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쿠스 웁살렌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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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헨리쿠스 웁살렌시스는 13세기 말부터 숭배받기 시작한 핀란드의 수호 성인이다. 1298년 기록에 처음 등장하며, 핀란드 십자군 원정과 관련되어 묘사된다. 헨리쿠스에 대한 전설은 핀란드 민요 "주교 헨리의 죽음의 노래"를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랄리라는 인물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묘사된다. 헨리쿠스는 1월 20일(사망일)과 6월 18일(유해 이송일)에 기념되었으며, 1300년 유해가 투르쿠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헨리쿠스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정치적, 사회문화적 측면에 영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핀란드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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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쿠스 웁살렌시스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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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헨리쿠스 |
출생 | c. 1100년경 잉글랜드 왕국 |
사망 | 1156년 1월 20일 (전통적으로), 쾨윌리외 호수, 핀족 부족 영토 (현재 핀란드) |
기념일 | 1월 19일 |
공경 | 가톨릭교회 성공회 루터교 |
직함 | 주교, 선교사, 순교자 |
주요 성지 | 이전 투르쿠 대성당, 현재 헬싱키 가톨릭 대성당 |
논란 | 실존 여부 논란 있음 |
종교 활동 | |
교구 | 웁살라 대교구 |
봉사 지역 | 핀란드 |
임명 | 1150년대 |
서품 | 잉글랜드 왕국 |
관련 정보 | |
기념일 | 1월 19일 |
후원 | 헬싱키 가톨릭 대성당 |
2. 역사적 배경
헨리 주교에 대한 이야기는 주로 후대에 기록된 전설에 기반하고 있어, 오늘날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의 역사적 실존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49] 실제로 헨리 주교나 그가 참여했다고 전해지는 십자군 활동을 직접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동시대의 기록은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았다.[50]
하지만 그가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전설이 반드시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헨리가 활동했다고 여겨지는 12세기와 13세기는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유럽 전역에서 정치적, 종교적 혼란으로 인해 폭력적인 사건이 빈번했던 시기였으며, 실제로 여러 고위 성직자들이 살해당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51][52][53]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1134년 포테비크 전투 이후 "그렇게 많은 주교가 한꺼번에 죽은 적은 없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따라서 헨리 주교 이야기는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2. 1. 역사 기록의 부족
헨리 주교의 생애에 대한 기록인 생애(Vita)는 그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로부터 약 150년이 지난 13세기 말에 작성되었다. 이 기록은 헨리 주교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거의 담고 있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12세기 중반 스웨덴 국왕 성 에리크 시대에 웁살라에서 활동한 잉글랜드 출신 주교였으며, 왕과 함께 평화롭게 왕국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러나 비기독교도인 핀란드인들의 위협 때문에 에리크 왕과 헨리 주교는 핀란드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핀란드를 정복하고 주민들을 세례시키며 교회를 세운 후, 에리크 왕은 스웨덴으로 돌아갔지만 헨리 주교는 고위 성직자의 삶보다 설교자의 삶을 원하여 핀란드에 남았다고 한다.