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무트 라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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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무트 라헨만은 독일의 작곡가로, 슈톡하우젠의 영향을 받아 구체음악 기악을 발전시켰다. 그는 특수 주법과 '전통의 이화' 전략을 통해 슈톡하우젠 이후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리 잡았다. 1970년대 말부터 특수 주법과 함께 리듬 폴리포니와 음역 치환을 활용했으며,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아 시간 구성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오페라 "성냥팔이 소녀", "아칸토", "Mouvement (- vor der Erstarrung)" 등이 있으며, 2015년 독일 음악 작가상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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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라헨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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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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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935년 11월 27일 |
출생지 | 슈투트가르트, 독일 |
학력 및 경력 | |
교육 | 슈투트가르트 음악 연극 대학교 |
직업 | 작곡가, 학자, 에세이스트 |
소속 | 하노버 음악 연극 미디어 대학교 |
수상 | |
수상 내역 | 함부르크 자유 한자 도시 바흐 상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BBVA 재단 지식의 최전선 상 |
2. 생애
헬무트 라헨만은 1935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당시 11세) 지역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10대 시절에 이미 작곡을 할 정도로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16]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위르겐 우데에게 피아노를, 요한 네포무크 다비트에게 작곡과 이론을 배웠다.[1]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베네치아에서 루이지 노노의 첫 개인 제자로 가르침을 받았다.
1965년에는 겐트 대학교의 전자 음악 스튜디오에서 잠시 일하며 테이프 작품 ''Szenario''를 작곡했지만, 이후로는 거의 기악 음악에 전념했다.[1] 그의 음악은 구체음악 기악으로 불리며,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모든 소리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이 특징이다. 프란시스코 에스테베스는 그의 작품을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에 비유하기도 했다.[1]
1978년부터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 하계 강좌에서 정기적으로 강의했으며,[16]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하노버 국립음악대학교에서,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작곡을 가르쳤다. 그의 강의는 ''실존적 경험으로서의 음악'' (브라이트코프 & 하르텔, 비스바덴, 1996년)에 수록되어 있다.
함부르크 자유 한자 도시 바흐 상(1972년),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1997년), BBVA 재단 지식의 경계상(2010년) 등 다수의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다.[1]
일본 피아니스트 스가와라 유키코와 결혼했으며,[3] 아버지는 개신교 목사, 어머니는 교회 음악가, 형 역시 목사인 가정에서 성장했다.[5][6]
2. 1. 초기 생애와 교육
헬무트 라헨만은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당시 11세) 지역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16]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십 대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1]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위르겐 우데에게 피아노를, 요한 네포무크 다비트에게 작곡과 이론을 배웠다.[1]1958년부터 1960년까지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작곡가 루이지 노노의 첫 번째 개인 제자가 되어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1] 라헨만은 노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그의 저작집에 "이것은 라헨만이 쓴 것이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노노의 고스트 라이터 역할도 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침묵'과 '노이즈'에 대한 그의 음악적 성향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와 교회 음악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성장했으며, 형도 목사인 가정에서 자랐다.[5][6] 이러한 종교적 배경은 그가 슈투트가르트 국립 음악 연극 대학교에서 피아노와 이론을 공부하고, 교회 음악가였던 요한 네포무크 다비트를 첫 스승으로 삼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2. 2. 전위 음악과의 만남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난 헬무트 라헨만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당시 11세) 지역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16]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던 그는 10대 시절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1955년부터 1958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위르겐 우데에게 피아노를, 요한 네포무크 다비드에게 작곡과 이론을 배웠다.[1]이후 장학금을 받아 이탈리아 베네치아로 건너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루이지 노노의 첫 번째 개인 제자가 되었다. 라헨만은 노노의 저작집에 "이것은 라헨만이 쓴 것이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노노의 측근으로 활동하며, 그의 고스트 라이터 역할까지 수행했다.[5][6] 이러한 경험은 훗날 라헨만이 '침묵'과 '노이즈'를 선호하는 음악적 경향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후 슈톡하우젠의 쾰른 강좌에 두 번이나 장학금을 받아 참가하면서 전위 음악 이론에 큰 영향을 받았고, 불레즈에게도 공감했다. 브라이언 퍼니호우와 함께 다름슈타트 하계 현대 음악 강습회의 단골 강사로 활동하며 포스트 시리얼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2. 3. 교육 활동
1978년부터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 하계 강좌에서 정기적으로 강의했다.[16] 1976년부터 1981년까지 하노버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음악 이론, 청음 훈련 및 작곡을 가르쳤으며, 1981년부터 1999년까지 슈투트가르트 국립음악대학교에서 작곡을 가르쳤다.[1]최근 하노버와 슈투트가르트 음악 대학원에서 작곡과 교수로 재직하며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쿠보 마야코, 라이 타카유키[10], 고바야시 아케미[11], 심광수, 마르크-앙드레 달바비 등을 제자로 배출했다. 현재 라이 타카유키를 제외한 모든 제자가 유럽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지도 방침은 "듣는 것은 무방비 상태다, 듣는 것 없이는!"으로 유명하며, 그의 제자들은 근본적으로 음악의 규칙을 의심하는 경향이 많다.
