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조지아 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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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56년 조지아 시위는 1956년 3월,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연설에 반발하여 조지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시위이다. 스탈린을 숭배하고 조지아 민족주의를 억압하는 흐루쇼프의 정책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시위는 스탈린 동상 앞에서 시작되어 점차 확대되었고, 시위대는 스탈린의 명예 회복, 정부의 사퇴 등을 요구했다. 시위는 격렬해지면서 소련군의 무력 진압으로 이어져 수십 명에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조지아 공산당 내 분열을 심화시키고 조지아 민족주의를 부활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1980년대 조지아 독립 투쟁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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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 3월 - 제28회 아카데미상
제28회 아카데미상은 1956년 2월 18일에 발표되었으며, 영화 《마티》가 작품상 등을 포함하여 4개 부문을 수상했다. - 조지아의 정치적 억압 - 4월 9일 비극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평화 시위대를 소련군이 무력 진압하여 다수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4월 9일 비극은 조지아의 반소비에트 운동을 격화시키고 독립을 향한 열망을 고취하며, 소련군 내부에 트빌리시 증후군을 야기했다.
1956년 조지아 시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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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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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1956년 3월 4일 ~ 1956년 3월 10일 |
장소 | 트빌리시,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소비에트 연방 |
원인 | 탈스탈린화에 대한 저항 |
목표 | 스탈린의 유산과 조지아 민족 정체성 옹호 |
방법 | 시위 행진, 피켓 시위, 폭동 |
결과 | 도시 불안정 및 소련 군사 당국에 의한 시위 진압 |
교전 세력 | |
지휘관 | |
제2세력 지휘관 | |
사상자 및 피해 | |
제1세력 사상자 | |
기타 정보 | |
추가 정보 |
2. 배경
스탈린의 가혹한 조지아 민족주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은 역설적으로 조지아의 국가적 위상에 큰 충격을 주었다.[18] 조지아의 젊은 세대는 스탈린 통치의 어두운 면을 완전히 알지 못했고,[16] 러시아로 건너가 대 제국을 통치했고 세계를 좌지우지했으며, 조지아를 지배했던 스탈린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천재성"을 찬양했다.[18]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소비에트 통치자들이 스탈린을 폄하하는 것은 조지아인들에게는 국가적 자긍심을 훼손하는 행위로 여겨졌다.[18]
정치에 대한 반감과 애국심이 결합하여 훗날 조지아인들은 "조지아가 낳은 위대한 아들"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는 모든 책임을 "온화한" 지도자 스탈린에게 돌리는 듯한 풍자적이고 냉소적인 발언을 하여 조지아인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19] 쿠타이시의 콤소몰 단장이자 훗날 소련 해체 후 조지아 대통령이 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흐루쇼프의 연설 말미에 조지아인들에게 한 비꼬는 표현, 특히 조지아 젊은이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언변에 주의할 것을 상기시켰다.[20]
조지아에서 탈스탈린화가 야기한 이러한 반응은 1924년 실패한 반란 이후 스탈린의 부활로 해석되기도 하고, 조지아 애국심의 첫 공개 표출로 생각되기도 했다.[16]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Арутюнов,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세르게이 아루티우노프ru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트란스카우카시아 출신의 사람들에게 흐루쇼프의 연설은 폭로가 아니었다. 많은 조지아인들은 특이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내가 1940년대 초에 이미 굴라그에 대한 진실을 배웠던 나의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인 카르데나키의 농민들과 다른 많은 마을의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스탈린을 "콧수염 난 자" 또는 "콧수염 난 짐승"(''에스 울바쉬아니 므트헤치'')이라고 불렀다. 이제 그들은 트랙터와 트럭의 앞유리에 스탈린의 초상화를 즉시 전시했다. 이것은 놀라운 극적인 변화였다. 러시아인들에게는 한 종류의 순응에서 다른 종류의 순응으로의 변화였지만, 조지아에서는 한 종류의 비순응적 행동에서 다른 종류의 비순응적 행동으로의 변화였다.[21]