전설은 헨리 주교가 살인자에게 교회법에 따른 처벌을 내리려 하자, 이에 격분한 피고인에게 살해당하면서 순교자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 ''생애(Vita)'' 기록은 헨리가 핀란드 주교가 아니라 웁살라의 주교였음을 강조하며,[5] 이는 나중에 교회에서도 받아들여진 주장이었다. 그는 연민 때문에 핀란드에 머물렀을 뿐, 주교로 임명된 적은 없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는 그의 시대 이전 핀란드 주교의 존재 여부, 그의 사후 상황, 심지어 핀란드 내 매장지에 대한 언급조차 없다. 핀란드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전혀 없어 어디에서든 만들어졌을 수 있다는 평가도 있다. 다만 사용된 라틴어는 학문적이며 문법적으로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헨리의 ''생애(Vita)'' 다음에는 보다 지역적인 내용인 ''기적(Miracula)'' 목록이 이어진다. 이는 주교가 사망한 후 여러 사람이 경험했다고 전해지는 11가지 기적을 나열한 것이다. 대부분의 기적은 핀란드에서 일어난 것으로 보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번호 | 기적 내용 | 관련 지역/인물 (추정) |
---|---|---|
1 | 살인자가 주교의 모자를 쓰자 두피가 벗겨짐 | 살인자 |
2 | 주교의 잘린 손가락이 다음 해 봄에 발견됨 | - |
3 | 소년이 죽음에서 부활함 | 카이살라(Kaisala) |
4 | 소녀가 죽음에서 부활함 | 베흐마(Vehmaa) |
5 | 병든 여성이 치유됨 | 사스타말라(Sastamala) |
6 | 프란체스코 수도회 에를렌드 수사의 두통이 치유됨 | 에를렌드 수사 |
7 | 맹인이 시력을 되찾음 | 퀴뢰(Kyrö) |
8 | 다리가 마비된 남자가 다시 걷게 됨 | 퀴뢰(Kyrö) |
9 | 병든 소녀가 치유됨 | - |
10 | 어부들이 폭풍 속에서 살아남음 | 코케매키(Kokemäki) 어부들 |
11 | 헨리 주교를 조롱한 사제가 복통을 겪음 | 스카라(Skara) 사제 |
헨리 전설의 여러 판본에는 이 기적들 중 일부만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
헨리 주교와 그의 핀란드 원정 이야기는 에리크 왕 전설에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13세기 초의 법전인 ''Västgötalagen'' 부록에는 에리크 왕의 업적에 대한 간략한 설명만 있을 뿐, 헨리 주교나 십자군에 대한 언급은 없다.[9] 헨리와 십자군에 대한 내용은 134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에리크 왕 전설의 한 판본에서 처음 등장한다. 두 전설 사이에 사건 내용과 표현의 유사성이 발견되어,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헨리 전설은 늦어도 1280년대 또는 1290년대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1300년 투르쿠 대성당 봉헌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그의 유해로 추정되는 것이 누시아이넨(Nousiainen)에서 투르쿠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처럼 헨리 주교에 대한 기록은 그가 활동했던 시기보다 훨씬 뒤늦게 나타나며 내용도 전설적인 요소가 강하다. 13세기 이전의 역사 기록에서는 헨리 주교나 그가 참여했다는 핀란드 십자군 원정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기록의 부재 때문에 오늘날 일부 역사학자들은 헨리 전설이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그의 역사적 실존에 의문을 표하기도 한다.[49] 실제로 유럽 역사에는 완전히 창작된 성인들의 사례가 존재하며,[49] 헨리 주교나 관련 십자군에 대한 직접적인 동시대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50]
그러나 헨리 주교가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했다는 전설 자체가 그의 실존 가능성을 부정하는 결정적인 근거는 되지 못한다는 반론도 있다. 12세기와 13세기는 혼란스러운 시기였으며, 실제로 많은 주교가 살해당했다.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는 1134년 포테비크 전투(Battle of Fotevik) 이후 "그렇게 많은 주교가 한꺼번에 죽은 적은 없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폭력적인 죽음을 맞이한 다른 주교들의 예로는 1187년의 웁살라 대주교(Archbishop of Uppsala),[51] 1219년의 에스토니아 주교(Bishop of Estonia),[52] 1220년의 린셰핑 주교(Bishop of Linköping) 등이 있다.[53] 이들 역시 살해되었지만 모두 성인으로 추대된 것은 아니었다.
2. 2. 웁살라 주교로서의 헨리

헨리 주교의 성인전인 ''생애(Vita)''는 그가 스웨덴 국왕 성 에리크 시대(12세기 중반)에 웁살라에서 활동한 잉글랜드 출신 주교였다고 전한다. 이 전설은 헨리가 핀란드 주교가 아닌 웁살라 주교였다는 점을 강조하며,[5] 이는 나중에 교회에서도 받아들여진 주장이었다.
