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P 위처 (192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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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ORP 위처 (1928년)는 1930년 폴란드 해군에 취역한 구축함으로, 프랑스에서 건조되었다. 1930년대에는 다양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며 북유럽 국가들을 방문했고, 1930년대 후반에는 무장 부족으로 인해 13.2 mm 오토키스 중기관총을 추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 공군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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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P 위처 (1928년) - [배(Ship)]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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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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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선 경력 | |
국가 | 폴란드 |
깃발 | [[파일:Naval Ensign of Poland.svg|53px]] |
함명 | ORP 비헤르 |
함명 유래 | 강풍 (폴란드어: Gale) |
주문 | 1926년 4월 2일 |
건조 | 샹티에 나발 프랑세, 블랭빌-쉬르-오른, 캉 |
기공 | 1927년 2월 19일 |
진수 | 1928년 7월 10일 |
취역 | 1930년 7월 8일 |
퇴역 | 해당 없음 |
제적 | 해당 없음 |
최후 | 1939년 9월 3일 침몰 |
좌표 | 36 (잔해) |
함선 특징 | |
함급 | 비헤르급 구축함 |
배수량 | 1,540 톤 (표준) 2,010 톤 (만재) |
길이 | 106.9 |
폭 | 10.5 |
흘수 | 3.5 |
추진 | 해당 없음 |
속력 | 33.8 |
승조원 | 162명 |
센서 | 해당 없음 |
전자전 장비 | 해당 없음 |
무장 (1930년) | 4 × 130 mm 포 2 × 40 mm wz. 28 대공포 2 × 3연장 550 mm/533 mm/450 mm 어뢰 발사관 2 × 240 mm Thornycroft 폭뢰 발사기 2 × Wz BH200 폭뢰 발사기 2 × 60 Wz. 08 기뢰 |
무장 (1939년) | 4 × 130 mm Wz. 19/24 Schneider-Creusot Model 1924 포 2 × 40 mm Wz. 28 Vickers-Armstrong 2 pdr Mk II 대공포 4 × 13.2 mm Wz. 30 중기관총 (2x2) 2 × 2연장 550 mm/533 mm/450 mm 어뢰 발사기 2 × Wz BH200 폭뢰 발사기 60 × Wz. 08 기뢰 |
장갑 | 해당 없음 |
항공기 | 해당 없음 |
2. 건조 및 취역
ORP 위처는 프랑스 블레인빌쉬르오른의 Ateliers et Chantiers Navals Français에서 건조되었으며, 건조에는 예정보다 2년이 더 걸린 4년이 소요되었다.[1] 증기 터빈은 생나제르의 Ateliers et Chantiers de la Loire에서, 무장은 셰르부르의 프랑스 해군 무기고에서 장착되었다. 1928년 7월 10일에 진수되었고, 1930년 7월 8일 셰르부르 항구에서 폴란드 해군에 정식 취역했다.[1]
함명은 기상 현상의 이름을 따 구축함 이름을 짓는 프랑스 전통에 따라 ''Wicher'' (Wicher|돌풍pl)로 명명되었다. 일주일 후 타데우시 모르겐슈테른-포자드 사령관 지휘 아래 그디니아에 도착하여 폴란드 해군의 첫 현대식 함선이 되었다. 자매함 ''부르자''는 동시 건조를 시작했지만, 2년 늦게 완성되었다.[1]
전간기 ''Wicher''는 다양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1932년 6월 15일 1932년 단치히 위기 동안 단치히 자유시(그단스크) 항구에 파견되어 폴란드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조했다.[1] 1931년 3월 마데이라로 항해하여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가족을 데려왔으며, 이는 ''Wicher''의 최장거리 항해였다.
1932년 8월 스톡홀름, 1934년 7월 레닌그라드, 1935년 6월 킬, 이후 헬싱키와 탈린을 방문했다. 1937년에는 학교 선박으로 페르누, 나르바, 비보르크, 투르쿠, 마리에함, 넥소, 스카겐, 아센스, 헬싱고어, 탈린, 리가를 방문했다.
