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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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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는 멕시코-미국 전쟁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한 멕시코 군인이다. 그는 1842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멕시코 정부의 지시를 수행했으며, 미국이 캘리포니아를 점령하려 하자 캘리포니아인들을 이끌고 저항했다. 로스앤젤레스 탈환 작전을 지휘하고, 치노 전투, 도밍게스 랜초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나, 리오 산 가브리엘 전투와 라 메사 전투에서 패배한 후 캘리포니아를 떠났다. 이후 캘리포니아 임시 정부를 이끌었으나 내부 갈등과 권력 투쟁에 직면했으며, 결국 캘리포니아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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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원어 이름José María Flores
출생일1818년 2월 21일
출생지누에바 엑스트레마두라, 누에바에스파냐 비에스카, 코아우일라주, 멕시코 (현재)
사망일1866년 4월 (48세)
사망지마사틀란, 시날로아주, 멕시코
배우자마리아 돌로레스 프란시스카 (1843년 7월 결혼)
거주지알타 캘리포니아
직업군사령관
정치인
군대멕시코 육군
복무 기간1846년–1847년
계급선임 대위
지휘멕시코 및 칼리포르니아인 부대 (남부 캘리포니아)
정치 경력
직위주지사 비서
임명자마누엘 미첼토레나
임기 시작1842년 12월 30일
임기 종료1845년 2월 22일
군사 경력
직위알타 캘리포니아 멕시코군 선임 대위
대통령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임기 시작1846년 9월
임기 종료1847년 1월
전임자호세 카스트로 (1846년 8월 캘리포니아에서 도피)
후임자안드레스 피코 (라 메사 전투 이후)
직위제11대 멕시코령 캘리포니아 주지사
임명자자진 임명
임기 시작1846년 11월 1일
임기 종료1847년 1월 10일
전임자피오 피코 (1846년 8월 캘리포니아에서 도피)
후임자안드레스 피코
참전 전투

2. 멕시코-미국 전쟁과 캘리포니아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는 1842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마누엘 미첼토레나 지사의 비서 및 호세 카스트로 사령관의 군대에서 대위로 복무했다. 1846년 8월, 카스트로는 플로레스를 스톡턴에게 보내 미국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스톡턴은 이를 거부했다. 카스트로와 피오 피코 지사는 캘리포니아를 떠났고, 플로레스는 로스앤젤레스에 남았다.[1]

스톡턴은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를 로스앤젤레스 책임자로 임명했으나, 길레스피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캘리포니아인들은 군대를 소집했다. 이들은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를 사령관,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를 부사령관, 안드레스 피코를 기병대 사령관으로 선출했다.[1]

2. 1. 전쟁 전 캘리포니아 상황

(현재 섹션은 내용이 비어있으므로, 원본 소스에 따라 내용을 추가해야 합니다.)

2. 2. 미군의 캘리포니아 점령

미군의 캘리포니아 침공과 초기 점령 과정에 대한 내용은 현재 자료 부족으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

3.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의 초기 활동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는 1842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해 마누엘 미첼토레나 주지사의 비서이자 호세 카스트로 사령관 휘하의 대위로 복무했다.[1] 1846년 8월, 카스트로의 명으로 로버트 스톡턴에게 미국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거부당했다. 이후 카스트로와 피오 피코 주지사가 캘리포니아를 떠나자 로스앤젤레스에 남았다.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한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군대를 소집하면서 플로레스는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가 부사령관, 안드레스 피코가 기병대 사령관을 맡았다.[1]

3. 1. 멕시코 정부와의 관계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대위는 1842년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마누엘 미첼토레나 지사의 비서였으며, 호세 카스트로 사령관의 군대에서 대위였다. 1846년 8월, 카스트로는 플로레스를 로버트 스톡턴에게 보내 미국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스톡턴은 카스트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캘리포니아를 떠났고, 피오 피코 지사도 뒤를 따랐다. 플로레스와 다른 군 장교들은 로스앤젤레스에 남겨졌다.[1]

스톡턴은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를 로스앤젤레스 책임자로 임명했으나, 길레스피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캘리포니아인들은 로스앤젤레스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 이때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대위가 ''사령관''으로 선택되었고,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 대위가 부사령관, 안드레스 피코 대위가 ''기병대 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1]

3. 2. 미군과의 초기 교섭

1842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한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대위는 마누엘 미첼토레나 지사의 비서이자, 호세 카스트로 사령관의 군대에서 대위로 복무했다.[1] 1846년 8월, 카스트로는 플로레스를 로버트 스톡턴에게 보내 미국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지만, 스톡턴은 카스트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다.[1] 이후 카스트로는 캘리포니아를 떠났고, 피오 피코 지사도 그 뒤를 따랐다.[1] 플로레스와 다른 군 장교들은 로스앤젤레스에 남겨졌다.[1]

