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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2월 6일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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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4년 2월 6일 위기는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에 발생한 정치적 위기로, 스타비스키 사건에 대한 불신과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사회 불안이 배경이 되었다. 우익 단체들의 시위가 격화되어 의사당 점거 시도까지 발생했으나 실패로 끝났고, 이 사건으로 당시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이 사퇴하고 가스통 두메르그가 이끄는 국민 연합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사건은 좌파 세력의 결집과 반파시즘 운동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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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2월 6일 위기
개요
1934년 2월 6일 위기 동안 콩코드 광장 밖에서 투사체로 기마 경찰을 공격하는 폭도
1934년 2월 6일 위기 동안 콩코드 광장 밖에서 투사체로 기마 경찰을 공격하는 폭도
날짜1934년 2월 6일
장소콩코드 광장, 파리, 프랑스
원인스타비스키 사건의 여파
장 시아프 해임
목표알 수 없음
방법폭동
결과에두아르 달라디에 사임
좌파 단체의 반대 시위
우익의 추가적인 급진화
교전 세력
측1극우 동맹
하위 세력1악시옹 프랑세즈
젊은 애국자
프랑시스트 운동
불의 십자단
프랑스 연대
측2프랑스 정부
하위 세력2좌익 카르텔
파리 경찰
측3좌익 시위대
하위 세력3프랑스 공산당
주요 인물1샤를 모라스
주요 인물2피에르 테탱제
주요 인물3마르셀 뷔카르
주요 인물4프랑수아 드 라 로크
주요 인물5프랑수아 코티
주요 인물6알베르 르브룅
주요 인물7에두아르 달라디에
주요 인물8모리스 토레즈
피해
사망자17명 (우익 시위대 9명 포함)
부상자알 수 없음
체포알 수 없음
추가 정보

2. 역사적 배경

프랑스는 1929년 월가 대폭락으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를 다른 서방 국가들보다 다소 늦은 1931년부터 겪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지속된 경제적 어려움 위에 닥친 대공황은 사회 전반, 특히 전통적으로 공화정을 지지했던 중산층에게 큰 타격을 주며 심각한 경제 및 사회 위기를 초래했다.

이러한 경제적 불안정은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졌다. 1932년 5월부터 1934년 1월까지 불과 2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다섯 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등 극심한 의회 불안정이 계속되었고, 이는 반의회주의 정서를 확산시키는 배경이 되었다.[5] 여기에 마르트 하나우 사건, 우스트릭 사건 등 여러 정치 및 금융 스캔들이 연이어 터져 나오면서 정부에 대한 국민적 불신은 극에 달했다.

특히 1933년 말에 불거진 스타비스키 사건은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증폭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금융 사기를 넘어 집권 급진당 정치인들의 연루 의혹으로 번졌고, 사건의 중심인물인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의 의문스러운 죽음은 정부의 은폐 의혹까지 불러일으켰다. 우익과 극우 세력은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정부의 부패를 맹렬히 비난하며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증, 반의회주의 등 기존의 선동 구호를 더욱 강화했다.

카미유 쇼탕 내각이 스캔들의 여파로 사임하고 1934년 1월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새롭게 총리로 취임했지만, 정치적 긴장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히려 달라디에 정부가 극우 시위에 편파적이라는 비판을 받던 파리 경찰청장 장 시아페를 해임하자, 이는 극우 세력을 더욱 자극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촉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2. 1. 대공황의 여파

프랑스는 1929년 월가 대폭락("검은 화요일")으로 시작된 1929년 대공황의 여파를 다른 서방 국가들보다 다소 늦은 1931년부터 겪기 시작했다. 경제 및 사회 위기는 전통적으로 공화국(특히 급진사회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던 중산층에게 특히 큰 타격을 주었다. 이는 의회 불안정으로 이어져 1932년 5월부터 1934년 1월 사이에 5개의 정부가 들어서는 결과를 낳았고, 이러한 혼란은 반의회주의 세력을 부추겼다.[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는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전쟁으로 인구 4천만 명 중 136만 명이 전사하는 등 큰 인명 피해를 입어 전후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 또한 전전 경제를 지탱했던 북부 공업 지대는 독일군에 의해 파괴되었고, 러시아 제국에 대한 차관은 소련 정부의 일방적인 파기로 회수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전쟁 중 발생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 미국에 대한 채무가 30억달러까지 늘어났다.