그러나 에리크 왕(1156년경–1160년) 시대의 역사 기록에는 헨리라는 이름의 웁살라 주교가 등장하지 않는다. 웁살라 교구의 초기 역사는 1164년 스테판이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54]
후대의 기록들은 헨리를 웁살라 주교와 연결시키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15세기 초에 작성된 웁살라 대주교 연대기(''Incerti scriptoris Sueci chronicon primorum in ecclesia Upsalensi archiepiscoporum'')에는 헨리가 웁살라 주교로 언급되며, 순교 후 핀란드 투르쿠 대성당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연대기는 헨리 전설이 이미 널리 퍼진 후에 쓰였기 때문에, 그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56][57]
15세기 말에 쓰인 ''legenda nova''는 헨리가 교황 사절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훗날 교황 아드리아노 4세)를 따라 스웨덴에 왔으며, 니콜라스에 의해 웁살라 주교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한다.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는 실제로 1153년에 스웨덴을 방문했지만,[58] 그를 수행한 인물 중에 헨리가 있었다거나, 그가 웁살라에 새로운 주교를 임명했다는 기록은 다른 어떤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59] 또한 ''legenda nova''는 헨리의 유해가 1154년에 투르쿠 대성당으로 옮겨졌다고 주장하지만, 투르쿠 대성당은 1290년대에야 지어졌기 때문에 이 주장은 사실과 명백히 다르다.[60] 16세기 말, 주교 파울루스 유스텐은 헨리가 핀란드 원정 전에 2년 동안 웁살라 주교였다고 주장하기도 했다.[60]
이러한 주장들과 달리, 중세 연대기 ''Annales Suecici Medii Aevi''[61]와 13세기 성 보트비드의 전설[62]에는 1129년에 '웁살라의 헨리쿠스 주교'(''Henricus scilicet Upsalensis'')가 성 보트비드의 새로 지어진 교회를 축성하는 데 참여했다는 기록이 있다.[63] 이 헨리는 1134년 포테비크 전투에서 덴마크군과 함께 싸우다 전사한 인물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는 원래 시그투나의 주교였으나 스웨덴에서 추방되어 덴마크로 피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64][65] 만약 이 1129년의 헨리가 나중에 에릭 왕과 함께 핀란드로 갔다고 전해지는 헨리와 동일 인물이라면, 이는 12세기에 웁살라에서 활동하다 죽은 주교에 대한 기억이 후대에 새로운 이야기와 결합되어 재구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66]
더 나아가, 아담 브레멘이 1075년경 저술한 ''Gesta Hammaburgensis ecclesiae pontificum''(함부르크 교회의 주교 행적)에는 "Sueones"(스웨덴인) 사이에서 설교하다 살해당해 순교한 "Hericus"라는 외국인 성직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담은 이 이야기를 스벤 2세 덴마크 왕에게서 들었다고 기록했다.[67] 일부 역사가들은 이 이야기와 후대의 헨리 주교 전설 사이의 유사성이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크다고 지적한다.[68]
2. 3. 핀란드 주교로서의 헨리
헨리의 생애를 다룬 전설(생애(Vita))에 따르면, 그는 웁살라의 주교였으며 핀란드에 머물기는 했지만 정식으로 핀란드 주교로 임명된 적은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5] 이는 나중에 교회 자체에서도 통용된 주장이었다. 전설은 그가 연민으로 핀란드에 머물렀다고 설명할 뿐, 그의 시대 이전에 핀란드에 주교가 있었는지, 그의 사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역사적 기록상 핀란드의 주교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룬 대주교 안데르스 수네센에게 보낸 서한에서 나타난다.[76] 이 서한은 사망한 핀란드 주교의 후임자 임명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사망한 주교의 이름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안데르스 대주교는 핀란드에서 주교직을 맡을 사람을 찾기 어렵다고 토로하며, 공식 자격은 없지만 이미 현지에서 활동 중인 인물을 임명하려 했고 교황은 이를 승인했다.[76] 당시 웁살라의 발레리우스(1207–1219/1224)가 스베르케르 2세와의 정치적 문제로 스웨덴에서 망명하여 덴마크에 머물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54] 이 설교자가 실제로 주교로 임명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보다 앞선 시기인 1171년(또는 1172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핀란드 교회의 상황을 비교적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보낸 서한에서 핀란드의 주교나 교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교황은 스웨덴 출신으로 추정되는 설교자들이 핀란드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핀란드인들에게 좋지 않은 대우를 받는 것에 우려를 표했다.[73] 이는 당시 핀란드에 공식적인 주교가 없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1164년부터 1248년까지 작성된 여러 웁살라 대주교 관할 목록에서도 핀란드 주교나 교구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 없다.[75]
1221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는 핀란드의 이름 없는 주교에게 직접 서한을 보냈다. 이 서한은 발레리우스 대주교가 핀란드 교회의 상황과 "야만인"들의 위협에 대해 교황에게 보고했음을 보여준다. 교황은 이 서한에서 핀란드 교회를 "새롭게" 설립된 것으로 언급했는데, 이는 12년 전 안데르스 대주교의 표현과 일치한다.[79] 그러나 1219년 스웨덴 국왕 요한 스베르케르손의 대관식에 참석한 주교 목록에는 핀란드 주교가 포함되어 있지 않아,[80] 당시 핀란드 주교가 웁살라 대주교의 관할 하에 있었을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75]
핀란드 최초로 이름이 명확히 기록된 주교는 1234년에 처음 언급되는 토마스이다.[71] 15세기와 16세기의 후대 연대기들은 헨리 이후 로드울프와 폴퀴누스가 주교직을 계승했고, 그 뒤 토마스까지 25~30년의 공백기가 있었다고 주장한다.[48] 그러나 1209년 교황 서한에 따르면 전임 주교 사망 직후 후임자 임명이 논의되었으므로 긴 공백기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후대 연대기의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부 연구자들은 초기 핀란드 주교인 로드울프와 폴퀴누스가 스웨덴이 아닌 덴마크에 의해 임명된 13세기 인물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81] 고대 핀란드의 교회 세금 제도가 스웨덴식이 아닌 덴마크식이라는 점,[82] 올란드 제도의 상황[83], 그리고 덴마크 연대기에 기록된 1191년, 1202년, 1210년의 핀란드 원정[84] 등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된다.
