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가타니촌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히가타니 촌은 일본 교토부의 촌으로, 산악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1889년 자치체를 형성했으나, 1954년 미야즈시 등 주변 자치체와 합병하여 폐지되었다. 히가타니성 성주 마쓰다 씨 가문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가마쿠라 시대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걸쳐 막부 봉행인으로 활동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미야즈시의 역사 - 요사군
요사군은 일본 교토부에 위치한 군으로, 7세기 여사평에서 유래하여 701년 군으로 승격, 713년 단고국에 속했으며, 현재는 이네정과 요사노정 2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 미야즈시의 역사 - 군다촌
군다촌은 교토부 구마노군에 있던 촌으로, 아름다운 해양 지역을 포함하고 미야즈 선 구리타 역이 위치한 교통 요지였으나 1954년 미야즈 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 요사군 - 이네정
이네정은 일본 교토부 북부에 위치한 어촌 도시로, 어업과 관광이 주요 산업이며, 중요 전통적 건조물군 보존지구로 지정되어 덧문어선과 다양한 축제,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 요사군 - 군다촌
군다촌은 교토부 구마노군에 있던 촌으로, 아름다운 해양 지역을 포함하고 미야즈 선 구리타 역이 위치한 교통 요지였으나 1954년 미야즈 시에 편입되어 폐지되었다. - 교토부의 폐지된 시정촌 - 단바촌
단바촌은 1889년 시정촌 제도 시행으로 여러 촌락이 통합되어 설립되었으나, 1918년 스기타니의 미네야마 정 편입, 1927년 지진 피해를 겪은 후 1955년 미네야마 정 등과 합병되어 폐지되었으며, 철도는 지나갔지만 촌 내에 역은 없었다. - 교토부의 폐지된 시정촌 - 구미하마정
구미하마정은 교토부 북부에 위치했던 정으로, 1894년에 성립하여 2004년 교탄고시에 합병되어 폐지되었으며, 농업과 어업이 주요 산업이었다.
히가타니촌 | |
---|---|
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 | |
자치체 명칭 | 히가타니촌 |
읽는 법 | ひがたにむら (Higatani-mura) |
구분 | 촌 |
폐지일 | 1954년 6월 1일 |
폐지 이유 | 신설 합병 |
폐지 상세 | 미야즈정, 구리타촌, 요시즈촌, 후추촌, 힛키촌, 세야촌, 요로촌, 히가타니촌 → 미야즈시 |
현재의 자치체 | 미야즈시 |
소속 | 교토부 요사군 |
1950년 인구 | 1280 |
인구 출처 | 국세조사 |
인접 자치체 | 요사군 세야촌, 요로촌, 쓰쓰카와촌, 다케노군 노마촌 |
위치 | 요사군 히가타니촌 |
2. 지리
히가타니 촌은 산악 지형이며, 각돌산, 사사가오산 등이 있다.
2. 1. 자연 환경

- 산악: 각돌산, 사사가오산
3. 역사
1889년 정촌제 시행으로 히가타니 촌이 성립되었고, 1954년 미야즈시와 합병되어 폐지되었다.
덴초지 뒤편에 있는 히가타니성의 성주 마쓰다 야마시로노카미 요리미치는 잇시키 씨를 섬겼으나, 덴쇼 10년 호소카와 후지타카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1][2] 요리미치의 아들 후쿠주마루는 귀농했고, 그 자손은 히가타니 촌에 남았다. 요리미치의 13대 조상 요리모리의 딸 센주히메는 고우다 천황의 후비가 되었고, 출가 후 간렌이라는 이름으로 곤고신인의 원호와 본존 아이젠묘오 좌상을 하사받았다. 마쓰다 씨 일족은 가마쿠라 후기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막부 봉행인으로 활동했다.[1][2]
3. 1. 촌의 성립과 폐지
1889년(메이지 22년) 4월 1일 - 정촌제 시행에 따라 근세 이래의 히가타니 촌이 단독으로 자치체를 형성하였다.[1][2]1954년(쇼와 29년) 6월 1일 - 미야즈정, 구리타 촌, 요시즈 촌, 후나카 촌, 히키 촌, 세야 촌, 요로 촌과 합병하여 '''미야즈시'''가 발족하면서 같은 날 히가타니 촌은 폐지되었다.
3. 2. 히가타니성과 마쓰다 가문
덴초지 뒤편에 있는 히가타니성의 성주 마쓰다 야마시로노카미 요리미치는 잇시키 씨를 섬겼으나, 덴쇼 10년 호소카와 후지타카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1][2] 요리미치의 아들 후쿠주마루는 귀농했고, 그 자손은 히가타니 촌에 남았다. 요리미치의 13대 조상 요리모리의 딸 센주히메는 고우다 천황의 후비가 되었고, 출가 후 간렌이라는 이름으로 곤고신인의 원호와 본존 아이젠묘오 좌상을 하사받았다. 마쓰다 씨 일족은 가마쿠라 후기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막부 봉행인으로 활동했다.[1][2]3. 2. 1. 마쓰다 가문과 관련된 논란
덴초지 뒤편에 있는 히가타니 성의 성주였던 마쓰다 야마시로노카미 요리미치는 잇시키 씨를 섬겼으나, 덴쇼 10년 호소카와 후지타카에게 공격받아 멸망하였다.[1][2] 요리미치의 아들 후쿠주마루는 농민이 되었고, 그 자손은 지금도 히가타니 촌에 남아 있다고 전해진다. 요리미치의 13대 조상 요리모리의 딸 센주히메는 고우다 천황의 후비가 되었다.마쓰다 씨 일족은 가마쿠라 후기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봉행인을 배출했고, 정소 기인의 필두인 공인 봉행으로 임명되는 등 막부 봉행인으로 에이로쿠 연간(1558~1570)까지 활동했다.[1][2]
4. 현대
과거 히가타니 촌 지역은 현재 미야즈시의 일부이다.
4. 1. 문화 유산
덴초지 뒤편에 있는 히가타니성의 성주 마쓰다 야마시로노카미 요리미치는 잇시키 씨를 섬겼지만, 덴쇼 10년(1582년) 호소카와 후지타카에게 공격받아 멸망했다.[1][2] 그 아들 후쿠주마루는 귀농했고, 그 자손은 지금도 히가타니 촌에 남아 있다. 요리미치의 13대 조상 요리모리의 딸 센주히메는 고우다 천황의 후비가 되었다. 후에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이름을 간렌으로 고치고, 고우다 천황으로부터 곤고신인의 원호와 본존 아이젠묘오 좌상을 하사받았다고 한다.[1][2] 마쓰다 씨 일족은 가마쿠라 후기부터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봉행인을 배출했고, 정소 기인의 필두인 공인 봉행으로 임명되는 등 막부 봉행인으로 에이로쿠 연간(1558~1570)에 이르기까지 활동했다.참조
[1]
간행물
東京大学史料編纂所研究紀要第4号(1993年) 榎原 雅治:新出「丹後松田系図」および松田氏の検討
https://www.hi.u-tok[...]
[2]
웹사이트
"丹後の地名」日ケ谷(宮津市)"
https://web.archiv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