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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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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시바 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처음 사용한 성씨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히데요시가 하바시로 개명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된 후, 하시바 성은 점차 사용 빈도가 줄어들었으며,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자결하면서 종가가 멸망했다. 이후, 분고국 히지번 기노시타 가문의 분가였던 기노시타 토시키요가 1872년 하시바로 복성했으나, 1884년 화족령 시행 당시 남작 수여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족으로 남았다. 하시바 씨는 히데요시의 친족, 양자, 유자 등에게 하사되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마에다 도시이에 등 유력 다이묘들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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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바씨
기본 정보
가문 이름하시바 씨
가몬고시치노키리
가몬 명칭고시치노키리
본성도요토미노 아손
가조하시바 히데요시
종별무가
사족
출신지오와리국아이치군 나카무라
근거지오우미국나가하마성
야마시로국후시미성
셋츠국오사카성
주요 인물하시바 히데요시
하시바 히데나가
하시바 히데쓰구
하시바 히데토시
하시바 도시쓰구
일본어 표기はしばし/はじばうじ

2. 하시바 가문의 성립과 변천

羽柴일본어라는 성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를 섬기던 시절 사용했던 성씨 중 하나이다. 히데요시는 처음 기노시타(木下)라는 성을 사용하다가, 1573년 경부터 하시바(羽柴)로 바꾸었다.

히데요시는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천하인이 된 후에는 하시바 성씨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1585년 다테 마사무네의 중신 엔도 모토노부에게 보낸 서장에 羽柴中禅|하시바 주젠일본어이라고 서명한 것이 마지막 공식 기록이다.[2]

이후 히데요시는 본성으로 평성(平姓)을 사용했고, 간파쿠 취임 시에는 후지와라 성(藤原姓)으로 개명했으며, 1586년에는 도요토미(豊臣)라는 새로운 성을 창성하였다. 그러나 이는 '씨(氏)'와 '성(姓)'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하시바 성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5]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자결하면서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할 때, 하시바 종가도 함께 멸망했다. 히데요시의 정실 고다이인이 친족을 양자로 들여 하시바 가문을 이었지만, 1624년 고다이인이 사망하자 에도 막부는 하시바 가문의 성씨 사용을 금지하고 기노시타 씨로 복귀시켰다.

1872년, 분고국 히지번의 기노시타 가문 분가 출신인 기노시타 도시치카가 하시바 성으로 복성하였다. 1884년 화족령 시행 당시 남작 후보에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사족에 머물렀다. 그의 양자인 하시바 도시로가 작위 수여를 청원했으나 실패하였다.

히데요시는 친족 외에도 여러 인물들에게 하시바(羽柴) 성을 하사했다. 다음은 하시바 성을 하사받은 주요 인물들이다.

하사받은 시기인물비고
1575년하시바 히데나가[10]
1582년호리 히데마사
1584년유키 히데야스
1584년하시바 히데쓰구
1584년가모 우지사토
1585년다키가와 가쓰토시
1585년니와 나가시게
1585년호소카와 다다오키
1585년마에다 도시이에
1585년마에다 도시나가
1586년이나바 사다미치
1587년우키타 히데이에
1587년호소카와 다다타카
1587년모리 히데요리
1587년사사 나리마사
1587년하치야 요리타카
1588년오토모 요시토시
1588년우에스기 가게카쓰
1588년깃카와 히로이에
1588년고바야카와 다카카게
1588년모리 데루모토
1588년시마즈 요시히로
1588년류조지 마사이에
1589년조소카베 모토치카
1590년시마즈 요시히사
1591년기노시타 가쓰토시
1591년호리 지카요시
1591년사타케 요시노부
1591년다테 마사무네
1592년오다 히데노부
1592년소 요시토시
1592년모가미 요시아키
1592년고바야카와 히데카네
1593년사토미 요시야스
1593년도쿠가와 이에야스
1595년고바야카와 히데아키
1595년호리 히데하루
1595년오다 히데오
1595년교고쿠 다카쓰구
1595년교고쿠 다카토모
1595년마에다 도시마사
1595년오다 노부타카
1595년도쿠가와 히데타다
1595년모리 히데모토
1597년류조지 다카후사
1598년후쿠시마 마사노리
1599년아오키 가즈노리
1599년도다 가쓰나리
1599년하시바 히데나오
1599년시마즈 이에히사
1615년다키가와 마사토시



히데요시는 하시바 성 외에도 도요토미(豊臣) 성을 여러 다이묘들에게 하사했다.