이 사건은 소비에트의 압력으로 인해 대부분 보도되지 않았고, 수십 년 동안 금기시되었다. 사건의 내용은 충돌 빈도, 동시 보도, 현장 목격자들의 진술 기록, 잔존한 몇몇 소비에트 비밀 문서들을 사용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복원될 수 있었다.[15]
2. 1.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
1956년 2월 25일, 제20차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 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비밀 연설"을 통해 이오시프 스탈린의 정치 제도에 의한 활동을 비판했다. 특히 당 상층부 숙청, 스탈린의 인격숭배, 블라디미르 레닌과 레프 트로츠키를 언급하며 공산주의 사상을 지탱하고 존속하는 것들을 비판했다.[15]초기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지배적 상징이었던 "수령"과 "국가 원수"에 대한 소문은 그의 후계자에 의해 규탄되며 급속도로 소비에트 연방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상세한 정보는 알려지지 않았음에도, 그 소문은 소비에트 연방 사회에 실제로 충격을 가져다 줬다.[15]
2. 2. 조지아의 반응과 민족주의
스탈린의 가혹한 조지아 민족주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은 역설적으로 조지아의 국가적 위상에 충격을 주었다.[18] 조지아의 젊은 세대는 스탈린 통치의 어두운 측면을 완전히 알지 못했고,[16] 러시아로 건너가 대 제국을 통치했고 널리 알려진 것과 같이 세계를 좌지우지했으며, 조지아를 지배했던 스탈린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그의 "천재성"에 대한 찬사와 영구한 찬양의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18] 그 때에, 러시아/소비에트 통치자들이 스탈린을 폄하하는 것은 조지아의 국가적 의식을 학대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18]정치에 대한 반감과 애국심이 어울어져 훗날 조지아인들이 "조지아가 낳은 위대한 아들"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으며, 니키타 흐루쇼프가 그 지역의 모든 공포는 반어적으로 "온화한" 지도자 스탈린의 탓으로 돌리는 식의 풍자와 냉소적인 언행에 불을 붙였다.[19] 쿠타이시의 콤소몰 단장이자 훗날 소련 해체 후 조지아 대통령이 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흐루쇼프의 연설 말미에 조지아인들에게 한 비꼬는 표현, 특히 조지아 젊은이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힐 수도 있는 언변에 주의할 것을 상기시켰다.[20]
조지아에서 탈스탈린화가 야기한 고통스러운 반응은 1924년 실패한 반란 이후 스탈린의 부활로 해석되기도 하고, 조지아 애국심의 첫 공개 표출로 생각되기도 했다.[16]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Арутюнов,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세르게이 아루티우노프ru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때 그들에게 요구된 충성심의 전환은 쉽게 실행하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트란스카우카시아 출신의 사람들에게 흐루쇼프의 연설은 결코 폭로가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조지아인들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내가 1940년대 초에 이미 굴라그에 대한 진실을 배웠던 나의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인 카르데나키의 농민들과 다른 많은 마을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스탈린을 "콧수염 난 자" 또는 더 명시적으로 "콧수염 난 짐승"(''es ulvashiani mkhetsi'')이라고 부르는 것 외에는 다른 용어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트랙터와 트럭의 앞유리에 스탈린의 초상화를 즉시 전시했다… 이것은 놀라운 극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한 종류의 순응에서 다른 종류의 순응으로의 변화였지만, 조지아에서는 한 종류의 비순응적 행동에서 다른 종류의 비순응적 행동으로의 변화였다.[9]
조지아를 휩쓴 이 사건은 소비에트의 압박으로 대부분 보도되지 않았고, 수십 년 동안 금기 소재가 되었다. 사건의 내용은 충돌 빈도, 동시 보도, 현장 목격자들의 진술 기록, 잔존한 몇몇 소비에트 비밀 문서들을 사용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복원될 수 있었다.[15]
3. 시위의 전개
1956년 3월 시위는 트빌리시를 중심으로 3월 4일부터 10일까지 일어났다.
