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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칼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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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 칼튼은 17세기 이후 아일랜드에 거주한 개신교 군인 가문 출신으로, 영국군에서 복무한 군인이었다. 1742년 소위로 임관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했고, 1751년 근위 보병 연대에 입대하여 리치몬드 공작의 후원을 받으며 승진했다. 7년 전쟁에서는 독일 전선과 캐나다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프랑스 및 쿠바 원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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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 칼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가이 칼튼의 초상
가이 칼튼의 초상
원어명The Lord Dorchester
출생일1724년 9월 3일
출생지아일랜드 왕국 티론주 스트러밴
사망일1808년 11월 10일
사망지잉글랜드 버크셔주 메이든헤드
직위
직책총독
국가퀘벡 주
임기1768년-1778년
군주조지 3세
전임제임스 머리
후임프레더릭 홀디먼드
국가2캐나다
직책2총독
임기21786년-1796년
전임2프레더릭 홀디먼드
후임2로버트 프레스콧
군사 복무
서훈바스 훈장
군복무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복무 기간1742년-1796년
소속 군대영국 육군
계급소장
지휘북아메리카 총사령부
참전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

2. 초기 경력

1751년, 칼튼은 근위 보병 연대에 입대하였고, 1752년에는 대위로 진급했다. 제임스 울프의 추천으로 리치몬드 공작 찰스 레녹스의 가이드로 선정되어 군 경력에 큰 탄력이 붙었다. 리치몬드 공작은 칼튼에게 영향력 있는 후원자가 되었다. 그 이후 칼튼은 더 빠른 속도로 승진하게 되었다.[2]

2. 1. 가문 배경과 군 입대

가이 칼튼은 17세기 이후 아일랜드에 거주한 개신교 군인 가문 출신으로, 영국군에 복무한 네 형제 중 한 명이었다. 칼튼이 14세 때 아버지 크리스토퍼 칼튼이 사망했고, 어머니는 재혼했다. 칼튼은 초등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1742년, 칼튼이 17세 때 제25보병 연대의 소위로 임관되었고, 1745년에는 중위로 진급했다. 이 시기에 캐나다의 프랑스군을 공격할 때의 지휘관 제임스 울프와 친구가 되었다. 1745년 재커바이트 반란 때 컬로든 전투에서 울프와 함께 칼튼이 종군했을 가능성이 있다. 칼튼의 형제인 윌리엄과 토마스도 육군에 입대했다.[1]

2. 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참전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영국군은 1742년부터 참전했지만, 칼튼과 그의 연대는 1747년이 되어서야 플랑드르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프랑스군과 교전했으나, 그 해 네덜란드군의 주요 요새였던 베르겐 옵 줌 함락을 막지 못하고 휴전 협정으로 전쟁이 중단되었다.[1] 1748년 엑스라샤펠 조약이 체결되면서 칼튼은 영국으로 귀환했다.[1] 그는 여전히 중위였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진급이 제한될 것임을 알고 좌절했다.[1]

칼튼이 1747년 처음 참전한 전투인 베르겐 옵 줌. 훗날 칼튼의 아들 조지가 이곳에서 전사한다.

3. 7년 전쟁

1757년, 칼튼은 중령으로 진급하여 독일과 캐나다 전선에서 활약했다. 그는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하노버 왕국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독일 부대에 종군했고, 노바스코샤의 루이스버그 요새 전투에서는 제임스 울프의 부관으로 선발되기도 했으나 조지 2세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1758년 제임스 울프 장군은 퀘벡 시 작전 지휘를 맡게 되면서 칼튼을 보급 담당관으로 선발했고, 조지 2세는 리고니에 백작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었다. 칼튼은 애브러햄 평원의 전투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1761년에는 벨르 일르 공격에 참가하여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지만 중상을 입었다. 1762년에는 쿠바 원정에 참가하여 스페인 전초 기지에 대한 공격을 이끌던 중 또다시 부상을 당했다.

3. 1. 독일 전선

1757년, 칼튼은 중령으로 진급했고, 프랑스군의 침략으로부터 하노버 왕국을 지키기 위해 조직된 독일 부대로 구성된 감시군에 종군했다. 이 군대는 하스텐벡 전투 후 퇴각했고, 결국 클로스터르제벤 협약을 맺어 전쟁에서 철수했다.[1] 협정이 맺어진 후 칼튼은 영국으로 돌아왔다.[1] 1758년 신설된 제72 보병연대 중령이 되었다.[1] 그 해 노바스코샤의 루이스버그 요새 전투에서 제임스 울프가 칼튼을 부관으로 선발했지만, 조지 2세가 지명을 거부했다.[1] 이는 칼튼이 유럽에서 종군할 때 하노버 병사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냈기 때문으로 보인다.[1] 이후 잠시 현역 지위를 얻지 못했지만, 독일에 다시 파견된 브런즈윅 공작 페르디난트의 부관으로 임용되었다.[1]

3. 2. 캐나다 전선

1758년 12월, Major-general영어로 승진한 제임스 울프 장군은 퀘벡 시 작전 지휘를 맡게 되면서 칼튼을 보급 담당관으로 선발했다. 조지 2세는 칼튼의 지명을 거부했지만, 리고니에 백작이 국왕과 이 문제에 대해 논의하여 국왕이 마음을 바꾸었다.[1] 칼튼은 핼리팩스에서 600명의 척탄병을 지휘했으며,[1] 1759년 6월 영국군과 함께 퀘벡 시에 도착하여 군대 지원과 대포 설치 위치 감독을 담당하는 공병 기사 역할을 맡았다.[1] 이후 9월 애브러햄 평원의 전투에서 머리에 부상을 입고, 10월에 영국으로 귀환했다.[1]

3. 3. 프랑스 및 쿠바 원정

1761년 3월 29일, 칼튼은 제72 보병연대 중령으로 프랑스 해안에서 16km 떨어진 비스케이만 북부의 섬, 벨르 일르 공격에 참가했다. 칼튼은 프랑스군에 대한 공격을 지휘했지만 중상을 입었고, 더 이상의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영국군은 4주간에 걸친 전투 끝에 그 섬을 점령했다.

1762년 대령으로 승진한 칼튼은 쿠바 원정에 참가했다. 1775년 칼튼과 맞붙게 되는 리처드 몽고메리가 이때 그의 동료였다. 7월 22일, 스페인 전초 기지에 대한 공격을 이끌던 중 칼튼은 또다시 부상을 당했다.

1764년, 칼튼은 제93 보병 연대로 이적했다.

참조

[1] 서적 Nelson p.18-19
[2] 서적 Nelson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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