스톡턴은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를 로스앤젤레스 책임자로 임명했지만, 길레스피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캘리포니아인들은 로스앤젤레스를 되찾기 위해 군대를 소집했다.[1] 이때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대위가 사령관으로 선출되었고,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 대위가 부사령관, 안드레스 피코 대위가 기병대 사령관으로 그 뒤를 이었다.[1]

4. 캘리포니아인의 저항과 플로레스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는 1842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마누엘 미첼토레나 지사의 비서로 일했다.[1] 1846년 8월, 호세 카스트로 사령관은 미국의 뜻에 따르겠다는 메시지를 스톡턴에게 전달하기 위해 플로레스를 보냈으나, 스톡턴은 카스트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카스트로와 피오 피코 지사는 캘리포니아를 떠났고, 플로레스는 다른 군 장교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남았다.[1]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가 로스앤젤레스 책임자로 임명되었으나, 가혹한 통치로 인해 캘리포니아인들은 군대를 소집하게 되었다. 이들은 플로레스를 사령관으로,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를 부사령관으로, 안드레스 피코를 기병대 사령관으로 선출했다.[1]

4. 1. 로스앤젤레스 탈환 작전

제공된 소스에는 로스앤젤레스 탈환 작전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고, 비어있는 문단임을 알리는 템플릿만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소스만으로는 섹션 내용을 작성할 수 없습니다.

4. 2. 캘리포니아군 지휘부 구성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는 1842년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마누엘 미첼토레나 지사의 비서를 지냈다.[1] 1846년, 캘리포니아인들은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군대를 소집하여 플로레스를 사령관으로 선출했다.[1]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는 부사령관, 안드레스 피코는 기병대 사령관이 되었다.[1]

5. 주요 전투 및 사건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는 1846년 미국-멕시코 전쟁 당시 캘리포니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군대를 이끌고 미군에 맞서 여러 전투를 치렀다.

플로레스는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의 가혹한 통치에 반발하여 봉기를 일으켰다. 그는 캘리포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아 사령관으로 선출되었고,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가 부사령관, 안드레스 피코가 기병대 사령관을 맡았다.

플로레스는 치노 전투, 도밍게스 랜초 전투, 샌 파스콸 전투 등에서 승리하며 캘리포니아를 일시적으로 미군으로부터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도밍게스 랜초 전투는 미 해병대가 패배한 몇 안 되는 전투 중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후 파우마 학살과 테메큘라 학살이 발생했다.

그러나 플로레스의 군대는 무기와 탄약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멕시코 중앙 정부의 지원도 받지 못했다. 결국 리오 산 가브리엘 전투와 라 메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캘리포니아는 다시 미국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플로레스는 1847년 1월 10일,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로스 베르두고스에 머물렀다. 그는 마지막 회의를 통해 캘리포니아를 떠나기로 결정하고, 지휘권을 안드레스 피코에게 넘긴 후 소노라로 향했다.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 전, 그는 모든 포로를 석방했다.[1]

5. 1. 치노 전투 (Battle of Chino)

플로레스의 병력은 길레스피보다 수적으로 우세했다. 플로레스는 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고, 1846년 9월 길레스피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로 동의했다. 길레스피는 벤자민 데이비스 윌슨에게 샌버나디노 지역에서 미국 지지자들을 이끌고 로스앤젤레스를 확보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다. 윌슨이 루고를 체포하기 위해 찾고 있다는 소식이 호세 델 카르멘 루고에게 전해졌다. 루고는 캘리포니아 민병대를 조직하여 윌슨을 뒤쫓았다. 두 군대는 치노 전투에서 만났다. 그 후 루고는 40명의 포로를 잡아서 플로레스에게 넘겼다. 플로레스는 루고에게 자신과 힘을 합칠 것을 요청했지만 루고는 거절했다. 플로레스는 포로들을 멕시코시티로 보내고 싶어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아이디어에 반대했다. 벤자민 윌슨은 길레스피에게 캘리포니아에서 완전히 떠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1846년 10월 4일, 길레스피는 샌페드로를 떠났다. 몇 명의 치노 포로들은 캘리포니아 포로들과 교환되었다.[1]

5. 2. 도밍게스 랜초 전투 (Battle of Dominguez Rancho)

플로레스는 길레스피보다 병력이 많았다. 플로레스는 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고, 1846년 9월 길레스피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로 동의했다. 길레스피는 벤자민 데이비스 윌슨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윌슨은 캘리포니아 민병대와 치노 전투에서 만난 후 포로 40명을 플로레스에게 넘겼다. 플로레스는 캘리포니아 탈환을 시작했고, 마누엘 가르피아스는 산타바바라를, 마누엘 카스트로는 샌루이스오비스포를 점령했다. 프란시스코 리코는 샌디에고 재탈환을 위해 남쪽으로 보내졌지만 로스앤젤레스로 소환되어 도착하지 못했다. 플로레스는 샌루이스오비스포에서 샌디에고까지 캘리포니아를 통제했지만, 군대는 무기와 탄약이 거의 없었다.

