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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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언공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광문원의 서생으로 시작하여 내의승지사인, 형부·병부 시랑을 거쳐 송나라에 사은사로 파견되어 대장경을 하사받아 귀국했다. 이후 중추원부사, 중추원사를 역임하고 목종 때 문하시중에 이르렀으며, 장단현이 단주로 승격되기도 했다. 화폐 사용에 대한 상소를 올려 백성들의 교역에 토산물 사용을 허용하게 했다. 특진 개국후, 감수국사 등을 거쳐 65세에 사망했으며, 목종 묘정에 배향되고 덕종 때 태부로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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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언공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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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직업 | 문관 |
경력 | 문하시중(門下侍中) |
출생일 | 940년 |
사망일 | 1004년 6월 28일 음력 6월 6일 |
자녀 | 한조(韓祚) |
부모 | 한총례(韓聰禮) |
시호 | 정신(貞信) |
본관 | 단주(湍州) |
2. 생애
한언공은 고려 초기 문신으로, 광종 때부터 목종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며 외교와 행정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송과의 외교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 고려의 행정 제도 정비에도 기여했다.
하위 섹션에서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성종 및 목종 대의 활동, 사후 등에 대해 자세히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한언공의 생애 전반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만을 간략하게 제시한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진출
장단(長湍) 사람으로, 부친 한총례(韓聰禮)는 광록소경(光祿小卿)을 역임하였다.광종 6년(955년) 15세에 광문원(光文院)의 서생(書生)이 되었고, 얼마 뒤 광문원의 승사랑(承事郞)이 되었다가 내승지(內承旨)로 옮겼다. 청을 올려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내의승지사인(內議承旨舍人)이 되었다. 성종 때에는 형부(刑部)·병부(兵部) 2부의 시랑(侍郞)으로 전임되었다.[13] 《고려사》에는 성종 3년(984년) 형관(刑官) 관아의 문기둥에 벼락이 친[2] 것을 계기로 기존의 어사(御事)·시랑·낭중(郞中)·원외랑(員外郞) 등을 견책해 파직하고 신임 인사를 기용하는 와중에 한언공이 예관시랑(禮官侍郞)으로써 형관시랑이 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3]
성종 9년(990년) 송(宋)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다.[4] 《고려사》열전에는 한언공은 성품이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고 평하고 있는데, 당시 송에서는 한언공의 태도와 행동이 예법에 맞는다고 평하며 금자광록대부 검교병부상서 겸 어사대부(金紫光祿大夫 檢校兵部尙書 兼御史大夫)를 제수하였으며, 송 태종은 한언공의 요청대로 《대장경》(大藏經) 481함 모두 2,500권을 하사하고, 태종 자신이 지은 《비장전》(秘藏詮) · 《소요영》(逍遙詠) · 《연화심륜》(蓮花心輪)도 하사하였다.[13][5] 한언공이 태종이 하사한 《대장경》을 가지고 귀국하자 성종은 이를 내전(內殿)에 들이고 승려들을 불러 독송하게 한 뒤에 사면령을 내렸다.[6] 어사예관시랑 판예빈성사(御史禮官侍郞 判禮賓省事)로 임명되었으며, 송의 추밀원(樞密院)이 고려의 숙직하는 관원과 서리의 직임과 같으므로 같은 관청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여 처음으로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고 사(使)와 부사(副使) 각 2인을 두었으며, 한언공을 중추원부사로 삼았다.[13][7] 이후 중추원사로 승진하고 전중감 지례관사(殿中監 知禮官事)로 전임되었다가, 참지정사 상주국(叅知政事 上柱國)으로 승진하였다.[13]
2. 2. 성종 대의 활동: 외교와 행정