2009년 무사시노 다케미쓰 도루 작곡상 심사위원으로 선정되었을 때, "저는 과감하게 자신의 성향(nature)에 따르기로 하고, 먼저 4곡을 골랐습니다"라고 말했다.[12]
2. 4. 개인적인 삶
라헨만은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그가 11세였을 때) 지역 교회 합창단에서 노래를 시작했다.[16] 어린 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보였으며, 십 대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1] 부친은 개신교 목사였고, 모친은 교회 음악가였으며, 형도 목사인 가정[5][6]에서 성장했다. 일본 피아니스트 스가와라 유키코와 결혼했다.[3]3. 음악적 특징
헬무트 라헨만은 자신의 음악을 "구체음악 기악"이라고 칭하며,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다양한 소리의 세계를 탐구하는 음악 언어를 추구했다.[2] 그의 음악은 가장 기본적인 소리에서 출발하여 증폭 과정을 거쳐 확장되며, 악기 연주자에게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다양한 기법을 사용한다.
라헨만은 루이지 노노에게서 사사하며 '침묵'과 '노이즈'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5][6] 1970년대 말 이후, 그는 특수 주법을 활용하면서도 리듬 폴리포니와 음역 치환 등을 통해 밀도 높은 음악을 구축했다.
그는 "전통의 이화(異化)"라는 전략을 통해 슈톡하우젠 이후 독일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작곡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영향은 마티아스 슈파링어, 게랄트 에케르트 등 여러 제자들의 작품에서 나타난다. 그러나 "먼지"라는 작품에서는 베토벤의 제9번을 이화하여 독일 내에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3. 1. 구체음악 기악
라헨만은 자신의 작품을 ''구체음악 기악''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운드 세계를 포괄하는 음악 언어를 의미한다. 작곡가에 따르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음악이다.따라서 그의 음악은 주로 가장 기본적인 소리에서 파생되며, 증폭 과정을 통해 확장된 작품의 기초가 된다. 그의 악보는 관악기, 금관악기 및 현악기를 위해 발명한 다양한 기법으로 인해 연주자에게 엄청난 요구를 한다.
3. 2. 특수 주법의 활용
라헨만은 자신의 작품을 ''구체음악 기악''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운드 세계를 포괄하는 음악 언어를 의미한다. 그의 음악은 주로 가장 기본적인 소리에서 파생되며, 증폭 과정을 통해 확장된 작품의 기초가 된다. 그의 악보는 관악기, 금관악기 및 현악기를 위해 발명한 다양한 기법으로 인해 연주자에게 엄청난 요구를 한다.1970년대 말 이후에는 사용하는 특수 주법이 점차 모방 및 학습하기 쉬운 유형으로 기울었지만, 리듬 폴리포니와 음역 치환 등을 적극 활용하여 밀도를 높이는 방침을 채택했기 때문에 결코 듣는 이가 싫증을 느끼는 일은 없다.
3. 3. 침묵과 소음의 활용
라헨만은 자신의 작품을 ''구체음악 기악''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운드 세계를 포괄하는 음악 언어를 의미한다. 작곡가에 따르면,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음악이다.[2]따라서 그의 음악은 주로 가장 기본적인 소리에서 파생되며, 증폭 과정을 통해 확장된 작품의 기초가 된다. 그의 악보는 관악기, 금관악기 및 현악기를 위해 발명한 다양한 기법으로 인해 연주자에게 엄청난 요구를 한다.