1930년대 후반, 무장 부족 문제가 드러나 1935년 가을 13.2mm 오토키스 중기관총 두 정이 추가되었다.
1939년 3월 18일 메멜 위기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으나 일주일 후 해제되었고, 훈련 항해는 중단되었다. 베이징 작전에 따라 대부분의 폴란드 함정은 영국으로 철수했지만, ''Wicher''와 ''그리프''는 폴란드 해안 방어를 위해 그디니아에 남았다.
2. 1. 건조 과정
이 배는 프랑스 블레인빌쉬르오른에 있는 Ateliers et Chantiers Navals Français에서 건조되었으며, 건조 기간은 처음 계획보다 거의 2년이 더 걸린 4년이 소요되었다.[1] 증기 터빈은 생나제르에 있는 Ateliers et Chantiers de la Loire에서 제작되었으며, 무장은 셰르부르에 있는 프랑스 해군 무기고에서 장착되었다. 1928년 7월 10일에 진수되었지만, 1930년 7월 8일에야 폴란드 해군에 의해 셰르부르 항구에서 최종적으로 취역했다.[1]ORP 위처(Wicher|돌풍pl)라는 이름은 기상 현상의 이름을 따서 구축함의 이름을 짓는 프랑스 전통에 따라 지어졌다. 일주일 후, 타데우시 모르겐슈테른-포자드 사령관의 지휘 아래 그디니아에 도착하여 폴란드 해군의 첫 번째 현대식 함선이 되었다. 자매함인 ''부르자''는 동시에 건조를 시작했지만, 최초 마감일로부터 약 4년 뒤인 2년 후에 완성되었다.[1]
2. 2. 제원
생나제르의 Ateliers et Chantiers de la Loire에서 증기 터빈을 제작했고, 셰르부르의 프랑스 해군 무기고에서 무장을 장착했다.[1] 1935년 가을에는 13.2mm 오토키스 중기관총 두 정을 추가했다.2. 3. 취역
블레인빌쉬르오른에 있는 Ateliers et Chantiers Navals Français에서 건조되었으며, 건설에는 처음 계획보다 거의 2년이나 더 걸린 4년이 소요되었다. 증기 터빈은 생나제르에 있는 Ateliers et Chantiers de la Loire에서 제작되었으며, 무장은 셰르부르에 있는 프랑스 해군 무기고에서 장착되었다. 1928년 7월 10일에 진수되었지만, 1930년 7월 8일에야 폴란드 해군에 의해 셰르부르 항구에서 최종적으로 취역했다.[1]함명은 기상 현상의 이름을 따서 구축함의 이름을 짓는 프랑스 전통에 따라 ORP ''Wicher'' (돌풍|돌풍pl)로 명명되었다. 일주일 후, 사령관 타데우시 모르겐슈테른-포자드의 지휘 아래 그디니아에 도착하여 폴란드 해군의 첫 번째 현대식 함선이 되었다. 자매함인 ''부르자''는 동시에 건조를 시작했지만, 최초 마감일로부터 약 4년 뒤인 2년 후에 완성되었다.
전간기에 ''Wicher''는 주로 정치적인 다양한 역할을 수행했다. 예를 들어, 1932년 6월 15일, 1932년 단치히 위기 동안 그녀는 그 항구에 진입하는 두 척의 영국 구축함을 만나고 그 도시에서 폴란드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조하기 위해 단치히 자유시(현대 그단스크) 항구로 파견되었다. 1931년 3월에는 마데이라로 항해하여 폴란드 원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가족을 데려왔다. 이 항해는 ''Wicher''가 폴란드에서 가장 멀리 이동한 거리였다.
