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스켈 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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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스켈 커리(Haskell Curry)는 20세기 미국의 수학자이자 논리학자이다. 조합 논리 분야의 선구자로서,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와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커리는 조합 논리가 수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 했으며, '커리의 역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조합 논리》, 《수학 논리의 기초》 등이 있다.
해스켈 커리는 1900년 9월 12일 매사추세츠주 밀리스에서 태어나 1982년 9월 12일 펜실베이니아주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사망했다.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괴팅겐 대학교에서 다비트 힐베르트에게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1]
해스켈 커리는 조합 논리가 수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려는 연구를 진행했다.[1] 1933년 말, 클레인-로서 역설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알론조 처치의 시스템과 커리 자신의 시스템을 포함하여 여러 관련 형식 체계의 모순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커리는 기초적인 접근 방식을 포기하지 않았다.[1]
2. 생애
모제스 쇤핀켈의 조합 논리에 영향을 받아 평생 이 분야를 연구하여 개척자이자 최대 공헌자가 되었다.[1] 조합 논리는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반이 되며, 앨론조 처치의 람다 계산과 유사하지만 최근에는 후자가 더 우세하다.
프린스턴 대학교와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1942년 커리의 역설을 발표했다.[1] 1966년부터 암스테르담 대학교 수학 교수를 역임했다. 또한 수리 논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1963년 『수리 논리학의 기초』를 저술했다. 커리는 형식주의를 따랐지만, 직관주의 논리에도 관심을 보였다.[1]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00-1930)
1900년 9월 12일 매사추세츠주 밀리스에서 웅변 학교를 운영하는 새뮤얼 사이러스 커리와 안나 바라이트 커리의 아들로 태어났다.[1] 1916년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다가 1920년 졸업 전에 수학으로 전공을 변경하였다.[1]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MIT)에서 2년간 전기 공학으로 대학원 과정을 마친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공부하여 1924년 문학 석사(M.A.) 학위를 받았다.[1]
하버드 대학교에서 조지 데이비드 비르크호프의 지도 아래 미분 방정식을 연구했지만,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 원리"를 접하며 수리 논리로 관심을 돌렸다.[1] 1927년 프린스턴 대학교 강사로 재직하면서 모제스 쇤핀켈의 조합 논리 연구를 접하고, 괴팅겐 대학교로 옮겨 다비트 힐베르트와 파울 베르나이스에게서 지도받았다.[1] 1930년 조합 논리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1]
2. 2. 결혼과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 재직 (1928-1966)
1928년, 커리는 괴팅겐으로 떠나기 전에 메리 버지니아 휘틀리와 결혼했다. 커리가 논문을 완성하는 동안 부부는 독일에서 살았고, 1929년 펜실베이니아주 스테이트 칼리지로 이사하여 커리는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Pennsylvania State College)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앤 라이트 커리(1930년 7월 27일)와 로버트 휘틀리 커리(1934년 7월 6일) 두 자녀를 두었다. 커리는 이후 37년 동안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에 머물렀다. 그는 미국 국립 과학, 공학, 의학 아카데미의 국가 연구 펠로우십을 받아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시카고 대학교에서 1년, 1938년부터 1939년까지 프린스턴의 고등 연구소에서 1년을 보냈다. 1942년에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 정부를 위해 응용 수학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휴직했으며, 특히 프랭크퍼드 병기창에서 근무했다. 전쟁 직후인 1945년과 1946년에는 ENIAC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풀브라이트 프로그램을 통해 그는 벨기에 루뱅에서 로버트 페이스와 협력했다.
2. 3. 암스테르담 대학교 및 은퇴 (1966-1982)
1966년 커리는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은퇴하고 암스테르담 대학교의 논리학, 논리학사 및 정확 과학 철학 교수직을 수락하여 에버트 빌렘 베스의 뒤를 이었다. 1970년, 조합 논리에 대한 두 번째 저서를 완성한 후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은퇴하고 펜실베이니아주 스테이트 칼리지로 돌아왔다.
해스켈 커리는 1982년 9월 12일 펜실베이니아주 스테이트 칼리지에서 사망했다.
3. 학문적 업적 및 영향
커리는 평생 조합 논리 분야에서 연구하며 이 분야의 창시자이자 가장 큰 인물이 되었다. 조합 논리는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초가 되는데, 그 힘과 범위는 앨론조 처치의 람다 계산법과 매우 유사하지만, 최근 수십 년 동안은 람다 계산법이 우세를 보이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커리는 프랭크포드 병기창에서 일하면서 코시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최급강하'' 알고리즘을 개발했다.[1] 이는 현대 경사 하강법의 기본적인 예가 되었다. 1947년에는 최초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중 하나를 설명하고 일반적인 산술 표현식을 1-주소 컴퓨터용 코드로 변환하는 절차를 최초로 설명했다.[1]
그는 하버드 대학교,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에서 가르쳤고, 1966년에는 암스테르담 대학교에서 논리학 교수가 되었다.
커리는 수리 논리학을 쓰고 가르쳤으며, 이와 관련하여 1963년 ''수리 논리의 기초''를 저술했다. 그는 형식주의를 선호했지만, 그의 저술에는 직관주의 논리에 대한 상당한 철학적 호기심과 열린 마음이 드러난다.
3. 1. 조합 논리 연구
해스켈 커리는 평생 동안 조합 논리 분야를 연구하여 이 분야의 창시자이자 가장 큰 기여자가 되었다. 커리는 조합 논리가 수학의 기초를 제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1] 1933년 말, 존 로서와의 서신 교환을 통해 클레인-로서 역설을 알게 되었는데, 이 역설은 여러 관련 형식 체계의 모순을 증명했다. 그러나 커리는 "역설에서 도망치고 싶지 않다"며 기초적인 접근 방식을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지속했다.[1]
조합 논리는 람다 계산법과 유사한 힘과 범위를 가지며, 함수형 프로그래밍 언어의 기초가 되었다.[1] 1947년 커리는 최초의 고급 프로그래밍 언어 중 하나를 설명하고, 일반적인 산술 표현식을 1-주소 컴퓨터용 코드로 변환하는 절차를 최초로 설명했다.[1]
3. 2. 수리 논리학 연구
커리는 수리 논리학에 대해 저술하고 가르쳤으며, 이 분야에서 그의 가르침은 1963년 저서 ''수리 논리의 기초''에서 절정에 달했다.[1] 그는 스승 힐베르트를 따라 형식주의를 선호했지만(1951년 저서 참조), 그의 저술에는 직관주의 논리에 대한 상당한 철학적 호기심과 매우 열린 마음이 드러난다.[1]
3. 3. 커리의 역설
1942년, 커리는 커리의 역설을 발표했다.[1] 이 역설은 논리 체계 내에서 모순을 유발하는 명제를 제시하여, 자기 지시적 문장의 문제점을 드러냈으며, 논리 체계의 무모순성 증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주요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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