이후 루이지 노노에게서 사사하며 '침묵', '노이즈'에 대한 그의 편애를 가지게 되었다.[5][6]
3. 4. 전통의 이화(異化)
라헨만은 자신의 작품을 ''구체음악 기악''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운드 세계를 포괄하는 음악 언어를 의미한다.[2] 작곡가에 따르면, 이것은 사운드 이벤트가 선택되고 구성되는 방식이 결과적인 음향적 특성 자체만큼이나 중요한 음악이다. 결과적으로, 음색, 볼륨 등과 같은 특성은 그 자체를 위해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거나 지칭한다. 즉, 청취자는 소리 또는 소음의 작용이 수행되는 조건을 듣고, 어떤 재료와 에너지가 관여하고 어떤 저항이 발생하는지 듣는다.[2]따라서 그의 음악은 주로 가장 기본적인 소리에서 파생되며, 증폭 과정을 통해 확장된 작품의 기초가 된다. 그의 악보는 관악기, 금관악기 및 현악기를 위해 발명한 다양한 기법으로 인해 연주자에게 엄청난 요구를 한다.
전위의 침체 이후, 특수 주법을 사용한 작곡가들은 대부분 매력을 잃었지만, "전통의 이화" 작용이라는 큰 전략이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는 형태로 나타나 열렬한 지지와 함께 슈톡하우젠 이후의 독일을 대표하는 핵심적인 작곡가로 여겨지게 되었다. 마티아스 슈파링어, 게랄트 에케르트, 요하네스 칼리츠케|Johannes Kalitzkede, 베아트 풀러, 게르하르트 빈클러|Gerhard Winklerde 및 기타 제자들의 작품에 영향이 직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1970년대 말 이후에는 사용하는 특수 주법이 점차 모방 및 학습하기 쉬운 유형으로 기울었지만, 리듬 폴리포니와 음역 치환 등을 적극 활용하여 밀도를 높이는 방침을 채택했기 때문에 결코 듣는 이가 싫증을 느끼는 일은 없다. "먼지"에 이르러서는 베토벤의 제9번의 이화를 수반하기 때문에 독일 국내의 금기에 접촉하여, 남서 독일 방송 교향악단으로부터 연주 거부를 당한 적이 있다.
4. 주요 작품
헬무트 라헨만은 구체음악 기악이라는 독자적인 작곡 기법을 발전시켜 현대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 작품들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17]
제목 | 구성 | 초연 연도 | 비고 |
---|---|---|---|
프란츠 슈베르트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곡 | 피아노 | 1956 | C-샤프 단조의 독일 무곡, D643 |
론도 | 두 대의 피아노 | 1957 | |
추억 | 41개 악기 | 1959 | |
두 개의 기교 | 관현악 | 1960 | |
트리플세테트 | 18개 악기 | 1960–1961 | 분실 |
다섯 개의 연 | 9개 악기 | 1961 | 철회 |
에코 안단테 | 피아노 | 1961–1962 | |
안젤리온 | 16개 악기 | 1962–1963 | 철회 |
자장가 | 피아노 | 1963 | |
인트로버전 I | 18개 악기 | 1963 | 철회 |
인트로버전 II | 8개 악기 | 1964 | 철회 |
시나리오 | 테이프 | 1965 | |
현악 3중주 I |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 1965 | |
인테리어 I | 타악기 연주자 한 명 | 1966 | |
녹턴 | 소규모 관현악과 첼로 솔로 | 1966/1967 | |
트리오 플루이도 | 클라리넷, 비올라, 타악기 | 1966/1968 | |
위로 I | 12개의 목소리와 타악기 | 1967 | |
템A | 플루트, 목소리, 첼로 | 1968 | |
위로 II | 16개의 목소리 | 1968 | |
에어 | 타악기 솔로와 함께 대규모 관현악 | 1968–1969 | |
프레시옹 | 첼로 | 1969–1970 | 2010년 개정 |
달 니엔테 (인테리어 III) | 클라리넷 | 1970 | |
Guero (Lachenmann)|구에로de | 피아노 | 1970 | |
콘트라카덴츠 | 대규모 관현악 | 1970–1971 | |
몽타주 |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 | 1971 | |
클랑샤텐 – 마인 자이텐슈필 | 세 대의 콘체르트플뤼겔(피아노포르테)와 현악 앙상블 | 1972 | |
그란 토르소 | 현악 4중주 | 1972 | |
파사드 | 대규모 관현악 | 1973 | |
슈반쿵겐 암 란드 | 판금 및 현악기 | 1974–1975 | |
두 개의 습작 | 바이올린 | 1974 | |
아칸토 | 클라리넷 솔로와 관현악 | 1975–1976 | |
