |
통치 | |
수석 장관 | 요한 루드비 홀스테인 요한 하르트비히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백작 |
가족 관계 | |
왕가 | 올덴부르크 왕가 |
아버지 | 크리스티안 6세 |
어머니 | 조피 막달레네 폰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
배우자 | 루이세 오브 그레이트브리튼 (1743년 결혼, 1751년 사망) 율리아나 마리아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1752년 결혼) |
자녀 | 크리스티안, 덴마크 왕세자 소피아 막달레나, 스웨덴 왕비 빌헬미네 카롤리네, 헤센 선제후비 크리스티안 7세 루이세, 헤센-카셀 공자 카를 비 프레데리크, 덴마크 왕세자 |
2. 생애
1723년 3월 31일 코펜하겐 성에서 크리스티안 6세 국왕과 조피 마그달레네 왕비의 아들로 태어났다.[11] 1730년 할아버지 프레데리크 4세가 사망하면서 왕세자가 되었고, 1746년 8월 6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덴마크-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경건주의 성향이 강했던 아버지와 달리, 프레데리크 5세는 비교적 자유로운 통치를 지향하여 궁정 분위기를 개방적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알코올 의존증과 쾌락주의적인 성향으로 인해 실제 국정 운영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통치의 대부분은 아담 고틀로브 몰트케, 요한 하르트비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하인리히 카를 폰 시멜만과 같은 유능한 각료들이 주도했다. 이들 각료들은 7년 전쟁(1756-1763) 기간 동안 덴마크-노르웨이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중립 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프레데리크 5세의 치세 동안 예술과 과학이 장려되어 코펜하겐 왕립 극장과 덴마크 왕립 예술 아카데미가 설립되었으며, 1754년에는 덴마크 서인도 회사로부터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매입하여 왕령 식민지로 삼았다.
첫 번째 왕비인 루이세가 1751년 사망한 후, 1752년 율리아네 마리와 재혼했다. 1760년 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건강이 점차 악화되었고, 오랜 음주와 방탕한 생활 끝에 1766년 1월 14일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 그의 시신은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어 첫 번째 왕비 루이세 곁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1723-1746)
프레데리크 5세의 초기 생애(1723-1746)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의 시기를 다룬다. 그는 1723년 3월 31일 코펜하겐 성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크리스티안 6세와 조피 마그달레네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1] 1730년 할아버지 프레데리크 4세가 사망하자 7세의 나이로 왕세자가 되었다.경건주의에 깊이 헌신했던 엄격한 부모와 달리, 프레데리크는 어린 시절부터 쾌활하고 사교적인 성격을 보였으며, 딱딱한 궁정 생활보다는 백성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분방함은 젊은 시절 쾌락주의와 방탕한 생활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의 교육 과정, 성격 형성, 그리고 영국의 루이즈와의 결혼 등 왕세자 시절의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2. 1. 1. 출생과 가족

프레데리크는 1723년 3월 31일 코펜하겐에 위치한 코펜하겐 성에서 당시 왕세자였던 크리스티안 6세와 그의 아내 조피 마그달레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1] 그는 프레데리크 4세 국왕의 손자였으며, 코펜하겐 성에서 태어난 마지막 덴마크 왕자였다. 이 성은 1731년 철거되고 크리스티안보르 성이 새로 지어졌다. 프레데리크는 태어난 다음 날 왕실 고해 신부 크리스텐 렘비그에게 세례를 받았고,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 프레데리크로 명명되었다.[2]

왕세자의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프레데리크는 태어날 때부터 왕위 계승자로 예정되었다. 그의 유일하게 살아남은 여동생 루이세 공주는 1726년에 태어났다. 1730년 10월 12일, 할아버지 프레데리크 4세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크리스티안 6세로 즉위하면서, 7세의 프레데리크는 왕세자가 되었다.
