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카이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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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로마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일원이다. 기원전 20년에 태어나 기원전 4년에 헤로데 대왕 사후 유대 왕국 계승 문제를 처리하고, 동방 군단 사령관으로 파르티아와 평화 조약을 맺는 등 정치적, 군사적 활동을 펼쳤다. 기원전 17년에는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에게 입양되어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며, 기원전 1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서기 2년 아르메니아 원정 중 부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으로 인해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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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원전 20년 출생 - 헤로데 안티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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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서 권력을 계승하여 내전과 암투 끝에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고, 공화정 형식을 유지하며 팍스 로마나 시대를 열고 행정 및 세제 개혁을 통해 로마 제국의 기틀을 다졌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 루키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자 양자로서 형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제국의 후계자로 양육되었으나, 기원후 2년 갑작스럽게 병사하여 로마 제국의 후계 구도에 변화를 가져왔다.
가이우스 카이사르 | |
---|---|
기본 정보 | |
![]() | |
본명 | 가이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다른 이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기원전 17년) |
로마자 표기 | Gaius Iulius Caesar |
신상 정보 | |
출생 | 기원전 20년, 로마, 로마 제국 |
사망 | 기원후 4년 2월 21일 (23세), 리미라, 리키아 |
매장지 | 아우구스투스 영묘 |
가족 관계 | |
배우자 | 리빌라 |
아버지 |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아우구스투스 (양아버지) |
어머니 | 율리아 (아우구스투스의 딸) |
기타 정보 | |
직함 | 프린켑스 유벤투티스 |
왕조 |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
2. 생애
기원전 20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의 친손자였기에 일찍부터 후계자로 주목받았다. 기원전 17년,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아우구스투스에게 입양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되었고, 이후 동생과 함께 후계자로 성장했다.
기원전 13년 트로이아 경기에서 연장조 조장을 맡으며 처음으로 로마 시민들 앞에 섰다. 기원전 5년에는 5년 뒤인 기원 1년의 집정관으로 지명되었고, 원로원 의석을 얻었다. 기사 계급으로부터 "청년의 제1인자"(프린켑스 유벤투티스, Princeps Juventutis)라는 칭호를 받아 사실상 황태자로 인식되었다.
기원전 1년 드루수스의 딸 리빌라와 결혼 후, 예정 집정관으로서 도나우강 방면 군무에 종사했다. 이후 동방으로 파견되어 1년 후 정식 집정관에 취임했다. 당시 아르메니아 왕국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왕이 추방되었고, 가이우스는 이 왕위에 메디아 출신 아리오발자네스를 세우는 임무를 맡았다. 이 임무를 완수했으나, 파르티아의 개입으로 아르메니아에서 반란이 재발했다.
기원 3년,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 포위전 중 부상을 입고 로마로 귀환하던 중, 현재의 터키 남부 리밀라에서 2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년 동생 루키우스도 사망하면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기원 4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가이우스의 동생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함께 양자로 삼았다.
2. 1. 배경
가이우스는 기원전 20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대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그리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의 결과로 발발한 로마 공화정의 마지막 전쟁 당시 아우구스투스의 초기 지지자였다. 그는 아우구스투스 군대의 핵심적인 장군이었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결정적인 전투에서 군대를 지휘했다. 아그리파는 초창기부터 동부 속주의 업무를 처리하는 데 신뢰를 받았으며, 기원전 23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을 뻔했을 때, 그가 죽는다면 ''프린켑스''가 될 징표로 아우구스투스의 인장 반지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회복하자마자 조카인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를 총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마르켈루스는 그 해 로마 시내에 퍼진 질병으로 사망했다.[3][4][5]
마르켈루스가 죽자,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그의 딸 대 율리아의 결혼을 주선했는데, 율리아는 이전에 마르켈루스의 아내였다. 아그리파는 기원전 18년에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호민관 권한)을 부여받았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3년에 받았던 권한이며, 이후에는 황제만이 행사하고 일부 후계자와 공유되었다. 호민관 권한은 그가 원로원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었다. 아그리파는 중요한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원로원에서 호민관 역할을 했으며, 황제의 권력과 권한의 일부가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 섭정의 지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5][6][7]
기원전 17년, 가이우스는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입양되었다. 가이우스가 14세가 된 기원전 6년, 로마 평민들은 황제의 후계자가 집정관의 자리에 오를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와 원로원은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가이우스가 원로원에 참관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20세가 되면 집정관에 오를 수 있는 예비 집정관의 지위를 약속하였다.