레 콩솔라시옹 | 합창단과 관현악 | 1976–1978 | |
살루트 퓌어 카우드웰 | 두 명의 기타리스트 | 1977 | |
탄츠스위트 미트 도이칠란트리트 | 관현악과 현악 4중주 | 1979–1980 | |
아인 키르너슈필 | 피아노 | 1980 | 일곱 개의 작은 곡 |
하모니카 | 대규모 관현악과 튜바 솔로 | 1981–1983 | |
무브망(- 전에) | 앙상블 | 1982/1984 | |
아우스클랑 | 피아노와 관현악 | 1984–1985 | |
Dritte Stimme zu J.S. Bachs zweistimmiger Invention d-moll BWV775 | 세 개의 악기 | 1985 | J. S. 바흐의 두 성부 인벤션 d단조 BWV 775에 대한 세 번째 목소리 |
슈타웁 | 관현악 | 1985–1987 | |
토카티나 | 바이올린 | 1986 | |
알레그로 소스테누토 |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 | 1986–1988 | |
타블로 | 관현악 | 1988 | |
행복한 영혼의 춤 | 현악 4중주 | 1989 | |
"...두 가지 감정..." | 스피커와 앙상블 | 1992 | 레오나르도와 함께 |
성냥팔이 소녀 | 매우 큰 관현악과 솔리스트 | 1988–1996 | 무지크 미트 빌더 (무지크테아터), 그림이 있는 음악 - 극장 음악 |
세레나데 | 피아노 | 1998 | |
눈 | 플루트, 트롬본, 남성 합창단, 관현악 | 1999 | |
사쿠라 변주곡 | 색소폰, 타악기, 피아노 | 2000 | |
제3 현악 4중주 "그리도" | 현악 4중주 | 2001 | |
슈라이벤 | 관현악 | 2003 | |
더블 (그리도 II) | 현악 오케스트라 | 2004 | |
콘체르티니 | 대규모 앙상블 | 2005 | |
...길을 잃었다... | 소프라노와 피아노 | 2008 | |
사쿠라 미트 베를리너 루프트 | 색소폰, 피아노, 타악기 | 2008 | |
마르셰 파탈 | 피아노 | 2016–1917 | |
베를리너 키르슈블뤼텐 | 피아노 | 2016–1917 | |
마르셰 파탈 | 관현악 | 2017 | |
나의 멜로디 | 여덟 개의 호른과 관현악 | 2012–1918 |
라헨만은 자신의 작품을 '구체음악 기악'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사운드 세계를 포괄하는 음악 언어를 의미한다.[2] 그의 음악은 주로 가장 기본적인 소리에서 파생되며, 증폭 과정을 통해 확장된 작품의 기초가 된다.
1970년대 말 이후 라헨만은 특수 주법을 점차 모방 및 학습하기 쉬운 유형으로 사용했지만, 리듬 폴리포니와 음역 치환 등을 적극 활용하여 밀도를 높이는 방침을 채택했다. 1980년대에는 각종 국제 마스터 클래스를 통해 명성을 얻었으며, 일본인과 재혼한 후 동양 문화에 대한 경향이 작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4. 1. 오페라 "성냥팔이 소녀" (1990-96)
1997년에 초연되었다. 대본에는 이 작품 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독일 적군의 창설자 중 한 명인 구드룬 엔슬린의 텍스트가 사용되었다.[13] 전편이 그의 작곡 어법인 다양한 악기의 특수 주법을 구사한 소음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추위로 언 손을 비비는 표현으로 공연장에 배치된 합창단이 사포를 갈거나, 후반부에 성냥을 긋는 장면에서는 마찰음을 연상시키는 음향이 다양한 악기 음으로 연주된 후, 지금까지 눈보라 등의 장면적인 음향(작곡가 왈 "생 악기에 의한 뮤지크 콩크레트")을 표현했던 것이 "진수성찬을 보는" 등의 환영적인 표현으로서의 음향으로 바뀐다. 또한 유일하게 무대에 오르는 등장인물인 주인공 소녀는 혀 차는 소리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아리아를 연주하는 기발한 음향이 구사된다. 마지막으로 소녀가 승천하는 장면에서는 일본의 가악 악기인 생이 사용된다. 초연을 포함한 많은 공연에서 미야타 마유미가 연주를 담당했다.세계 초연은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고 야유도 있었지만, 전위적인 연출에 따르는 것으로 스캔들로 여겨질 정도는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도쿄 교향악단이 2000년에 연주회 형식으로 개정고를 초연했다. 당시 주최 측의 일부 홍보가 마치 동화적인 이해하기 쉬운 오페라를 의도한 것처럼 보도되었기 때문에 라헨만의 작풍을 몰랐던 관객은 충격을 받았지만, 종연 후에는 공격적인 야유 등은 없고 온건한 박수에 휩싸였다.