부모인 크리스티안 6세와 소피 마그달레네 여왕은 경건주의에 깊이 헌신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는 엄격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자랐다. 7세 때 독일 귀족 게오르크 빌헬름 폰 푈렌탈이 그의 궁정 교사가 되었으나, 푈렌탈은 왕세자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1738년 해임되었다.[3] 1730년 비밀 자문관 이베르 로젠크란츠가 양육을 맡았지만 이 역시 실질적인 교육에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당시 코펜하겐 궁정에서는 독일어가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는 평생 덴마크어보다 독일어를 더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Der Dänische Prinz|데어 데니셰 프린츠de(독일어로 "덴마크 왕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는 동전 수집 외에는 문화나 지적 활동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프레데리크는 엄격하고 경건한 부모와는 달리, 부드럽고 친절하며 쾌활한 성격을 지녔다. 그는 대중 앞에 나서기를 꺼렸던 부모와 달리,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공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경건주의 교육에도 불구하고 그는 종교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사슴 사냥, 술, 여자를 즐기는 쾌락주의자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향은 점차 방탕으로 이어져, 음주와 난봉꾼들과의 교제로 얼룩진 생활 방식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에 실망하여 법적으로 무능력자 선언까지 고려했지만, 이는 절대 군주제의 근간인 국왕법( Lex Regia|렉스 레기아la; Kongeloven|콩엘로벤da )에 위배될 소지가 있고 왕실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릴 수 있다는 신중론에 따라 실행되지 않았다.

1730년, 프레데리크보다 11살 많은 귀족 아담 고틀롭 몰트케가 그의 시종으로 임명되었다. 몰트케는 왕세자의 방탕한 생활을 제지하지는 못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깊은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는 훗날 프레데리크가 왕위에 오른 뒤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몰트케는 1743년 궁정 교사로 승진했다.
1740년 견신례를 받은 프레데리크는 국무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1743년 스웨덴에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하자 프레데리크가 후보로 거론되었고, 농민들은 그를 지지하며 달레칼리아 반란( stora daldansen|스토라 달단센sv )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압력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아돌프 프레데리크가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최종 결정되었다.
왕세자의 방탕한 성향 때문에, 그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결혼 협상이 가속화되었다. 1743년, 왕가 간의 결혼을 통해 영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이유로 영국의 루이즈 공주, 즉 조지 2세와 캐롤라인의 막내딸과의 결혼이 제안되었다.[4] 덴마크 정부는 이 제안을 긍정적으로 보았고, 프레데리크의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 국왕은 처음에는 망설였으나, 이 결혼이 아들의 스웨덴 왕위 계승 주장에 대한 영국의 지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로 결국 설득되었다.[5] 왕세자 프레데리크는 공주의 초상화를 보고 그녀의 외모에 매력을 느꼈으며, 그녀의 상냥함을 전해 듣고 결혼에 동의했다.[4]

결혼 협상은 1743년에 시작되어 몇 달 안에 성공적으로 마무리되었고 9월 14일에 완료되었다.[6] 그들은 1743년 11월 10일 하노버에서 대리 결혼식을 올렸으며, 공주의 오빠인 컴벌랜드 공작이 신랑을 대신하여 참석했다.[4][6] 일주일 후, 루이즈와 프레데리크의 수행원들이 당시 덴마크 홀슈타인 공국에 속한 알토나에서 만났는데, 프레데리크는 그곳에서 처음으로 아내를 만났다.[4] 루이즈와 프레데리크는 함께 코펜하겐으로 이동했고, 1743년 12월 11일 덴마크 수도에 공식적으로 입성했을 때 많은 환영을 받았다. 같은 날, 신랑이 참석한 두 번째 결혼식이 새롭게 완공된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의 예배당에서 열렸다.