3월 4일, 스탈린 사망 3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학생들이 트빌리시 시내 쿠라 강변에 있는 스탈린 동상 앞에 모이면서 시위가 시작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에 분노한 학생들은 경찰에게 공격적으로 대응했고, 그루지야 공산당원 파라스티슈빌리는 스탈린 동상에 올라가 "스탈린의 적들은 이 병처럼 죽어라!"라고 외치며 술병을 깨뜨렸다.[15][20] 시위는 점차 규모가 커졌고, 고리, 쿠타이시, 루스타비, 수후미 등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15]
3월 6일, 트빌리시의 시위는 더욱 조직화되었고,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비밀 서한이 낭독되면서 상황은 더욱 확대되었다. 3월 7일, 트빌리시 국립대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류했다. 시위대는 루스타벨리 대로를 따라 레닌 광장으로 행진하며 정부 청사와 시청 앞에서 멈춰 섰다. 시위대는 3월 9일을 공휴일로 지정하고, 모든 지역 신문에 스탈린 관련 기사를 게재하며, 극장에서 스탈린 우상화 영화를 상영하고, 중국군 사령관 주더를 초청할 것을 요구했다.[20] 시위대의 수는 7만 명에 육박했다.[15]
3월 9일, 도시는 마비되었고, 시위대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강하게 비난하고 스탈린의 명예 회복을 요구했다. 지역 정부는 상황을 통제하지 못했고, 경찰은 무기력하게 반응했다. 당국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기념 행사를 허용하려 했지만, 늦은 시도는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날 늦게 스탈린 동상 근처 집회에서 다음과 같은 정치적 요구 사항이 낭독되었다.
번호 | 요구 사항 |
---|---|
1 | CPSU 중앙위원회에 스탈린에 대한 "비공개 서한"을 보고할 것 |
2 | 아나스타스 미코얀, 니콜라이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를 당과 정부 직책에서 모두 해임할 것 |
3 |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 |
4 | 아제르바이잔 SSR 제1서기 미르 자파르 바기로프를 석방할 것 |
5 | 소비에트 조지아 관리 아카키 므겔라드제와 므자바나드제를 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 승진시킬 것 |
6 | 스탈린의 아들 바실리를 중앙위원회에 임명할 것 |
7 | 사면을 실시할 것 |
모스크바로 전보를 보내기 위해 약 10명을 통신 건물로 보냈지만, 이들은 신원 확인을 이유로 구금되었다.[15]
3월 9일 밤, 집회는 반(反)볼셰비키적인 성격을 띠었고, 사람들은 조지아 국기를 흔들고, 조지아의 소련 탈퇴를 요구하는 전단이 등장했다.[15] 모스크바에서 병력 투입 결정이 내려졌고, 소련 내무부는 트빌리시가 통제 불능 상태라고 보고했다. 당국은 라디오를 통해 집회 중단을 호소했고, 통행금지령을 발표했다. 자정 무렵, 군중은 대표단을 구출하기 위해 통신 건물로 돌격했고, 군대는 군중에게 발포했다. 동시에 전차가 레닌 광장과 스탈린 기념비에서 시위대를 몰아내기 위해 이동했다. 시위대는 3월 10일 집회를 재개하려 했지만, 군대에 의해 다시 해산되었다. 이 유혈 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사망했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0명 이상이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로 추방되었다.[16][19][15]
3. 1. 3월 4일: 시위의 시작
1956년 트빌리시 시위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에 반발하여 그루지야 SSR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시작되었다. 3월 4일, 학생들은 스탈린 사망 3주기를 맞아 쿠라 강변의 스탈린 동상 앞에 모였다.[15][20] 이들은 흐루쇼프의 연설에 분노하며 시위를 벌였다.이때, 그루지야 공산당원 파라스티슈빌리가 술에 취한 채 스탈린 동상에 올라가 술병을 깨뜨리며 "스탈린의 적들은 이 술병처럼 죽어라!"라고 외친 사건은[15][20] 시위대의 격앙된 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시위대는 스탈린 동상에 화환을 바치며 점차 규모를 키웠고, 혼란에 빠진 지역 당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다. 트빌리시에서 시작된 시위는 고리, 쿠타이시, 루스타비, 수후미 등 다른 도시로 확산되었다.[15]
3. 2. 3월 6일 ~ 8일: 시위의 확산