프랑스에서는 2001년 9월 15일에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지만, 공연장 관객 대부분이 종연 직후 야유를 퍼부었고, 일부 관객이 대항하여 박수를 쳤지만 겨우 몇 명이 드문드문 손뼉을 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리하르트 바그너의 『탄호이저』 프랑스 초연이나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 초연을 연상시키는 스캔들이 되었다.
이러한 최초의 초연 이후 몇몇 상연에서의 연출에서는 소녀 역이 백색 칠을 한 스킨헤드인 "암흑 무도"풍의 안무로 표현되었다. 그 후 독일 슈투트가르트 초연은 몇 명이 객석에서 떠났지만, 세 시즌에 걸쳐 열 몇 번의 티켓은 모두 매진되었다.
라헨만의 작력 전체에서 보면 이 오페라는 지금까지의 그의 작풍에 없는 새로운 표현을 목표로 한 최전위의 작품이 아니라, 그동안 그의 과거 작곡 기법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 1막에 연주 시간은 2시간, 4관 편성의 관현악으로, 일렉트릭 기타 등의 특수한 편입 악기도 포함한다. 일본에서 현재 2 종류(KAIROS 레이블의 독일 세계 초연 녹음 및 ECM 레이블의 일본 초연 녹음)의 CD가 발매되어 있으며, 해외에서는 슈투트가르트 초연의 CD, SWR의 바덴바덴의 CD도 있다. ECM에서 발매된 "도쿄고"는 오페라의 핵심으로 여겨졌던 "...두 개의 감정..."의 기악 부분이 완전히 개작되어, 더욱 정적을 강조한 구조가 되었다. 이 버전에서는 악보는 발매되지 않았다.
4. 2. "Accanto" (1975-76)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테이프가 사용되지만, 단순히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음량을 조절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어 청중은 불현듯 나타나는 모차르트의 단편을 인식하는 순간 노이즈와 침묵의 바다에 빠져든다.[14] 이러한 인용은 그가 선구자는 아니지만, 포스트 전위의 사고를 강조하는 것으로 크게 논해진다. 곡 후반은 펄스가 풍부하게 사용되는데, 이것 또한 "포스트 전위"임을 증명한다.4. 3. "Mouvement (- vor der Erstarrung)" (1982-84)
Mouvement (- vor der Erstarrung)|무브망(- 경직 전)de은 1982년부터 1984년에 걸쳐 작곡된 앙상블을 위한 곡이다.[17] 헬무트 라헨만은 이 곡을 통해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인 구체음악 기악을 더욱 발전시켰다.4. 4. 현악 사중주
- 그란 토르소(Gran Torso), 현악 사중주 (1972)[17]
- 행복한 영혼의 춤(Reigen seliger Geister), 현악 사중주 (1989)[17]
- 제3 현악 사중주 "그리도"(Grido), 현악 사중주 (2001)[17]
4. 5. 그 외 주요 작품
제목 | 구성 | 초연 연도 | 비고 |
---|---|---|---|
프란츠 슈베르트 주제에 의한 다섯 개의 변주곡 | 피아노 | 1956 | C-샤프 단조의 독일 무곡, D643 |
론도 | 두 대의 피아노 | 1957 | |
추억 | 41개 악기 | 1959 | |
두 개의 기교 | 관현악 | 1960 | |
트리플세테트 | 18개 악기 | 1960–1961 | 분실 |
다섯 개의 연 | 9개 악기 | 1961 | 철회 |
에코 안단테 | 피아노 | 1961–1962 | |
안젤리온 | 16개 악기 | 1962–1963 | 철회 |
자장가 | 피아노 | 1963 | |
인트로버전 I | 18개 악기 | 1963 | 철회 |
인트로버전 II | 8개 악기 | 1964 | 철회 |
시나리오 | 테이프 | 1965 | |
현악 3중주 I |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 1965 | |
인테리어 I | 타악기 연주자 한 명 | 1966 | |
녹턴 | 소규모 관현악과 첼로 솔로 | 1966/1967 | |