2. 1. 기노시타 성에서 하시바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기노시타'라는 성씨를 사용했다. 기노시타 씨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으며, 히데요시의 출신 성분은 확실하지 않아 성씨가 없는 하층민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구와타 다다치카는 히데요시의 아내 네네의 친정이 반슈 타쓰노의 '기노시타 씨' 출신이므로, 성씨가 없던 히데요시가 결혼을 계기로 무사 신분처럼 '기노시타'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히데요시의 아버지 기노시타 야에몬이 아자이 씨의 가신 아자이 다다마사의 동생인 쇼세이 호시가 환속하여 오미 다카시마 씨의 기노시타 엣추노카미 다카야스의 딸과 결혼하여 기노시타 야스케 구니요시라 칭한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1]

히데요시는 1565년 11월 2일, 노부나가가 미노국의 토호 쓰보우치 도시사다에게 준 지행 안도장에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라고 서명한 것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이후 전공을 쌓아 노부나가의 유력 부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히데요시가 기노시타에서 하시바(羽柴)로 개명한 것은 1573년 7월 20일, 오야마자키 소츄에 밧줄 공출을 요구한 서장에 '하시바 도키치로 히데요시'라고 서명한 것이 최초이다. 『노부나가 공기』[3]에서는 1572년 7월 24일 조에 오미 잇코잇키 토벌 지휘관으로 '기노시타 도키치로'를 기록하고, 같은 해 8월 조에는 도라가오야마에 건설된 요새의 '정번(죠반)'으로 '하시바 도키치로'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성씨 변경에 대해 다케나카 시게토의 『도요카가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그 무렵 노부나가의 마음에 든 시바타 수리료 가쓰이에, 니와 엣젠노카미 나가히데라고 말했으므로, 그 사람의 성씨를, 한 글자씩 하사하려 하여, 니와의 '하'에, 시바타의 '시바'를 더하여, 하바시 츄젠노카미로 개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1차 사료와 모순된다. 히데요시는 1569년 4월 16일자 서장에서 '기노시타 도키치로'라고 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시바(羽柴)의 유래에 대해 도쿠토미 소호는 기노시타에서 하시바로 바꾼 시기를 '겐키 말부터 덴쇼 초'로 추정하고, 주젠노카미(中জেন노카미)를 칭한 것도 '덴쇼 3, 4년'으로 보았다. 하지만 하시바 성씨를 사용하게 된 것은 1573년 이후로 여겨진다. 와타나베 세이유는 니와 나가히데의 '하(羽)'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시바(柴)'를 조합한 것이라고 보았고[4], 오와다 데쓰오도 "하시바라는 이름의 유래는 노부나가의 중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의 '시바'와 니와 나가히데의 '하'를 한 글자씩 받아서 하시바로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라고 하였다. 도쿠토미 소호는 『도요카가미』의 내용을 받아들이면서도 "상당히 우스운 일"이라며, 노부나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행위였다고 평가했다.

