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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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섬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28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고, 1531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을 지냈다. 김안로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유배되었으나, 풀려난 후 수찬, 부제학,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등 요직을 거쳤으며, 1552년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좌찬성, 이조판서, 대제학을 역임하고 이량의 횡포를 탄핵하여 사직하기도 했다. 명종 사후 선조 즉위 후 예조판서로서 원상으로 서정을 처리했으며,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세 차례 영의정을 역임했다.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을 지냈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되었다.
2. 생애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사사된 뒤 3년 만인 1540년(중종 35)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 뒤 수찬, 부제학,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2년(명종 7)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홍섬은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559년에는 좌찬성,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으로서 이량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하였다.
홍섬은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하여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2] 156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2] 그 해 6월 28일 명종이 승하하고 7월 3일 선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로서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연로한 정승)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였다.[2]
홍섬은 1568년 우의정에 올랐다.[2] 1571년 좌의정이 되어 궤장을 하사받았다.[2] 1574년, 1575년, 1578년 세 차례 영의정을 역임했다.[2] 1576년에는 좌의정을 역임했다.[2]
2. 1. 관직 생활 초기
1528년(중종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153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정언을 지냈다. 1535년 이조좌랑으로서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그 일당인 허항(許沆)의 무고로 흥양에 유배되었다.
2. 2. 김안로 사사 이후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사사된 뒤 3년 만인 1540년(중종 35) 유배에서 풀려났다. 그 뒤 수찬, 부제학, 경기도관찰사, 대사헌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552년(명종 7) 청백리에 선정되었다.
2. 3. 이량 탄핵과 사직
홍섬은 1558년 좌찬성으로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559년에는 좌찬성, 이조판서, 대제학을 겸하게 되자 좌찬성을 사임하였다. 1560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으로서 이량의 횡포를 탄핵하다가 사직하였다.
2. 4. 선조 즉위 이후
홍섬은 1563년 판의금부사로 복직하여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다.[2] 1567년 예조판서가 되었다.[2] 그 해 6월 28일 명종이 승하하고 7월 3일 선조가 즉위하자 예조판서로서 원상(院相, 어린 임금을 보좌하던 연로한 정승)으로 서정(庶政)을 처결하였다.[2]
2. 5. 영의정 및 좌의정 역임
홍섬은 1568년 우의정에 올랐다.[2] 1571년 좌의정이 되어 궤장을 하사받았다.[2] 1574년, 1575년, 1578년 세 차례 영의정을 역임했다.[2] 1576년에는 좌의정을 역임했다.[2]
3. 평가 및 사후
4. 작품
4. 1. 가사
4. 2. 저서
참조
[1]
서적
동원집
[2]
간행물
홍섬
한국학중앙연구원
[3]
서적
국역 국조인물고
[4]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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