1846년 10월 6일, 윌리엄 멀빈 대위가 이끄는 미국 해병대 203명을 포함한 미국인 420명이 샌페드로에 상륙했다. 플로레스는 창기병 50명과 함께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를 파견하여 진격하는 미국군과 맞서게 했다. 1846년 10월 7일, 미군은 도밍게스 랜초로 진격했고, 플로레스는 카리요의 병력에 합류하여 머빈의 병력과 교전했다. 10월 8일, 한 시간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해병대를 격파하여 4명을 사살하고, 사상자 없이 미군을 샌 페드로 만으로 몰아냈다. 이 전투가 도밍게스 랜초 전투였으며, 미 해병대가 전투에서 패배한 몇 안 되는 사례 중 하나였다. 이 승리는 캘리포니아인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장악했던 절정의 순간이었다.

5. 3. 샌 파스콸 전투 (Battle of San Pasqual)

플로레스는 멕시코 중앙 정부의 지원이 필요하여 증원을 요청하기 위해 안토니오 코로넬 대위와 몇몇 부하들을 소노라로 보냈다. 가는 길에 그들은 스티븐 W. 커니 장군의 진격을 알게 되었고, 플로레스에게 전령이 보내졌다. 플로레스는 안드레스 피코를 보내 미국인들과 맞서게 했다. 곧 샌 파스콸 전투가 벌어졌다.

승전 후 플로레스는 피코에게 로스앤젤레스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지만, 남부에 병력을 남겨 미국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게 했다.

5. 4. 파우마 학살과 테메큘라 학살

샌 파스콸 전투 이후, 몇몇 캘리포니아 출신들이 파우마 학살에서 살해되었다.[1] 플로레스는 호세 델 카르멘 루고와 그의 민병대를 테메큘라로 보내 이 학살에 대한 복수를 지시했다.[1] 곧 테메큘라 학살이 벌어졌다.[1]

5. 5. 리오 산 가브리엘 전투 (Battle of Rio San Gabriel)

Battle of Rio San Gabriel영어 또는 리오 산 가브리엘 전투는 1847년 1월 8일,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가 이끄는 캘리포르니아인 부대와 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미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하였고, 플로레스는 재정비를 위해 후퇴했다.[1]

5. 6. 라 메사 전투 (Battle of La Mesa)

플로레스는 길레스피보다 병력이 많았고, 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다. 1846년 9월 길레스피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로 했으며, 10월 4일 샌페드로를 떠났다.

플로레스는 캘리포니아를 되찾기 시작했다. 마누엘 가르피아스는 산타바바라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파견되어 전투 없이 임무를 완수했다. 마누엘 카스트로는 북쪽을 확보하기 위해 파견되어 샌루이스오비스포를 점령했다. 프란시스코 리코는 샌디에고를 되찾기 위해 남쪽으로 보내졌으나 로스앤젤레스로 소환되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했다. 리코는 캘리포니아인 몇 명을 샌디에고를 감시하고 미국인들을 막기 위해 보냈다.

플로레스는 샌루이스오비스포에서 샌디에고까지 캘리포니아를 통제했지만, 군대에 무기와 탄약이 거의 없었다. 남부 캘리포니아의 모든 남성 주민에게 군인이 될 것을 요청했으나, 약 200명만이 현역으로 남았다.

1846년 10월 6일, 윌리엄 멀빈 대위가 이끄는 미국 해병대원 203명을 포함한 420명의 미국인이 샌페드로에 상륙했다. 플로레스는 50명의 캘리포니아 창기병과 함께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를 파견하여 진격하는 미군에 맞서게 했고, 정규군은 로스앤젤레스를 지키기 위해 남았다.

라 메사 전투


1847년 1월 9일, 플로레스의 군대는 라 메사 전투에서 스톡턴의 군대와 마지막으로 맞붙었다. 1월 12일, 플로레스의 군대는 휴전 깃발을 내걸었다.