1932년 8월 스톡홀름, 1934년 7월 레닌그라드, 1935년 6월 킬, 다음 달에는 헬싱키와 탈린을 방문했다. 1937년, 학교 선박으로 복무하면서 페르누, 나르바, 비보르크, 투르쿠, 마리에함, 넥소, 스카겐, 아센스, 헬싱고어, 그리고 탈린과 리가를 방문했다.
1930년대 후반, 무장이 부족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프랑스 해군 포병은 발사 속도가 낮았고, 배는 공중 폭격에 대한 적절한 방어를 갖추지 못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35년 가을에 두 정의 13.2 mm 오토키스 중기관총이 추가되었다.
1939년 3월 18일, "대(對)어뢰 부대" 전체와 함께 메멜 위기로 인해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경계는 일주일 후에 해제되었고, 훈련 항해는 중단되었다. 동시에 대부분의 폴란드 해상 함정은 영국 항구로 철수하기 위해 준비되었다 (베이징 작전). ''Wicher''와 ''그리프''는 폴란드 해안을 방어하기 위해 그디니아 항구에 남겨진 유일한 주요 함선이었다.
3. 전간기 활동
ORP ''Wicher''는 전간기 동안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 정치적 임무: 1932년 단치히 위기 당시 단치히 자유시(현 그단스크)에 파견되어 폴란드의 영향력을 과시했다.[1] 1931년에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가족을 마데이라에서 폴란드로 이송했다.
- 해외 방문: 1932년 스톡홀름, 1934년 레닌그라드, 1935년 킬, 헬싱키, 탈린을 방문했다.
- 학교 선박 임무: 1937년 페르누, 나르바, 비보르크, 투르쿠, 마리에함, 넥소, 스카겐, 아센스, 헬싱고어, 탈린, 리가를 방문했다.
1930년대 후반, 프랑스 해군 포의 낮은 발사 속도와 대공 방어력 부족이 문제로 지적되어 1935년 가을 13.2mm 오토키스 중기관총 두 정이 추가되었다.
1939년 3월 메멜 위기로 경계 태세에 들어갔으나 일주일 후 해제되었다. 베이징 작전에 따라 대부분의 폴란드 해상 함정은 영국으로 철수했지만, ''Wicher''와 ''그리프''는 그디니아에 남아 폴란드 해안을 방어했다.
3. 1. 정치적 임무
전간기에 ''Wicher''는 다양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1932년 6월 15일, 1932년 단치히 위기 동안 단치히 자유시(현대 그단스크) 항구에 진입하는 두 척의 영국 구축함을 만나고 그 도시에서 폴란드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조하기 위해 파견되었다.[1] 1931년 3월에는 마데이라로 항해하여 폴란드 원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가족을 데려왔다. 이 항해는 ''Wicher''가 폴란드에서 가장 멀리 이동한 거리였다.1932년 8월 스톡홀름, 1934년 7월 레닌그라드, 1935년 6월 킬, 다음 달에는 헬싱키와 탈린을 방문했다. 1937년에는 학교 선박으로 복무하면서 페르누, 나르바, 비보르크, 투르쿠, 마리에함, 넥소, 스카겐, 아센스, 헬싱고어, 그리고 탈린과 리가를 방문했다.
3. 2. 주요 항해
전간기에 ''Wicher''는 여러 정치적 임무를 수행했다. 1931년 3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원수와 그의 가족을 폴란드로 이송하기 위해 마데이라로 항해했다.[1] 이는 ''Wicher''가 폴란드에서 가장 멀리 항해한 기록이다.1932년 8월 스톡홀름, 1934년 7월 레닌그라드, 1935년 6월 킬을 방문했고, 그 다음 달에는 헬싱키와 탈린을 방문했다. 1937년에는 학교 선박으로 복무하면서 페르누, 나르바, 비보르크, 투르쿠, 마리에함, 넥소, 스카겐, 아센스, 헬싱고어, 탈린, 리가를 방문하여 폴란드 해군의 위상을 알렸다.
