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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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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24 사건은 1957년 5월 24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에서 발생한 반미 시위로, 미국 군인이 대만인을 살해한 사건에 대한 미국의 무죄 판결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1957년 3월, 주 타이완 미군 고문단 소속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가 대만인 류쯔란을 사살한 사건이 발생했고, 미국 군사 법원은 레이놀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에 분노한 대만 시민들이 미국 대사관에 항의 시위를 벌였고, 시위는 폭력 사태로 번져 미국 대사관과 미국 공보원 등이 파괴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중화민국 간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나, 양국 정부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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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4 사건
사건 개요
사건명5·24 사건 (오이사이 사건)
다른 명칭류쯔란 사건 (劉自然事件), 메이디 사건 (meidì shìjiàn, 美帝事件)
발생일1957년 5월 24일
발생 장소타이완 타이베이 시 주 타이완 미국 대사관
원인류쯔란 사건에 대한 미국의 소극적인 태도
결과주 타이완 미국 대사관 습격 및 파괴, 반미 감정 고조
관련 인물
주요 인물류쯔란 (劉自然), 조지 H. 커 (George H. Kerr)
배경
시대적 배경냉전 시대, 타이완의 반공주의, 미국의 타이완 지원
사건 전개
발단류쯔란의 사망 사건 발생
경과타이완 시민들의 항의 시위
주 타이완 미국 대사관 습격 및 파괴
타이완 정부의 시위 진압
주요 사건류쯔란 사망 사건, 미국 대사관 습격 사건
영향
정치적 영향중화민국과 미국 관계의 일시적 악화
사회적 영향타이완 내 반미 감정 고조
문화적 영향타이완 사회의 민족주의 부상
Yeh (2021)필리핀, 태국, 홍콩에서 중국인의 반미 감정 표출
관련 서적
제목포모사 배반당하다 (Formosa Betrayed)
저자조지 H. 커

2. 배경

1950년대 미국과 중화민국의 관계는 복잡했다. 1951년 미국은 타이완에 군사 고문단(MAAG)을 설치했고, 1957년 1월까지 타이완에는 10,000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했으며 그중 61%는 MAAG 고문단과 그 가족이었다.[4] 미국 정부는 모든 민간 및 군사 인력과 그 가족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1955년부터 중화민국과 미국은 주둔군 지위 협정 체결 협상을 벌였으나, 중화민국이 미국 인력의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4] 사건 발생 전부터 MAAG 인력의 강간 등 범죄 행위로 인해 양국 관계는 이미 긴장 상태였다.[4]

2. 1. 미중 관계와 군사고문단

1951년,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에 맞서 중화민국(타이완)을 지원하기 위해 타이완에 군사고문단(MAAG)을 설치했다. 1957년 1월까지 타이완에는 10,000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했으며, 이 중 61%는 MAAG 고문단과 그 가족이었다.[4] 미국 정부는 모든 민간 및 군사 인력과 그 가족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5년부터 중화민국과 미국은 주둔군 지위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벌였지만, 중화민국이 미국 인력의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요구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4]

2. 2. 주둔군 지위 협정 (SOFA) 협상

1951년, 미국은 타이완에 군사 고문단(MAAG)을 설치하기로 했다. 1957년 1월까지 타이완에는 1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했으며, 그중 61%는 MAAG 고문단과 그 가족이었다. 미국 정부는 모든 민간 및 군사 인력과 그 가족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

1955년부터 중화민국과 미국은 주둔군 지위 협정 체결 협상을 벌였으나, 중화민국은 강간 및 살인에 대해 미국인을 재판할 권리를 요구한 반면,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전속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4] 미국은 자국 군인이 해외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해당 국가가 아닌 자국 법률에 따라 처벌받아야 한다는 치외법권을 주장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미국의 이러한 주장이 불평등하며 주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비판한다. 특히, 주한미군 범죄와 관련하여 한국인의 법 감정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아 이 문제는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여진다.

3. 류쯔란 사건

1951년, 미국은 타이완에 군사 고문단(MAAG)을 설치했다. 1957년 1월까지 타이완에는 1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했으며, 그중 61%는 MAAG 고문단과 그 가족이었다. 미국은 모든 민간 및 군사 인력과 그 가족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약 1,000명의 미국인이 중화민국 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다. 1955년부터 중화민국과 미국은 주둔군 지위 협정 체결 협상을 벌였지만, 중화민국은 미국인의 강간 및 살인 사건 재판권을 요구했고, 미국은 "전속 관할권"을 주장하며 협상은 결렬되었다. MAAG 인력의 범죄 행위로 인해 미국-중화민국 관계는 이미 긴장 상태였다.[4]

1957년 3월 20일,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참전 용사인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가 류쯔란을 사살하면서 미국과 중화민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5]