니키타 흐루쇼프의 연설에 분개한 사람들이 쿠라 강변의 스탈린 동상 앞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15][20] 조지아 공산당원 파라스티슈빌리는 스탈린 동상에 올라가 "스탈린의 적들은 죽어버려라. 이 술병처럼."이라고 외치며 술병을 깨뜨렸다.[3][8] 시위는 점점 규모가 커졌고, 고리, 쿠타이시, 루스타비, 수후미, 바투미 등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3]3월 6일, 트빌리시의 시위는 더욱 조직화되었고, CPUS 중앙 위원회의 비공개 서한이 조지아 장관들과 지역 기자들이 참석한 특별 회기에서 낭독되면서 상황은 더욱 확대되었다.[3] 3월 7일 이른 시각, 트빌리시 국립대학교 학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거리로 나와 다른 학교 학생들과 합류했다. 시위대는 루스타벨리 대로에서 레닌 광장으로 가는 트빌리시 주도로를 따라 행진하며 정부 청사와 시청 앞에서 멈춰 섰다.[3]
시위대는 당국에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제시했다.
- 3월 9일을 공휴일로 지정
- 모든 지역 신문에 스탈린 관련 기사 게재
- 극장에서 미헤일 챠우렐리 감독의 영화 ''베를린 함락''과 ''잊을 수 없는 해 1919년'' 상영
- 중국군 사령관 주더 초청[8]
시위대의 수는 7만 명에 육박했다. 소련 중앙 내무부는 처음에는 항의 규모를 과소 평가했고, 3월 8일이 지나서야 중앙 위원회에 보고되었다.[3]
3. 3. 3월 9일: 저항의 절정
당시 도시는 마비되었다. 특히 레닌 광장과 화환으로 장식된 스탈린 동상 앞에서 여러 곳에서 동시에 집회가 열렸다. 중심가 거리는 시위대들로 가득 차 있었고, 그들은 니키타 흐루쇼프를 강하게 비난하고 스탈린의 명예 회복과 그의 기념일 기념을 요구했으며, 특히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에게 스탈린의 명예를 옹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었고, 버스와 자동차가 뒤집어졌다. 군중은 교통을 통제했고, 심지어 몇몇 경우에는 교통을 완전히 막기도 했다. 저항하는 운전자들과 경찰과의 충돌이 몇 차례 발생했다. 몇몇 주동자가 체포되자 시위는 더욱 대규모로 확대되었고 군중은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조지아 제1서기 바실 므자바나드제는 시위대에게 연설했고, 방문 중인 중국 원수 주더는 군중에게 인사했지만 스탈린 동상을 방문하는 것을 거부했고 시위는 해산되지 않았다.[15]시위가 계속되자 지역 정부는 상황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게 되었다. 시위대의 규모와 조지아 애국심, 그리고 공산주의에 대한 충성심에 압도된 경찰은 점점 더 무기력하게 반응했다. 3월 9일 초, 당국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기념 행사를 허용하려고 시도했지만, 늦은 양보 시도는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날 늦게 스탈린 동상 근처 집회에서 여러 당 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정치적 요구 사항이 낭독되었다.[15]
이후 이 청원서의 작성자로 기소된 루벤 키피아니(Ruben Kipiani)의 증언에 따르면, 요구 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번호 | 요구 사항 |
---|---|
1 | CPSU 중앙위원회에 스탈린에 대한 "비공개 서한"을 보고할 것 |
2 | 아나스타스 미코얀, 니콜라이 불가닌, 니키타 흐루쇼프를 당과 정부 직책에서 모두 해임할 것 |
3 |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 |
4 | 아제르바이잔 SSR 제1서기 미르 자파르 바기로프를 석방할 것 |
5 | 소비에트 조지아 관리 아카키 므겔라드제와 므자바나드제를 중앙위원회 정치국으로 승진시킬 것 |
6 | 스탈린의 아들 바실리를 중앙위원회에 임명할 것 |
7 | 사면을 실시할 것 |
모스크바로 전보를 보내기 위해 약 10명을 루스타벨리 거리에 있는 인근 통신 건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15]
3. 4. 3월 9일 밤 ~ 10일: 유혈 진압