3. 전설과 민간 전승
헨리 주교에 대한 전설과 민간 전승은 주로 그의 성인전(''vita''), 기적 이야기, 그리고 핀란드 민요인 Piispa Henrikin surmavirsi|피스파 헨리킨 수르마비르시fi("주교 헨리의 죽음의 노래")를 통해 전해 내려온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다. 민간 전승, 특히 "죽음의 노래"는 헨리 주교의 살해와 관련된 랄리라는 인물과 그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며, 교회의 공식 기록과는 다른 세부 사항들을 포함하고 있다.[36]
3. 1. 성인전과 기적

성인전에 따르면, 핀란드 교회의 설립은 성 에릭 왕과 당시 스웨덴에서 가장 중요한 교구의 주교였던 헨리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다. 성인전은 왕과 주교가 서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두 개의 큰 빛'처럼 스웨덴을 다스렸다고 묘사한다. 이 시기에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이 평화롭게 공존하여 '약탈적인 늑대'가 '무고한 자'를 해치지 못하는 이상적인 시대였다고 그려진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이와 달랐다. 에릭 왕의 전임자, 에릭 왕 자신,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두 명의 왕이 모두 10년 이내에 살해당했으며, 이는 스웨덴 왕실 역사상 매우 혼란스럽고 폭력적인 시기였다. 또한 1150년대에는 웁살라 주교와 링쾨핑 주교 사이에 어느 교구가 대주교구가 될 것인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성인전은 십자군 자체를 "핀란드의 눈멀고 사악한 이교도들"을 기독교 질서 아래 두기 위해 수행된, 짧고 비교적 평화로운 사건으로 묘사한다.
성인전의 저자는 특히 헨리 주교를 겸손한 순교자로 그리는 데 중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핀란드 현지의 민간 전승에서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주교의 죽음, 매장 장소 등과 관련된 내용은 성인전에서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인전과 민간 전승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고, 교회는 점차 성인전에 민간 전승의 세부 사항들을 추가하게 되었다.
주교의 죽음에 대한 민간 전승, 특히 '죽음의 노래(Piispa Henrikin surmavirsi)' 버전은 성인전(vita)의 내용과 차이가 있다. 이 노래에 따르면 주교를 살해한 사람은 랄리라는 인물이다. 랄리의 아내 케르투는 남편에게, 손님으로 왔던 헨리 주교가 감사의 표시도 없이 집을 떠나면서 허락이나 대가 없이 오븐에서 빵을, 지하실에서 맥주를 가져가고 말에게 건초를 먹였으며, 재만 남기고 갔다고 거짓으로 말했다. 이에 격분한 랄리는 즉시 스키를 타고 헨리 주교를 뒤쫓아 에우라의 쾨일리엔얘르비 호수 얼음 위에서 그를 살해했다고 전해진다.[36] 랄리는 살해 후 헨리 주교의 주교관을 벗겨 자신의 머리에 썼다. 랄리의 어머니가 그에게 주교관을 어디서 얻었는지 묻자, 랄리는 그것을 벗으려 했지만, 머리 가죽까지 함께 벗겨져 버렸다고 한다. 랄리는 결국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7세기 버전의 노래는 랄리의 비참한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41]
:이제 주교는 기쁨 속에 있고,
:랄리는 악한 고통 속에 있네.