루이즈는 자연스럽고 솔직한 행동으로 왕실과 대중 모두에게 빠르게 인기를 얻었고, 이는 남편의 인기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부부는 잘 지냈으며 적어도 초기 몇 년간은 관계가 원만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부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으나, 장남 크리스티안 왕세자는 유아기에 사망했다. 그러나 루이즈는 남편의 문란한 행동을 완전히 제어하지는 못했으며, 프레데리크는 결혼 후에도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는 아내를 존중하고 친절하게 대했지만, 다른 여성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했으며, 1746년부터 1751년 사이에는 마담 한센이라는 애인을 두고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루이즈는 남편의 외도를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 후, 신혼 부부는 처음에는 코펜하겐의 콩겐스 니토르브 광장에 위치한 샬로텐보르 궁전에 거주했다. 1745년에는 프레데릭홀름스 운하 건너편에 있는 프린스 저택으로 이사했는데, 이 저택은 니콜라이 에이트베드가 로코코 양식으로 개조한 곳이었다. 그들의 집은 엄격하고 무거운 분위기의 크리스티안보르 궁전과는 달리 활기차고 즐거운 궁정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2. 1. 2. 교육
크리스티안 6세와 소피 마그달레네 여왕은 경건주의에 깊이 헌신했다. 이는 루터교 내에서 성경 교리에 대한 강조와 개인의 경건함, 활기찬 기독교 생활을 결합한 운동이었다. 그 결과 프레데리크는 엄격한 종교적 교육을 받았다. 7세 때 그는 독일 귀족 게오르크 빌헬름 폰 푈렌탈을 궁정 교사로 하는 자신의 왕실 가문을 갖게 되었다.[3] 푈렌탈은 모라비아 형제단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그의 집은 코펜하겐의 경건주의 서클의 중심지였다. 그는 왕과 깊은 종교적 경건함을 공유했고, 한동안 크리스티안 6세의 교회 문제 고문 역할을 했으나, 성격이 너무 부드럽고 나약하여 왕세자의 정신적 발달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고, 결국 1738년 궁정 교사 직에서 해고되었다.[3]
프레데리크의 교육은 다소 부족하게 이루어졌다. 1730년 왕은 왕세자 프레데리크의 양육을 비밀 자문관 이베르 로젠크란츠에게 맡겼지만, 이는 실제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로젠크란츠는 전통적인 루터교 정통주의의 지지자였으나, 크리스티안 6세는 점차 경건주의 지지자가 되면서 로젠크란츠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따라서 왕세자의 교육은 당시 궁정에 만연했던 독일 경건주의 정신으로 진행되었다. 당시 코펜하겐 궁정에서는 주로 독일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프레데리크는 그의 조상들처럼 덴마크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고 평생 독일어를 더 능숙하게 사용했다.[3] 그의 어머니는 때때로 그를 "Der Dänische Prinz"(독일어로 "덴마크 왕자")라고 부르며 이를 꼬집기도 했다. 그는 동전 수집에 약간의 관심을 보인 것을 제외하고는 문화적 또는 지적인 관심이 거의 없었다.