전쟁으로 국토가 파괴된 프랑스, 벨기에 등과 달리 독일 국내의 생산 설비는 거의 온전했기 때문에, 이들 국가는 독일로부터의 배상금에 경제를 의존하고 있었다. 독일이 배상금 지불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자 프랑스와 벨기에는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졌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루르 공업 지대 점령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독일에 하이퍼인플레이션을 초래하고 프랑스의 국제적 고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결국 프랑스는 미국의 개입을 통해 배상 문제를 해결하려는 도스 안에 동의하고 루르에서 철병했다.

이후 경제는 완만한 회복세를 보였으나, 독일의 배상 부담을 줄여주는 영 안이 발효된 직후 세계 대공황이 발생했다. 미국 자본이 독일에서 철수하면서 독일과 프랑스 경제는 다시 위기에 빠졌다. 프랑스는 로잔 회의 등을 통해 배상금 일부를 면제해주며 어떻게든 배상을 확보하려 했으나,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배상 지불 포기를 선언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이를 조약 위반이자 배신 행위로 규탄하며 강력한 대응을 요구했지만, 프랑스 정부는 또다시 국제적으로 고립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묵인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과 정부에 대한 불신은 프랑스 국내 정치 지형을 급변시켰다. 사회주의공산주의 정당과 함께 국수주의, 파시즘 성향의 극우 정당들이 빠르게 지지세를 넓혀갔다. 정치적 혼란은 극심하여 1932년 5월에는 폴 두메르 대통령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1933년 한 해 동안에만 총리가 세 번이나 교체되는 등 심각한 정치 위기가 이어졌다. 이런 상황 속에서 스타비스키 사건과 같은 정치·금융 스캔들은 극우 세력에게 정부를 공격하고 사회 불안을 증폭시키는 좋은 빌미를 제공했다.

2. 2. 정치적 불안정

프랑스는 1929년 대공황의 여파를 다른 서방 국가보다 다소 늦은 1931년에 겪었다. 경제 및 사회 위기는 특히 전통적으로 공화국(특히 급진사회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 중산층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의회 불안정이 심화되어, 1932년 5월부터 1934년 1월 사이에 5개의 정부가 연이어 들어서는 불안정한 상황이 이어졌다. 잦은 정부 교체는 반의회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5]

정치적 혼란은 연이은 정치 및 금융 스캔들로 더욱 깊어졌다. 마르트 하나우 사건, 법무부 장관이 연루되어 1930년 앙드레 타르디외 정부를 무너뜨린 우스트릭 사건 등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스타비스키 사건이 터지면서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또한, 1932년 5월에는 폴 두메르 프랑스 대통령이 암살당했고, 1933년 한 해 동안에만 프랑스 총리가 세 번이나 교체되는 등 심각한 정치 위기가 지속되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프랑스 국내에서는 사회주의·공산주의 계열 정당과 국수주의적·파시즘적 정당들이 빠르게 지지 기반을 넓혀갔다.