히데요시는 두 양자에게 '히데카쓰'라는 휘(諱)를 중복해서 부여했는데, 이는 니와 나가히데의 아래 휘('히데')에 시바타 가쓰이에의 위 휘('가쓰')를 겹치는 하시바 성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시바 성의 니와·시바타 양성 합성설을 보강하는 시각도 있다.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고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되자, 히데요시가 발급하는 문서들은 존대화되거나 봉서로 대체되었고, 직장도 '히데요시'라고만 서명하거나 화압, 인판만 찍는 등으로 점령되어 하시바 성씨는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1585년 10월 13일, 다테 마사무네의 중신 엔도 모토노부에게 보낸 서장에 '하시바 주젠노카미'라고 서명한 것이 히데요시가 하시바 성씨를 사용한 마지막 예이다. 히데요시는 본성으로 평성을 사용했고, 간파쿠 취임 시에는 후지와라 성으로 개명했으며, 이후 도요토미 성을 창성했지만, 씨(氏)와 성(姓)의 차이가 있어 하시바를 대신하여 도요토미로 한 것은 아니다.[5]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자결하고 하시바 종가는 멸망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미망인 고다이인이 친족인 도시쓰구를 양자로 맞아 하시바 가문을 이었지만, 1624년 고다이인이 사망한 후 에도 막부로부터 하시바 성씨 사용을 금지당하고 기노시타 씨를 칭하게 되면서 하시바 씨는 다시 소멸했다.

분고국 히지번 기노시타 가문의 분가로 다테이시령 5000석의 교대 합류였던 기노시타 도시키요가 1872년 3월 10일에 하시바로 복성했다.

1884년 화족령 시행 당시 하시바 가문은 남작 수여 대상 가문에 거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족으로 남았다. 하시바 도시키요의 양자인 기노시타 도시로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서작 청원 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사족으로 남았다.

2. 2. 하시바 성의 사용과 도요토미 성 하사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기노시타라는 성씨를 사용했다. 1565년 11월 2일, 노부나가가 미노국의 토호 츠보우치 토시사다에게 준 지행 안도장에 "기노시타 도키치로 히데요시"라고 서명한 것이 히데요시가 역사에 등장하는 첫 기록이다.[2]

이후 히데요시는 전공을 쌓아 노부나가의 유력 부장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기노시타에서 하시바(羽柴)로 성을 바꾼 첫 기록은 1573년 7월 20일, 오야마자키 소츄에 밧줄 공출을 요구한 서장[2]에서 "하시바 도키치로 히데요시"라고 서명한 것이다. 『노부나가 공기』[3]에는 겐키 3년 7월 24일, 오미 잇코잇키 토벌 지휘관으로 "기노시타 도키치로"가 기록되어 있고, 같은 해 8월 도라가오야마에 건설된 요새의 "정번(정반)"으로 "하시바 도키치로"가 기록되어 있다.

성씨 변경에 대해 다케나카 시게토의 『도요카가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기록은 히데요시가 1569년 4월 16일자 서장에서 "기노시타 도키치로"라고 서명한 사실과 모순된다.

도쿠토미 소호는 하시바 성의 유래에 대해, 기노시타에서 하시바로 바꾼 시기를 "겐키 말부터 덴쇼 초"로 추정하고, 니와 나가히데의 "하"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시바"를 조합한 것이라고 보았다. 오와다 데쓰오 역시 "하시바라는 이름의 유래는 노부나가의 중신인 시바타 가쓰이에의 '시바'와 니와 나가히데의 '하'를 한 글자씩 받아서 하시바로 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라고 설명한다. 도쿠토미 소호는 히데요시가 노부나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이런 우스운 일을 했다고 평가하며, 히데요시를 "노부나가 학의 대박사"라고 비꼬았다.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고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되자, 히데요시가 발급하는 문서에서 하시바 성씨는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1585년 10월 13일, 다테 마사무네의 중신 엔도 모토노부에게 보낸 서장에 "하시바 츄젠노카미"라고 서명한 것이 마지막이다.[2] 다만, 히데요시가 다른 성씨로 바꾼 것은 아니다.[5] 히데요시는 본성으로 평성을 사용했고, 간파쿠 취임 시에는 후지와라 성으로 바꿨으며, 이후 도요토미 성을 창시했지만, 이는 씨(氏)와 성(姓)의 차이일 뿐, 하시바를 도요토미로 바꾼 것은 아니다.