프레데리크 왕자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고 다소 우울한 부모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보였다.[3] 그는 본성이 부드럽고 친절했으며, 쾌활하고 누구에게나 다가가기 쉬웠으며, 백성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3] 그는 궁궐 밖으로 거의 나오지 않던 은둔적인 부모와 달리,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공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엄격한 경건주의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경건주의에 얽매이지 않았다.[3] 종교적 감정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프레데리크는 사슴 사냥, 술, 여인과 같은 삶의 즐거움을 추구하는 쾌락주의자로 성장했다.[3]
그러나 이러한 쾌락주의는 점차 방탕으로 변질되었고, 프레데리크는 음탕한 행동과 알코올 중독으로 특징지어지는 방탕한 생활 방식으로 악명을 얻었다. 그는 몇몇 난봉꾼들과 함께 도시의 선술집과 사창가를 전전했으며, 이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한때 그를 법적으로 무능력자로 선언하는 것까지 고려했다.[3] 하지만 왕의 신중한 조언자들은 이것이 1665년 덴마크-노르웨이의 절대 군주제 헌법인 ''Lex Regia|렉스 레기아la''(Kongeloven|콩겔로벤da)을 법적으로 위반하는 것이라며 반대했다.[3] 또한, 미래의 국왕이 통치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군주제의 권위를 전례 없이 훼손하는 행위였다.[3]
왕세자와 그의 왕국의 미래에 가장 중요한 인물은 프레데리크보다 11살 많은 19세 귀족 아담 고틀롭 몰트케였다. 그는 1730년에 프레데리크의 시종으로 임명되었다. 몰트케는 그의 아버지의 시종이기도 했으며, 왕과 여왕은 몰트케가 왕세자가 자신을 통제하도록 가르칠 것이라고 믿었다. 1743년 몰트케는 궁정 교사로 승진했다. 실제로 몰트케는 프레데리크의 성욕이나 음주를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대신 두 사람 사이에 평생 지속될 신뢰 관계를 형성했으며, 이는 프레데리크가 왕위에 오른 후 매우 중요해졌다.
1740년 왕세자는 견신례를 받았고, 이후 왕위 계승자로서 국무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1741년 스웨덴의 울리카 엘레오노라 여왕이 사망하고 1743년 스웨덴의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을 때, 적법한 상속자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왕세자 프레데리크는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로 선출될 가능성이 있었다. 농민들은 일방적으로 왕세자 프레데리크를 선출했고, 심지어 달레칼리아의 농민들은 그의 선출을 강요하기 위해 달레칼리아 반란 또는 ''stora daldansen|스토라 달단센sv''을 일으켰다. 그러나 1743년 아보 조약의 결과로, 1741–1743년 러시아-스웨덴 전쟁이 종식되었고, 러시아 제국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압력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아돌프 프레데리크가 왕세자 프레데리크 대신 왕위 계승자로 임명되었다.
노르웨이의 프리메이슨 역사가 카를 루드비히 퇴리센 부게는 왕세자 시절 프레데리크 5세가 코펜하겐의 프리메이슨 로지인 성 마틴에 가입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아마 1744년 6월이었을 것이며, 젊은 시절 프리메이슨 로지에 가입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대왕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두 사람 모두 프리메이슨을 격렬하게 반대하는 아버지를 두었지만, 프로이센 국왕과는 달리 프레데리크 5세는 로지 회원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적은 없었다.[7]
2. 1. 3. 방탕한 생활과 첫 결혼
프레데리크 왕자는 어린 시절부터 엄격하고 다소 우울했던 부모, 크리스티안 6세와 소피 마그달레네 여왕과는 매우 다른 성격을 보였다.[3] 그는 본래 부드럽고 친절했으며, 쾌활하고 누구에게나 다가가기 쉬운 성격으로, 백성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3] 궁궐 밖으로 거의 나가지 않았던 부모와 달리, 프레데리크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리며 공공장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을 즐겼다. 엄격한 경건주의 가정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 경건주의에 얽매이지 않았다.[3] 종교적인 감정을 전혀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프레데리크는 사슴 사냥, 술, 여자를 탐닉하는 쾌락주의자로 성장했다.[3]
그러나 이러한 쾌락주의는 점차 방탕으로 변질되었고, 프레데리크는 음탕한 행동과 알코올 중독으로 점철된 방탕한 생활 방식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몇몇 난봉꾼들과 어울려 도시의 선술집과 사창가를 전전했으며, 이 때문에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는 한때 그를 법적으로 무능력자로 선언하는 것까지 고려할 정도였다. 하지만 왕의 신중한 조언자들은 1665년 제정된 덴마크-노르웨이의 절대 군주제 헌법인 Lex Regia|렉스 레기아la(Kongeloven|콩겔로벤da)를 법적으로 위반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를 만류했다. 또한, 미래의 국왕이 통치에 부적합하다고 인정하는 것은 군주제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었다.