2. 2. 초기 생애 및 가족
- -기원전 20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와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장남 '''가이우스 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로마에서 태어났다.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직계 손자에 해당했기에 후계자 후보로 일찍부터 기대를 받았다. 남동생으로는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있으며, 여동생으로는 소율리아와 대 아그리피나가 있다.
기원전 17년, 동생 루키우스가 태어나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가 되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개명했다. 윕사니우스 씨족에서 양자로 온 것을 뜻하는 '''윕사니아누스'''를 네 번째 이름으로 더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윕사니아누스'''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같은 방식으로 황제의 양자가 된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후계자로서 길러졌다.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에게 읽기, 수영 및 기타 교육 요소를 가르쳤으며, 특히 자신의 필체를 모방하도록 훈련시키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12]
기원전 13년, 트로이 게임에서 연장조의 조장을 맡아 처음으로 로마 시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코르토나 근처 오사이어의 호화로운 시골 별장 영지는 가이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소유였다.[18]
2. 3. 정치 경력
기원전 17년,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서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입양되었다. 가이우스가 14세가 된 기원전 6년, 로마 평민들은 황제의 후계자가 집정관의 자리에 오를 것을 요구하였다. 황제와 원로원은 요구를 받아들이는 대신 가이우스가 원로원에 참관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20세가 되면 집정관에 오를 수 있는 예비 집정관의 지위를 약속하였다.[20][21] 젊은 왕자에 대한 로마의 지지는 곧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나갔으며, 전례 없는 14세의 나이에 집정관으로 지명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모든 지역에 동상과 비문이 세워졌다.[22][23][24]기원전 5년, 그는 군사적 나이에 도달하여 토가 비릴리스를 입었고,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원로원에 소개되었으며, 원로원은 그를 'princeps iuventutis'(청년 지도자)와 'sevir turmae'(기병 사단 사령관)로 선언했다. 집정관으로 지명되었기에, 그는 원로원에 자신의 의견을 제시할 수 있었다.[20][21] 기원전 1년에는 동방 군단의 사령관 자격으로 프라아테스 5세와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서기 1년에는 예정대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2. 4. 헤로데 왕조 계승 문제와 파르티아와의 관계
기원전 4년 헤로데 왕국의 국왕 헤로데 대왕이 사망한 후,[25] 그의 아들 안티파스와 아르켈라오스는 모두 헤로데의 유언장을 가지고 로마로 가서 각각 아버지의 왕국을 상속받아야 하는 이유를 변론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단독으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가이우스를 포함한 원로원 의회를 소집했다. 의회는 아르켈라오스가 가져온 유언장을 비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 유언장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아내 리비아에게 상당한 유산이 포함되어 있었다.[26][27] 사비누스 '집정관'이 황제에게 약속된 수천만 세스테르티우스를 지키기 위해 시리아 팔레스타이나에 주둔하자 유대의 도시들이 봉기했다.[28] 시리아 총독 바루스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시리아에서 군단을 투입해야 했다.[27]동시에 파르티아의 프라아테스 4세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도움을 받아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로마가 세운 왕 티그라네스 4세를 추방했다.[29] 역사가 페레로는 프라아테스가 아르메니아를 로마에 포로로 잡힌 자신의 아들들을 석방하는 협상 카드로 사용하려 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아시아에서 로마의 우위는 보호령으로서 아르메니아를 소유하는 것에 달려 있었다. 로마가 아르메니아에서 파르티아인들을 상대하기 전에 먼저 팔레스타인에 묶여 있던 시리아 군단을 사용할 수 있게 해야 했다.[30] 그곳의 군단을 풀기 위해 유대 왕국은 헤로데 대왕의 아들들에게 분할되었다. 절반은 아르켈라오스에게, 나머지 절반은 그의 형제 안티파스와 필리포스에게 분할되었다. 이는 유대가 강력해지는 것을 막으면서 이 지역의 안정을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 유대 문제를 해결한 황제는 로마의 보호령으로서 아르메니아의 지위를 재확립하고 로마가 유프라테스 강까지 모든 땅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동방 세계에 보여주기 위해 아르메니아에 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30]