3. 1. 사건 발생

1957년 3월 20일,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참전 용사이자 미 군사원조고문단(MAAG)의 일원으로 타이완에서 2년간 복무한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는 양명산에 있는 자신의 복층 주택 밖에서 류쯔란과 대치했다.[5] 류쯔란은 중화민국 육군 소령(계급)이자 혁명실천연구원의 직원이었다.[5] 레이놀즈는 류쯔란이 자신의 아내가 목욕하는 동안 욕실 창문을 통해 엿보았다고 주장했다.[5]

레이놀즈가 주택 앞으로 가서 류쯔란을 불렀을 때, 류쯔란이 약 0.91m 길이의 물건을 들고 다가왔고, 이에 레이놀즈는 .22구경 권총을 발사했다.[5] 레이놀즈는 타이완 군사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지만, 류쯔란이 두 번째로 접근해 오자 두 번째 총알을 발사했다고 주장했다.[5] 류쯔란은 두 번째 부상을 입고 복층 주택 건너편 공원으로 걸어갔다. 나중에 류쯔란의 시신은 주택에서 거의 약 60.96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5]

미국과 중화민국 형사 수사관은 총격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5] 중화민국 수사관들은 레이놀즈가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다.[5] 류쯔란의 시신이 레이놀즈의 복층 주택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는 것은 그가 도망가는 중에 두 번 총을 맞은 것이 아니라 시신이 놓여 있던 지점에서 근거리에서 총을 맞았다는 것을 시사했다.[5] 또한 레이놀즈가 묘사한 물건은 주택 근처나 시신 근처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5]

3. 2. 미군과 중화민국 수사 당국의 입장 차이

미군과 중화민국 수사 당국은 류쯔란 피살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 미군 측은 초기에 로버트 레이놀즈 상사가 정당방위로 행동했다고 판단하여 기소를 원하지 않았다. 반면 중화민국 수사관들은 레이놀즈 상사가 류쯔란을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다.[5]

중화민국 수사관들은 류쯔란의 시신이 레이놀즈의 집 방향을 향하고 있었던 점을 근거로, 류쯔란이 도망가다가 총에 맞은 것이 아니라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레이놀즈 상사가 묘사한 흉기는 현장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5]

미국 당국은 중화민국의 압력으로 청문회를 개최했고, 청문회는 레이놀즈 상사를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할 것을 권고했다. 청문회는 첫 번째 발포는 공포로 인해 이루어졌을 수 있지만, 두 번째 발포는 레이놀즈 상사가 물러설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했다고 판단했다.[5]

하지만 1957년 5월 23일, 미국 군사 법원은 배심원단의 평결을 통해 레이놀즈 상사에게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6] 이는 재판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한 중화민국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6]

3. 3. 군사 재판과 무죄 판결

1957년 3월 20일,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참전 용사이자 미 군사고문단(MAAG)의 일원이었던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는 자신의 집 밖에서 류쯔란과 대치했다. 레이놀즈는 류쯔란이 자신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훔쳐봤다고 주장하며 그를 총으로 쐈다. 류쯔란은 두 번째 총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그의 시신은 레이놀즈의 집에서 약 60.96m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다.[5]

미국과 중화민국 수사관들은 이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내렸다. 미국 측은 레이놀즈의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중화민국 측은 레이놀즈가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질렀다고 보았다. 중화민국의 압력으로 미국 당국은 레이놀즈에 대한 군사 재판을 열었다.[5]

1957년 5월 20일, 타이베이에서 미 군사 법원이 열렸다. 레이놀즈 측 변호인은 류쯔란이 레이놀즈의 아내를 강간하려 했으며, 레이놀즈는 가족을 보호하려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레이놀즈가 첫 번째 발포 후 집으로 물러나 경찰에 신고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57년 5월 23일, 배심원단은 레이놀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6]

이 무죄 평결은 재판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한 중화민국 국민들을 분노하게 했다. 증거도 없이 미국인이 정당방위를 주장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불만도 컸다.[6]

4. 반미 시위 (타이베이 사건)

1951년, 미국 정부는 타이완에 군사 고문단(MAAG)을 설치하는 데 동의했다. 1957년 1월까지 타이완에는 10,000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이 중 61%는 MAAG 고문단과 그 가족이었다. 미국 정부는 모든 민간 및 군사 인력과 그 가족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 결과 약 1,000명의 미국인이 중화민국 법의 적용을 받았다. 1955년부터 중화민국과 미국 정부는 주둔군 지위 협정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벌였지만, 중화민국이 강간 및 살인에 대해 미국 인력을 재판할 권리를 요구한 반면,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는 "전속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 폭동이 일어나기 전, 미국-중화민국 관계는 이미 MAAG 인력의 강간을 포함한 범죄 행위로 인해 긴장 상태에 있었다.[4]