성종 9년(990년) 한언공은 송(宋)에 사은사(謝恩使)로 파견되었다.[4] 당시 송에서는 한언공의 태도와 행동이 예법에 맞는다고 칭찬하며 금자광록대부 검교병부상서 겸 어사대부(金紫光祿大夫 檢校兵部尙書 兼御史大夫)를 제수하였다. 송 태종은 한언공의 요청에 따라 《대장경》(大藏經) 481함, 총 2,500권과 태종 자신이 지은 《비장전》(秘藏詮), 《소요영》(逍遙詠), 《연화심륜》(蓮花心輪)을 하사하였다.[13][5]한언공이 귀국하자 성종은 대장경을 내전(內殿)에 들이고 승려들을 불러 독송하게 한 뒤 사면령을 내렸다.[6] 이후 한언공은 어사예관시랑 판예빈성사(御史禮官侍郞 判禮賓省事)로 임명되었으며, 송의 추밀원(樞密院)을 본떠 고려에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여 중추원이 처음 설치되고 사(使)와 부사(副使) 각 2인을 두었는데, 한언공이 중추원부사가 되었다.[13][7] 이후 중추원사로 승진하고 전중감 지례관사(殿中監 知禮官事)로 전임되었다가, 참지정사 상주국(叅知政事 上柱國)으로 승진하였다.[13]
2. 3. 목종 대의 활동: 정치 개혁과 죽음
목종이 즉위하자 한언공은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임명되었으며, 목종 4년(1001년)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이 해에 목종은 한언공의 고향인 장단현을 단주(湍州)로 승격시켰다.[8]앞서 성종의 명에 따라 전폐(錢幣), 즉 화폐를 주조하고 이를 널리 사용할 것을 권장하며 아울러 추포(麤布)의 사용을 금하고 있었는데, 당시 고려에서 화폐는 아직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추포가 거래 대상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무리한 화폐 사용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는 자들도 있었다. 한언공이 상소를 올려 이 점을 지적하였고, 목종 5년(1002년) 7월 목종은 교서를 내려 차와 술, 음식을 파는 점포에서는 철전을 사용하고, 그 밖의 백성들간의 사사로운 교역에 한해 토산물을 임의로 사용하도록 허용하였다.[9]
이후 여러 번 승진하여 특진 개국후(特進 開國侯), 식읍 1,000호,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 한총례에게는 내사령(內史令)이 증직되었다.[13]
목종 6년(1003년)에 한언공은 병이 들었다. 목종은 한언공에게 의약과 수레 두 대를 하사하고 온천에 가서 요양하게 하였고, 주현(州縣)에 명령하여 그의 노정에 공급하게 하였다. 또한 한언공의 병이 위독해지자 근신(近臣)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궁중에서 기르던 말 세 필을 하사하여 쾌유 기도를 올리게 하였으나[13] 이듬해 6월 6일에 사망하였다.[10] 향년 65세였다. 목종은 한언공에게 쌀 500석, 보리 300석, 포 1,200필, 차 200각을 부의로 내렸으며, 내사령(內史令)을 증직하고 시호는 '''정신'''('''貞信''')이라 하였다.[11]
2. 4. 사후
1003년 목종은 한언공이 병이 들자 의약과 수레 두 대를 하사하고 온천에서 요양하게 하였으며, 주현(州縣)에 명하여 그 노정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게 하였다. 병세가 위독해지자 근신(近臣)을 보내 문병하고, 궁중에서 기르던 말 세 필을 하사하여 쾌유를 빌게 하였으나,[13] 이듬해 6월 6일에 향년 65세로 사망하였다.[10] 목종은 한언공에게 쌀 500석, 보리 300석, 포 1,200필, 차 200각을 부의로 내리고, 내사령(內史令)을 증직하였으며, '''정신'''(貞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1]현종 18년(1027년) 목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12] 덕종 2년(1033년) 태부(太傅)가 증직되었다.[13][14]
3. 인물
목종이 평주에 행차했을 때 날이 저물고 추위가 심해 길가에 멈춰 술을 마셨다. 한언공이 "신 등은 실컷 마시고 먹지만, 군사들은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자, 목종은 그를 가상히 여겨 초서구(貂鼠毬)를 하사하고 행궁으로 들어갔다.[13]
4. 자녀
아들은 한조(韓祚)이다.[13] 한조의 딸은 용의왕후 한씨이며, 언니 용신왕후와 함께 정종의 비가 되었다.[15]
참조
[1]
서적
고려사 목종세가 및 한언공열전
1004-06-06
[2]
서적
고려사 세가제3 성종
0984-05-01
[3]
서적
고려사 세가제3 성종
0984-05-01
[4]
서적
송사 태종
0990-12-14
[5]
서적
송사 열전제246 외국3 고려
[6]
서적
고려사 세가제3 성종
0991-04-21
[7]
서적
고려사 지제30 백관1 밀직사
[8]
서적
고려사 지제10 지리1 왕경 개성부 장단현
[9]
서적
고려사 지제33 식화2 화폐
[10]
서적
고려사 세가제3 목종
1004-06-06
[11]
서적
고려사 지제18 예6 흉례 제신 상
[12]
서적
고려사 세가제5 현종
1027-04-12
[13]
서적
고려사 열전권제6 제신 한언공
[14]
서적
고려사 세가제5 덕종
1033-10-12
[15]
서적
고려사 열전제1 후비 정종 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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