3. 3. 훈련 항해
전간기에 ''Wicher''는 여러 정치적 임무를 수행했다. 1932년 6월 15일, 1932년 단치히 위기 당시 단치히 자유시(현대 그단스크) 항구에 정박하려는 영국 구축함 두 척을 맞이하고 폴란드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기 위해 파견되었다.[1] 1931년 3월에는 마데이라로 가서 폴란드 원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그의 가족을 태워 왔다. 이는 ''Wicher''가 폴란드에서 가장 멀리 항해한 기록이다.1932년 8월에는 스톡홀름, 1934년 7월에는 레닌그라드, 1935년 6월에는 킬, 그 다음 달에는 헬싱키와 탈린을 방문했다. 1937년에는 학교 선박으로 활동하며 페르누, 나르바, 비보르크, 투르쿠, 마리에함, 넥소, 스카겐, 아센스, 헬싱고어, 탈린, 리가를 방문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비체르는 폴란드 침공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비체르는 그디니아에서 독일군의 폭격 공습을 격퇴하고 헬 해군 기지로 이동하여 그단스크만 입구에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시도했으나, 여러 사건을 겪으며 실패했다.
9월 3일에는 독일 구축함의 공격과 루프트바페의 공습을 받았다. 특히, 세 번째 공습에서 4발의 폭탄을 맞고 침몰했다. 이 과정에서 승무원 1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당했다.[2] 살아남은 승무원들은 육상 방어에 합류했다.
전쟁 후, 독일군에 의해 인양되었던 비체르의 잔해는 1946년 다시 인양되어 야스타르니아 지역으로 옮겨졌다. 이후 공중 폭격 연습의 표적으로 사용되다가 1963년 부분적으로 해체되었다. 현재는 선체의 일부, 연통 2개, 방향타 등이 남아있다.
4. 1. 폴란드 침공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이 시작되자, 비체르는 그디니아에서 독일군의 폭격 공습을 격퇴하고 헬 해군 기지로 이동하였다.[2] 비체르는 기뢰 부설함 그리프가 그단스크만 입구에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2]항해 중 비체르는 루프트바페 소속 Ju 87B 급강하 폭격기 33대의 공격을 받았다. 여러 차례 폭탄이 근접하여 떨어지면서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함장이 사망했다. 그단스크만 해전에서 비체르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독일군의 공격으로 함교 창문이 깨지고 선체 여러 곳이 파손되었다.[2]
9월 2일 오전 1시경, 비체르는 헬로 돌아와 작전이 중단된 것을 알게 되었다.
4. 2. 루르카 작전 (Operation Rurka)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 이후, ORP 위처는 그디니아에서 폭격 공습을 격퇴한 후 헬 해군 기지로 이동하여 그단스크만 입구에 기뢰를 부설하는 루르카 작전에 참여했다. 기뢰 부설함인 ''그리프''[2]가 주도하는 이 작전에서, ORP 위처는 호위를 맡았다. 부유식 창고에서 해군 기뢰를 탑재한 후, ''그리프''와 함께 헬 반도로 항해했다.항해 중 ORP 위처는 33대의 루프트바페 Ju 87B 급강하 폭격기 편대의 공격을 받았다. 여러 차례 폭탄이 근접하여 떨어지면서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함장이 사망했다. 그단스크만 해전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ORP 위처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는 않았지만, 독일군의 공격으로 함교의 모든 창문이 깨지고 선체 여러 곳이 파손되었다.[2] 18시 45분에 헬 항구에 도착한 후, ORP 위처는 작전 구역으로 출항하여 22시경에 도착했다. ORP 위처의 함장 스테판 데 발덴 사령관은 작전이 중단된 것을 모르고 비어있는 만을 보호했으며, 헬에 정박해 있던 폴란드 함대를 보호하지 못했다.[2]
ORP 위처는 도착 직후 독일 구축함 2척을 발견했지만, 폴란드 부대에 주의를 끌고 싶지 않아 발포하지 않았다. 그날 밤 늦게 순양함 1척을 발견하기도 했다. 9월 2일 오전 1시경, ORP 위처는 헬로 돌아와 작전이 중단된 것을 알게 되었다.