왕세자의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1730년 그의 시종으로 임명된 아담 고틀롭 몰트케였다. 몰트케는 프레데리크보다 11살 많은 19세의 귀족이었으며, 그의 아버지는 몰트케가 왕세자의 방탕한 생활을 바로잡아 줄 것이라 기대했다. 1743년 몰트케는 궁정 교사로 승진했지만, 실제로 그는 프레데리크의 성욕이나 음주를 통제하지 못했다. 대신 두 사람 사이에는 평생 지속될 깊은 신뢰 관계가 형성되었고, 이는 훗날 프레데리크가 왕위에 오른 후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740년 견신례를 받은 프레데리크는 왕위 계승자로서 국무원에 참여하게 되었다. 1743년 스웨덴에서 왕위 계승 위기가 발생했을 때, 프레데리크는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일방적으로 그를 지지하며 달레칼리아 반란( stora daldansen|스토라 달단센sv, 달레칼리아 대무도)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러시아 제국의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 여제의 압력으로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아돌프 프레데리크가 최종적으로 스웨덴 왕위 계승자로 결정되었다.
2. 2. 치세 (1746-1766)
1746년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의 뒤를 이어 덴마크-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11] 경건주의 성향의 아버지와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통치를 지향했으나, 알코올 의존증과 쾌락주의 성향으로 인해 실제 국정 운영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실질적인 통치는 아담 고틀로브 몰트케, 요한 하르트비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하인리히 카를 폰 시멜만 등 유능한 각료들이 주도했으며, 이들은 7년 전쟁 기간 동안 중립 정책을 유지하여 국가 안정을 도모했다. 프레데리크 5세의 치세 동안 예술과 과학이 장려되었고, 몇몇 문화 및 복지 시설이 설립되었다. 또한 1754년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왕령 식민지로 편입했다. 오랜 음주와 방탕한 생활로 건강이 악화되어 1766년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9]2. 2. 1. 즉위
1746년 8월 6일,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가 사망하자 프레데리크는 23세의 나이로 덴마크-노르웨이의 왕위를 계승했다.[11] 그는 덴마크-노르웨이의 다섯 번째 절대 군주가 되었다. 새로운 국왕과 왕비 루이세는 코펜하겐의 프린스 맨션에서 운하 건너편의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듬해 9월 4일, 셸란 섬 북쪽에 위치한 프레데릭스보르 궁전 예배당에서 전통적인 대관식을 거행했다.[8]

프레데리크 5세의 즉위는 덴마크 궁정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경건주의 성향이 강했던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의 엄격하고 폐쇄적인 궁정과는 달리, 프레데리크 5세 시대의 궁정은 훨씬 더 개방적이고 축제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이전에 국민과 궁정을 분리했던 크리스티안보르 궁전 주변의 무거운 쇠사슬이 제거되었고, 궁정은 다시 무도회와 사교 모임의 장소가 되었다. 프레데리크 5세는 국민들과 직접 만나기를 원했으며, 코펜하겐 시민들과 어울리고 농장을 방문하는 것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작가 루드비 홀베르를 포함한 평민들도 궁정 행사에 초대될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5세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그는 왕위에 오를 무렵 이미 알코올 중독이 심각한 상태였고, 이로 인해 국정을 직접 운영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실제 통치는 유능한 각료들에게 크게 의존했다. 즉위 직후 그는 자신의 총신이었던 A. G. 몰트케를 궁내대신으로 임명했다. 몰트케는 왕의 최측근으로서 국정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왕의 방탕한 생활이 왕실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관리하는 역할도 맡았다. 