:주교는 천사들과 함께 노래하며,
:기쁨의 찬가를 부르네.
:랄리는 지옥으로 스키를 타고 내려가네.
:그의 왼쪽 스키가 미끄러지네.
:고통의 짙은 연기 속으로.
:그의 지팡이로 그는 휘두르네.
:악마들이 그를 잔혹하게 괴롭히네.
:지옥의 열기 속에서
:그들은 그의 불쌍한 영혼을 공격하네.
이 이야기는 17세기 노래 버전으로 만들어져, 헨리 주교가 마지막으로 지나간 길을 따라 매년 열리는 순례 행사에서 공연되기도 했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 버전에서는 랄리가 사용한 무기가 칼이었다고 묘사된다. 하지만 도끼는 핀란드에서 흔히 사용되었고, 성 올라프의 살해 무기이기도 했기 때문에 헨리 주교의 전설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41] 랄리는 상류층 인물로 묘사되지 않았으므로 값비싼 무기인 칼보다는 도끼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역사적으로 더 높다고 여겨진다.
헨리 주교는 죽기 직전, 자신의 마부에게 남은 시신 조각들을 파란 끈으로 묶은 천에 모아 종마가 끄는 마차에 실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종마가 지치면 황소로 바꾸고, 그 황소가 멈추는 곳에 교회를 지으라고 유언했다.[36] 이 장소가 바로 헨리 주교의 유해가 안치될 곳, 즉 노우시아이넨 교회가 되었다.
중세 민간 전승에는 주교를 살해한 랄리에게 닥친 여러 재앙과 불행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전리품으로 가져간 주교관을 벗을 때 머리카락과 두피가 함께 떨어져 나갔고, 주교의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내자 손가락 뼈만 남았다고 한다. 결국 랄리는 호수로 달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진다.[36][44]
3. 2. 핀란드 민간 전승: "주교 헨리의 죽음의 노래"
헨리에 관한 여러 민속 전승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민요 "주교 헨리의 죽음의 노래"(''Piispa Henrikin surmavirsi'')이다. 이 노래는 헨리의 생애나 사역보다는 그의 죽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36]노래에 따르면 헨리는 "양배추 땅"(''Kaalimaa'')에서 자랐다고 하는데, 이 지명은 오랫동안 핀란드 역사가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 이름은 핀란드 남서부 해안 지역인 칼란트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 칼란트는 상부 사타쿤타의 베실라hti 출신 초기 설교자와 관련하여 언급되기도 하는데, 이 설교자는 "칼란드의 물고기"(''Kalannin kala'', 또는 ''Hunnun herra'')라는 별명으로 불렸다.[37] 미카엘 아그리콜라 주교는 1548년 그의 저서 ''세 브시 테스타멘티''에서 핀란드에 처음 정착한 스웨덴인들이 고틀란드에서 칼란드의 해안 섬으로 왔으며, 핀란드인들의 괴롭힘 때문에 스웨덴 본토의 친척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기록했다.[38] 일각에서는 이 이름이 주교의 스코틀랜드 기원을 나타내는 스코틀랜드 게일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전설상으로는 그가 잉글랜드 출신이라고 전해진다.[39]
민간 전승에는 십자군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에릭 왕은 노래 서문에서 헨리를 걱정하는 "형제"로 잠시 등장할 뿐이다. 헨리는 핀란드 남서부를 홀로 다니며 설교하는 외로운 인물로 그려지며, 이름 외에는 교회의 공식 기록(비타, vita)에 나오는 헨리와 공통점이 거의 없다.[42]
코케매키는 헨리가 설교했던 장소로 자주 언급되며, 나중에 사타쿤타의 중심 교구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지역은 1331년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40]
주교의 죽음에 대한 노래의 내용은 공식 기록(비타)과 차이가 있다. 노래 속 살해범은 랄리라는 이름의 농부이다. 랄리의 아내 케르투는 남편에게, 손님으로 왔던 헨리가 감사할 줄 모르고 집을 떠나면서 허락이나 대가 없이 오븐에서 빵을, 지하실에서 맥주를, 마구간에서 건초를 가져갔으며 재만 남기고 갔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격분한 랄리는 즉시 스키를 타고 헨리를 뒤쫓아 에우라의 쾨일리엔얘르비 호수 얼음 위에서 그를 따라잡아 살해했다고 전해진다.[36] 랄리는 살해 후 헨리의 모자인 미트라를 벗겨 자신의 머리에 썼다. 랄리의 어머니가 모자를 어디서 얻었는지 묻자 그가 모자를 벗으려 했으나, 모자와 함께 두피까지 벗겨져 버렸다. 랄리는 결국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17세기에 기록된 노래 버전은 랄리의 최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41]
:이제 주교는 기쁨 속에 있고,
:랄리는 악한 고통 속에 있네.