3월 9일 밤, 콜메우르네오비스 광장에서의 집회는 점점 더 반(反)볼셰비키적인 성격을 띠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국가 "디데바"를 부르고 조지아 국기(조지아 민주 공화국의 국기)를 흔들었다. 사복 차림의 사람들이 개입하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곧이어 전단이 등장했는데, 목격자이자 조지아계 유대인 작가 파이나 바아조바(다비드 바조프의 딸)에 따르면, 전단에는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조지아의 소련 탈퇴 요구가 담겨 있었다.[15]이후 사건은 다소 불분명하다. 그날 늦게, 모스크바에서 이반 페듀닌스키가 지휘하는 트란스캅카스 군관구 병력 투입 결정이 내려졌다. 그러나 현지에 주둔하던 조지아인 부대는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배치되지 않았다.[22] 소련 내무부는 트빌리시가 통제 불능 상태라고 보고했다. 보고에 따르면, 시위대 다수가 술에 취해 무장하고 도시를 약탈하며, 러시아인과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정부 건물을 포위하려 한다고 주장했다.[15]
같은 날 저녁, 당국은 라디오를 통해 집회 중단을 호소했고, 트빌리시 주둔군 사령관은 3월 10일 자정부터 통행금지령을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많은 시위대가 위협을 감지하고 도심을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정 무렵, 통신 본부로 파견된 대표단이 신원 확인을 이유로 구금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군중은 대표단을 구출하기 위해 건물로 돌격했고, 경비군과 충돌했다. 군대는 시위대가 건물로 돌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군중에게 발포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전차가 레닌 광장과 스탈린 기념비에서 시위대를 몰아내기 위해 이동했다. 시위대는 3월 10일 집회를 재개하려 했지만, 군대에 의해 다시 해산되었다.[15]
이 유혈 진압 과정에서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이 사망했다. 공식 보고는 없지만, 사상자 수는 적게는 106명[19]에서 많게는 800명[23]으로 추정된다.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고, 200명 이상이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로 추방되었다.[16][19][15]
4. 시위의 결과 및 영향
1956년 3월 집회는 조지아 공산당 내 분열을 심화시켰다. 같은 해 7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는 조지아 공산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결의안을 발표했고, 8월에는 트빌리시 제2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었다.[16] 므자바나드제는 기자 회견에서 희생자 수를 최소화하고 당의 새로운 견해를 발표하는 강연 프로그램을 후원하여 조지아인들을 진정시켰고, 1957년 6월 중앙위원회 서기국 후보위원으로 승격되었다.[4]
1978년 4월까지 조지아에서 소련 통치에 대한 명백한 저항은 없었지만, 조지아인들은 모스크바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많은 조지아인들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린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트빌리시 사건은 발트해 연안 국가를 제외하고 조지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명백히 이탈했음을 보여주었다. 소련에 대한 충성심은 약해졌고, 반소 감정은 조지아 민족주의 재건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4][5]
1956년 사건 직후, 소련으로부터 완전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최초의 조지아 지하 단체가 등장했다. 이들은 규모가 작고 약했으므로 소련 당국은 신속하게 무력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956년 3월 집회에 참가했던 10대였던 메랍 코스타바와 즈비아드 가므삭후르디아와 같은 새로운 반체제 인사들의 기원이 되었고, 이들은 1980년대 조지아 독립 투쟁을 이끌었다.[5] 조지아에서는 SovLab과 같은 단체들이 스탈린주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을 열고, 국가 내 친스탈린 감정의 유산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3]
4. 1. 조지아 공산당의 분열