4. 3. 그단스크만 해전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 당시, 비체르는 그단스크만 입구에 기뢰를 부설하는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이동하던 중 루프트바페 소속 Ju 87B 급강하 폭격기 33대의 공격을 받았다. 여러 발의 폭탄이 근처에 떨어지면서 경미한 피해를 입었고 함장이 사망했다. 그단스크만 해전에서 비체르는 직접적인 타격을 받지는 않았으나, 독일군의 공격으로 함교의 모든 창문이 깨지고 선체가 여러 곳에서 파손되었다.[2]4. 4. 독일 구축함과의 교전
1939년 9월 3일 아침, 헬 항구에 정박해 있던 ORP 비체르는 그리프와 함께 Z1 레베르히트 마아스와 Z9 볼프강 젠커 두 척의 독일 구축함의 공격을 받았다.[2] 독일 구축함들은 9해리 거리에서 포격을 시작했다. 폴란드 군함과 해안 포대가 반격에 나섰고, 그리프는 2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후 독일 함대는 연막을 치고 퇴각했다.[2]4. 5. 침몰
1939년 9월 3일 아침, ''Z1 레베르히트 마아스''와 ''Z9 볼프강 젠커'' 두 척의 독일 구축함이 항구에 정박해 있던 그맆과 ''비체르''를 공격했다. 폴란드 군함과 해안 포대가 공격을 격퇴했고, ''그리프''는 2발의 명중탄을 기록했다. 이후 독일 함대는 연막을 치고 물러났다.[2]
같은 날 늦게, ''비체르''는 두 차례의 공습을 격퇴했지만, 15시경 세 번째 공습에서 루프트바페 소속 독일 비행기 두 그룹의 공격을 받아 4발의 폭탄을 맞았다. 폭탄 2발은 선체 중앙을, 1발은 선수를 강타했으며, 나머지 1발은 근접하여 우현 선체 여러 곳을 파손시켰다. ''비체르''는 침몰하기 시작했고, 승무원은 상륙하여 포메라니아의 육상 방어에 합류했다. 이 공습으로 선원 1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입었다.[2]
5. 전후 잔해
1939년 폴란드 침공 당시 독일군의 공습으로 비헤르는 큰 피해를 입고 침몰했다. 특히 그단스크만 해전에서 1939년 9월 3일 세 번째 공습에 4발의 폭탄을 맞아 선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2] 이로 인해 비헤르는 침몰했고, 승무원들은 육상 방어에 합류했다.
5. 1. 인양 및 활용
1939년 11월 독일군에 의해 인양되어 얕은 물로 예인되었다.[2] 일부 자료에서는 수리 후 독일 해군(크리그스마리네)에 편입될 예정이었으나 실행되지는 않았다.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1946년 폴란드에 의해 다시 인양되어 야스타르니아 지역으로 옮겨졌고, 1955년까지 공중 폭격 연습의 표적으로 사용되었다.[2] 1963년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현재는 선체의 4분의 1, 연통 2개, 방향타 등이 남아있다.
5. 2. 현재 상태
1963년에 부분적으로 해체되었으며, 현재는 선체의 4분의 1과 연통 2개, 방향타 등이 남아있다. 잔해는 위치에 있다.[2]참조
[1]
웹사이트
15. Juni: Einlaufen des polnischen Zerstörers "Wicher" in den Danziger Hafen als Drohgebärde gegenüber Deutschland und Danzig
https://web.archive.[...]
Herden-institut
[2]
서적
Poland's Navy, 1918–1945
Hippocrene Books
199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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