프레데리크 5세 본인은 주로 사냥이나 전쟁 예술과 같은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국왕은 형식적으로 국정 운영에 참여하고 의회 회의에도 참석했지만, 실질적인 국정 운영은 몰트케를 비롯해 J. H. E. 베른스토르프, H. C. 쉬멜만과 같은 유능한 대신들이 주도했다. 이들 각료들은 7년 전쟁 (1756–1763)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 스웨덴 등 주변 강대국과의 관계 속에서도 덴마크-노르웨이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중립 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이는 당시 덴마크-노르웨이가 비교적 평화롭고 안정적인 시기를 보낸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프레데리크 5세는 개인적으로 문화 예술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아버지 시대와 달리 예술 활동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예술과 과학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첫 번째 왕비 루이세의 영향으로 배우와 음악가들의 활동이 장려되었으며, 1748년에는 니콜라이 에이트베드가 설계한 새로운 건물에 왕립 덴마크 극장이 문을 열었다. 또한 1754년 3월 31일, 그의 31번째 생일에 코펜하겐에 왕립 덴마크 미술 아카데미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같은 시기에 공공 복지를 위한 시설들도 설립되었다. 왕립 프레데릭스 병원과 가난한 소년들을 위한 학교인 왕립 고아원(da)이 세워졌으며, 왕립 고아원은 1753년 10월 1일 크리스티안스하운에서 개교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753년 6월 29일에는 덴마크 최초의 복권인 로열 코펜하겐 복권(da)을 만들었으며, 이 역시 현재까지 존재한다. 1754년에는 덴마크 서인도 회사로부터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매입하여 왕령 식민지로 삼았다. 또한 활동적인 프리메이슨이었던 그는 1749년 6월 24일 노르웨이에 최초의 메이슨 롯지를 설립하기도 했다.[7]
2. 2. 2. 국정 운영
1746년 8월 6일,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가 사망하자 프레데리크 5세는 23세의 나이로 덴마크-노르웨이의 절대 군주로 즉위했다.[8] 경건주의의 영향 아래 엄격하고 보수적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프레데리크 5세는 비교적 자유로운 통치를 지향했으며, 그의 즉위는 덴마크 궁정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궁정은 이전보다 훨씬 더 축제적이고 편안한 분위기를 띠게 되었다. 프레데리크 5세는 국민들과의 만남을 즐겼으며, 코펜하겐 시민들과 어울리거나 농부들의 농장을 방문하는 모습도 보였다. 국민과의 소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이전 시대에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을 둘러싸고 있던 무거운 쇠사슬이 제거되었고, 궁정에서는 다시 무도회와 사교 모임이 활발하게 열렸다. 루드비 홀베르와 같은 평민 지식인들도 궁정 행사에 초대될 정도로 개방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그러나 프레데리크 5세의 개인적인 영향력은 제한적이었다. 특히 첫 번째 왕비인 루이세가 1751년 사망한 이후, 그는 술과 여자를 즐기는 쾌락주의에 빠졌으며 알코올 의존증으로 국정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이유로 실제 국정 운영의 대부분은 유능한 각료인 아담 고틀로브 몰트케, 요한 하르트비 에른스트 폰 베른스토르프, 하인리히 카를 폰 시멜만 등이 주도했다.
이들 각료들은 1756년부터 1763년까지 유럽 대륙을 휩쓴 7년 전쟁 기간 동안 덴마크-노르웨이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중립 정책을 성공적으로 유지했다. 당시 덴마크-노르웨이는 스웨덴, 러시아 제국과 비교적 가까운 관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각료들은 신중한 외교를 통해 중립을 지켜냈다.
프레데리크 5세는 개인적으로 예술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예술 활동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그의 재위 기간 중 코펜하겐 왕립 극장과 덴마크 왕립 예술 아카데미(Det Kongelige Danske Kunstakademi)가 설립되는 등 문화적인 발전도 이루어졌다. 또한 1754년에는 덴마크 서인도 회사로부터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매입하여 왕실 직할령으로 편입시켰다.