1956년 3월 집회는 조지아 공산당원들이 사람들과 단결을 표현하면서 당 내부 분열을 확대시켰다.[16] 1956년 7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는 조지아 공산당 지도부를 비판하는 결의안을 발표했고, 8월에는 트빌리시의 제2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었다.[16] 그러나 므자바나드제는 인터뷰에서 희생자 수를 최소화하고 당의 새로운 견해를 퍼뜨리기 위한 강연 프로그램을 후원함으로써 조지아인들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성공으로 므자바나드제는 1957년 6월 중앙위원회 서기국 후보위원으로 승격되었다.[4]4. 2. 조지아 민족주의의 부활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은 스탈린의 조지아 민족주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조지아 민족의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혔다.[18] 젊은 세대의 조지아인들은 스탈린 통치의 어두운 면을 완전히 알지 못했고,[16] 러시아로 건너가 대 제국을 통치하고 세계를 좌지우지한 스탈린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18] 이러한 상황에서 스탈린을 폄하하는 것은 러시아/소비에트 통치자들에 의해 조지아의 국가적 의식을 억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18]애국심과 정치에 대한 반감이 뒤섞인 감정은 흐루쇼프가 그 시대의 모든 공포를 "온화한" 지도자 스탈린에게 돌린 비꼬는 언행 때문에 더욱 악화되었다. 조지아인들은 스탈린을 "조지아가 낳은 위대한 아들"이라고 불렀다.[19] 쿠타이시의 콤소몰 단장이자 훗날 소련 붕괴 이후 조지아 대통령이 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흐루쇼프의 연설이 끝난 후 조지아에 대한 그의 반어적인 표현, 특히 조지아 젊은이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언변에 주의할 것을 상기시켰다.[20]
조지아에서 탈스탈린화가 야기한 고통스러운 반응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1924년 실패한 반란 이후 스탈린의 부활로 해석되기도 하고, 조지아 애국심의 첫 번째 공개 표출로도 생각되었다.[16]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세르게이 아루티우노프|Sergei Arutyunovru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그때 그들에게 요구된 충성심의 전환은 쉽게 실행하기에는 너무나도 엄청났다. 트란스카우카시아 출신의 사람들에게 흐루쇼프의 연설은 결코 폭로가 아니었다. 그러나 많은 조지아인들은 다소 특이한 방식으로 반응했다. 내가 1940년대 초에 이미 굴라그에 대한 진실을 배웠던 나의 할아버지의 고향 마을인 카르데나키의 농민들과 다른 많은 마을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라. 이 사람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스탈린을 "콧수염 난 자" 또는 더 명시적으로 "콧수염 난 짐승"(''es ulvashiani mkhetsi'')이라고 부르는 것 외에는 다른 용어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트랙터와 트럭의 앞유리에 스탈린의 초상화를 즉시 전시했다… 이것은 놀라운 극적인 변화였다. 그러나 러시아인들 사이에서는 한 종류의 순응에서 다른 종류의 순응으로의 변화였지만, 조지아에서는 한 종류의 비순응적 행동에서 다른 종류의 비순응적 행동으로의 변화였다.[9]
조지아를 휩쓸고 간 사건은 소비에트의 압박으로 대부분 보도되지 않았고 수십 년 동안 금기시되었다. 사건의 내용은 충돌 빈도, 동시 보도, 현장 목격자들의 진술 기록, 잔존한 몇몇 소비에트 비밀 문서들을 사용한 다양한 분석을 통해 복원될 수 있었다.[15]
1978년 4월 이전까지 조지아는 소비에트 통치에 도전하는 명백한 시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지아인들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정부에 저항하는 원한을 계속 품고 있었다. 많은 조지아인들이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군대 발포 명령에 대한 개인적인 책임을 물었다. 트빌리시 사건은 발트해 연안 국가를 제외하고 조지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명백하게 이탈했음을 보여주었다. 연방에 대한 충성심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반볼셰비키 감정은 조지아 민족주의 재건의 필수 요소가 되었다.[16][17] SovLab 연구소 소속 이라클리 크바다기아니가 주장했듯이, 이 사건은 자기희생과 민족주의에 기여했다.[12]
