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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고레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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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와라노 고레미치는 1122년에 참의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1160년 정2위 태정대신에 오른 헤이안 시대의 귀족이다. 그는 딸을 천황에게 입내시키고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했으며, 니조 천황에게 『대괴비초』를 헌상하여 고시라카와인과의 대립을 심화시켰다. 시가, 관현, 서예에 능통하고 재치 있는 언변으로 궁중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등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였다. 선례를 존중하면서도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졌으며, 격한 성격과 독설가적인 면모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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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노 고레미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씨명후지와라 북가중어문류
이름후지와라노 고레미치
이명구죠 다이쇼고쿠(九条大相国), 오미야 다이쇼고쿠(大宮大相国)
시대헤이안 시대 후기
출생간지 7년 (1093년)
사망조칸 3년 2월 15일 (1165년 3월 28일)
관위정2위 태정대신
주군호리카와 천황 → 도바 천황 → 스토쿠 천황 → 고노에 천황 → 고시라카와 천황 → 니조 천황
아버지후지와라노 무네미치
어머니후지와라노 아키스에의 딸
형제자매무네코, 노부미치, 코레미치, 스에미치, 나리미치, 시게미치, 사다미치, 료엔(良延), 소카이(宗海), 이카쿠(伊覚)
배우자정실: 후지와라노 타츠코 (후지와라노 아키타카의 딸), 후지와라노 사다자네의 딸
자녀타메미치, 코레자네, 테이시/시메코
이미지
후지와라노 고레미치
후지와라노 고레미치 초상 (산노마루 쇼조칸 소장 『천자 섭관 어영』에서)

2. 약력

덴에이 3년(1122년) 참의에 임명되었다. 다이지 5년(1130년) 10월, 자신보다 늦게 참의가 된 후지와라노 나가자네가 먼저 곤츄나곤으로 승진한 것에 불만을 품고 칩거했다.[1] 덴쇼 원년(1131년) 참의, 중궁 곤다이부, 우병위독 관직을 사임했다.[2] 조쇼 2년(1133년) 조정에 복귀하여 곤츄나곤으로 승진했다.[3][4]

이후 관백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에게 접근하여 규안 6년(1150년) 딸 테이시/시메코를 타다미치의 양녀로 삼아 고노에 천황에게 입내시켰다. 고노에 천황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토쿠시/나리코(비후쿠몬인)와 타다미치 등의 신임을 얻어 발언력을 강화했고, 니조 천황 에이랴쿠 원년(1160년) 사촌 후지와라노 무네스케의 뒤를 이어 정2위 태정대신에 올랐으며, 이후 사망할 때까지 5년간 재임했다. 조정의 올바른 모습을 담은 『대괴비초』를 저술하여 니조 천황에게 헌상했고, 니조 천황관백 타다미치는 고레미치를 중용하여 친정 강화를 꾀하며 고시라카와인과 대립했다.

3. 정치 활동 및 사상

고레미치는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와의 관계, 그리고 비후쿠몬인과의 인척 관계를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고레미치의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나가자네의 자매였다.[1] 그러나 고레미치는 외척의 힘뿐만 아니라 자신의 풍부한 재능과 정치력으로 조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니조 천황의 친정 강화를 지지했으며, 조정의 본연의 자세를 제시한 『대괴비초』를 저술했다.[5]

고레미치는 귀족과 사찰에 주어져야 할 봉호 제도가 폐지된 현실을 지적하고, 장원과 지행국 제도가 이를 대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장원 정리령을 비판했다. 또한, 헤이지의 난 이후 후지와라노 노부요리가 무사를 후대하는 논공행상을 하자, "사람을 많이 죽인 자가 은상을 받는다면, 어째서 산조도노의 우물에 벼슬을 줄 수 없는가"라고 비판했다. 이는 산조도노가 불탔을 때 많은 여관이 우물에 뛰어들어 사망한 것을 빗대어 후지와라노 노부요리를 통렬히 비판한 것이다.[6]

4. 성격 및 평가

후지와라노 고레미치는 학식과 재능이 뛰어나고 시가, 관현, 서예에 능통한 다재다능한 문화인이었다. 그는 재치 있는 언변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했으며, 궁중에서 인기가 많았다. 선례를 존중하면서도, 불합리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얽매이지 않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격한 성격과 독설가적인 면모도 있었다.[7]

고레미치는 의문이 생기면 반드시 경험자에게 질문하여 납득하는 성격이었지만, 덜렁거리는 면모와 착각으로 인한 실수담도 전해진다.[7] 다이지 4년(1129년)의 지모쿠(除目)에서 나카하라노 모로토오를 이키노카미스오노켄스이에 이중으로 임명하는 오류가 발생했을 때, 고레미치는 공식 기록의 정확성을 위해 이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록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이 사건과 『구조 쇼코쿠 제목초(九条相国除目抄)』의 편찬 등을 통해 고레미치가 외기(外記)의 업무에 깊이 이해하고 있었음이 후대에까지 전해졌다. 기요하라노 요리나리는 구조 가네자네에게 외기 재건에 힘쓴 인물로 후지와라노 요리나가, 신제이와 함께 고레미치를 언급하기도 했다(『교쿠요』 겐랴쿠 2년 4월 29일 조).