1615년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자결하면서 하시바 종가는 멸망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미망인 고다이인(도요토미 네네)이 친족을 양자로 맞아 하시바 가문을 이었지만, 1624년 고다이인이 사망한 후 에도 막부에 의해 하시바 성씨 사용이 금지되면서 하시바 씨는 다시 소멸했다.

1872년 3월 10일, 분고국 히지번 기노시타 가문의 분가인 기노시타 도시치카가 하시바로 복성했다. 1884년 화족령 시행 당시 하시바 가문은 남작 수여 대상이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족으로 남았다. 하시바 도시치카의 양자인 하시바 도시로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까지 작위 수여 청원 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2. 3. 하시바 가문의 몰락

오다 노부나가 사후, 히데요시천하인의 자리에 오르면서, 그가 발급하는 문서들은 점차 존대화되거나 간략화되었다. 이에 따라 "하시바"라는 성씨의 사용 예는 점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1585년 10월 13일, 다테 마사무네의 중신 엔도 모토노부에게 보낸 서장에 "하시바 츄젠노카미"라고 서명한 것이 히데요시가 하시바 성씨를 사용한 마지막 기록이다.[2]

히데요시는 본성으로 평성을 사용했고, 관백 취임 시에는 후지와라 성으로, 이후에는 도요토미 성을 사용했지만, 이는 씨(氏)와 성(姓)의 차이로 인해 하시바 성씨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사회 습관에 따라 히데요시의 씨는 도요토미, 성은 하시바였다.

1615년 5월,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시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자결하면서 하시바 종가는 멸망했다. 이후 히데요시의 미망인 코다이인(도요토미 녕자)이 친족인 토시츠구를 양자로 맞아 하시바 가문을 이었지만, 코다이인의 사망 후 에도 막부는 하시바 토시츠구에게 하시바 성씨 사용을 금지하고 기노시타 씨를 칭하게 했다. 이로 인해 1624년 하시바 씨는 다시 소멸했다.

분고국히지번기노시타 가문의 분가였던 기노시타 토시키요가 1872년 3월 10일에 하시바 성씨로 복성했다. 그러나 1884년 화족령 시행 당시 하시바 가문은 남작 작위를 받지 못하고 사족으로 남았다.

하시바 토시키요의 양자인 하바시 토시로는 메이지 시대부터 다이쇼 시대에 걸쳐 작위 수여 청원 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하고 사족으로 남았다. 현대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연관된 하시바 성씨는 이 일족만이 남아있다.

3. 주요 구성원

하시바씨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 '''하시바 종가'''


하시바 히데요시를 중심으로, 정실 네네와 그 혈연, 히데요시의 아들들과 양자들로 구성되었다. 히데요시의 친아들은 요절하거나 후사가 끊겼지만, 양자들은 각 가문을 이어갔다.

  • '''히데요시의 친족'''


히데요시의 부모, 계부, 누나, 여동생과 그 배우자들로 구성되었다. 히데요시의 누나 토모와 여동생 아사히는 각각 미요시 요시후사,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유력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히데요시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야마토 하시바가'''


하시바 히데나가를 당주로 하는 가문으로, 히데요시의 동생인 히데나가가 이끌었다. 히데나가는 도요토미 정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의 가문은 양자들을 통해 이어졌다.

  • '''기후 하시바가'''


하시바 히데카쓰를 당주로 하는 가문으로,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토모의 아들인 히데카쓰가 이끌었다. 히데카쓰는 임진왜란에서 활약했으며, 그의 가문은 딸 사다코를 통해 구조가와 연결되었다.

  • '''오우미 → 오와리 하시바가 (종가)'''


하시바 히데쓰구를 당주로 하는 가문으로,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토모의 아들인 히데쓰구가 이끌었다. 히데쓰구는 한때 히데요시의 후계자로 관백직을 물려받았지만, 이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히데쓰구의 처자식들 역시 대부분 처형되었으나, 일부는 살아남아 가문을 이었다.