스타비스키 사건은 1933년 언론에 보도되었다. 바욘의 ''Crédit municipal'' 은행이 연루된 이 사건은 카미유 쇼탕 정부의 장관을 포함하여 여러 급진당 의원과 연관된 횡령범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 일명 'le beau Sasha'(잘생긴 사샤)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언론이 나중에 스타비스키가 쇼탕의 처남이 공공 검사였기 때문에 19개월 동안 재판이 연기되는 혜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1934년 1월 8일,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는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고, 경찰은 자살을 원인으로 보고했다. 이는 은폐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편리한 진술이었다. 우익은 쇼탕이 비밀을 밝히지 못하도록 그를 암살했다고 주장했다. 언론은 그 후 정부 부패 혐의에 대한 정치 캠페인을 시작했고, 극우파는 시위를 벌였다. 그 달 말, 또 다른 스캔들이 드러난 후 쇼탕은 사임했다.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1934년 1월 27일 급진사회당의 또 다른 정치인으로서 쇼탕의 뒤를 이었다. 하지만 1월 9일부터 파리에서는 이미 13번의 시위가 발생한 상태였다. 의회 우파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1932년 선거에서 선출된 좌파 과반수를 대체하려 했고, 극우파는 전통적인 주제인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증(스타비스키는 귀화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었다), 프리메이슨(카미유 쇼탕은 메이슨 고위 인사였다)에 대한 적대감, 그리고 반의회주의를 이용했다. 역사가 세르주 베른슈타인은 스타비스키 사건이 심각성이나 재판에 회부된 인물에 있어서는 예외적이지 않았지만, 급진사회당이 국민 의회에서 절대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고, 따라서 정부가 취약하며 우파 정당들이 대안 연립 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는 사실에 힘입어 좌파 정부를 사임시키려는 우익의 결의가 예외적이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결국 2월 6일 대규모 시위를 촉발한 것은 경찰 청장 장 시아페의 해임이었다. 열렬한 반공주의자인 시아페는 극우파의 거리 시위(군주주의자 ''왕의 행동''의 청년 단체인 ''프랑스 행동''이 라틴 구역의 몇 안 되는 좌파 학생들을 상대로 한 시위, 폭동, 공격 등)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여 이중 잣대를 적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좌파에 따르면 시아페의 해임은 스타비스키 사건과의 연관성 때문이었고, 우파는 달라디에의 새 정부에 대한 지지를 대가로 시아페의 사임을 요구하는 협상을 비난했다.

2. 3. 스타비스키 사건

1933년 말, 바욘의 시립 은행(Crédit municipal프랑스어)이 도산하면서 대규모 금융 사기 사건인 스타비스키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은행 설립자이자 횡령범인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Alexander Stavisky)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담보로 제공된 보석이 모조품으로 밝혀지면서 파장이 커졌다. 특히 당시 카미유 쇼탕 정부의 식민상 Albert Dalimier|알베르 달리미에프랑스어를 비롯한 여러 급진당 의원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정치 스캔들로 비화했다.[5]

언론은 스타비스키가 과거에도 사기 혐의가 있었으나, 쇼탕의 처남이 공공 검사였던 덕분에 19개월 동안 재판이 연기되는 특혜를 누렸다고 폭로하며 사건의 심각성을 더했다. 스타비스키는 스위스로 도주했으나, 1934년 1월 8일 샤모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발표했지만, 정부의 비리를 은폐하기 위한 암살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특히 우익 세력은 쇼탕 정부가 비밀을 묻기 위해 스타비스키를 제거했다고 주장하며 대대적인 정부 비판 캠페인을 벌였다.

이 사건은 당시 대공황으로 인한 경제난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더욱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극우 세력은 스타비스키가 귀화우크라이나유대인이라는 점과 쇼탕 총리가 프리메이슨의 고위 인사라는 점을 부각하며 반유대주의, 외국인 혐오증, 프리메이슨에 대한 적대감, 반의회주의를 자극하는 선동을 벌였다. 우익 언론과 단체들은 연일 정부의 부패를 규탄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역사가 세르주 베른슈타인은 스타비스키 사건 자체가 이전의 다른 스캔들에 비해 특별히 심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시 국민 의회에서 절대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해 취약했던 좌파 연립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우익의 정치적 공세가 매우 강력했다고 분석했다.