1956년 사건 직후, 조지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탈퇴할 것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는 비밀 단체들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전형적으로 소규모였고 무장하지 않았으므로 소비에트 당국은 재빨리 그들을 중립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10대 시절에 둘 다 1956년 집회 시위 참가자였던 메랍 코스타바와 즈뱌드 감므사쿠르디아와 같은 새로운 반체제 세대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대의 시초 둘은 1980년대에 조지아의 독립 투쟁을 이끌게 된다.[17]
4. 3. 독립 운동의 기원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조지아 민족주의 억압은 조지아의 국가적 자긍심에 큰 상처를 입혔다.[18] 젊은 세대는 스탈린 통치의 어두운 면을 알지 못한 채, 러시아에서 대제국을 통치하고 세계를 좌지우지했던 스탈린을 자랑스러워했다.[16][18] 이러한 상황에서 러시아/소비에트 통치하의 조지아가 스탈린을 폄하하는 것은 조지아의 국가적 의식을 모욕하는 것으로 여겨졌다.[18]이러한 반감과 애국심은 조지아인들이 "조지아가 낳은 위대한 아들"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게 만들었고, 니키타 흐루쇼프의 풍자적인 언행에 더욱 분노하게 했다.[19] 특히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는 흐루쇼프의 연설이 조지아 젊은이들의 자부심을 상처 입힐 수 있음을 경고했다.[20]
탈스탈린화에 대한 조지아인들의 고통스러운 반응은 다양하게 해석되었다. 1924년 반란 이후 스탈린의 부활로 해석되기도 하고, 조지아 애국심의 첫 공개 표출로도 여겨졌다.[16]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세르게이 아루티우노프는 많은 조지아인들이 흐루쇼프의 연설에 특별하게 반응했다고 설명했다.[21]
1956년 3월의 집회는 조지아 공산당원들이 국민들과의 연대를 표현하면서 당 내부 분열을 심화시켰다. 1956년 7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는 조지아 공산당 지도자들을 비판하는 결의안을 발표했고, 8월에는 트빌리시의 제2서기가 러시아인으로 교체되었다. 그러나 므차바나드제는 희생자 수를 최소화하고 당의 새로운 계획을 발표하는 강연 프로그램을 통해 조지아인들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고, 1957년 6월에는 간부 위원회 후보 위원으로 선출되었다.[16]
1978년 4월까지 조지아에서 소비에트 통치에 대한 명백한 저항은 없었지만, 조지아인들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정부에 대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많은 조지아인들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시위대에 발포 명령을 내린 개인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트빌리시 사건은 발트 지역을 제외하고 조지아가 소비에트 연방에서 이탈했음을 보여주었다. 연방에 대한 충성심은 약해졌고, 반볼셰비키 감정은 조지아 애국심을 재건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16][17]
1956년 사건 직후, 조지아의 비밀 단체들이 처음으로 소비에트 연방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대체로 소규모였고 무장하지 않아 소비에트 당국에 의해 빠르게 중립화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1956년 집회에 참가했던 10대 메랍 코스타바와 즈뱌드 감므사쿠르디아와 같은 새로운 반체제 인사들의 기원이 되었고, 이들은 1980년대 조지아의 독립 투쟁을 이끌게 된다.[17]
SovLab과 같은 단체들은 스탈린주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식을 열고, 국가 내 친스탈린 감정을 해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1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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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viet research institute observes memorial day of Stalin terror victi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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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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