1760년 사고로 다리를 다친 후 프레데리크 5세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었다. 결국 1766년 1월 14일 코펜하겐의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에서 4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임종 직전 그는 "내게 큰 위안은 내 생애 동안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과 내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았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어 첫 번째 왕비 루이세 곁에 묻혔다.
2. 2. 3. 문화 예술 진흥
프레데리크 5세는 개인적으로 예술에 큰 관심은 없었으나, 예술 활동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그의 통치 아래 코펜하겐 왕립 극장과 덴마크 왕립 예술 아카데미(Det Kongelige Danske Kunstakademi)가 설립되어 덴마크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했다. 그의 부모인 크리스티안 6세와 조피 마그달레네 시대의 엄격하고 경건했던 궁정 분위기와 달리, 프레데리크 5세의 궁정은 훨씬 개방적이고 축제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이전에는 국민들과 거리를 두었던 것과 달리, 프레데리크 5세는 국민들과 어울리기를 즐겼으며,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을 둘러싼 쇠사슬이 제거되고 무도회와 사교 모임이 다시 활발해졌다. 작가 루드비 홀베르와 같은 평민 예술가들도 궁정 행사에 초대받아 편안함을 느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사후에는 덴마크의 유명 조각가 요하네스 비데벨트가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된 그의 석관과 기념물을 디자인했다.2. 2. 4.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 매입
1754년에 덴마크령 서인도 제도를 덴마크 서인도 회사로부터 매입했다.2. 2. 5. 두 번째 결혼
첫 번째 왕비 루이즈가 1751년 12월 19일에 사망한 후, 프레데리크 5세는 1752년에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딸인 율리아네 마리와 재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한 명을 두었다.- 프레데리크 (1753년 10월 11일 - 1805년 12월 7일)
2. 3. 죽음과 유산
수년에 걸친 과도한 음주와 방탕한 생활 방식은 프레데리크 5세의 건강을 점차 악화시켰다. 특히 그의 체질이 원래 튼튼하지 않았기에 그 영향은 더욱 심각했다. 국왕은 점점 우울감에 빠졌고, 자신과 국사를 돌보는 데 소홀해졌다. 말년에는 음주가 더욱 심해져 거의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사고를 당해 두 번이나 다리가 부러졌고, 이로 인해 오랫동안 요양하며 크게 쇠약해졌다. 도로테아 비엘은 당시 국왕이 "몰트케의 도움 없이는 팔에 힘이 없어 모자를 다시 머리에 쓸 수 없는" 상태로 보였다고 증언했다. 결국 그는 지속된 음주와 방탕으로 건강을 완전히 잃었다.
1766년 1월 14일, 프레데리크 5세는 코펜하겐에 위치한 크리스티안스보르 성에서 20년의 통치를 마치고 42세의 나이에 부종으로 사망했다. 그의 통치는 아버지 크리스티안 6세의 경건주의적이고 엄격했던 통치와 비교되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를 가져왔다고 평가받았기에, 그의 죽음을 많은 이들이 슬퍼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전해진다. "내 마지막 순간에 내가 누구에게도 고의로 불쾌감을 준 적이 없고, 내 손에 피 한 방울도 없다는 것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됩니다."[9]

프레데리크 5세의 시신은 크리스티안보르 궁전의 크리스티안보르 궁전 예배당에서 성대한 국장으로 치러진 후, 셸란 섬에 있는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이곳은 15세기부터 덴마크 군주들의 전통적인 매장지였으며, 그는 첫 번째 왕비 루이세 옆에 묻혔다. 그의 기념비는 덴마크의 조각가 요하네스 비데벨트가 디자인하여 1769년에 완성되었다. 이 기념비는 발 받침대 위에 놓인 커다란 석관과 여러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뒤쪽에는 항아리로 장식된 기둥과 국왕의 초상화가 새겨진 메달이 있다. 석관 양옆에는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상징하는 왕관을 쓴, 슬픔에 잠긴 두 여성상이 약 약 2.74m 높이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 기념 예배당은 비데벨트와 덴마크 건축가 카스파르 프레데리크 하르스도르프가 협력하여 만들었다.