2. 5. 동방 원정과 집정관 취임
기원전 17년, 가이우스는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양자로 입양되었다. 기원전 6년, 가이우스가 14세가 되었을 때, 로마 평민들은 황제의 후계자가 집정관 자리에 오를 것을 요구했다. 황제와 원로원은 이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가이우스에게 원로원 참관 권한을 부여하고, 20세에 집정관에 오를 수 있는 예비 집정관 지위를 약속했다. 기원전 1년, 가이우스는 동방 군단의 사령관 자격으로 프라아테스 5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서기 1년에는 예정대로 집정관에 선출되었다.기원전 1년, 드루수스의 딸 리빌라와 결혼했으나, 부부 사이에 자식은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9]
가이우스는 동방으로 떠나기 전, 동생 루키우스와 함께 울토르 마르스 신전(Temple of Mars Ultor) 봉헌을 기념하는 경기(기원전 2년 8월 1일)를 관리했다.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서 260마리의 사자가 도살되었고, 검투사 시합과 "페르시아인"과 "아테네인" 간의 해상 전투, 키르쿠스 플라미니우스(Circus Flaminius)에서 36마리의 악어가 도살되는 등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32][33]
아우구스투스는 노령으로 인해 직접 동방으로 갈 수 없었지만, 가이우스에 대한 신뢰가 두터웠다. 가이우스는 황실을 대표했기 때문에 그의 명령, 약속, 위협은 황제 자신의 것과 마찬가지의 효력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겨우 18세였기에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기에는 너무 어렸다.[31]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에게 총독 권한을 부여하고, 그의 사촌 여동생이자 드루수스 대와 안토니아 마이너(Antonia Minor)의 딸인 리빌라와 결혼시켰다.[33][34] 또한, 가이우스의 젊음과 경험 부족을 고려하여 마르쿠스 롤리우스(Marcus Lollius),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누스(Publius Sulpicius Quirinus),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Velleius Paterculus),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Lucius Domitius Ahenobarbus, 네로의 할아버지), 유바 2세(Juba II), 세야누스(Sejanus) 등 고문관들을 함께 보냈다.[35][36][37][38][39][40][41]
시리아로 가는 길에 가이우스는 로도스(Rhodes)에서 은퇴한 티베리우스를 만났는데, 수에토니우스(Suetonius)에 따르면 가이우스는 사모스(Samos) 섬에서 티베리우스를 냉대했다.[35][37]
기원후 1년 1월 1일, 가이우스는 매형인 루키우스 아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부재 중"으로 집정관에 취임했다.[21] 스무 살이었던 가이우스는 안티오크에서 아르메니아 침공을 위한 군대를 조직하고 프라아테스와 협상을 시작했다. 황제는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파르티아 왕도 평화에 열려 있었다. 가이우스의 군대가 시리아에 주둔하여 파르티아를 위협했기 때문에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젊은 집정관은 사방에서 사절들의 방문을 받았다.[45]
기원후 1년 봄과 여름까지 전쟁 준비가 이어졌고, 협상이 성공적으로 타결되었다. 프라아테스는 아르메니아에서 철수하고 로마에 포로로 잡혀 있는 형제들을 포기하기로 동의했다.[33][47] 그해 후반기, 가이우스는 군대를 이끌고 파르티아 국경으로 진격하여 프라아테스와 최종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합의에서 프라아테스는 아르메니아에 대한 모든 주장과 이복 형제들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49]
가이우스는 동방에 머무는 동안 아라비아로 원정을 이끌었다. 플리니우스는 이를 아이리우스 갈루스의 남아라비아에서의 활약과 관련하여 언급했다.[51] 존 그레인저는 가이우스가 나바테아 왕국을 지원하거나 징계하기 위해 "아라비아 원정"을 수행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53]
2. 6. 아르메니아 원정과 죽음
기원전 1년 드루수스의 딸 리빌라와 결혼했다.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9]유프라테스 강둑에서 프라아테스 5세와 회담을 갖고 평화 조약을 기념하는 연회를 열었다. 롤리우스에게 불만을 품은 프라아테스는 이 자리에서 가이우스에게 섭정의 비밀 협상을 폭로했다. 롤리우스는 왕들로부터 선물을 갈취한 죄(regnum muneribus)로 가이우스의 신임을 잃고 독약을 마셨다.[46][55] 롤리우스의 죽음은 티베리우스에게 행운이었으며, 그 후 가이우스는 로마로의 귀환과 로마 정치 복귀에 동의했다.[56]