  • '''탄바 하시바가'''


하시바 히데토시를 당주로 하는 가문으로,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네네의 조카인 히데토시가 이끌었다. 히데토시는 고바야카와가를 계승하여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로 이름을 바꾸었다.

  • '''오사카 하시바가 (종가)'''


하시바 히데요리를 당주로 하는 가문으로, 히데요시의 친아들인 히데요리가 이끌었다. 히데요리는 도요토미 정권의 후계자였지만,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여 가문이 멸망했다.

3. 1. 하시바 종가

3. 2. 히데요시의 친족

3. 3. 야마토 하시바가 (하시바 히데나가 → 히데야스가)



관계이름비고
장남코이치로키노시타 요이치로라고도 함. 요절[1]
다이젠인모리 히데모토의 아내[1]
오미야히데야스의 아내[1]
양자하시바 히데야스히데나가 사후 가독을 계승. 미요시 요시후사와 토모의 아들. 요절[1]
양자센마루니와 나가히데의 3남. 도도 다카토라의 양자가 되어 다카요시로 칭함. 나바리 도도가의 시조[1]


3. 4. 기후 하시바가 (하시바 히데카쓰가)

하시바 히데카쓰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미요시 요시후사와 토모의 아들이다. 정실은 아자이 나가마사의 3녀 오고우이며, 요도도노의 동생이다. 히데카쓰 사후 오고우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재혼하였다.

히데카쓰와 오고우 사이의 딸 사다코는 구조 유키이에와 결혼하여 니죠 야스미치, 구죠 미치후사, 마쓰도노 미치모토 등을 낳았다.

3. 5. 오우미 → 오와리 하시바가ㆍ종가 (하시바 히데쓰구가)

하시바 히데쓰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로, 미요시 요시후사와 토모의 아들이다. 히데요시로부터 관백직을 물려받았지만, 이후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처형되었다.

구분이름비고
장남센치요마루아버지 사후 처형됨
차남햐쿠마루아버지 사후 처형됨
3남쥬마루아버지 사후 처형됨
4남츠치마루아버지 사후 처형됨
로게츠인일설에는 히데요리의 약혼녀. 하지만, 다른 딸이라고도 함. 아버지 사후 처형됨.
오키쿠야마구치 헤이나이의 아내
류세이인사나다 노부시게의 아내. 자식으로 오다히메(겐쇼인), 미요시 유키노부


3. 6. 탄바 하시바가 (하시바 히데토시가)

하시바 히데토시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이자, 고다이인의 조카이다. 한때 하시바 종가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고바야카와가를 계승했다. 정실은 모리 데루모토의 양녀인 고마쓰히메이다.

3. 7. 오사카 하시바가ㆍ종가 (하시바 히데요리가)

하시바 히데요시의 친아들로, 어머니는 요도도노이다. 히데요시는 아들 히데요리를 관백에 앉히려 했으나, 도쿠가와 쇼군가가 이를 저지했고, 결국 히데요리 가문은 멸망했다.[1]

4. 도요토미 정권의 주요 인물 및 정책


  • '''정책'''

:* 태합검지

:* 도수령

:* 병농분리

:* 신분통제령

:* 인소령

:* 총무사령

:* 훤화정지령

:* 해적정지령

:* 바테렌 추방령

:* 천정통보

5. 하시바 성씨의 하사와 사용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던 히데요시는 처음에는 기노시타 성씨를 사용했다. 1565년 11월 2일, 노부나가가 미노국의 토호 츠보우치 토시사다에게 준 지행 안도장에 "기노시타 토키치로 히데요시"라고 서명한 것이 히데요시가 역사에 등장하는 첫 기록이다.[2]

이후 히데요시는 전공을 쌓아 노부나가의 유력 부장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1573년 7월 20일자 서장에는 "하바시 토키치로 히데요시"라고 서명하여 성씨를 바꾼 것을 확인할 수 있다.[2] 『노부나가 공기』[3]에는 1573년 7월 24일 오미 잇코잇키 토벌 지휘관으로 "기노시타 토키치로"가, 같은 해 8월 토라가오야마 요새의 "정번(죠반)"으로 "하바시 토키치로"가 기록되어 있다.