6. 플로레스의 캘리포니아 통치와 몰락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 대위는 1842년에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그는 마누엘 미첼토레나 지사의 비서였으며, 호세 카스트로 사령관의 군대에서 대위였다.[1] 1846년 8월, 카스트로는 플로레스를 로버트 F. 스톡턴에게 보내 미국의 뜻에 따르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스톡턴은 카스트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거부했다.[1] 카스트로와 피오 피코 지사가 캘리포니아를 떠난 후, 플로레스는 로스앤젤레스에 남은 군 장교 중 한 명이었다.[1]

스톡턴은 아치볼드 H. 길레스피 중위를 로스앤젤레스 책임자로 임명했지만, 길레스피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은 캘리포니아인들은 군대를 소집하여 로스앤젤레스를 되찾으려 했다.[1] 이때 플로레스 대위가 ''사령관''으로 선택되었고,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 대위가 부사령관, 안드레스 피코 대위가 ''기병대 사령관''으로 그 뒤를 이었다.[1]

플로레스는 병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미국인들에게 떠날 것을 요구했고, 길레스피는 1846년 9월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나기로 동의했다.[1] 이후 길레스피는 벤자민 데이비스 윌슨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윌슨은 호세 델 카르멘 루고가 이끄는 캘리포니아 민병대에게 패배하고 치노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다.[1] 플로레스는 포로들을 멕시코시티로 보내려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고, 결국 길레스피는 1846년 10월 4일 샌페드로를 떠났다.[1]

플로레스는 캘리포니아를 탈환하기 위해 마누엘 가르피아스를 산타바바라에, 마누엘 카스트로를 북부 지역에, 프란시스코 리코를 샌디에고에 파견하여 각 지역을 확보했다.[1] 그러나 그의 군대는 무기와 탄약이 부족했고, 남부 캘리포니아의 모든 남성 주민들에게 병사가 될 것을 요청했지만 약 200명만이 현역으로 유지되었다.[1]

1846년 10월 6일, 윌리엄 멀빈 대위가 이끄는 미군이 샌페드로에 상륙하자, 플로레스는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를 파견하여 맞서게 하고, 정규 군대는 로스앤젤레스를 지켰다.[1]

6. 1. 임시 정부 구성과 운영

1846년 10월 26일, 플로레스는 캘리포니아 지방 의회를 소집하여 남은 캘리포니아 정부를 재편했다.[1] 11월 1일, 플로레스는 임시 지사 겸 ''사령관(comandante general)''이 되었다.[1] 12월 3일, 프란시스코 리코와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가 플로레스에 반란을 일으켰다.[1] 플로레스는 치노(Chino) 포로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전쟁 자금을 훔쳤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1] 치노 포로를 멕시코 시티로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고, 분실된 자금에 대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아 12월 5일 권력을 되찾았다.[1] 리코와 카리요는 반란으로 투옥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1]

6. 2. 내부 갈등과 권력 투쟁

1846년 10월 26일, 플로레스는 캘리포니아 지방 의회를 소집하여 남은 캘리포니아 정부를 재편했다. 11월 1일, 플로레스는 임시 지사 겸 ''사령관(comandante general)''이 되었다. 12월 3일, 프란시스코 리코와 호세 안토니오 카리요가 플로레스에 반란을 일으켰다. 플로레스는 치노(Chino) 포로에 대한 음모를 꾸미고 전쟁 자금을 훔쳤다는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치노 포로를 멕시코 시티로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고 분실된 자금에 대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아 12월 5일 권력을 되찾았다. 리코와 카리요는 반란으로 투옥되었지만, 곧 석방되었다.

6. 3. 멕시코 중앙 정부 지원 요청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는 멕시코 중앙 정부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증원군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안토니오 코로넬 대위와 몇몇 부하들을 소노라로 보냈다. 가는 도중에 그들은 스티븐 W. 커니 장군이 진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플로레스에게 급히 전령을 보냈고, 플로레스는 안드레스 피코를 보내 미군과 맞서 싸우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샌 파스콸 전투가 벌어졌다.[1]

7. 플로레스 이후의 캘리포니아

플로레스가 캘리포니아를 떠난 후, 멕시코-미국 전쟁은 1848년 2월 2일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 체결로 막을 내렸다. 이 조약으로 멕시코는 캘리포니아를 포함한 광대한 영토를 미국에 할양해야 했다.

8.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주어진 원본 소스에 따르면, 호세 마리아 플로레스에 대한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섹션은 현재 비어있는 상태이다. 따라서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그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구체적으로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8. 1.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죄송합니다. 주어진 원본 소스에는 '더불어민주당 관점에서의 평가' 섹션에 대한 내용이 없기 때문에, 지시사항에 따라 수정할 내용이 없습니다. 원본 소스 자체가 비어있는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추가적인 수정 작업이 불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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