아르메니아 왕좌가 공석이 되자 가이우스는 황제의 허락을 받아 아트로파테네의 아리오바르자네스 2세를 왕좌에 앉혔다. 그러나 로마인들만 아르메니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파르티아는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대규모 반란군은 아르타기라의 요새를 점령했다. 가이우스는 이 갈등에 휘말려 서기 2년 8월 말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그는 민족주의 세력으로 인한 소수의 반란만 진압해야 했기에 심각한 반대에 직면하지 않았다.[57]
9월 9일, 반란 지도자 아바돈은 가이우스를 요새로 초대하여 대화를 나누자고 했다. 이는 함정이었고, 가이우스는 대결 과정에서 부상을 입었다. 격분한 부관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그의 군대는 즉시 도시를 포위하고 격렬한 전투 끝에 요새를 점령했다.[58][59] 처음에는 상처가 심각해 보이지 않았고, 그는 아르메니아의 평정 작업을 완료할 수 있었는데, 이는 비교적 쉬운 일이었다.[33][60][57]
서기 3년, 상처의 영향으로 완전히 쇠약해져 지휘권을 포기하고 시리아로 물러났으며, 아우구스투스에게 더 이상 공적인 삶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 알렸다.[33][57] 동방 원정은 가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의 건강은 쇠약해졌고 정신 상태도 불안정해졌다. 황제가 자신의 후계자이자 번영의 유일한 희망으로 여겼던 23세의 젊은이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여 명성과 권력에 대한 전망을 포기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그를 격려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가이우스는 서기 4년 2월 21일 리미라에서 사망했다.[61]
가이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2년 갈리아 원정 중 마살리아에서 전사하였다. 2년 후, 가이우스 카이사르 역시 아르메니아 원정 중에 부상을 입고, 2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70]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사랑하던 두 양자가 모두 죽고 나자,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3. 사후
기원전 1년 드루수스의 딸 리빌라와 결혼했으나,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69]
가이우스의 동생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서기 2년 갈리아 원정 중 마살리아에서 전사하였다. 2년 후, 가이우스 카이사르 역시 아르메니아 원정 중에 부상을 입고 24세의 나이로 전사했다.[70]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사랑하던 두 양자가 모두 죽고 나자,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다.
시민들과 제국의 시 관계자들은 가이우스에게 많은 명예를 안겼으며, 여기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부인들이 적절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고 규정된 ''콜로니아 옵세퀀스 율리아 피사나'' (피사)가 포함되었다. 여성들이 위로할 수 없을 정도로 울부짖자 사원, 공중 목욕탕 및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그의 짧은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리키아의 리미라에 있는 리미루스 강에 기념비가 세워졌다.[64] 사후에 원로원은 젊은 카이사르에게 명예를 부여하기로 결정했으며, 군 복무 연령에 도달했을 때 소년들이 받았던 황금 창과 방패를 원로원 회관에 걸어두도록 했다.[64] 그들의 유골이 담긴 관은 아버지 아그리파와 다른 황실 가족 구성원들의 유골과 함께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보관되었다.[64]
타키투스와 카시우스 디오는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죽음에 불법적인 행위가 개입되었을 수 있으며 가이우스의 의붓 할머니 리비아가 그들의 죽음에 관여했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리비아의 추정 동기는 자신의 아들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만들려는 것이었을 수 있다.[54][65]
4. 대중문화
가이우스와 루키우스는 1976년 TV 시리즈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등장하는데, 이 시리즈에서는 그들의 죽음 순서를 바꿔 가이우스가 먼저 죽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19] 가이우스 역은 얼 로즈가 연기했다.[19]
5. 가계도
1. 가이우스 카이사르 |
---|
2.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3. 율리아 |
4. 루키우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
5. (이름 미상) |
6. 아우구스투스 |
7. 스크리보니이아 |
8. (이름 미상) |
9. (이름 미상) |
10. (이름 미상) |
11. (이름 미상) |
12. 가이우스 옥타비우스 |
13. 아티아 |
14.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
15. 센티아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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