:주교는 천사들과 함께 노래하며,
:기쁨의 찬가를 부르네.
:랄리는 지옥으로 스키를 타고 내려가네.
:그의 왼쪽 스키가 미끄러지네.
:고통의 짙은 연기 속으로.
:그의 지팡이로 그는 휘두르네.
:악마들이 그를 잔혹하게 괴롭히네.
:지옥의 열기 속에서
:그들은 그의 불쌍한 영혼을 공격하네.
이 이야기는 17세기 버전의 노래가 헨리의 마지막 여정을 따라 매년 열리는 순례 행사에서 불렸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더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부 노래 버전에서는 랄리의 무기가 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끼는 핀란드에서 매우 흔한 도구였고, 헨리 전설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는 성 올라프 살해 당시 사용된 무기이기도 했다.[41] 또한 랄리는 상류층 인물로 묘사되지 않으므로 값비싼 무기인 칼보다는 도끼가 역사적으로 더 개연성 있는 살해 도구로 여겨진다.
헨리는 죽기 직전, 자신의 마부에게 남은 시신 조각들을 파란 끈으로 묶은 천에 모아 종마가 끄는 마차에 실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종마가 지치면 황소로 바꾸고, 황소가 멈추는 곳에 교회를 지으라고 유언했다.[36] 이 장소가 헨리의 유해가 안치될 곳이었다.
중세 민간 전승은 주교를 살해한 랄리에게 닥친 여러 재앙과 불행을 상세히 묘사한다. 전리품으로 가져간 주교의 모자를 벗을 때 머리카락과 두피가 함께 떨어져 나갔다고 전해진다. 또한 주교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자 손가락의 살이 사라지고 뼈만 남았다고 한다. 결국 랄리는 호수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36][44]
4. 헨리 숭배와 유해
헨리 주교는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공식적으로 시성된 적은 없지만, 13세기 말부터 핀란드의 투르쿠 교구를 중심으로 성인으로 숭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숭배는 점차 스웨덴을 포함한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으나,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의 유해는 처음 노우시아이넨에 안치되었다가 이후 투르쿠 대성당으로 옮겨졌다고 전해지며, 이 유해의 행방과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남아있다.
4. 1. 헨리 숭배의 발전

헨리에 대한 숭배가 시작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지만, 스웨덴 전역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기까지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1344년까지 웁살라 대성당에는 헨리 주교의 유물이 없었다. 한 전기 작가에 따르면, 헨리에 대한 숭배는 14세기 내내 투르쿠 교구 밖에서는 드물었다. 린셰핑 근처의 바드스테나 수도원은 15세기 초 스웨덴 다른 지역에 헨리의 전설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헨리는 웁살라에서 가장 높은 등급인 'totum duplex' 숭배를 받지 못했으며, 투르쿠와 노우시아이넨에서처럼 교회의 수호성인('patronus')으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스웨덴의 로마 가톨릭 시대가 끝날 무렵, 헨리는 지역 성인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헨리를 숭배하는 스웨덴 및 다른 지역의 교구는 그의 지역적 지위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되었다.
헨리는 북부 독일에도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지만, 로마 가톨릭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대체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투르쿠 주교령에서 헨리의 연례 축일은 1월 20일(''talviheikki'', "겨울 헨리")이었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그의 사망일로 여겨졌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더 유명한 성인들이 1월 20일에 기념되었기 때문에, 1월 19일에 그의 기념일이 거행되었다. 종교 개혁 이후 핀란드에서도 헨리의 날은 1월 19일로 변경되었다.[31] 이 축일의 존재는 1335년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15세기 초부터 전례 달력에 표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다른 기념일은 6월 18일(''kesäheikki'', "여름 헨리")에 열렸는데, 이는 그의 유해가 투르쿠 대성당으로 옮겨진 날이었다.