결국 거센 비난 여론에 직면한 카미유 쇼탕 내각은 1934년 1월 말 총사퇴했다. 후임으로는 같은 급진당 소속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달라디에 정부 역시 우익의 공세를 피할 수 없었으며, 특히 극우 시위에 관대하다는 비판을 받던 파리 경찰청장 장 시아페를 해임한 조치는 오히려 극우 세력을 더욱 자극하여 대규모 시위를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3. 1934년 2월 6일 위기

1933년 12월 말, 바욘 시립 은행 파산과 관련된 스타비스키 사건이 터지면서 정치적 스캔들이 불거졌다. 이 사건에는 카미유 쇼탕 내각의 각료를 포함한 정부 요인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고, 사건의 중심인물인 세르주 스타비스키가 스위스에서 자살한 채 발견되면서 정부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했다. 결국 카미유 쇼탕 내각은 1934년 1월 말 총사퇴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을 틈타 아크시옹 프랑세즈를 비롯한 여러 우익 및 극우 단체들은 반의회주의적인 분위기를 고조시키며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조직했다. 이들은 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이나 나치의 뮌헨 폭동과 같은 파시스트 쿠데타를 모방하려 했으며, 1934년 2월 6일, 파리콩코르드 광장을 중심으로 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 앞에서 격렬한 폭동을 일으켰다.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일부 시위대가 의사당 내부로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으며, 이 과정에서 사망자 16명과 부상자 2,300여 명을 내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시위 다음 날인 2월 7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거리 시위의 압력에 밀려 결국 사임을 발표했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 역사상 거리의 압력으로 정부가 물러난 첫 번째 사례였다.

이 정치적 위기는 전직 대통령(1924-1931) 가스통 두메르그가 이끄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면서 일단락되었다. 우익 성향의 공화주의자였던 두메르그는 극우 세력과 중도 의회 정당 모두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인물로 여겨졌다. 그의 "국민 연합 정부"는 앙드레 타르디외, 루이 바르투, 루이 마랭 등 우익의 주요 정치인들과 중도 좌파 인사들을 포함했으나, 사회주의 정당과 공산주의 정당은 배제되었다. 이 정부에는 훗날 비시 정권을 이끌게 되는 필리프 페탱도 국방장관으로 참여했다.

이 사건은 처음에는 "2월 6일 사건"으로 불렸으나, 이후 의회 정치와 프랑스 제3공화국 체제 자체의 심각한 위기를 드러냈다는 의미에서 "1934년 2월 6일의 위기"로 명명되었다.

3. 1. 극우 단체의 결집

스타비스키 사건으로 인해 카미유 쇼탕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정국 불안이 심화되자, 여러 우익 및 극우 단체들이 이를 기회로 삼아 반의회주의적인 목소리를 높이며 결집했다.[6] 이들 단체는 1934년 1월부터 시위를 주도했으며, 2월 6일 대규모 시위를 통해 프랑스 제3공화국 체제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주요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 '''액시옹 프랑세즈''' (Action Française): 1905년 샤를 모라스가 창설한 가장 오래된 왕당파 단체로, 약 6만 명의 회원을 보유했다. 제3공화국을 폐지하고 부르봉 왕정 복고를 목표로 삼았다. 정치적 가톨릭주의, 국수주의, 반민주주의 성향을 보였으며, 청년 조직인 '왕당파 카멜로' (Camelots du Roi)는 거리 시위를 주도했다.
  • '''애국 청년''' (Jeunesses Patriotes): 1924년 파리 의원 피에르 타이탱저가 창설했으며, 약 9만 명의 회원을 가졌다. 왕정 복고를 추구하지는 않았으나, 보다 권위주의적이고 가톨릭적인 공화국을 지향하며 급진사회당의 장기 집권에 반대했다. 공화 연맹 등 주류 우익과 연계되어 있었다.
  • '''프랑스 연대''' (Solidarité Française): 1933년 향수 재벌이자 보나파르트주의 성향의 의원 프랑수아 코티가 설립했다. 정치적 목표가 명확하지 않았고 회원 수는 많지 않았다.
  • '''프랑시슴''' (Francisme): 마르셀 부카르가 이끌었으며, 파시즘 이념을 노골적으로 표방했다.
  • '''십자군단''' (Croix-de-Feu): 1926년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 단체로 시작되었으나, 1931년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대령의 지휘 아래 일반인에게도 문호를 개방하며 가장 큰 규모의 단체로 성장했다. 자체적인 무장 그룹("dispos")을 보유했다. 2월 6일 시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나, 드 라 로크 대령은 시위대가 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을 직접 공격하는 것을 막았다. 이 결정이 쿠데타 시도를 무산시킨 주요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7] 역사가들은 이 단체를 파시스트보다는 대중주의적 사회 가톨릭 단체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 '''참전 용사 협회''' (Associations d'anciens combattants): ''전국 전투 연합''(Union nationale des combattants, UNC) 등 여러 참전 용사 단체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UNC는 약 9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한 우익 성향 단체였다.