4. 1. 일화


  • 아버지 후지와라노 무네미치가 사망하기 직전, "영지는 일단 아내(코레미치 등 형제의 어머니)에게 주고, 아내가 숨진 뒤에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도록"이라 말해서, 장래 아이들이 받을 땅을 미리 지정한 후 숨졌다. 그런데, 형제 중 한 명인 후지와라노 노부미치가 어머니보다 먼저 병사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사망하기 직전에 남겨진 다른 아들인 노부미치가 받을 땅을 다른 자식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코레미치만은 "그럼 아버지와의 약속에 역행한다"라고 말하고, 죽은 형의 아들에게 형의 몫의 영지를 주었다. 사람들은 그를 결백하고 정직하고 효심이 깊은 친구(孝友廉直)라고 평했다 (『태기(台記)』 규안 6년 11월 30일조).
  • 다이지 4년 (1129년), 지모쿠 (헤이안 시대에 대신 이외의 모든 벼슬을 임명하는 의식)에서 나카하라노 모로토오를 이키노카미스오노켄스이에 이중으로 임명한 것이 다음 해에야 발각되어, 가을 지모쿠에서 취소 절차를 밟으려다 모로토오가 병사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취급에 대해 논의가 되었다. 그 때, 대외기는 "(이중으로 받은) 스오노켄스이를 취소하는 것이 타당하다"라고 말했지만, 많은 귀족이 고인에게 관여하고 싶지 않다고, 그대로 공석으로 두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코레미치만은 대외기가 시키는 대로, 공식 기록에 있어서는 안 되는 기록이 남아 버리기 때문에, 선례가 없어도 취소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했으나, 통과되지 않았다 (『중우기(中右記) 다이지 5년 9월 28일조).
  • 코레미치는 자신이 의문스럽게 생각한 것, 수상하게 생각한 것은 반드시, 죠로나 경험자에게 즉석에서 질문해 납득하려고 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덜렁거리는 측면도 있고, 착각에 의한 실패담도 전해지고 있다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 권 제3 「공사」97 등).

5. 저술

코레미치는 조정의 본연의 자세를 설파한 『대괴비초』를 저술하여 니조 천황에게 바쳤다.[5] 『대괴비초』에서는 옛 의례의 부흥을 주장하는 한편, 귀족이나 사찰에 주어져야 할 봉호 제도가 폐지되었기 때문에 이를 대신하는 것으로 장원이나 지행국 제도가 존재하고 있음을 설파하며, 장원 정리령을 비판하고 있다.

『본조서적목록(本朝書籍目録)』에 따르면, 『구죠 다이쇼고쿠 지모쿠초(九条相国除目抄)』라는 제목에 관한 책 8권을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5] 다만, 『어로우보(魚魯愚鈔)』, 『제목초(除目抄)』 등에 보이는 ‘구초(九抄)’, ‘여초(要抄)’로 표기된 것이 『구죠 다이쇼고쿠 지모쿠초』일 것으로 추정된다.[6]

일기로는 『쿠죠 다이쇼고쿠기(九条相国記)』 (『곤다이나곤 코레타다교기(権大納言伊通卿記)』)를 남겼다. 그 외에도 후시미노미야어기록소수 『백단어불어자필법화경공양부류기(白檀御仏御自筆法華経供養部類記)』, 『본조세기(本朝世紀)』, 『어유초(御遊抄)』 등에도 코레미치의 글이 남아있다.

6. 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후지와라노 무네미치
어머니후지와라노 아키스에의 딸
정실후지와라노 타츠코(릿시)후지와라노 아키타카의 딸
아들후지와라노 이에자네1125년 - 1160년
후지와라노 테이시/시메코 (쿠죠인)1131년 - 1176년, 후지와라노 타다미치의 양녀, 코노에 천황의 중궁
아내후지와라노 사다자네의 딸
아들후지와라노 타메미치1112년 - 1154년
아내후지와라노 토시타다의 딸후에 이혼[8]



일설에서는 이에미치를 에이쿠의 아버지로 보기도 한다.[8]

참조

[1] 서적 曽我、2012年、P252-262
[2] 서적 古事談
[3] 서적 今鏡
[4] 서적 今鏡
[4] 서적 長秋記
[5] 서적 山槐記 null
[6] 간행물 『魚魯愚鈔』所引『九抄』『要抄』について 古代学協会 1990
[7] 서적 曽我、2012年、P267-271
[8] 서적 変革期の社会と九条兼実 『玉葉』をひらく 勉誠出版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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