트리오 플루이도 | 클라리넷, 비올라, 타악기 | 1966/1968 | |
위로 I | 12개의 목소리와 타악기 | 1967 | |
템A | 플루트, 목소리, 첼로 | 1968 | |
위로 II | 16개의 목소리 | 1968 | |
에어 | 타악기 솔로와 함께 대규모 관현악 | 1968–1969 | |
프레시옹 | 첼로 | 1969–1970 | 2010년 개정 |
달 니엔테 (인테리어 III) | 클라리넷 | 1970 | |
Guero (Lachenmann)|구에로de | 피아노 | 1970 | |
콘트라카덴츠 | 대규모 관현악 | 1970–1971 | |
몽타주 |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 | 1971 | |
클랑샤텐 – 마인 자이텐슈필 | 세 대의 콘체르트플뤼겔(피아노포르테)와 현악 앙상블 | 1972 | |
그란 토르소 | 현악 4중주 | 1972 | |
파사드 | 대규모 관현악 | 1973 | |
슈반쿵겐 암 란드 | 판금 및 현악기 | 1974–1975 | |
두 개의 습작 | 바이올린 | 1974 | |
아칸토 | 클라리넷 솔로와 관현악 | 1975–1976 | |
레 콩솔라시옹 | 합창단과 관현악 | 1976–1978 | |
살루트 퓌어 카우드웰 | 두 명의 기타리스트 | 1977 | |
탄츠스위트 미트 도이칠란트리트 | 관현악과 현악 4중주 | 1979–1980 | |
아인 키르너슈필 | 피아노 | 1980 | 일곱 개의 작은 곡 |
하모니카 | 대규모 관현악과 튜바 솔로 | 1981–1983 | |
무브망(- 전에) | 앙상블 | 1982/1984 | |
아우스클랑 | 피아노와 관현악 | 1984–1985 | |
Dritte Stimme zu J.S. Bachs zweistimmiger Invention d-moll BWV775 | 세 개의 악기 | 1985 | J. S. 바흐의 두 성부 인벤션 d단조 BWV 775에 대한 세 번째 목소리 |
슈타웁 | 관현악 | 1985–1987 | |
토카티나 | 바이올린 | 1986 | |
알레그로 소스테누토 | 클라리넷, 첼로, 피아노 | 1986–1988 | |
타블로 | 관현악 | 1988 | |
행복한 영혼의 춤 | 현악 4중주 | 1989 | |
"...두 가지 감정..." | 스피커와 앙상블 | 1992 | 레오나르도와 함께 |
성냥팔이 소녀 | 매우 큰 관현악과 솔리스트 | 1988–1996 | 무지크 미트 빌더 (무지크테아터), 그림이 있는 음악 - 극장 음악 |
세레나데 | 피아노 | 1998 | |
눈 | 플루트, 트롬본, 남성 합창단, 관현악 | 1999 | |
사쿠라 변주곡 | 색소폰, 타악기, 피아노 | 2000 | |
제3 현악 4중주 "그리도" | 현악 4중주 | 2001 | |
슈라이벤 | 관현악 | 2003 | |
더블 (그리도 II) | 현악 오케스트라 | 2004 | |
콘체르티니 | 대규모 앙상블 | 2005 | |
...길을 잃었다... | 소프라노와 피아노 | 2008 | |
사쿠라 미트 베를리너 루프트 | 색소폰, 피아노, 타악기 | 2008 | |
마르셰 파탈 | 피아노 | 2016–1917 | |
베를리너 키르슈블뤼텐 | 피아노 | 2016–1917 | |
마르셰 파탈 | 관현악 | 2017 | |
나의 멜로디 | 여덟 개의 호른과 관현악 | 2012–1918 |
5. 수상
헬무트 라헨만은 1972년 함부르크 자유 한자 도시 바흐 상, 1997년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2010년 현대 음악 부문의 BBVA 재단 지식의 경계상을 수상했고, 2015년에는 독일 음악 작가상 평생 공로상을 받았다.[8] 가우데아무스 상 입선 및 베토벤 상 등의 수상 경력도 있다.[7]
6. 영향
헬무트 라헨만은 자신의 음악을 ''구체음악 기악''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관습적이지 않은 연주 기법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소리 세계를 포괄하는 음악 언어를 의미한다. 그의 음악은 주로 가장 기본적인 소리에서 파생되며, 증폭 과정을 통해 확장된 작품의 기초가 된다.[2] 그의 악보는 관악기, 금관악기 및 현악기를 위해 발명한 다양한 기법으로 인해 연주자에게 엄청난 요구를 한다.