이들 단체는 베니토 무솔리니로마 진군이나 나치의 뮌헨 폭동과 같은 파시스트 쿠데타를 모방하려 했으며, 2월 6일 시위대는 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 앞에서 폭동을 일으켜 일부는 의사당 내부로 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핵심 세력이었던 십자군단의 지도자 드 라 로크 대령이 단원들의 의사당 직접 공격을 막으면서 쿠데타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 과정에서 사망자 16명, 부상자 2,300여 명이라는 큰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비록 프랑스 공산당(PCF) 계열 단체인 공화 참전 용사 협회(Association républicaine des anciens combattants|ARAC프랑스어) 등 일부 좌파 세력도 시위에 참여했으나[8], 사건의 주된 동력은 극우 단체의 반의회주의적 활동이었다.

3. 2. 시위의 전개

1934년 2월 6일 밤, 파리 곳곳에 모였던 다양한 우익 단체들은 부르봉 궁전(프랑스 국민의회 의사당) 앞이지만 센 강 건너편에 위치한 콩코르드 광장으로 집결했다.[1][2] 시위대는 의사당 진입을 시도했고, 경찰과 공화국 수비대는 전략적 요충지인 콩코르드 다리를 지키기 위해 이들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시위대는 경찰을 향해 온갖 종류의 물건을 던졌으며, 일부는 무장하고 있었다. 경찰은 결국 군중을 향해 발포했고, 소요는 다음 날 새벽 2시 30분까지 이어졌다.[1] 이 과정에서 아크시옹 프랑세즈 회원들을 중심으로 최소 16명[2](다른 자료에서는 17명[1])이 사망하고 2,000여 명[1](다른 자료에서는 2,300여 명[2])이 부상을 입었다.

이날 폭동에서 극우 단체들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1] 특히 아크시옹 프랑세즈, Jeunesses patriotes|애국청년동맹fra, Solidarité française|프랑스 연대fra, Mouvement Franciste|프랑시슴단fra 등이 연대하여 시위를 주도했다.[2] 반면, 또 다른 우익 재향 군인 단체인 UNC(Union Nationale des Combattants) 회원 대부분은 콩코르드 광장을 피해 엘리제 궁전 근처에서 소규모 시위를 벌였다.[1] 한편, 좌파 재향 군인 단체인 ARAC(Association Républicaine des Anciens Combattants) 소속 공산주의자들이 시위에 연루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이후 발표된 한 성명서는 당시 집권 중이던 중도 좌파 연합(좌파 카르텔)이 "도둑은 물러가라, 프랑스 만세!"를 외치던 비무장 재향 군인들에게 발포했다고 비난했다.[1]