성씨 변경에 대해 타케나카 시게토의 『토요카가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이 기록은 1차 사료와 모순된다. 도쿠토미 소호는 하시바 성씨의 유래를 니와 나가히데의 "하"와 시바타 가쓰이에의 "시바"를 조합한 것으로 보면서도, 노부나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행동이었다고 평가했다.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사망하고 히데요시가 천하인이 되자, 히데요시가 발급하는 문서에서 하시바 성씨는 점차 보이지 않게 된다. 1585년 10월 13일, 다테 마사무네의 중신 엔도 모토노부에게 보낸 서장에 "하바시 츄젠노카미"라고 서명한 것이 마지막 기록이다.[2] 히데요시는 관백 취임 후 후지와라 성으로, 이후 도요토미 성을 사용했지만, 이는 씨(氏)와 성(姓)의 차이로 하시바 성씨를 버린 것은 아니다.

1615년 오사카 전투로 히데요시의 후계자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자결하면서 하시바 종가는 멸망했다. 히데요시의 미망인 코다이인이 친족을 양자로 맞아 하시바 가문을 이었지만, 1624년 에도 막부에 의해 기노시타 씨로 개칭되면서 하시바 씨는 다시 소멸했다.

1872년 3월 10일, 분고국히지번기노시타 가문의 분가였던 기노시타 토시키요가 하시바 성씨로 복성했다. 1884년 화족령 시행 당시 하시바 가문은 남작 수여 대상이었으나, 최종적으로 제외되어 사족으로 남았다. 하시바 토시키요의 양자인 하바시 토시로는 서작 청원 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히데요시는 친족 외에도 하시바 성씨를 하사했다. 1582년 10월 호리 히데마사에게 하사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5] 이후 옛 주군이었던 오다 일족, 동료 다이묘, 신종시킨 다이묘 등에게 하시바 성씨를 수여했다. 히데요시 사망 직전에는 직신층에게도 수여하여 주종 관계 강화를 도모했다.

하시바 성씨를 칭한 인물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같은 거물부터 오다 노부타카까지 다양했다. 이는 "가문"이 아닌 개인에 대한 칭호로 여겨진다. 히데요시는 이와 유사하게 "도요토미 아손" 씨성도 수여했는데, 그 범위는 하시바 씨보다 훨씬 넓었다.

히데요시 사후에도 하시바 성씨는 시마즈 이에히사, 호소카와 다다오키, 이케다 데루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일부 다이묘가 사용을 계속했다. 오사카 전투 이후에는 점차 사라졌다.

하시바 성씨를 하사받은 연월일은 명확한 자료가 없어 특정하기 어렵다. 다음은 고문서, 일기류 등에서 하시바 성씨를 칭한 것이 확인된 인물들의 목록이다.

참조

[1] 문서 中興武家系図 宮内庁
[2] 서적 豊臣秀吉文書目録 名古屋大学文学部国史学研究室 1989
[3] 서적 信長公記 角川書店 1969
[4] 서적 蜂須賀小六正勝 雄山閣 1929
[5] 논문 慶長期大名の氏姓と官位 日本史研究会 1997
[6] 문서 足守藩主・木下利房次男。羽柴宗家滅亡後に高台院の養子となるが、高台院の死後、木下氏に復姓。
[7] 문서 織田信長四男。
[8] 문서 徳川家康次男
[9] 문서 木下家定五男。
[10] 서적 秀吉政権の儀礼形成 新人物往来社 1981
[11] 서적 陣立書にみる家臣団の形成 新人物往来社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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