헨리를 기리는 미사의 입당송인 ''Gaudeamus omnes'' ("모두 기뻐하라")는 14세기 말 또는 15세기 초의 ''Graduale Aboense''라는 문서 내에 기록되어 전해진다.[33]
4. 2. 유해 논란
전승에 따르면 헨리 주교는 노우시아이넨에 처음 묻혔다고 한다.[85] 그의 유해, 혹은 최소한 그의 유해로 여겨지는 일부는 1300년에 투르쿠로 옮겨졌다.[85] 전승 외에 노우시아이넨과 초기 주교들을 연결하는 유일한 출처는 1234년 노우시아이넨에서 토마스 주교가 서명한 서한이다.[86]주교의 무덤이 그가 성인으로 추대된 후 늦어도 노우시아이넨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중세 문서에서는 주교의 무덤이 지역 교회에 계속 위치해 있었다고 언급하는데, 이는 모든 유해가 투르쿠로 옮겨진 것은 아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88] 노우시아이넨 교회는 나중에 15세기의 웅장한 가묘로 장식되었으며, 그 복제품은 헬싱키의 핀란드 국립 박물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89]
투르쿠에 있던 대부분의 유해는 1720년, 대북방 전쟁 중 핀란드를 점령한 러시아 군대가 러시아로 이송하기 위해 목록화할 때까지 제자리에 있었다. 이송을 지시한 인물은 전쟁 중 러시아 측으로 귀순하여 핀란드의 엄혹한 점령을 담당했던 스웨덴 귀족 구스타프 오토 더글러스 백작이었다.[90] 그 이후 유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유물을 운송하던 러시아 선박이 항해 중에 침몰했다고 한다.[88]
그러나 헨리의 척골 일부는 1514년에 건설되어 대성당에서 소중히 여겨졌던 주교 헤밍의 유물함에 보관되어 전해졌다. 또한 뼈가 헨리의 것이라고 명시된 양피지 조각도 함께 보관되었다. 대성당 복원 작업 중에 이 유물은 핀란드 국립 고고학 위원회로 옮겨졌다.[92] 이후 헬싱키의 성 헨리 대성당 제단 안에 안치되었다.[91]
1924년, 턱이 없는 두개골과 몇 개의 다른 뼈가 투르쿠 대성당의 밀봉된 벽장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대중 매체와 심지어 교회에서도 헨리의 유물이라고 언급되지만, 이러한 지정은 추측에 불과하며 뼈는 다른 성인의 것일 수도 있다. 이 뼈는 현재 투르쿠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다.[92]
5. 현대적 의의와 유산
헨리 주교는 핀란드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록 공식적인 시성 절차를 거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핀란드의 가톨릭 교회와 복음주의 루터교회 모두에서 성인으로 인정받으며 종교적 존경의 대상이다.[93][94][95] 그의 이야기는 핀란드의 정체성 형성과 연결되어 정치적, 사회문화적으로도 해석되며, 순례지 운영, 축일 기념, 지역 문장 도안 활용 등 현대에도 그의 유산은 뚜렷하게 남아있다.[99][101] 또한, 대중문화 속에서도 그의 이야기가 소재로 활용되는 등[103] 헨리 주교는 핀란드 역사와 문화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5. 1. 정치적, 사회문화적 영향
헨리 주교에 대한 전설은 핀란드 교회의 설립을 스웨덴의 성 에릭 왕과 연결 짓는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전설에 따르면, 왕과 주교는 서로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스웨덴을 다스렸으며, 이는 세속 권력과 교회 권력의 이상적인 공존을 강조한다. 전설은 이 시기를 '무고한 자'들이 '약탈적인 늑대'의 위협 없이 평화롭게 살았던 행복한 시대로 묘사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는 이와 달랐다. 에릭 왕의 전임자, 에릭 자신, 그리고 그의 두 후계자는 모두 10년이 채 안 되는 기간 동안 살해당했으며, 이는 스웨덴 왕족 역사상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또한 1150년대에는 웁살라 주교와 린셰핑 주교 사이에 어느 교구가 대주교구가 될지를 두고 격렬한 다툼이 있었다. 전설 속에서 제1차 스웨덴 십자군은 "핀란드의 눈멀고 사악한 이교도들"을 기독교 질서 아래 두기 위한 짧고 평화로운 사건으로 묘사된다. 전설의 작성자는 헨리 주교를 겸손한 순교자로 그리는 데 집중했으며, 핀란드 민간 전승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다른 요소들은 의도적으로 배제한 것으로 보인다. 시간이 흐르면서 교회 전승과 민간 전승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성 헨리에 대한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었다.