센 강 우안(북쪽)의 콩코르드 광장에서 경찰이 시위대를 힘겹게 막아내는 동안, 프랑수아 드 라 로크 대령이 이끄는 크루아 드 푀(Croix-de-Feu)는 센 강 남쪽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목표로 삼은 부르봉 궁전은 남쪽에서의 방어가 훨씬 취약했지만, 크루아 드 푀는 별다른 충돌 없이 건물을 포위했다가 해산하는 데 그쳤다.[1] 이러한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크루아 드 푀는 다른 극우 단체들로부터 Froide-Queue|차가운 피fra라는 경멸적인 별명을 얻기도 했다.[1] 공화국 전복을 목표로 했던 다른 단체들과 달리, 드 라 로크 대령은 공화주의와 의회주의 체제의 합법성을 존중하는 입장을 보인 것으로 평가된다.[1] 그의 소극적인 태도로 인해 쿠데타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2]

프랑스 국민의회 내부에서는 우익 의원들이 폭동을 빌미로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이끄는 좌파 카르텔 정부의 사퇴를 압박했다. 그러나 좌파 의원들은 달라디에 총리를 중심으로 단결하려 했고, 격앙된 분위기 속에서 좌우파 의원들 간에 주먹다짐까지 벌어진 후 회의는 종료되었다.[1]

달라디에 총리는 밤사이 공공질서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하려 했고, 비상사태 선포까지 고려했으나 실행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음 날, 사법부와 경찰은 그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고, 내각의 장관들과 소속 정당마저 지지를 철회했다. 결국 달라디에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 역사상 거리 시위의 압력으로 정부가 물러난 첫 번째 사례였다.[1]

4. 위기의 결과

2월 6일 사건은 프랑스 정치 지형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사건 직후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은 총사퇴했고, 전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가 우익 인사를 포함한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좌익 세력은 대규모 총파업을 벌이고 "반파시즘 지식인 감시 위원회"를 결성하는 등 파시즘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며 결집했다. 이러한 좌우 대립의 심화는 이후 인민 전선 정부의 출범과 극우 단체 크루아 드 푸의 해산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4. 1. 달라디에 정부의 사퇴

2월 6일 사건은 당시 프랑스 정부와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사건 다음 날인 2월 7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이끄는 내각은 시위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총사퇴를 결정했다. 이는 제3공화국 역사상 거리 시위로 인해 정부가 물러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었다. 이후 전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가 우익 인사들을 포함시킨 새 내각을 구성하여 사태 수습에 나섰다.

4. 2. 국민 연합 정부의 수립

2월 6일 사건은 공화국 정부와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건 다음 날인 2월 7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이끌던 내각은 결국 총사퇴를 결정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전직 대통령이었던 가스통 두메르그가 새로운 총리로 지명되어 내각 구성에 나섰다. 두메르그는 우익 성향의 각료들을 포함시킨 거국 내각, 이른바 '국민 연합 정부'를 구성하여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우파 중심의 내각 구성에 좌익 세력은 즉각적으로 강하게 반발했다. 이들은 두메르그 내각이 조각된 바로 그날, 연대하여 전국적으로 450만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감행하며 새 정부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는 프랑스 사회의 정치적 갈등이 더욱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4. 3. 좌파의 결집과 반파시즘 운동

2월 6일 사건 이후, 좌파 진영은 파시스트 쿠데타가 일어났다고 확신했다. 극우 리그의 반의회주의 활동은 명백했으며, 특히 ''프랑시스크''와 같은 일부 단체는 1922년 로마 진군으로 이탈리아 파시즘 정권을 세운 이탈리아 ''파쇼'' 리그의 행태를 모방했다. 역사가 세르주 베른슈타인은 드 라 로크 대령이 헌법적 합법성을 존중하려 했을 수 있다고 보았지만, 그의 ''크루아 드 푸'' 조직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었으며, 군국주의적 성향이나 퍼레이드에 대한 집착 등 파시스트 리그의 특징을 일부 공유했다.