그의 영향력은 다름슈타트 현대 음악 하계 강좌에서 1978년부터 정기적으로 강의를 해온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하노버 국립음악대학교(1976-1981)와 슈투트가르트 국립음악대학교(1981-1999)에서 작곡을 가르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의 음악 이론은 ''Musik als existentielle Erfahrung'' (''실존적 경험으로서의 음악'') (브라이트코프 & 하르텔, 비스바덴, 1996)에 잘 나타나 있다.
마티아스 슈파링어, 게랄트 에케르트, 베아트 풀러 등의 제자들에게서 라헨만의 영향이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1980년대에 그는 클라우스 후버와 함께 명교수로 불렸으며, 일본인과 재혼한 후에는 동양 문화, 특히 일본의 "마(間)"에 영향을 받은 시간 구성을 보여주었다.
그는 쿠보 마야코, 라이 타카유키[10], 고바야시 아케미[11], 심광수, 마르크-앙드레 달바비 등의 제자를 배출했다. 그의 제자들은 "듣는 것은 무방비 상태다, 듣는 것 없이는!"이라는 그의 지도 방침에 따라 음악의 규칙을 근본적으로 의심하는 경향을 보인다.[12]
참조
[1]
웹사이트
Lachenmann, Helmut
https://web.archive.[...]
[2]
간행물
musique concrète instrumentale: Helmut Lachenmann, in conversation with Gene Coleman
http://www.slought.o[...]
2008-04-07
[3]
웹사이트
Klang als Naturereignis
https://www.arsmondo[...]
2023-11-12
[4]
웹사이트
Helmut Lachenmann
https://web.archive.[...]
Breitkopf & Härtel
2014-12-31
[5]
웹사이트
Als Sohn einer Pfarrersfamilie kam Lachenmann in Stuttgart zur Welt,
https://crescendo.de[...]
crescendo.de
2021-02-24
[6]
웹사이트
Helmut Friedrich Lachenmann
https://www.radioswi[...]
www.radioswissclassic.ch
2021-02-24
[7]
웹사이트
サントリーホール国際作曲委嘱シリーズ No.27 ヘルムート・ラッヘンマン
https://www.suntory.[...]
2020-04-13
[8]
웹사이트
Deutscher Musikautorenpreis
https://www.musikaut[...]
2022-08-18
[9]
웹사이트
Guero
https://www.breitkop[...]
Breitkopf und Härtel
2021-02-24
[10]
웹사이트
Takayuki Rai
https://webshop.done[...]
webshop.donemus.com
2021-02-24
[11]
웹사이트
Akemi Kobayashi
http://schoenklang.d[...]
schoenklang.de
2021-02-24
[12]
웹사이트
【総評】
https://www.operacit[...]
www.operacity.jp
2021-02-24
[13]
웹사이트
Lachenmann: Das Mädchen mit den Schwefelhölzern
https://www.concerti[...]
www.concerti.de
2021-02-24
[14]
문서
Musik-Konzepte 61/62 Helmut Lachenmcmn, pp.62-72
[15]
서적
Helmut Lachenmann. Musik-Konzepte Neue Folge, Bd. 146. edition text&kritik, München 2009, ISBN 3-86916-016-0, p.116
[16]
웹인용
Lachenmann, Helmut
https://web.archive.[...]
[17]
웹인용
Helmut Lachenmann
https://web.archive.[...]
Breitkopf und Hartel
201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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