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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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찬석은 1960년대 일본에서 바둑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한 바둑 기사이다. 1973년 국수전과 왕위전에서 우승했으며, 1974년 국수전, 1985년 박카스배, 1986년 KBS 바둑왕전 등에서 우승했다. 1987년 8단, 2003년 9단으로 승단했으며, 2010년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그의 이름을 기리는 하찬석 국수배 영재바둑대회가 2013년부터 개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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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찬석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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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출생일 | 1948년 12월 20일 |
사망일 | 2010년 9월 14일 |
출생지 | 대한민국 |
거주지 | 대한민국 |
단 | 9단 |
소속 | 한국기원 |
기사 정보 | |
이름 | 하찬석 |
프로 입단 | 1967년 |
은퇴 | 2010년 |
타이틀 | 국수 2기 |
통산 성적 | 알려지지 않음 |
2. 생애 및 경력
1963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 문하에서 바둑을 수학하고 1967년 일본기원에서 프로로 입단했다.[1] 1970년 귀국하여 한국기원 소속 기사로 활동하며 국수전, 왕위전 등 다수의 국내 기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1] 2003년 9단으로 승단했으며,[1] 2010년 지병인 직장암으로 별세했다.[1] 사후 그의 업적을 기리는 하찬석 국수배 영재바둑대회가 2013년부터 개최되고 있다.[1]
2. 1. 일본 유학 및 프로 입단
1963년 일본에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 木谷實|기타니 미노루일본어 문하에 들어가 바둑을 배웠다. 일본에서는 '''가와모토 마사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67년 일본기원 초단으로 입단하였고, 1970년 병역을 위해 귀국하여 한국기원 4단이 되었다.2. 2. 한국으로 귀국 및 활동
1963년 일본에 건너가 기타니 미노루(木谷實) 문하에서 바둑을 배우고 1967년 일본기원에서 초단으로 입단했다. 일본에서는 河本 正夫|가와모토 마사오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970년 병역 의무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기원 소속 4단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73년 5단으로 승단했으며, 같은 해 제18기 국수전에서 조남철 9단을, 제8기 왕위전에서 윤기현 7단을 꺾고 우승하며 주요 기전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제19기 국수전 타이틀을 방어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걸쳐 여러 기전에서 활약했으며, 1979년에는 왕위전과 국수전에서 당시 최강자였던 조훈현 9단에게 도전했으나 두 기전 모두 2연패 후 3국에서 기권하며 타이틀 획득에는 실패했다.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하여 1985년 제2기 박카스배, 1986년 제5기 바둑왕전, 1992년 8단전 등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987년 8단, 2003년 9단으로 승단했다. 2006년에는 중일한 삼국 원로 바둑전에 출전하기도 했다.
2010년 9월, 지병인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2013년부터 합천군의 후원과 한국기원의 주최로 하찬석 국수배 영재바둑대회가 매년 열리고 있다.
'''주요 우승 경력'''
2. 3. 주요 우승 경력
1973년 제18기 국수전과 제8기 왕위전에서 처음으로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듬해인 1974년에는 제19기 국수전 타이틀을 방어했다. 이후 1985년 제2기 박카스배와 1986년 제5기 KBS 바둑왕전에서 우승했으며, 1992년에는 8단전에서 우승을 차지했다.주요 우승 기록은 아래와 같다.
2. 4. 기타 경력
1963년 일본으로 건너가 木谷實|기타니 미노루일본어 문하에 들어가 바둑을 배웠다.[1] (1964년 기곡실에게 입문했다는 기록도 있으며, 일본 활동 시에는 '가와모토 마사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67년 일본기원 초단으로 프로에 입단하였고,[1] 1970년 병역 의무 이행을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기원 소속 4단 기사가 되었다.[1]이후 꾸준히 승단하여 1973년 5단, 1987년 8단,[1] 2003년 9단에 올랐다.[1] 다수의 기전에서 활약하며 최고위전(1976년, 1978년, 1985년), 국기전(1978년), 패왕전(1979년), 국수전(1979년), 왕위전(1979년) 등 여러 대회에서 도전자로서 결승에 진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1979년 왕위전과 국수전에서는 당시 최강자였던 조훈현에게 도전했으나 아쉽게 패배했다.
2006년에는 중일한 삼국 위기 원로전에 출전하여 중국의 王汝南|왕루난중국어과 일본의 羽根 泰正|하네 야스마사일본어를 상대로 승리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했다.
2010년 9월, 지병인 직장암으로 인해 향년 69세로 별세했다.[1] 그의 업적을 기리고 유망주를 발굴하기 위해 고향인 경상남도 합천군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최하는 하찬석 국수배 영재바둑대회가 2013년부터 매년 개최되고 있다.[1]
3. 별세 및 기념 사업
2010년 9월 지병인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인을 기리기 위해 합천군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최하는 하찬석 국수배 영재바둑대회가 2013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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