1934년 2월 9일,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물러나고 가스통 두메르그가 총리로 임명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로 9명이 사망했다. 2월 12일, 주요 노동조합인 노동총동맹(CGT, 개혁주의 성향, 사회당 연계)과 통일노동총동맹(CGTU, 혁명주의 성향, 공산당 연계)은 하루 동안의 총파업을 공동으로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본래 사회당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와 공산당은 각자 별도의 시위를 계획했으나, 기층 당원들과 지지자들의 요구로 시위는 하나로 합쳐졌다. 이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간의 첫 실질적인 연합의 계기가 되었으며, 반파시즘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의 분열 이후 양측의 연대는 어려웠으나, 이 새로운 협력은 훗날 1936년 인민전선 (급진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연립 정부, 공산당은 참여 없이 지지) 결성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이러한 반파시스트 연합은 코민테른이 유럽 공산당들에게 사회민주주의자를 포함한 다른 좌파 정당들과 협력하여 파시즘과 반공산주의 정권의 확산을 막으라고 지시한 스탈린의 노선과도 일치했다.[9]

폭동 이후 반파시즘 운동은 더욱 확산되었다. 1934년 3월 5일에는 철학자 알랭, 민족학자 폴 리베, 물리학자 폴 랑게뱅 등이 참여한 ''반파시스트 지식인 감시 위원회''가 창설되었고, 아나키스트들도 다양한 반파시스트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월 6일 사건의 충격으로 2월 7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이 총사퇴하고 전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가 우익 인사들을 포함한 새 내각을 구성했지만, 이에 반발한 좌익 세력은 두메르그 내각 조각 당일 전국적으로 450만 명이 참여하는 총파업을 감행하며 강력히 저항했다. 이처럼 고조된 우익 세력에 대한 위기감과 좌파의 결집은 이후 인민 전선 정부 수립 및 크루아 드 푸 해산 등 극우 세력에 대한 대응으로 이어졌다.

4. 4. 우파의 급진화

2월 6일 사건은 공화국 정부와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사건 다음 날인 2월 7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내각은 결국 총사퇴했다.[1] 이후 전 대통령 가스통 두메르그가 우익 인사들을 포함시킨 새 내각을 구성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시도했다.[1] 그러나 이는 즉각적인 좌익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다. 좌파 진영은 두메르그 내각이 조각된 당일, 전국적으로 450만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한 총파업을 조직하여 맞섰다.[1] 이어 3월 5일에는 파시즘에 맞서기 위한 "반파시즘 지식인 감시 위원회"가 결성되는 등, 우익 세력의 위협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크게 높아졌다.[1]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후 출범한 인민 전선 정부는 대표적인 우익 단체였던 크루아 드 푸아를 강제 해산시키는 등 우익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1]

참조

[1] 간행물 February 6, 1934: The Veterans' Riot https://cronfa.swan.[...]
[2] 간행물 Political Violence in Interwar France.
[3] 서적 Politics and economics in the 1930s
[4] 간행물 The six fevrier 1934 and the 'Survival' of the French Republic.
[5] 서적 French Conservatism in Crisis: The Republican Federation of France in the 1930s https://archive.org/[...]
[6] 서적 French Conservatism in Crisis: The Republican Federation of France in the 1930s
[7] 간행물 Fascism in France and the Strange Case of the Croix de Feu. https://www.jstor.or[...]
[8] 간행물 February 6, 1934: The Veterans' Riot.
[9] 서적 A The Popular Front in France: Defending Democracy, 1934–38
[10] 문서 Citizens and citoyens: republicans and liberals in America and France
[11] 서적 Inside Europe https://archive.org/[...] Harper & Brothers
[12] 간행물 The six fevrier 1934 and the 'Survival’of the French Republic.
[13] 서적 The Politics of Depression in France 1932–1936
[14] 간행물 Political Violence in Interwar France.
[15] 서적 Politics and economics in the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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