1957년 3월 20일,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 참전 용사이자 MAAG의 일원이었던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가 타이완 현지인 류쯔란을 총으로 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레이놀즈는 류쯔란이 자신의 아내가 목욕하는 것을 엿보았다고 주장하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중화민국 수사관들은 레이놀즈가 계획적으로 살해했다고 결론 내렸다.[5] 이후 1957년 5월 20일, 미국 군사 법원은 레이놀즈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이 판결은 중화민국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6]

4. 1. 시위 발생과 전개

1957년 5월 24일 오전 10시경, 류쯔란의 미망인은 딸과 함께 미국 대사관 밖에서 "살인자 레이놀즈는 무죄인가? 미국 군사 재판의 불공정하고 부당한 결정에 항의한다"라는 문구가 적힌 포스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6] 이 포스터는 영어와 중국어로 작성되었다. 몇 시간 안에 6,000명의 군중이 대사관 밖에 모여 반미 구호를 외치며 류쯔란에 대한 정의를 요구했다. 오후에는 여러 차례 군중이 대사관에 진입하여 차량과 가구를 부수고 성조기를 훼손했다. 지하실 방공호에 숨어 있던 8명의 미국인들이 쫓겨났고, 그 중 일부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6]

같은 날, 군중은 MAAG-타이완 본부인 설탕 빌딩을 포위했고, 또 다른 군중은 USIS 건물을 두 곳이나 파괴했다. 결국 시위대는 타이베이 시 경찰청을 포위하고 파괴 행위를 저질렀다. 경찰관이 총에 맞자 다른 경찰관들이 군중에게 발포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베이에 군 병력을 투입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군중은 저녁까지 대사관에 피해를 계속 입혔다. '블랙 프라이데이'로 알려진 이 사건이 끝날 무렵, 11명의 미국인, 62명의 경찰관, 11명의 시위대가 부상을 입었고, 시위대 1명이 사망했다. 경찰은 111명을 체포했다. 미국 대사관과 USIS 건물에 대한 피해액은 500000USD 이상이었다.[6]

4. 2. 중화민국 정부의 대응

1957년 5월 24일 오전 10시경, 류쯔란의 미망인은 딸과 함께 주 중화민국 미국 대사관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영어와 중국어로 "살인자 레이놀즈는 무죄인가? 미국 군사 재판의 불공정하고 부당한 결정에 항의한다"라고 적힌 포스터를 들고 있었다.[6] 몇 시간 안에 6,000명의 군중이 대사관 밖에 모여 반미 구호를 외치며 류쯔란에 대한 정의를 요구했다. 중화민국 정부는 타이베이에 군 병력을 투입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군중은 저녁까지 대사관에 피해를 계속 입혔다.[6]

5. 사건의 여파

1951년, 미국은 타이완에 군사 고문단(MAAG)을 설치했고, 1957년에는 1만 명 이상의 미국인이 거주했으며 그중 상당수는 군사 고문단과 그 가족들이었다.[4] 미국은 이들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했고, 이로 인해 약 1,000명의 미국인이 중화민국 법의 적용을 받지 않았다.[4] 1955년부터 주둔군 지위 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미국은 자국 군인에 대한 전속 관할권을 주장하면서 협상은 결렬되었다.[4]

1957년 3월 20일, 미군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가 타이완 현지인 류쯔란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 레이놀즈는 류쯔란이 자신의 아내를 엿보았다고 주장하며 정당방위를 주장했지만, 중화민국 수사관들은 계획적인 살인으로 결론 내렸다.[5] 미국 군사 법원은 레이놀즈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이는 중화민국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5월 24일 대규모 반미 시위로 이어졌다.[6] 시위대는 미국 대사관과 시설들을 공격하고 파괴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5·24 사건 관련 피해 규모
구분내용
인명 피해11명의 미국인, 62명의 경찰관, 11명의 폭도 부상, 폭도 1명 사망[6]
재산 피해미국 대사관과 USIS 건물에 500000USD 이상 피해[6]