프레데리크 5세의 이름은 여러 장소에 남아 그의 유산이 되었다.
지역 | 장소명 | 비고 |
---|---|---|
덴마크 셸란 섬 | 프레데릭스베르크 | |
미국령 버진아일랜드 세인트크로이 섬 | 프레데릭스테드 | |
덴마크 코펜하겐 | 프레데릭스타덴 지구 | |
인도 서벵골 주 | 세람포르 | 1755년부터 1845년까지 덴마크령 인도의 일부였으며, 당시에는 "프레데릭스나고르"로 불림. |
그린란드 | 파미우트 | 과거 "프레데릭스하브"로 불림. |
노르웨이 | 프레드리크스베른 | 전 해군 기지 |
프레데리크 5세는 두 번 결혼하여 총 6명의 정식 자녀를 두었으며, 그 외에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생아 5명이 있다.
3. 자녀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딸. 1743년 결혼하여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크리스티안 | 1745년 7월 7일 | 1747년 6월 3일 | 왕세자, 요절 |
소피아 마그달레나 | 1746년 7월 3일 | 1813년 8월 21일 | 1766년 구스타브 3세와 결혼, 스웨덴 왕비. 후손 있음. |
빌헬미나 카롤리네 | 1747년 7월 10일 | 1820년 1월 19일 | 1763년 헤센 선제후 빌헬름 1세와 결혼. 후손 있음. |
크리스티안 7세 | 1749년 1월 29일 | 1808년 3월 13일 |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후임 국왕. 1766년 캐롤라인 마틸다와 결혼. 후손 있음. |
루이세[12] | 1750년 1월 30일 | 1831년 1월 12일 | 1766년 카를 폰 헤센카셀과 결혼. 프레데리크 6세의 왕비 마리의 어머니, 크리스티안 9세의 할머니. 후손 있음.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페르디난트 알브레히트 2세의 딸. 1752년 재혼하여 아들 1명을 두었다.
- 사생아
프레데리크 5세는 엘세 한센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래 5명의 자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 프레데리케 마르가레테 드 한센, 데스티논 백작부인 (1747–1802)
- 프레데리케 카트린 드 한센, 뤼초 백작부인 (1748–1822)
- 안나 마리 드 한센, 페만 부인, 이후 반 뫼렌가흐트 부인 (1749–1812)
- 소피 샤를로테 드 한센, 도르니 백작부인 (1750–1779)
- 울리크 프레데리크 드 한센 (1751–1752)
참조
[1]
웹사이트
Kongelige i kirkebøgerne
http://www.historie-[...]
Dansk Historisk Fællesråd
2013-02-18
[2]
서적
Kongelig Dåb. Fjorten generationer ved Rosenborg-døbefonten
Forlaget Hovedland
[3]
서적
Dansk Biografisk Leksikon
Gyldendal
[4]
간행물
Louise
https://runeberg.org[...]
Gyldendals forlag
[5]
서적
Queenship in Europe 1660-1815: The Role of the Consort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서적
Dansk Biografisk Leksikon
J.H. Schultz Forlag
[7]
문서
K.L. Bugge, Det danske frimureries historie, bind 1, 1910, s. 191-194.
[8]
서적
Enevældens kroninger. Syv salvinger - ceremoniellet, teksterne og musikken
Forlaget Falcon
[9]
문서
Frederik den Femtes Hof, Charlotte Dorothea Biehls Breve og Selvbiografi.
[10]
뉴스
The Sinking of a Bust Surfaces a Debate Over Denmark’s Past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2021-02-15
[11]
서적
권력과 광기
말글빛냄
[12]
문서
루이제의 외손자가 [[크리스티안 9세]]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