헨리에 대한 숭배는 투르쿠에서 시작되었으나, 스웨덴 전역으로 퍼지는 데는 100년 이상이 걸렸다. 1344년까지 웁살라 대성당에는 헨리 주교의 유물이 없었으며, 14세기까지 헨리 숭배는 투르쿠 교구 밖에서는 드물었다. 15세기 초, 린셰핑 근처의 바드스테나 수도원이 스웨덴 다른 지역에 헨리 전설을 확산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웁살라에서는 헨리가 가장 높은 등급의 숭배 대상('totum duplex')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투르쿠나 노우시아이넨처럼 교회의 수호성인('patronus')으로 지정되지도 않았다.
스웨덴의 로마 가톨릭 시대 말기에 헨리는 지역 성인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스웨덴 및 인접 지역 교구에서 헨리 숭배 등급은 다음과 같이 나뉘었다.
헨리는 북부 독일에도 알려졌던 것으로 보이나, 로마 가톨릭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투르쿠 주교령에서는 헨리의 축일을 전통적으로 그의 사망일로 여겨지는 1월 20일(''talviheikki'', "겨울 헨리")에 기념했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더 유명한 성인들이 1월 20일에 기념되었기 때문에 1월 19일에 헨리의 축일을 지냈다. 종교 개혁 이후 핀란드에서도 헨리의 날은 1월 19일로 변경되었다.[31] 이 축일은 1335년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15세기 초부터 전례 달력에 표시되었다. 또 다른 축일은 그의 유해가 투르쿠 대성당으로 옮겨진 날인 6월 18일(''kesäheikki'', "여름 헨리")이었다. 헨리를 기리는 미사의 입당송인 ''Gaudeamus omnes'' ("모두 기뻐하라")는 14세기 말 또는 15세기 초의 ''Graduale Aboense''라는 문서에 기록되어 전해진다.[33]
헨리는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시성된 적은 없다. 그러나 1296년 교황 문서에서 이미 성인으로 불렸으며,[21]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인으로 여겨진다.[93][94] 그의 성인 인정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시성 절차가 확립되기 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복음주의 루터교회와 캐나다 복음주의 루터교회의 기념 달력에서는 1월 19일에 헨리를 기념한다.[95] 1월 19일은 스웨덴과 핀란드에서 헨리의 이름날이기도 하다 (소위 "헤이킨패이바").[96] 그는 핀란드 가톨릭 교회에서 지역 성인으로 계속 기억되고 있으며, 핀란드의 유일한 가톨릭 대성당인 성 헨리 대성당은 그에게 봉헌되었다.[97] 이 대성당은 1860년에 봉헌되었다.[98]
쾨일리외의 키르코카리 섬은 핀란드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가톨릭 순례지이며, 매년 하지 축제 전 6월 둘째 주 일요일에 기념 예배가 열린다. 또한, 중세 시대의 순례길인 약 140km 길이의 "성 헨리의 길"은 쾨일리에서 노우시아이넨까지 이어지며, 순례자들을 위해 경로가 표시되어 있다.[99] "성 헨리 종교 통합 순례" 협회가 이 순례 행사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100]
헨리 주교의 활동에 대한 민간 전승을 바탕으로 노우시아이넨, 쾨일리(현재 새키래의 일부), 코케매키 자치구는 그들의 문장에 헨리 전설과 관련된 이미지를 사용한다.[101] 오늘날 헨리와 그의 살인자로 알려진 농부 랄리는 핀란드 중세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인물 중 하나로 남아 있다.[102]
5. 2. 대중문화 속 헨리 주교
헨리 주교가 쾨일리외 호수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야기는 핀란드의 메탈 밴드인 문소로우의 곡 'Köyliönjärven jäällä|쾨일리외년얘르벤 얘앨래fin'(쾨일리외 호수의 얼음 위에서)의 주제가 되었다.[10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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