5. 1. 미중 관계의 갈등과 봉합

미국 정부는 즉각 중화민국에 항의했으며, 장제스의 아들인 장징궈를 포함한 여러 중화민국 관리들이 폭동을 의도적으로 선동했다고 비난했다.[6] 장제스를 포함한 중화민국 관리들은 폭동에 대해 사과했지만, 중화민국의 공식 보고서는 정부가 시위와 폭동을 계획하고 선동했다는 의혹을 부인했다. 대신, 보고서는 시위자들이 판결에 대한 분노로 군중 심리를 반영하는 방식으로 행동했다고 주장했다. 보고서는 또한 레이놀즈가 살인을 저질렀다는 중화민국의 입장을 재확인했다. 중화민국 내부 조사에서는 대만과 홍콩의 중국 언론이 군사 재판에 대한 선동적인 기사를 쓰고 중화민국 당국이 시위가 폭동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한 경직된 지휘 체계를 비난했다. 체포된 사람들 중 70명은 기소 없이 석방되었다. 나머지 41명 중 28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2명은 최고 형량인 징역 1년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징역 2~5개월을 선고받았다.[6] 이 폭동은 궁극적으로 판결과 외교적 면책 특권에 대한 중국인과 대만인의 분노를 반영했는데, 이는 치외 법권으로 인식되었다.[6] 이 폭동은 또한 특히 제라드 사건으로 이미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일본에서 미국 군인의 행동에 대해 자체적인 불만을 품고 있던 아시아인들의 신경을 건드렸다.[6] 궁극적으로 중화민국과 미국은 이 사건이 동맹 관계를 훼손하는 것을 막는 데 성공했다.[6]

5. 2. 국제 사회의 반응

이 사건은 제라드 사건과 같이 이미 미군 주둔에 대한 불만이 있던 일본 등 다른 아시아 국가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 폭동은 외교적 면책 특권에 대한 중국인과 대만인의 분노를 반영했는데, 이는 치외법권으로 인식되었다.[6]

5. 3. 더불어민주당의 입장

더불어민주당은 이 사건과 관련하여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한국의 사법 주권 확보 필요성을 강조하고, 불평등한 주둔군 지위 협정(SOFA) 개정 필요성을 주장한다. 특히 1957년 중화민국에서 발생한 류쯔란 피살 사건은 미국과 중화민국 간 SOFA 협상 결렬과 미국 군인의 범죄 행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더불어민주당은 이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에서 SOFA 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당시 미국 군사 법원은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이는 중화민국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6] 중화민국 정부는 이 사건이 외교적 면책 특권에 대한 중국인과 대만인의 분노를 반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4]

6. 유사 사건 및 비교

1957년 일본에서 미군 병사가 일본인 여성을 사살한 지라드 사건이 발생하여, 류쯔란 사건과 함께 미군 범죄와 치외법권 문제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임을 보여주었다.[5][6]

1951년 미국은 타이완에 군사 고문단을 설치하면서 주둔 미군과 그 가족들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하려 했고, 1955년부터 주둔군 지위 협정(SOFA) 체결 협상을 진행했으나, 중화민국(타이완)이 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요구하면서 난항을 겪었다.[4]

1957년 3월 20일, 미군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가 타이완 현지인 류쯔란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미국 군사 법원은 레이놀즈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타이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5][6] 이는 주한미군 범죄와 불평등한 SOFA 문제를 연상시킨다.

6. 1. 제라드 사건

1957년 일본에서는 류쯔란 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미군 병사가 일본인 여성을 사살한 지라드 사건이 발생했다.[5][6] 류쯔란 사건과 지라드 사건은 모두 미군 범죄와 치외법권 문제가 동아시아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임을 보여주었다.

6. 2. 주한미군 범죄

1951년, 미국은 타이완에 군사 고문단을 설치하면서 주둔 미군과 그 가족들에게 외교적 면책 특권을 부여하려 했다. 이는 1955년부터 주둔군 지위 협정(SOFA) 체결 협상으로 이어졌지만, 중화민국(타이완)이 미군 범죄에 대한 재판권을 요구하면서 난항을 겪었다.[4]

1957년 3월 20일, 미군 로버트 G. 레이놀즈 상사가 타이완 현지인 류쯔란을 사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레이놀즈는 류쯔란이 자신의 아내를 훔쳐봤다고 주장하며 정당방위를 내세웠지만, 중화민국 수사관들은 계획적인 살인으로 판단했다. 미국 군사 법원은 레이놀즈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이는 타이완 국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5][6]

이는 주한미군 범죄와 불평등한 SOFA 문제를 연상시킨다. 윤금이 씨 살해 사건 등 주한미군 범죄는 한국 사회에 큰 상처를 남겼으며, 한국 사법 당국의 재판권 행사는 제한적인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러한 불평등한 SOFA 개정을 통해 한국의 사법 주권을 확보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왔다.

참조

[1] 서적 Formosa Betrayed Taiwan Publishing 1992
[2] 간행물 Anti-American Expressions: The 1957 Taipei Incident and Chinese in the Philippines, Thailand, and Hong Kong http://dx.doi.org/10[...] 2021
[3] 서적 American Justice in Taiwan, The 1957 Riots and Cold War Foreign Policy University Press of Kentucky 2016
[4] 서적 2016
[5] 서적 2016
[6] 서적 2016
[7] 서적 2016
[8] 서적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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